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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간신(북송 6적) 중의 간신으로 불린 인물]채경(蔡京)

Bawoo 2021. 10. 28. 21:19

채경(蔡京, 1047년 ~ 1126년)는 북송 말의 정치가, 재상, 서도가. 자는 원장(元長). 복건성 복주 출신으로 동관 등과 함께 『』의 <간신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중국사 전체에서도 간신을 언급할때 진회 등과 함께 거론되는 간신 중 간신이라고 불리는 인물. 송나라 휘종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수호전(水滸傳)』에서도 가장 먼저 간신으로 거론되고 있다.

[Cai Jing (1047–1126), courtesy name Yuanchang (元長), was a Chinese calligrapher and politician who lived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of China. He is also fictionalised as one of the primary antagonists in Water Margin, one of the Four Great Classical Novels of Chinese literature.]

2. 생애

2.1. 초기의 삶

 

흥화군 선유(興化軍 仙遊)[1] 사람으로 신종 희녕 3년(1070년) 동생 채변(蔡卞)[2]과 나란히 진사시에 급제했다. 채경은 어린 시절부터 동생 채변과 함께 뛰어난 서필가인 종조부 채양(蔡襄)에게 필법을 배웠고, 이후에는 소식(蘇軾)과 함께 당나라 서호(徐浩)의 필법을 배웠다. 그후에도 채경은 심전사(沈傳師), 구양순(歐陽詢), 왕희지 필체를 스승으로 삼아 서필을 배웠다.

관료 초년생부터 임기응변과 지모로 널리 알려졌는데, 양주의 장관으로 있을때, 8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지나가던 고관이 방문하여 손님수가 40명으로 늘어났다. 시간은 다 되었고 요리 수는 모자란데도 불구하고, 채경은 40인분의 요리를 거뜬히 내놓았다. 채경은 이렇듯 '어떻게든 해내는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그는 여혜경[3]과 마찬가지로 “카멜레온”같은 인물로도 유명했다. 자신의 영달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종이 붕어하고 법이 180도 바뀌자, 개봉부 지사였던 채경 역시 모든 제도를 바꿔놓고 기존의 자신의 입장을 정반대로 취하여 재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4]. 이런 까닭에 범조우(范祖禹)는 선인태후와 집권 대신들에게 채경을 중용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해 당시 중앙 관직에 오래 있지 못하고 지방 관직을 주로 맡아야만 했다.

중앙에 오래 있지 못하고 좌천되어 지방관리로 지내던 채경은 선인태후가 붕어하고 철종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기회를 얻게 된다. 소성(紹聖) 원년이던 1094년, 신법파 중 원칙론자 장돈이 재상이 되고 증포, 채변 등 신법파들이 젊은 철종에게 중용되는 상황에서 채경은 재빠르게 신법파 행세를 하면서 개봉으로 복귀, 호부상서(戶部尚書)에 임명되었다. 이때 채경은 재상 장돈에게 적극적인 변법 시행과 과거의 잘못됨을 청산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서 범조우(范祖禹), 유안세(劉安世), 왕암수(王巖叟) 등을 원우당인[5]이라고 하여 탄핵시키고 귀양보내는데 앞장섰다. 이처럼 채경은 철저하게 신법파가 집권할때는 신법파로, 구법파가 집권할때는 구법파로 행세하면서도 양쪽 모두에서 성공한 관직 생활을 지냈다. 그러나 채경 역시 장돈 등 집권 대신들에게 간사하고 믿지 못할 인물이라고 여겨진 까닭에 곧 지방으로 좌천됐다.

2.2. 부귀영화와 몰락

철종이 붕어한 뒤, 휘종 즉위할 무렵 , 환관 동관과 휘종의 후궁 유씨와의 인연으로 재상감으로는 채경이 적당하다는 말을 흘려넣도록 시키고 역시 간신인 재상 증포가 휘종에게 건의해 채경을 도왔다. 이렇게 개봉부로 복귀한 채경은 휘종의 총애와 증포의 도움 등을 받아 ‘대명부지사->한림학사->부재상->재상’ 의 위치에 오르면서 51세에 재상이 되었다. 채경은 승진을 거듭할 수록 증포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는데, 어느날 휘종과 증포 앞에서 증포의 개인적 비리, 월권행위 등을 고발해 증포마저 축출했다.[6][7]

증포를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한 채경은 이후 신법파와 구법파에 상관없이 119명의 정적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휘종의 비호아래 돌에 그 이름을 새겨 전국에 세워놓고 탄압을 가하였다. 그리고 몇년후, 채경은 모든 이에게 화합을 목적으로 하는 의견을 쓰라고 명하고 그 글을 꼬투리 잡아 200명의 인물을 리스트에 더 추가시켰다. 도합 319명의 명단이 전국 300여 부.주에 배포되었다.

1년이 지난 숭년 5월 정월, 길다란 혜성이 서쪽하늘에 출현하였고 사람들은 319명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 탓이라고 생각했다. 휘종은 환관을 시켜 밤에 석비를 부수고 동시에 전국의 석비를 파괴하라는 명을 내렸다. 채경은 반발했지만 혜성의 출현으로 뒤숭숭한 때라 참을수 밖에 없었다. (현재는 광서성 바위산 속에 두 개의 석비만이 남아있다.)

민심이 동요되자 부재상 유정지와 어사 유규 등이 휘종에게 채경의 정책을 탓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기울은 휘종은 채경을 불러 넌지시 말을 꺼내지만 "지금까지의 정책은 부군인 선종의 유지를 받들은 것이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대연기를 펼쳐 휘종은 과연 그런가하고 생각해버렸다. 어쨌든 채경은 일단 숭녕 5년 2월(1106년) 일단 재상직에서 물러난다. 뒤를 이은 유정지가 역부족임을 알고 있던 채경은 수도에 남아있다가 다음해 정월 다시 재상직에 오른다.

채경은 왕안석부터 내려온 신법당 소속이었다. 차, 소금 전매 증서와 화폐개혁 등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불렸고(당시 발행된 '숭녕통보'에는 채경의 친필 동전이 있다) 학교 제도를 통해 자신의 수족이 될 인간들을 양성하였다.

 

한번은 그가 물의 고장 소주(蘇州)를 방문했을때 약방을 경영하여 갑부가 된 주충과 그의 아들 주면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화석강'을 조달하여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장본인들이다.

채경은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면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첫 숭녕 5년 말고도 3년 후인 대관 3년(1109), 선화 2년(1120) 등 몇차례 물러났지만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복귀하였다. 세번째로 재상직에 올랐을때는 개봉성 안의 서쪽에 광대한 저택을 지었는데 궁전과도 같은 모습을 하였으며 3일에 한번만 출근하고 , 후엔 5일에 한번만 출근했다.

그러나 채경은 후손들을 잘 얻지 못했다. 아버지의 덕으로 고관이 된 자식들은 서로 권력 다툼을 해댔고, 심지어 손자들에게 "쌀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느냐"하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는 손자는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아들 채유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고관이 되었지만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지라 잔소리만 하는 아버지를 싫어하여 동관, 왕보와 함께 북방 정벌을 휘종에게 부추겼다. 채유와 왕보는 얼굴과 신체에 붉고 푸른 화장을 하고 외설스러운 말과 도교의 비밀유희를 연출하며 휘종을 농락하였다. 특히 채유는 알몸으로 정원의 큰 나무에 올라가 매미흉내를 내다가 황후로부터 지적받기도 했다.

휘종의 사치와 정국혼란이 정점에 달할 무렵, 나이 70을 바라보는 채경은 머리 회전이 둔해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권력구조의 결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유능한 인재는 다 배척하는 바람에 중대한 일에 쳐했을때 도움이 될 인간이 없었다.

금나라의 군대가 다가오자 요나라의 천조제는 산서성으로 도망치고 금의 태조 완안아골타는 송으로 눈을 돌렸다. 채경은 이때 이미 손쓸 방도가 없음을 느끼고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금의 침공으로 나라가 쓰러질 정도가 되자 휘종은 아들 송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유생인 진동 등의 6적론(6적: 채경, 양사성, 이방언, 왕보, 동관, 주면)에 따라 6명 모두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강남으로 유배된 채경의 자손 33명 가운데 채유 등 거의 다가 참수되었고 80세를 맞이한 채경은 한때 해남도에 유배되었다가 호남의 장사에서 병사하였다.

 

[참고: 책 " 중국을 움직인 시간3 권   261쪽에 채경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채경은 관직이 강등되어 지방으로 보내졌는데 계속 강등되어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로 지방을 전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이 채경인 것을 알고는 음식을 주지않아  수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한다. 당시 80세 ]

채경의 아들 채조는 공주와 혼인한 탓에 죽음을 당하지 않고, 어느 샌가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벼슬을 살았지만, 정강의 변 때에 송나라 황제, 황족들과 같이 금나라의 포로가 된다. 채조의 아내 무덕공주는 이때 만 20세였는데 금나라 왕자 완안종망에게 강간당하고 그의 첩이 되었으며, 완안종망이 죽자 완안희윤이 빼앗아 살다가 2년 후 죽었다. 채조는 이 꼴을 보고도 계속 포로 신세인 휘종을 섬기다가 죽었다. 채조는 이 모든 걸 기록한 '북수행록' 이란 책을 남겼는데 금나라에서도 직접 휘종을 모셨던 사람인만큼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인정받는다.

 

3. 평가

"10년간 채경이 정사에 재차 부임하는 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성공하였는데 양쪽 사람들이 서로 믿고 구제를 하였으니 식자들은 그를 보고 간사하다고 여겼다(十年間京再蒞其事,成於反掌,兩人相倚以濟,識者有以見其姦)." - 『송사』 <간신전> 「채경전」
"채경이 쫓겨난 신하에서 일어나 일단 뜻을 얻자 천하가 눈을 씻고 그 행동을 보았는데 채경은 '소술(紹述 : 변법파)'의 권신들과 은밀히 결탁하여 천자를 눌러 억제하고 곧 도성(都省)에 강의사(講議司)를 설치하여 스스로 제거(提舉)가 되고 그 당인 오거후(吳居厚), 왕한지(王漢之) 등 10여 명을 신료로 삼아 정사를 크게 취하니 종실(宗室), 용관(冗官), 국용(國用), 상려(商旅), 염택(鹽澤), 부조(賦調), 윤목(尹牧)등 매번 한 가지 일마다 세 명이 주관하였다. 무릇 어떤 일을 시행하는 것은 모두 채경에게서 나왔다(京起於逐臣,一旦得志,天下拭目所為,而京陰託, 紹述之柄,箝制天子,用條例司故事,即都省置講議司,自為提舉,以其黨吳居厚、王漢之十餘人為僚屬,取政事之大者,如宗室, 冗官, 國用, 商旅, 鹽澤, 賦調, 尹牧,每一事以三人主之. 凡所設施,皆由是出)." - 『송사』 <간신전> 「채경전」
"채경은 이미 귀해졌지만 탐욕은 더욱 심해졌다. 이미 복야를 받들어 제수되었어도 거듭하여 사공기록전(司空寄祿錢)을 새로이 취하여 밤, 콩, 땔나무와 더불어 겸종을 예전처럼 받았다. 이 때 모두 절지(折支)로 하여 역시 모두 멋대로 진급(真給)하였으며, 단지 서면으로 주행(奏行)하는데도 황제는 알지 못하였다(京既貴而貪益甚,已受僕射奉,復創取司空寄祿錢,如粟, 豆, 柴薪與傔從糧賜如故,時皆折支,亦悉從真給,但入熟狀奏行,帝不知也)." - 『송사』 <간신전> 「채경전」

북송 최악의 간신송사의 <간신전>에 기록되어있으며, 일반 간신을 초월한 요마 수준의 취급을 받아 양사성, 이언, 주면, 왕보, 동관과 함께 육적이라 불렸다.

사실 망국시대 마지막 권신이니 어떻게 욕을 먹어도 할말이 없다.[8] 송 휘종 때에 날뛰었던 숱한 간신들과 권신들 중에서도 악명이 높기로는 실로 으뜸이었다.

소림사를 비롯, 지금까지도 돌에 새긴 그의 글씨가 남아있을 정도로 소식, 미불(米芾), 황정견(黄庭堅)과 함께 북송 시대 뛰어난 서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9] 미술품에 대한 안목이 정확하였다.

희대의 서예가인 동시에 불세출의 간신배이기에 서예와 인격수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4. 기타[편집]

  • 고려 예종이 안화사를 지었을 때 북송 황제 휘종에게 명필이 쓴 간판(편액)을 부탁하자 채경이 직접 쓴 간판을 보내줬다고 한다. 고려사엔 간판에 '정국안화지사'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하지만 고려도경엔 '안화지문'이라 쓰여져 있었다고 기록했다.

5. 소설 속의 채경

수호지에서는 4간신 중 한명으로 나온다. 악역의 필두는 아니나, 자신의 아들인 채구지부를 물산이 풍부한 강주지부로 보내 재산을 늘리는 등의 부패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지다성 오용이 심양루에서 반역시를 쓴 죄로 사형이 선고된 송강을 구출하기 위해, 태사인 채경의 명령서를 훔쳐서 위조를 시도하는데, 여기서 오용은 실수로 채경이 한림학사 시절에 쓰던 채경의 인장을 위조해서 찍는 바람에 작전이 꼬이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수호지에선 실제 인물과 마찬가지로 필체에 능숙했다는 설정도 있다. 수호후전에서는 동관, 고구와 함께 양산박 호걸들의 손에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우영 수호지 2000에서도 서예가로서 예술가로서 능력치가 좋으나 정치적으로는 그야말로 나라 말아먹는 무능한 간신배라고 나온다.

[1] 오늘날의 복건성 보전(福建省 莆田)[2] 채경의 동생이자 왕안석의 사위. 신법파였으며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까지 올랐는데 구법파와 자주 대립하였으며, 형 채경과 더불어 서예가로도 그 필법이 유명했다. 하지만 형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3] 채경과 마찬가지로 복건성 출신인 간신. 일찍이 조정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비열하며 믿지 못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왕안석만은 사마광 등의 경고에도 이를 믿지 않고 굉장히 신뢰했고 희녕변법 당시 그를 추천해 높이 썼다. 하지만 왕안석이 위기에 몰리자 왕안석을 탄핵해 사임시키는게 일조했으며, 왕안석이 복직하고 다시 물러나는 과정에서도 왕안석을 계속 공격했다. 이런 까닭에 왕안석은 완전히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살면서 종종 “복건자(복건사람)때문에 그르쳤다”라고 후회했다.[4] 당시 사마광의 신법 이전 회귀조치에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조치를 취한 사람은 채경이었다. 이때 사마광은 "만약 사람들마다 법을 받드는 것이 자네와 같다면 어찌 행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使人人奉法如君,何不可行之有)."라고 채경을 칭찬할 정도로 놀라워했다.[5] 철종 친정기때 집권한 신법파가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후 섭정기때 집권한 사마광 등 구법파 대신들을 가리키는 말[6] 채경은 휘종을 앞에 두고 증포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증포의 비리와 월권행위를 폭로해 증포를 공격했다. 이때 증포가 논박을 하면서 채경과 싸움이 붙었는데 채경은 증포 스스로 무너지게끔 공격했다. 따라서 증포는 얼굴이 붉어지게 할 정도로 화를 내며 이성마저 잃어버린 모습으로 황제 앞에서 채경을 비난했다. 이렇게 채경의 의도대로 증포는 무너졌고 증포의 행동들은 휘종과 조정 대신들마저 화가 나게 만들었다. 이 싸움은 한 신하가 참다못해 증포에게 “폐하께서 앞에서 계시는데 너무 무례한거 아니오”라고 말이 나오고 나서도 멈추지 않다가 참다못한 휘종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서야 끝이 났다고 한다. 이후 당연히 증포는 탄핵 후 조사를 받게 되었고 황제가 내려야 할 하사품을 측근들에게 하사하는 등의 월권행위와 뇌물을 받는 비리 등이 적발되어 축출되었다.[7] 증포를 축출한 이후에도 채경은 증포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비리 등을 밝히면서 계속해서 탄핵했다. 따라서 증포는 이후에도 계속 폄직되었고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로 더욱 폄직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잠시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에도 지방에 좌천된 채 살다가 자신이 탄핵시켜 쫓아낸 정적 장돈이 죽은지 1년 뒤인 1107년 윤주에서 사망했다.[8] 수호지의 영향 때문에 북송시대의 간신으로는 고구가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메인악역인 고구를 지나치게 악마화했기 때문이다. 실존인물인 고구도 충분히 간신 소리를 들을만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소설에서의 묘사마냥 막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간신이자 악의 근원은 채경에게 있었다.[9] 일반적으로 채경보다는 친척이자 스승인 채양(蔡襄)을 4대 서법대가 중 한명으로 뽑는다.[namu.wiki/w/채경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