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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 단편소설 세 편]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김홍신/곰 발가락:전진우/ 철과 흙:리지명

Bawoo 2024. 5. 7. 13:48
저자:김홍신, 출간:2023.10.10.
 
[소감] 1981년- 내 나이 32살 때이다. 작가는 35세- "인간시장"이란 대중소설(?)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작가의 신작. 나보다 3년 빠른 47년 생이니 올해 77세, 작품이 나온 해인 작년-2023년-에는 76세 때 작품이다. 올해 74세인 내 건강 기준으로는 치밀한 구성을 요하는 문학작품-장편 소설-을 쓰기에는 그리 녹록하지 않은 나이인데 신작을 냈다. 더군다나 조정래 작가처럼 작가로서만 생활한 게 아니라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기간이 제법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우리 세대(?)는 워낙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기에 나처럼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삶을 산 경우가 아니라며 글을 쓸 소재는 무궁무진(?)한 시대를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작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했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이 작품의 소재를 얻지 않았을까 내 멋대로 생각해 봤다.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 하나. 

작품은 액자소설 형식을 띤 것으로 이해했다. 살날보다는 살아온 날이 훨씬  더 많아 과거의 이야기를 쓰기에 딱 좋은 형식. 내용은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한 인간의 이야기인데 원인은 본인 자신이 자초-철책선을 침투하다가 사살된 북한군의 시신에 부하들을 데리고 가 기도를 해줬고 북한에서 뿌린 불온서적을 가지고 있었다-했으나  자신의 부인을 사랑한 보안대 장교-부인의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남자이다-에 의해 삶 자체가 망가지게 되고 복수를 꿈꾸나 자신의 딸을 위해 용서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재는 좋으나 작품성 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창작을 하거나 문학작품을 많이 읽은 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생각. 그래도 끝까지 읽어낸 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인지도의 힘(?) 덕분이겠다. ^^
 

책 속으로

[해설 중에서]

운명의 덫, 또는 이념의 압제와 사랑의 완성

소설의 책장을 넘기면서 다시금 감각하는 것은, 이 작가가 태생적으로 이야기의 달인이라는 사실이다. 그 주제를 요약하면 한두 줄의 문장으로 그치고, 서사를 나열하더라도 몇 장이면 될 이야기의 재료로, 이토록 장대한 소설의 얼개와 콘텐츠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당대 사회의 정치적 억압과 군문(軍門)의 부조리한 제도들, 여전히 서슬 푸르게 잔존하는 이념의 허상들을 헤치고, 인간이란 무엇이며 왜 가치 있게 존중받아야 하는가를 이보다 더 적나라하며 실감 있게 서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성의 근본과 삶의 심연, 그 바닥을 두드려보는 소설적 행위를 정확하면서도 유연하게 그려낸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병렬하기도 하고 전복하기도 하면서, 그 시간의 동선을 매우 자유롭게 활용한다. 한편으로는 미궁의 사건을 확인해 가는 추리적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구성상의 형식은 사건에 긴장감을 더하고 재미를 유발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침내 작품을 통독하고서야 그 얽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처럼 잘 짜인 이야기 방식을 통해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의 언덕으로 거슬러 오르는 운명애, 환경의 속박을 넘어선 인간 의지의 개가(凱歌)가 제시된다.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본문 중에서]

“그의 삶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애도해요……”

봉분 없는 묘지는 머잖아 풀 더미가 될 터이고, 오두막이나 다를 바 없는 집은 벌레들이 파먹고 비바람이 들이치고 주인 없는 걸 눈치챈 하늘이 눈을 흘겨서 삭여버릴 테니 한 해도 지나지 않아 폭삭 주저앉을 것 같았다. 목공소에서 십자가를 다시 만들거나 소박한 비석을 만들어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거름이 아니면 주저앉아 좀 더 그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 「한 남자의 마지막」 중에서

보안반장의 입에서 빨갱이란 소리가 나올 때마다 내 영혼이 한 뭉텅이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고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던 병사가 노란 주전자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섰다. 마치 주전자로 나를 내려칠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내민 물잔을 잡은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두 손으로 받쳐 들었지만 따르는 물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겨우 몇 모금 마시자, 물이 순식간에 방광으로 들어간 듯 속옷을 한 방울씩 적시는 느낌이었다.
“너, 빨갱이지?”
“절대로 아닙니다. 육군 소위 한서진입니다.”
살아야 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 나는 빨갱이가 될 수 없다. 내 핏속에 빨갱이가 될 수 없는 인자가 있다는 걸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 「긴급 호송」 중에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공인된 빨갱이가 되어버렸다. 변호인의 말처럼...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용서지요”
불신과 분열의 시대에 던지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

국내 최초 밀리언셀러 「인간시장」의 작가로 그동안 수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 온 소설가 김홍신의 신작 장편소설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가 출간된다.『바람으로 그린 그림』이후 6년 만에 발표되는 이 작품은 냉혹한 1970년대를 거쳐온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렸다.
작가는 치열한 역사적·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던 대작들에 이어, 장편소설 『단 한 번의 사랑』『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통해 순정한 사랑의 서사를 선보이며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은 바 있다. 인간사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은 작가에게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한 과제로 남았고, 6년간의 깊은 성찰 끝에 얻어낸 해답을 신작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에 여실히 녹여내었다.


시대의 아픔과 거친 삶의 비극 속에 써 내려간
한 사람의 일대기이자 스러져간 모든 이름들의 연대기

소설은 주인공 한서진의 딸 자인이 아버지의 유고를 읽고 그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액자식 구성으로 쓰였다. 1971년, ROTC 출신의 육군 소위 한서진은 사살된 북한 장교의 시신에 십자가를 꽂고 명복을 빌어준 죄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빨갱이로 몰려 형무소에 수감된다. 피아를 구분 짓기에 앞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우를 갖췄을 뿐이라는 그의 항변이 받아들여질 리 없는 엄혹한 시기…… ‘적인종(赤人種, 빨간색 인간)’으로 매도된 채, 애써 쌓아온 삶의 이력과 가족들마저 잃게 된 억울한 상황 속에서 그는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는 존재로 변질되어 간다.
작품은 비록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권력을 통해 개인 혹은 집단을 낙인찍고 다시 이를 복수로 되갚는 폭력적인 모습은 오늘날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적군의 죽음에도 애도를 표하던 인류애는 고문을 거치며 실종되고, 분노와 좌절로 무모한 범행조차 서슴지 않던 주인공이 용서라는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킬 뿐 이는 결국 뜨거운 용서로밖에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50년 가까운 시간을 문학에 바친 영원한 글쟁이 김홍신의 노련한 필력이 신작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에도 고스란히 녹아났다. 액자 형식과 시점의 변화를 통해 극의 입체감을 더했고, 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고문 과정 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는 독자의 몰입을 강화한다. 긴장감 넘치는 한 편의 소설이 마침내 애도문으로 글의 장르가 확장되고, 그 찬란하도록 슬픈 변곡점에서 삶과 죽음의 경외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향한 오랜 성찰의 흔적

주인공 한서진은 제 삶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 두 남녀에 대한 증오심마저도 모두 거두어버린다. 그의 초월적인 삶의 자세와 적을 끌어안는 포용력은 차세대를 대변하는 그의 딸 자인에게 대물림된다. 오랜 시간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의 사연을 깨달은 자인이 출생의 아픔을 넘어 그의 영전에 깊은 애도를 표함으로써 비로소 과거와 현재의 화해를 이루어낸다.
그런 점에서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는 전작들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 휴머니즘 소설이다. 세상의 시련과 고난 속에도 변치 않는 인간의 조건은 이토록 숭고하고 성숙한 ‘사랑과 용서’의 힘임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일깨운다.
2023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0년, 문민정부 출범 30년을 맞이한 해로,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진 과거를 되돌아보며 평화와 상생을 도모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더욱 첨예한 분열과 대립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학은 물론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동시대인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다루어온 소설가 김홍신이 큰 어른이자 노장 소설가로서 우리에게 던지는 절실한 화해의 가치가 더욱 울림 있게 다가올 것이다.

[줄거리]
사살된 적(敵)을 위해 기도한 죄로
‘적인종(赤人種, 빨간색 인간)’이라 명명되어 살아온 한 남자

병석에 누운 한 남자가 죽어간다. 자인은 외삼촌의 부름으로 친아버지 한서진의 임종을 지킨다. 처자식을 버리고 전과자가 되어 왕래조차 하지 않았던 남자. 이후 자인은 아버지 서진의 유고를 손에 넣고 증발하듯 사라졌던 그의 사연을 깨닫는다.
1971년, 학도군사훈련단 출신 대한민국 국군 소위 한서진은 사살된 북한 장교의 시체에 십자가를 꽂아주고 명복을 빌어준 죄로 ‘적인종(赤人種, 빨간색 인간)’으로 매도된다. 신앙심과 인류애에 기반한 순수한 기도였다는 항변이 받아들여질 리 없는 시대였다. 서진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죄로 5년 형을 선고받는다.
‘남한산성’이라 불리는 육군형무소 감금된 서진은 같은 방에 수감된 김 대위와 박 중위에게서 심한 폭행을 당한다. 악몽과도 같은 감옥에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바깥세상에 두고 온 아내 지향과 딸 자인을 향한 그리움, 오랜 친구이자 처남인 재필의 무한한 지지 덕분이었다.
어느 날, 서진은 면회 자리에서 평소와 달리 제 시선을 피하는 지향과 암담해하는 재필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날부로 서진은 뼈가 뒤틀리고 몸뚱이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듯한 증오와 원망 속에서 오직 복수할 일념으로 출옥을 꿈꾸는데…….

[등장인물소개]
한서진 학훈단 출신 국군 소위이자 실향민 2세다. 사살된 북한 장교에게 신앙심에 기반한 기도를 올렸다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의 죄명으로 육군형무소에 수감된다. ‘빨갱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과 피아를 구분 짓기에 앞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개인의 이념, 두 지향점의 간극 사이에서 고뇌한다.

재필 서진의 오랜 친구이자 손위 처남. 대학 1학년 때 문학반에서 서진과 만나 우정을 맺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진을 모친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들인다. 이후 여동생 지향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지향 한서진의 아내이자 재필의 여동생. 모친이 운영하는 하숙집을 찾은 대학생 서진과 연애하여 딸 자인을 갖는다. 수감된 남편의 형기를 줄여보고자 면회를 갔다가 전 애인, 보안반장 이진구를 마주하고 만다.

이진구 육군 대위이자 보안반장이며 지향의 전 애인. 지향의 간절한 호소로 서진을 봐주지만, 그녀를 향한 옛 감정이 다시금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자인 한서진과 지향 사이에서 난 딸로, 훗날 소설가로 성장한다. 아버지 한서진의 비밀스러운 생애와 사연을 파헤치고 그간 묵인된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 몰두한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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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전진우
출간:2023.6.9.
 

[소감] 이 작품집을 낸 전진우 작가는 "그대의 2020.10.30"이란 작품을 읽고 다른 작품도 있으면 읽어봐야겠다고 자리매김해 놓은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용하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단편소설 모음집을 발견했다. 사실 단편소설은 읽는 걸 일부러 피하는 편인데 반가운 마음에 책장을 열어보니 "우와! 시원찮아진 내 눈에도 딱 맞게 활자 크기도 시원하게 크잖은가". 기쁜 마음으로빌려와 놓고 막상 읽은 건 다른 책들에 밀려 조금 늦었다. 단편소설을 거부(?)하는 내 읽기 성향 때문이다. 그래도 책을 잡은 뒤에는 아주 빠르게 읽어냈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작품은 살날이 그리 많이 안 남은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이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출생년을 검색해보니 나보다 1년 빠른 1949년 생이다. 내가 빠른 1월 생이라 49년 생하고 같이 학교에 다녔으니 인연이 되었다면 서로 얼굴을 마주했을 수도 있었겠다.^^ 때문인지 내 또래들이 읽으면 아주 익숙했을 소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춘기 시절 첫사랑이랄 수는 없겠지만 이성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그 시절에 만난 인연을 다 늙어 만났을 때 교차하는 감정을 다룬 작품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작품성 면에서는 작가의 장편에 비해서는 떨어진다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살아온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게 해 준 것만으로 읽은 보람을 느낀다. 의병장 이인형 선생을 다룬 "의병'이란 작품 외 몇 편은 위의 범주에 안 들기는 한다. 아무튼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데 장편 "동백" 외에는 도서관에 없다. 

글 쓰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정도는 아는 내 입장에서는 내내 아쉬운 대목이다. 많이 팔리고 읽혀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소득이 보장돼야  작가들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좋은 작품을 쓸 텐데 말이다. 

 

책소개:일부만 발췌

 

모두 9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곰 발가락』에는 우리 현대사와 현실의 문제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촘촘히 이어진다. 친일, 분단, 반공이라는 과거의 덫으로부터 ‘미투 운동’에 노출된 늙은 사내들의 당혹감이라는 현실의 문제까지. 작가는 어느새 진부한 이야기들로 치부되는 그것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미 해결된 것이냐고, 그냥 지나간 일처럼 덮고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역사와 시대가 강요해온 운명에 포획된 사람들의 등에는 여전히 곰 발가락에 찢긴 상처가 아물지 않았거늘 신자유주의 아래 각자도생으로 분투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소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문예바다 편집부-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작가의 말 / 04
터치Touch / 08
곰 발가락 / 32
명랑한 밤입니다 / 76
의병 / 126
원유회 / 161
빨간 버스 / 196
부음訃音 / 241
빛의 기억 / 279
챔피언 / 302

─해설 / 인생극장이라는 은퇴 후의 삶과 허허로운 위안,
그리고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 전상기 / 330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경실은 끝내 북촌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덕실 누님은 운명이라고 했다. 경실이 인민군 소대장을 따라나선 것도, 남편이 북으로 간 것도 다 운명이라고 했다. 어지럽고 오금이 저려 대문 밖 배웅도 못 하고 쪼그려 앉아 울다 보니까 희붐하게 동이 텄다고 했다. 새벽에야 이태 만에 만났던 남편과 영영 생이별한 것을 알았다고 했다. 덕실 누님은 그 새벽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 정호야. 니 매형도, 경실 누나도 빨갱이 아니란다. 그냥 거역 못 할 운명에 따른 것뿐이지. 네가 이 집에 양자로 들어온 거처럼 말이야.

-「곰 발가락」(57∼58쪽) 중에서-

내 생의 아름다운 시절은 북촌에서 산 십 년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부와 양모, 덕실 누님, 두수 아저씨, 혜산댁.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은 물론 한 번 본적 없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인민군 장교 따라 이북으로 갔다는, 눈빛이 샛별처럼 초롱초롱했다는 경실 누님도 보고 싶다. 막내 처제와 함께 월북했다는 큰매형, 그리고 잘생긴 얼굴에 사람됨이 더할 나위 없었다는 인민군 장교도 만나보고 싶다. 왜 말더듬이에 정신도 온전치 않았다는 경실 누님은 만난 지 며칠 만에 인민군 장교를 따라갔을까? 큰매형은? 그들은 살아있을까? 어떻게 살아왔을까? 죽었다면 어디에 묻혔을까? 빨갱이가 아니라 거역 못 할 운명을 따른 거라면 북촌댁 양자였던 나는 적어도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연좌제는 정말 없어진 걸까. 그 모질고 질긴 적대와 증오가 사라질 수 있을까.

-「곰 발가락」(74쪽) 중에서-

김재우, 합수부에 연행까지 됐었는데 살아난 거 이상하지 않아?
그런 말들이 여기저기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너, 프락치였어?
그러나 아무도 암말 하지 않았다. 부장도, 차장도 한마디 없었다. 하다못해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는 동료들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대할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저 침묵할 뿐. 기자란 묻는 직업이다. 그런데 그는 물을 수 없었다.
-「부음訃音」(270쪽) 중에서-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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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리지명, 출간:2024.1.10.
 
[소감] 이 작품을 쓴 리지명 작가는 탈북작가이다. 그래서 북한을 소재로 작품을 쓴다. " 두형제 이야기2021.2.15." 라는 작품을 읽었는데 다른 탈북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실망한 경험이 있어 큰 기대는 안 했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끝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 작품도 읽어볼 생각을 했다. 결과는 양호.
읽은 두 작품을 통해 느낀 건 등장인물이 북한, 중국, 남한에 적을 두고 있고 서로 혈연적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한에 있는 인물-월남 아니면 탈북-은 크게 성공하여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도움을 준다는 설정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 작품 역시. 가독성도 뛰어나다. 추리소설을 쓰는 김성종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수업을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작품 중에 추리기법을 썼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북한의 현실을 알게 해주는 좋은 점이 있는 반면에 좀 더 깊이 알았으면 하는 점에서는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일독할 만한 작품을 쓰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 

소개

태수와 춘희, 두 사람의 이야기

『철과 흙』의 주인공은 태수와 춘희, 두 사람이다. 이야기는 함경남도 남단 인구 2만여 명이 사는 탄광, 광산 지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태수’는 상동, 중동, 하동으로 나뉜 이 ‘동네’의 중동 탄광의 ‘갱장’으로 있다.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외의 설정은 허구다.

춘희의 이력이 아주 특이하다. 그녀는 태수의 중동 탄광과 맞붙은 중동농장 소속 작업반인 상촌 마을의 농장 이발사다. 이쪽 세상과 달리 여성이 이발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 두 사람의 내밀한, 이면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곳 탄광·광산촌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 사연과 음모, 욕망과 그 반대되는 동정의 움직임이 쫄깃쫄깃한 이야기의 재미를 느끼도록 펼쳐진다.

태수와 춘희, 두 인물로 하여금 감추어진 관계 속에 놓이도록 한 것은 북한사회 체제를 ‘대표’하는 ‘철’의 속성, 곧 이 탄광·광산촌을 휘감고 흐르는 욕망, 음모, 이념, 폭력과 살상의 뒤얽힘이다.
태수와 춘희는 이 감추어진 사연을 배경으로 거느리며 작중에 나타나 서로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게 된다.

비단 두 사람의 사랑만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싸고 방사형으로, 거미줄처럼 뒤얽힌 사람살이의 관계를 꿰뚫고 있는 것은 남과 여의 사랑, 남자와 남자의 우정, 여성과 여성의 동정이요 연민이며, 서로 몰랐던 사람들끼리도 새롭게 마음을 열고 돕고 감춰줄 수 있었던 ‘유정’한 마음의 존재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소설 『철과 흙』은 단순히 저쪽 체제 비판의 소설이 아니요, 그 세계의 표면과 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리얼한 사람살이의 진실을 가리키는 작품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 왜 ‘철과 흙’인가?

‘철’은 이 이야기가 탄광, 광산 지대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며, 맨살에 와 닿은 철의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처럼 그가 그리는 북한 체제의 현실이 차갑고 괴롭기 때문이다. 냉혹한 이념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존재. ‘철’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비정함을 표상한다.

그러면 ‘흙’은 무엇이냐. 흙은 따사롭고 부드럽다. 그것을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양육해 주는 어머니요 여성이요 사랑이다. ‘철’의 세계인 저쪽에도 그 삶을 감싸안는 흙의 온기가 아예 없지 않았으니, 이지명 작가가 그리는 작중의 인물들은 저마다 비정한 생존의 논리를 품고 있으되 그들이 끝내 기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랑의, 동정의 마음 그것이다.

□ 김성종을 중국 땅에서 숨어서 읽다!

“제가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김성종 작가도 만나 봤습니다. 김성종 소설에 매력을 느껴서 중국에 있을 때부터 그 책만 들여다 봤어요. 『제5열』, 『일곱 개의 장미』, 『안개 속에 지다』 등등 그 분이 쓴 책은 너무 재밌어서, 중국 연길, 훈춘 같은 데 서점, 또 책 빌리는 데서, 한국소설 읽은 게 한 상자는 될 텐데요, 하룻밤에 다 읽고 또 갖다주고 빌리고, 숨어 있으니까 계속 읽었지요.”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