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혼고 가즈토 | 역자 이민연 | 글항아리 | 2022.7.18
[소감] 일본 역사를 지일 차원에서 알고자 한다면 언제부터 시작할까? 내 경우에는 아무래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한 인물. 그러나 이 히데요시 사후 최종적으로 권력을 잡은 건 도쿠카와 이에야스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이고. 이 책은 이 전투에서 승자와 패자로 엇갈린 인물들의 삶을 추적했다. 전문적인 형식의 글이 아닌 일반 독자 누구나가 쉽게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전국시대 주요인물에 관한 기본지식이 없다면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전국시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심으로 쓴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 이란 대하소설을 읽었다면 좀 편하게 읽을 수가 있겠다. 대망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 그리고 후일담까지 기록해 놓은 게 이 책의 매력이랄 수 있으니까.
[사족] 요즘 일본에 관한 책이 많이 번역되어 나오는 것 같은 데 지일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경우에도 많은 책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이런 책도 많이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무조건 반일을 할 게 아니라 지일을 해서 타산지석으로 삼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소개
일본의 센고쿠(전국) 시대는 각지에서 여러 군웅이 일어나 세력을 다투는 전란의 시대였다. 이 혼란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룬 것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위시한 그의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각각 서군과 동군으로 나뉘어 천하를 놓고 다시 다투게 되는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여 일본은 에도 시대로 접어들 준비를 마친다.
일본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이 시대에 사무라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때로는 한순간의 방황이 일가의 멸망을 초래했고, 때로는 과감한 결단이 가문의 번성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천하를 판가름한 결전, 세키가하라 전투를 중심으로 생존을 건 전국 무장들의 명암을 풀어낸다. 통설뿐 아니라 최신 연구 성과까지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딱딱해지기 쉬운 역사 연구의 최전선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는다.[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서문
제1장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세키가하라 고찰1
고바야카와는 배신자인가? | 이에야스의 논공행상 | 고바야카와가의 진정한 수확량은? | 미숙한 군사사 관련 연구 | 세키가하라, ‘최고 포상’의 무공은 | 왜 이에야스는 히데타다군을 기다리지 않았나 | 유명한 에피소드의 근거는 어디에 | ‘천하를 제패한 자’의 탄생 | 표변한 이에야스 | 모리 데루모토의 운명
제2장 나오에조에 이에야스는 분노했는가: 세키가하라 고찰2
나오에 가네쓰구라는 무장 | ‘2인자’를 향한 히데요시의 뜨거운 시선 | 남자로서의 과업과 의리 | ‘에도江戶’는 ‘에도穢士’ | ‘더럽혀진 땅’을 살아가는 이에야스의 정신세계
제3장 천하 통일이란 무엇인가: 세키가하라 고찰3
일본은 하나가 아니다 | 항상 ‘군웅할거’ 상태 | 종말을 맞은 가네쓰구의 싸움 | 세키가하라 여담 | 마사쓰나의 ‘배령처’ | 노부나가의 ‘천하포무天下布武’와 히데요시의 ‘총무사령?無事令’ | 가모 우지사토, 이에야스, ‘수도’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무장들 | 또 하나의 세키가하라
제4장 간베는 참모였는가
구로다 간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 NHK는 ‘일부일처’를 좋아한다? | 간베는 천하를 욕심냈나? | 센고쿠 시대에 ‘참모’는 없었다? | ‘적중 돌파’ 시마즈 군사 1500명의 수수께끼 | 히데요시와 당주 사이에 낀 시마즈 요시히로 | ‘쓰리노부세釣り野伏’ 전술로 이룬 시마즈 최강 전설
제5장 여성주와 일본 무쌍의 용장
다치바나 소세쓰의 ‘라이키리雷切’ 전설 | ‘2만 대 700’ 격전의 끝 | 긴치요 ‘여성주’ 탄생의 수수께끼 | 히데요시가 ‘일본 무쌍의 용장’이라고 칭찬한 남자 | ‘라이키리마루’ 전설의 수수께끼 | 긴치요의 보리사와 마쓰다 세이코 | 영지 회복의 니와 나가시게
제6장 마에다는 왜 100만 석인가
오타니 요시쓰구의 부름에 응한 영주들 | 오타니 요시쓰구의 모략 | 호쿠리쿠의 세키가하라 | 마에다 도시이에의 인품이 낳은 ‘가가 100만 석’
제7장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아내들
‘창업’과 ‘수성’ | 히데타다가 여섯 살 연상의 애 딸린 이혼녀를 사랑한 이유 | 마음의 상처를 입은 히데타다의 ‘수성’ | 천하 제패 쇼군들이 사랑한 미망인과 공주 | 음탕하고 성욕이 강한 인물로 그려진 히데요시
제8장 성과 운명을 함께: 여인들의 센고쿠 시대1
센고쿠 시대에는 여인들도 목숨을 걸었다 | 여성주들의 싸움 | 노부나가가 사랑한 남자들 | 센고쿠 무장의 BL | 이이가의 여주인, 나오토라 | 아키타 미인의 DNA
제9장 위기일발의 도주: 여인들의 센고쿠 시대2
목이 떨어진 피바다 속에 누웠던 센고쿠의 여인들 | 『오아무 이야기』의 무대는 어디인가 | 오아무를 잇는 센고쿠 시대 여성 이야기꾼 | 오키쿠의 오사카성 탈출 | ‘하쓰’ 일행과의 만남 | 도피행의 결말 | 무장...
책 속으로
일본의 센고쿠 시대 혹은 중세는 전쟁의 시대다. 가장 가혹했던 이 시대를 살아야 했던 무장들은 자체적으로 일정한 교전 규칙을 만들었지만, 이 규칙을 어기는 무장들도 흔했던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극적인 사건을 살펴보며 중세 시대 무장들의 절박했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_10쪽
세키가하라 전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이야기로는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繼의 차’가 이에 해당한다. 어느 날 히데요시의 다과회에 초대된 여러 장수가 고급 찻잔에 든 차를 한 입씩 마시고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그런데 요시쓰구가 입을 대자 그 뒷사람들은 마시는 척만 하기 시작했다. 요시쓰구가 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옮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시다 미쓰나리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셨다. 감격한 요시쓰구는 미쓰나리와 문경지교刎頸之交(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의 벗)를 맺었다. 요시쓰구는 세키가하라에서도 미쓰나리와의 우정을 중시하여 패할 것을 알면서도 서군에 가담했다._36쪽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나가마사는 조스이에게 이에야스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며 오른손을 잡고 고마워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조스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때 네 왼손은 무엇을 했느냐고. 다시 말해 왜 왼손으로 칼을 뽑아 이에야스를 찔러 죽이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랬더라면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져 조스이에게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가 왔을 것이라는 뜻이다._94쪽
무엇이 쇼운으로 하여금 그렇게 격렬한 싸움에 몸을 던지게 했을까? 물론 무사의 명예라거나 자부심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로서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야성의 배후에는 호만산성에 쇼운의 차남인 14세의 다카하시 무네마스, 다치바나산성에 쇼운의 장남인 19세의 다치바나 무네토라(후일의 무네시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원군(모리군)은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리고 시마즈군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면 장남인 무네토라와 차남인 무네마스는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쇼운은 그 가능성에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_121~122쪽
나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상황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전투라고 생각한다. 도쿠가와와의 내통이 의심되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9월 14일에 마쓰오산성에 포진했다. 마쓰오산과 이에야스의 본진이 위치한 아카사가가 손을 잡으면 미쓰나리 등의 오카이성은 고립된다. 그리하여 미쓰나리는 급하게 세키가하라로 진을 옮겼고, 미쓰나리를 추격한 동군과 그곳에서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즉 세키가하라에서의 전투는 당초부터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서군의 최강 부대인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군대가 그곳에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_163~164쪽
센고쿠 시대는 남색이 특히 번성한 시대였다. 남자다운 기개가 중시되고, 전장에는 여성을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센고쿠 무장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소년이 그 상대였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바로 그런 경우다. 다만 ‘과연 노부나가’라고 감탄하게 하는 것은 상대를 선택할 때에 용모뿐만 아니라 ‘능력’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유능한 놈’이 노부나가의 취향이랄까. 그래서 ‘노부나가가 사랑한 남자들’에는 마에다 도시이에,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등 쟁쟁한 멤버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_181쪽
성안에서 싸울 때, 그곳에는 많은 여성과 아이가 있었다. 전화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기는 하지만 그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있다. 야마다 교레키山田去曆라는 무사의 딸인 ‘오아무おあむ’다. 80세의 그녀는 옛날이야기를 해달라 조르는 아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고 있던 소년 중 한 명이 이를 글로 남겼다. 이것이 『오아무 이야기おあむ物語』로, 전장 속 여인들의 모습을 짧지만 생생하게 전해준다._193~194쪽
출판사서평
양자택일: 도요토미인가, 도쿠가와인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라는 무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도요토미가의 유력한 가신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내내 애매한 태도를 보이다가 끝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섰다. 그래서 히데아키를 배신자라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남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입지가 위태로워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군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봐야 옳다.
히데아키의 이런 배경은 곧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경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는 최강의 두 세력이었고 무장 영주들은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선택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한 영주들은 대부분 세력을 키우지 못했으며 서군을 택한 영주들은 몰살 혹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배신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렇게 영주들에게 가문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대한 결단을 강요했다.
결단을 내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 하루 전에 서군의 세 요충지 중 하나인 마쓰오산성을 점거했다. 이에 따라 동군과 서군이 병력을 재배치하면서 비로소 세키가하라 전투의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아키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한 나비효과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큰아들의 정예군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투를 치른 것이 그 증거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가 바꿔버린 대치 구도에서 반짝이는 승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선택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도쿠가와가와 우에스기 가의 신경전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었다. ‘군신’ 우에스기 겐신으로 유명한 우에스기가는 도쿠가와가의 견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를 불렸고, 이를 문제 삼는 도쿠가와가를 우에스기가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가 조롱했다(나오에조 사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가를 토벌하러 오사카성을 떠났는데, 그 틈을 타 이시다 미쓰나리가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거병했다.
그런데 우에스기가는 회군하는 이에야스군을 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천하 통일’을 꿈꾸었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은 ‘비상식적’인 인물이었고, 오랜 전란으로 인해 많은 영주는 ‘군웅할거’ 상태를 당연시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천하 통일을 꿈꾸는 자들의 한판 승부였다면, 세키가하라에서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해 군웅할거 시대가 돌아올 거라고 믿는 다른 영주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에스기가는 군웅할거의 재래를 전제하고 미리 입지를 세우기 위해 이에야스의 배후를 치기보다 근처에서 패권을 잡으려는 행보를 보였다.
센고쿠 시대 참모로 잘 알려져 있는 구로다 간베(조스이)도 마찬가지로 세키가하라에서 동군과 서군이 맞붙는 동안 규슈 지역에서 영지 확대를 꾀했다. 사쓰마를 지배하던 시마즈가가 서군에 1500명의 군사만 보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형식상으로’ 은거하던 시마즈가는 돌아올 군웅할거 시대를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고 말았으며 군웅할거를 노리던 영주들은 새 권력 구도로 편입되었다.
도쿠가와의 논공행상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업적과 전력을 내세워 천황도 배제한 채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의 새 중심으로 에도를 택한 것도 더 이상 천황의 조력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제패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했던 무장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가장 큰 포상을 받은 건 영지가 40만 석이나 늘어난 구로다 나가마사였다. 구로다 간베의 아들이었던 그는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과 내통해 모리가의 군대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탈시켰다. 모리가는 전후 지위 보장을 약속받았으나 변심한 이에야스에 의해 세력이 축소되었다.
우에스기가는 앞서 말했듯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세력을 늘리려 했으나, 전투의 결과를 전해듣자 흐름을 오판했다며 깔끔하게 물러났다. 이에야스는 그 태도가 담백하다며 우에스기가를 멸문시키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일본 무쌍의 용장’이라며 추켜세웠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서군 편에 섰다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낭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 노력하여 몰수된 영지를 회복하고 2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가깝게 지냈다.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에야스는 전반적으로 인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랫동안 도쿠가와가를 섬긴 가신들에게는 더욱 인색했고, 반대로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다가 전향한 가신들 등 도쿠가와가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신흥 가신과 사위들에게 굉장히 후한 포상을 내렸다. 특히 이에야스의 사위가 된 가토 기요마사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큰 공적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지가 약 25만 석이나 늘어났다. 이에야스의 둘째, 셋째 딸과 결혼한 신흥 영주 이케다 데루마사, 가모 히데유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압도적인 승리를 바탕으로 영주들 간의 세력 구도를 재편했고, 일본은 도쿠가와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키가하라 전투의 큰 흐름을 설명한 것 외에도, 이 책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가득하다. 매력적인 인물 구로다 간베, 서군을 일으키는 데 실질적으로 공헌한 오타니 요시쓰구의 일화도 있고 만화 『나루토』 에서 오마주한 다치바나 소세쓰의 ‘라이키리’ 전설도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다치바나 긴치요 등의 여성 성주 이야기, 『오야무 이야기』 『오키쿠 이야기』 등 당시의 평범한 여성들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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