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한 해설은 아래 책소개, 출판사 서평을 참고 바랍니다.
책소개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더욱 강렬했던 한 식민지 조선인 청년의 마지막 여정. “정교하고 치밀한 문장과 감정이 절제되어 있는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간결하고 심오한 정서가 매력적”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3회 고창신재효문학상을 수상한 이준호 소설가의 장편소설 『조선 사람 히라야마 히데오』가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었다.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의 국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21년 고창군이 제정한 고창신재효문학상은, 매해 고창 지역의 역사·자연·지리·인물·문화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작품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많은 응모작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작품”으로 심사위원들에게 거론된 『조선 사람 히라야마 히데오』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여정은 단지 그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환기”시킨 소설로, 특히 극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혼란과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화두를 던지는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예열을 위해 시동을 걸어둔 프로펠러가 맹렬히 돌아간다.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부속품들은 일사불란하다. 동체를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격렬한 진동에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난다. 혈관을 도는 피의 흐름이 빨라진다. 도색이 벗겨진 부분이 손바닥에 이질감을 남긴다. 날개를 딛고 올라가 조종석에 앉는다. 계기반의 바늘들은 정상 위치에 있다. 조종석 덮개를 닫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_p.007
얼굴을 비쳤으니 내 도리는 한 셈이다. 집을 비운 히라야마 상이 고맙기만 하다. 헛걸음을 했는데도 콧노래가 나온다. 신의주나 경성에서 전보를 칠까 잠깐 망설였다. 양부모에게 애틋한 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말았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숨 막힐 듯했던 집에서 그나마 좋은 기억은 바나나뿐이다. 그림으로만 보던 그 열대과일을 먹었을 때의 황홀함이란. 잠자던 혓바닥의 미각세포들이 일제히 깨어나 아우성을 쳤다. 미끈거리고 부드러운 식감은 생경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_p.064
낙하지점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추락했을 때를 대비해 지정해 둔 집결지는 개나 주라지. 비상식량이 든 휴행낭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오게 사선으로 멘다. 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찡그린다. 햇빛이 강렬하다. 손바닥을 이마에 붙여 차양을 만든다. 근접전을 벌이는 전투기들이 쫓고 쫓긴다. 지상에서 보니 생존을 위한 사투인데도 꼬리잡기 놀이처럼 한갓지고 여유롭다. 이제 저들과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_p.081
일본인이 양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가져온 건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였다. 그는 군산에 있는 정미소에서 경리로 일했다. 그런데 조건이 좀 까다로웠다. 아니, 이상하고 복잡했다. 군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 것. 일본어에 능통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집안이 가난할 것. 특히 일본어는 내지인 수준일 것. 게다가 양자라고 했지만 실상은 호적을 새로 만들어 그 일본인의 친자가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 조선인 신민규는 사망 처리돼 민적에서 삭제되는 거였다. _p.101
추락한 조종사로 포로가 되는 것보다는 지나인 피란민으로 징집되는 편이 낫다. 최악이 아닌 것에 감사하기로 한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간에게 합리화는 현실을 견디는 최고의 발명품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 유일한 대응책은 합리화뿐이기도 하다. 아마도 을은 나를 자기네 가족의 장남이라고 하며 갑과 맞바꾸었을 것이다. 을은 내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_p.143
끔찍한 통증에 벌떡 일어난다. 골반에 손이 가 있다. 다시 어깨에 뭔가가 내리꽂힌다. 잠기운을 떨치지 못해 허둥대는 와중에도 신음이나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입을 꽉 다문다. 두 손으로 골반과 어깨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린다. 일본군이 착검한 소총을 나에게 겨누고 있다. 나는 놀라서 엉덩이걸음으로 물러난다. 일본군 하나는 무릎을 꿇은 소년을 등 뒤에서 감시하고, 다른 일본군들은 집 안을 수색한다. _p.185
피란민들에게 음식을 구걸했으나 하나같이 거절당했다. 일곱 가족의 가장이 베푼 물 한 그릇이 최대의 친절이자 자비였다. 말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두들겨 맞았다. 피란민들은 오는 동안 몹쓸 짓을 많이 당했는지 낯선 사람을 극도로 경계했다. 간혹 나를 동행으로 받아주는 피란민들도 있다. 딱 거기까지다. 음식은 절대 나눠주지 않는다. 그들이 지나온 황량하고 삭막한 산야처럼 인정이 메말랐다. 그런 와중에도 표정과 몸짓에서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느껴진다. 이유는 단 하나. 목적지가 멀지 않다. _p.251
언제부터 말을 잃은 걸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연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지 않은 파편들만 흘러나온다. 안달하지 않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도 있다. 검지로 땅바닥에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다. 나는 고창 사람 신민규입니다. 조선어로 글씨를 쓰는 게 아주 오랜만이다. 내가 히타 출신 히라야마 히데오가 아니라 고창 사람 신민규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자각된다. 잃은 것이 많다. 되찾아야 할 것도 많다. 그게 무엇이든 이제부터 천천히, 하나씩 찾아오면 되리라. _ p.269
출판사서평
“이음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작품의 완성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조된 정교한 호흡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찾아오는 완연한 긴장미
제3회 고창신재효문학상 수상작 『조선 사람 히라야마 히데오』가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었다. 심사를 맡은 김양호·김홍정·한창훈·손홍규·김별아 작가는 “한 장면 한 장면에 공을 들인 정교하고 치밀한 문장과 감정이 절제되어 있는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간결하고 심오한 정서가 매력적”이라며 “문체가 확실하게 존재하며 구성도 이음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이 작품의 완성도에 마음이 기울”었다고 평했다. 특히 “허구인 소설이 어떤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이 작품의 가능성”에 대해 상찬하기도 했다.
수상자 이준호 작가는 199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30년 차의 중견 소설가다. 지난해에는 단편소설 「10시 20분에 방영하는 9시 뉴스」로 제15회 현진건문학상 추천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같이 이미 작품성을 검증받은 작가의 문체는 비교적 긴 호흡의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고 촘촘하게 직조된 듯한 호흡으로 높은 완성도를 선보인다. 작가 이준호만의 이 호흡은 『조선 사람 히라야마 히데오』의 첫 장을 펼쳐 든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완연한 긴장미를 선사한다.
“조선인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맨몸으로 던져졌기에 끝없이 감내해야 한 세상의 만행
고통스러웠기에 더욱 강렬했던 한 조선인 청년의 마지막 여정!
『조선 사람 히라야마 히데오』는 치밀한 구성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의 의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환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전북 고창 사람으로 설정한 가공인물 ‘히라야마 히데오(신민규)’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 곤고한 우리 민족의 삶을 깊게 조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가정의 양자로 들어갔음에도 고향인 고창에 대한 그리움과 민족애를 지니고 성장했으며 일본제국주의 조종사 양성 과정을 거쳐 조종사로 만주 지역 전투에 참가했으나 전투기 추락 사고를 당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주인공은 일본군의 감시와 추적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고, 천신만고 끝에 꿈의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래서 일본어에 능통한 조선인을 원했구나. 이래서 양자가 아니라 가짜 호적을 만든 거구나. 나는 도살하려고 키운 돼지나 다름없구나. 야스쿠니에 들어간다는 건 전사를 의미했다.”
히라야마 히데오는 성장 과정과 참전 중에도 항상 조선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고향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으로 어려운 자신의 삶을 결연히 견뎌낸다. 극한의 상황에서 농아 행세를 통해 끝내 목숨을 부지한 주인공이 결국 실어증에 빠져 땅바닥 손 글씨로 “나는 고창 사람 신민규입니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읽는 이에게 큰 울림을 선사한다.
“그게 무엇이든 이제부터 천천히, 하나씩 찾아오면 되리라”
허구인 소설이 어떤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 있음을 보여준
한국 역사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
『조선 사람 히라야마 히데오』는 본심에서 논의한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었다.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인 조선인이 전투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뒤 천신만고의 여정 끝에 오랫동안 가슴에만 품었던 진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목적지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만족하지만 점차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과 슬픔을 배워가는 인물의 여정이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 장면 한 장면에 공을 들인 정교하고 치밀한 문장과 감정이 절제되어 있는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간결하고 심오한 정서가 매력적이다. 다만 소설의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 아닌 터라 소설에서 묘사된 배경과 사건들마저 작위적으로 여기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본심 진출작들과 견주었을 때, 문체가 확실하게 존재하며 구성도 이음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이 작품의 완성도에 마음이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심사숙고 끝에 허구인 소설이 어떤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이 작품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여정은 단지 그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환기시키며, 그에게 조선의 독립이란 고창이라는 고향을 회복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는 점 역시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기에 고창신재효문학상의 의의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_제3회 고창신재효 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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