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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중국: 문화대반란 1964~1976:저자 송재윤

Bawoo 2023. 1. 6. 11:26
[소감] 중국의 문화대혁명기는 우리나라와 국교가 없던 시기였다. 당연히 보도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나의 10대 중반부터 20 중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기억으로는 홍위병이라는 낱말이 기억날 뿐 별로 관심조차 없었다. 투병생활 군 복무 등으로 개인적으로도 힘든 시기였지만, 나라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 시절이어서 암울한 사건이 많았었다. 기억 나는 큰 사건으로는 베트남전 파병(64~73), 김신조 일당 청와대 습격 (68.1월), 10월 유신(72년)이었던 것 같고. 아무튼 중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강 건너 불 보듯 공산 독재국가에서 무슨 사건이 났나보다 정도의 관심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G2로 부상하고 우리나라에 영향력이 커지는 걸 보면서 중국 현대사에도 괸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중국이 우리나라에 영향력을 잃어버린 건 1894년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해서가 처음이다. 그전까지는 고대부터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1992년 수교하기 전까지는 영향력 없는 적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한국전쟁(1950~53) 때는 북한을 도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수교후엔 우리나라가 우월적 위치에서 경제 교류가 있었고 최대 교역국, 무역 흑자국이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중 무역수지도 적자로 전환될지도 모른다. 중국의 자체 조달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 우리나라로부터 수입품이 줄어드는 싱황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치, 경제적 영향력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 중국 경제 의존도가 커지는 데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렇다고 탈중국도 쉽지 않은 일이다. 13억 거대 시장을 포기하는 건 미국 같은 대국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래저래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딜레머이다.

중국의 경제 발전은 우리나라, 대만, 싱가포르같은 정부 주도형 경제발전 모델을 따른 것이다. 정치는 독재로 하고 경제는 시장경제를 택한. 결과는 중국도 성공.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중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은 이런 점 때문에 많이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의 폐해가 이리 심했었던 건 미처 몰랐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다인"이란 대하 소설을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작품에도 문화대혁명의 폐해가 잘 나와있다.

결론은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1선에서 물러난 1인자 마오쩌둥의 권력 복귀책으로 벌어진 것인데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민중 특히 학생들 때문에 사태가 커진 것으로 이해했다.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독재체제인 때문에 개인의 의사를 함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도 한 몫 했을 테고. 국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새삼 만주주의가 얼마나 좋은 체제인가를 누낄 수 있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최적인 노작. 이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써준 저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마오쩌둥의 주도로 10여 년 동안 진행된 문화혁명의 폭력과 불합리를 고발한다.

출판사서평

중국공산당이 인정한 바와 같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자기파괴의 역사이다. 칼과 총을 든 홍위병과 수십만이 운집한 집회로 상징되는 이 거대한 정치 운동은 표면상 인민의 자발적인 ‘혁명’으로 미화되었지만, 기실 마오쩌둥의 사망과 동시에 막을 내린 마오 최후의 권력투쟁이었다. 마오는 중국 전역에 혁명의 문화를 퍼뜨려 군중을 혁명투사와 인민의 적으로 나누었고, 균열의 틈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권위는 시진핑의 인민 감시 및 사상 교육을 통해 오히려 강화되는 듯 보인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중국에서는 보다 철저한 인민 감시와 반대자를 향한 탄압이 행해진다.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탄압은 이제 중국 내의 소수민족과 다수의 자치구를 넘어 해외의 유수 기업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시진핑 사상을 주입받으며 열광적 애국주의로 무장한 청년들과 시진핑의 관계는 마오쩌둥 사상의 보위를 외치던 홍위병과 마오쩌둥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현대중국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하는 “슬픈 중국” 3부작의 제2권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문화혁명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가리고 정적을 제거하고자 했던 마오의 기획이었음을 지적하며, 중공 내부의 권력 다툼, 군중을 분열시키는 정치 공작의 관점에서 문화혁명을 재조명한다. 중공 내부와 홍위병, 군중조직 등 다양한 주체들의 역학관계를 통해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을 되짚는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마오쩌둥에서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거대한 시나리오,
당 내부의 역학관계를 통해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을 되짚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고 중앙 정치의 제2선으로 물러났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지도하에 중국의 경제가 안정을 되찾는 동안, 지도자로서 천명을 상실한 마오는 자신의 실정을 덮고 더 큰 권력을 누릴 기회를 노렸다. 마오가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한 사람은 국가주석 류사오치였다. 1962년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며 정치 운동을 재개한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인민을 격동시켜 본격적으로 류사오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오원위안, 치번위 등의 지식인들을 통한 정치 공작은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된 인민들이 스스로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그 측근을 차례로 제거하게 만들었다. 각 대학에 공작조를 보내 문화혁명의 질서를 잡고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던 류사오치는 결국 혁명을 억압한 반동분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1969년 류사오치가 사망한 뒤에도 정적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혁명 시나리오는 계속되었다. 군부의 실력자였던 린뱌오와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천보다는 물론, 극좌파 지식분자였던 왕리, 관펑, 치번위 역시 인민을 이용한 마오의 공작에 따라서 차례로 제거되었다.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당대 권력자들의 최후와 마오쩌둥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문화혁명의 모든 과정이 마오쩌둥의 권력투쟁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혁명을 실행한 두 개의 축, 홍위병과 군중조직
문화혁명 초기 혁명의 불씨를 댕김으로써 무장투쟁의 주축으로 활동했으나, 마오의 상산하향 운동으로 오지에 버려진 홍위병은 중국 역사의 모순을 드러낸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이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보다 과격하게 혁명에 참여했지만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정부와 기성세대에 의해 오지에서 젊음을 보내며 중국의 대표적인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확산과정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서는 홍위병에게 자극을 받은 군중조직에도 주목해야 한다.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문화혁명의 실행 주체로 홍위병과 군중조직을 동시에 살핌으로써 홍위병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그간의 논의를 넓히고자 시도한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했던 군중조직은 마오쩌둥이 주문한 “권력 탈취”를 실행함으로써 시 정부와 주요 언론을 전복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생산성 저하를 이유로 단체행동권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의 권력 탈취는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처럼 보였으나, 군부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