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보짠(翦伯贊, 1898년 4월 14일 – 1968년 12월 18일)은 위구르족 출신의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후난성 타오위안현에서 태어난 젠보짠은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지자가 되었다. 1952년부터 죽을 때까지 베이징 대학 부총장을 역임했다. 그의 세대의 권위 있는 많은 학문적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문화 대혁명 기간 박해를 받았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젠보짠은 1968년 자살했다.[위키백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5〉 대역사가 젠보짠 “펑위샹 장군은 중국 진보의 상징”
1968년 문혁 발발 2년 후, 비판대에 끌려 나온 젠보짠. [사진 김명호]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사후에 총명한 며느리를 봤다. 1978년 가을, 해양지질연구소는 자료실 요원 위화신(余華心·여화심)을 선진공작자로 선정했다. 후보였던 부시장 딸이 씩씩거렸다. “대관료이며 대군벌이었던 펑위샹의 며느리는 자격이...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블로그2021.06.19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6〉 젠보짠 “펑위샹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는 세태 한심”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들과 젠보짠(앞줄 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국·공내전 시절, 홍색선전기관 신화사(新華社)는 4월만 되면 분주했다. 5월 1일 국제노동절에 발표할 선언문과 구호, 집회, 시위 준비 등 할 일이 많았다. 승리를 앞둔, 1948년 노동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신화사 사장 랴오청즈(廖承志... ) 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블로그202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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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펑위샹 - 나무위키
- 군, 혹은 스스로는 "국민군"이라고 했다. 한때 그의 영지는 옌시산이 지배하는 산시성을 제외한 산해관 이남 화북지역 전체에 달했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펑위샹은 1882년 11월 6일 청나라 안휘성 소현(巢縣)에서 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예성 청현(靑縣) 흥제진(興濟鎭) 북가(北街)로...나무위키 웹문서2022.09.04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3〉 뉴욕으로 떠난 펑위샹 “장제스는 제2의 히틀러”1935년 12월 2일, 항일을 결심한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와 다섯째 중간)와 펑위샹(앞줄 오른쪽 여섯째 뒤쪽)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들과 쑨원 능을 참배했다. 앞줄 오른쪽 여덟째가 중앙집행 위원장 위유런(于右任). [사진 김명호]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양국이 무력 충돌했다. 국·공 양당은 합작...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블로그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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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1〉 펑위샹 “애들은 애완견 아니다, 능력 갖추게 엄히 키워야”
펑위샹과 리더촨은 1남 3녀를 뒀다. 뒷줄이 장녀 펑리다. 1940년, 충칭. [사진 김명호] 한동안 펑위샹(馮玉祥·풍옥상)에 대한 평가는 야박했다. 은원(恩怨)이 남달랐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찬양과 비난을 반복했다. “배신이 직업”이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여름 뤼산(廬山...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블로그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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