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기록으로는"골령골의 기억전쟁"," 박만순의 기억전쟁", " 박만순의 기억전쟁 2", " 박만순의 기억전쟁 3"을 읽었다.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휘두르는 인간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기록인데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이 책은 민간인 학살 관련 책이 나온 걸 알게 되면 찾아 읽는 내 독서습관 때문에 발견했는데 경남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가슴 아픈 역사를 이젠 그만 읽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잠시 훑어보고 참고용으로 분류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위 박만순 작가의 책을 같이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책소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알리기 위해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경제림을 수반한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 손을 놓지 못하는 내가 야속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지역에서도 학살지만 보였다. 민간인 학살 사건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깊이 무겁게 박혀버린 까닭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100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자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무관심한 사회도 안타까웠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생한 지 74년을 맞는다. 당시 학살을 목격했던 이들과 1세대 유족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20년 세월 동안 70~80대 노인을 대상으로 학살 사건을 찾던 나도 60세에 가까워졌다. 이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마지막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이 영화 제작을 마치면 이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완전히 학살 사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책머리에’ 중에서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책머리에
1부 창원 지역 민간인 학살
2부 함안 지역 민간인 학살
3부 창녕 지역 민간인 학살
4부 진주 지역 민간인 학살
5부 산청 지역 민간인 학살
6부 의령 지역 민간인 학살
7부 사천 지역 민간인 학살
8부 통영 지역 민간인 학살
9부 거제 지역 민간인 학살
부록
책 속으로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학살은 점심 무렵인 오전 11시를 넘어 끝이 났다. 그 시간 동안 반죽음이 된 사람들은 먼저 올라간 사람을 죽이는 M1 총소리를 들으며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살이 끝난 이후 동네에는 소문이 돌았다. 학살 현장에는 절명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세 명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어깨에 총을 맞고 마을로 내려와 지서로 가서 자수했다. 그가 왜 도망가지 않고 자수했는지 동네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순박한 사람이라고 탄식만 했다. 지서 순경은 그날 일꾼을 시켜 산모퉁이에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를 총살하고 묻었다.
-26쪽
“아버지는 보도연맹도 아니고. 보도연맹을 소집했는데 부락에 할당된 인원이 있는 모양이지. 보도연맹 가입된 인원이 있었는데, 그중에 아는 사람은 빠져버리고 그 대신으로 보낸 모양이라.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서…. 똑똑한 사람들, 이장 동생이니 뭐니 그런 사람은 다 빠져버리고, 멋모르는 사람을 인원 맞추어서 보낸 모양이라.”
보도연맹 회의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에는 이장과 몇 사람의 남자들이 남아 있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소집을 피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멋모르고 따라나선 사람들이 죽었다. 어떤 집안은 두 명의 형제가 동시에 죽었다. 형이 회의에 간다고 나서는 것을 본 동생은 자기도 구경할 것이라며 따라갔다가 죽었다.
-58~59쪽
이들이 마산 앞바다에서 학살된 이후 구산면 옥계, 심리, 난포리 앞바다에는 한데 묶인 사람들이 시신이 되어 떠올랐다. 당시 이현규 씨는 안녕마을 큰골 해안에 떠오른 시신을 매장했다. 선주였던 그는 선원을 시켜 산자락 끝에 드러난 땅에 묻도록 했다. 선원들은 괭이로 흙을 파서 8구의 시신을 해안에 묻었다.
“사람을 묶어서 밧줄로 착착 엮었는데 팔을 이렇게 묶고, (여러 사람을) 한데 묶어서, 불어서 줄이 풀려서 형편 없더구만.”
-82쪽
한국전쟁을 전후해 대마도 인근 해상과 해안에서는 여러 구의 시신이 인양되거나 발견됐다. 이 시신들은 화장되어 서산사(西山寺. 이즈하라 세이잔지) 뒤 야산 대나무 숲에 매장했다. 표류자지령위(漂流者之靈位) 무덤은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관련자로 추정된다.
그 이후에 대마도 해상에서 시신이 또 떠올랐다. 주민들은 이 시신을 모아 임시 매장했다. 1963년 4월 이즈하라 경찰서 인근에 있는 태평사 주지 스님이 이 시신을 화장해서 묻고 뒤편 묘지에 무연지제령(無緣之諸靈)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114쪽
경찰은 언덕 아래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경찰과 군인이 언덕 위로 올라간 직후 총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사살한 경찰과 군인은 주민을 불렀다. 주민들은 그곳으로 올라가 구덩이를 10개 파서 한 곳에 4~6구씩 넣고 매장했다. 김성수 씨는 그 수를 50명이라고 했다. 주민들은 흙으로 나지막한 봉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무덤은 도드라져 보였고, 인근을 지나는 주민은 학살 매장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최삼영 씨도 산에 나무하러 다니면서 도드라진 무덤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송현동 학살지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이곳을 피해 다녔다.
-165쪽
1950년 8월 11일 오후 1시 무렵 보현마을 상공으로 미군 정찰기가 선회하고 돌아갔다. 잠시 뒤 호주기 4대가 나타났다. 마을 상공을 저공 비행하던 호주기는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마을은 화염으로 휩싸였다. 아수라장이 된 마을에서 살아남은 피난민과 주민은 마을 앞 하천 둑 제방으로 급히 달아났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겨냥해 호주기는 또다시 기총 사격을 가했다. 마을은 부모형제의 주검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사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폭격 맞은 집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234~235쪽
“치가 떨리고… 뭐 사상죄로 뭔 일이 있어야 죽든가 죗값을 받지. 그 아무것도 아닌데, 그 당시 좌익 우익하던 그땐데 아무 명칭도 없는데… 그 당시 활동한 사람은 다 살았다 아이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은 다 죽었는데. 안 죽고 살은 사람은 진짜 사상적으로 뭘… 그때 레닌 막슨가… 그 뭐 좋다고 이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안 죽었다. 다 나왔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농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만 전부 다 죽인 거라. 끌려 와가지고….”
그의 눈 주변이 붉어져 있었다. 억울해서 말만 하면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먼저 나온다고 했다. 그의 칠촌 아재도 형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념이 무언지도 몰랐다. 남의 집 일만 하고 살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남편의 죽음에 목놓아 통곡하던 배우자들은 경찰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248쪽
출판사서평
경남 지역 민간인 학살의 진실
영화감독 구자환이, 자신이 만든 민간인 학살 다큐 영화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을 책으로 펴냈다. 경남 지역에 한한 아쉬움은 있지만, 학살 피해자의 가족과 목격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학살지를 발굴하고, 자료를 뒤적여 이루어낸 기록이다. 저자의 말대로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넘으면서 증언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할 것이다. 그동안 두려움과 상처 때문에 증언을 꺼리던 피해자 가족과 목격자의 말을 받아 적고 또 영상으로 찍으면서 저자 또한 힘든 여정을 지내왔다. 일단 집단 학살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트라우마를 저자 또한 감당해야 했기에 그랬다. 마지막 영화를 찍으면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말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저자가 다큐멘타리 영화를 찍으면서 확인한 학살 현장 및 증언은 어떤 시대가 오건, 또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지워져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의 기록이다. 아픈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은 살리는 것이 역사는 아니다. 역사는 그 모든 것을 힘들면 힘든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후대가 받아 안아서 미래에 넘겨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자환 감독의 이번 책은 역사를 대하는 귀감이 된다. 누구나 아픔은 망각하고 싶은 것이지만 아픔의 망각은 좋은 기억마저 왜곡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역사는 편의에 따라 취사 선택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우리 역사의 아픔 중에서도 아주 큰 아픔이다. 하지만 이 기억을 맞대면하는 용기가 많아질수록 아픔의 치유는 빨라지고 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진주시 사봉면 대곡리 이혜기 할머니도 당시 스물한 살이던 남편을 잃었다. 남편은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 몰랐다. 동네 사람들이 한번 가 보자고 해서 갔던 길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 일이 비극이 될 줄 몰랐다. 남편은 1950년 음력 6월 1일 동네 사람들과 회의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49쪽)
이 책은 역사에 대한 일반론적인 또는 교양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위의 인용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이 바로 민중들의 아픔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주로 한국전쟁 전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만큼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깊은 응어리로 남아서이기도 하지만 국민보도연맹 자체가 국가의 거대한 속임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익이 뭔지도 모르고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했다가 불려나가 학살당했다는 증언은 이 책 전체에 걸쳐 되풀이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이 책은 고발하고 있다.
학살의 방법이나 희생자의 처리 문제도 충격적인데, 동네 주민들에게 희생자들을 매장하게 하거나 아예 수장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수장된 희생자들의 시체가 대마도까지 떠내려간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마산형무소에서 전차 상륙함(LST)을 타고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민간인 일부의 시신은 해류를 타고 일본 대마도(쓰시마)로 떠밀려갔다. 거제도 지심도 인근에서 수장된 이들과 부산형무소에서 갇혀 오륙도 앞바다에서 수장된 이들 일부도 대마도로 떠내려갔다. 이보다 앞서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관련자로 추정되는 이들도 시신이 되어 대마도 해안에 떠올랐다.(31~32쪽)
어쩌면 독자들은 반복되는 학살 기록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학살 전의 사정과 학살 후의 상황을 함께 꿰맞춰 가다 보면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에 몸을 떨 것이다. 학살 자체도 용납할 수 없지만 그 이유와 사후 대처에서 최소한의 합리성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에게 가해지는 2차 폭력이 차라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빨갱이’는 국가폭력의 언어일 뿐
한국전쟁 이후의 적잖은 세월은 희생자 가족의 입을 막아온 시간이며 동시에 연좌제 등을 통한 2차 가해의 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을 키워야 했다. 남편이 죽임을 당한 이후로 김수가는 진해, 부산 등지를 오가며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악착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억울하게 남편을 잃은 하소연은 어디에도 할 수 없었다. 악착스럽게 키운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연좌제로 피해를 보아야 했다. 큰아들은 공무원에 합격하지 못했고, 작은아들은 공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으나 신원 조사 이후에 탈락했다. 그들에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128쪽)
이 모든 것이 학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도리어 학살지는 자연재해로 인해 소실되기까지 했다. “태풍이 들이닥친 이후 시신을 묻은 장소가 해일에 밀려 사라”(302쪽)지기도 했던 것이다. 가장의 죽음으로 인한 생활고, 그리고 여기에 덧대진 국가의 입막음과 연좌제로 인한 추가 폭력이 더해졌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 가족은 체념하거나 또는 그런 시간이 다시 올지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왜냐면 우리는 아직 분단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학살이 해방 이후 벌어진 분단 때문임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것이 희생자 가족의 뼈에 새겨졌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잠시 먼 산을 응시하던 할머니는 체념한 듯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이 일을 말하지도 못했고, 이 일을 묻고 다니다 가는 잡혀갔을 것이라고 했다. 좋은 세상이 왔지만, 할머니는 겁이 난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엇 때문에 겁이 나느냐고 내가 물었다.
“해나(행여) 또 돌아올까 싶어서. 옛날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거라. 아직까지 남북이 안 갈려 있는교. 갈려 있는데 겁이 안 날 턱이 있나. 겁이 나는데.”(266쪽)
민간인 학살은 한국전쟁 전부터 줄기차게 일어났던 바, 이승만 정권은 남한에 북한의 적이 존재한다는 두려움과 광기 어린 집착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가 아는 ‘빨갱이’의 탄생은 그런 현실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분단에 반대하거나 일제 식민지 시절의 친일 경찰을 미워하는 감정까지도 빨갱이의 증표로 삼았던 것은 그동안 충분히 밝혀진 사실이다.
저자는 그래서 아예 이 책의 제목을 ‘빨갱이의 무덤’이라고 붙였는데, 이것은 이승만 정권이 차라리 이념 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빨갱이’를 필요로 했던 감춰진 진실을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빨갱이라는 말을 어떤 이유에서건 쓰지 못하게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강력한 낙인 효과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낙인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한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하는 게 급선무다. 빨갱이가 아니었음을 밝혀주는 차원을 떠나 ‘빨갱이’라는 언어 자체가 이승만 정권의 폭력과 독재를 정당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그 가족의 복권, 그리고 학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수동적인 방어와 변명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은 일방적이고 비이성적인 국가폭력일 뿐임을 폭로하는 일이 필요하다. 저자가 ‘책을 펴내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제목을 ‘빨갱이 무덤’으로 지은 이유는 “당신들이 빨갱이라고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봐라”고 항의를 하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레드콤플렉스를 없애고 싶었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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