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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Yellow Submarine - Beatles

Bawoo 2014. 3. 23. 15:03

 

 

 

 

 

 

 

 

 

 

 

 

 

 

 

Yellow Submarine / Beatles


In the town where I was born
Lived a man who sailed to sea
And he told us of his life
In the land of submarines

내가 태어났던 마을에
바다를 항해를 하던 아저씨가 살았지요
그가 우리한테 그의 삶에 대해 얘길 해 주었지요
잠수함 나라에 대해서 말이죠


So we sailed on to the sun
Till we found the sea of green
And we lived beneath the waves
In our yellow submarine

그래서 우린 태양을 향해 떠났어요
녹색 바다를 찾을 때 까지말이예요
우린 파도 아래서 살고 있었어요
우리의 노란 잠수함 안에서


We all live in our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We all live in our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아요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아요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And our friends are all on board
Many more of them live next door
And the band begins to play

우리 친구들도 모두 타고 있어요
많은 친구들이 이웃집에 살고있죠
그리고 밴드는 연주를 시작하죠

We all live in our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We all live in our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아요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아요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As we live a life of ease
Everyone of us has all we need
Sky of blue and sea of green
In our yellow submarine.

우린 여유있는 삶을 살기위해
우린 모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죠
푸룬 하늘과 초록색 바라
우리 노란 잠수함에서


 

 


 

 

때는 1957년 7월, '40년 생인 존 레논이 18살이 되던 해 교회에서 그의 밴드 쿼리맨(Qurrymen)의 공연이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밴드로서는 최하위권이었다. 그들은 파티장이나 결혼식장 등에서 주로 연주했는데,

 가수로 치자면 제일 안 쳐주는 '웨딩 싱어'였던 것이다. 그런 쿼리맨이 공연을 할 때 존의 친구가 같은 학교 다니고 있는

 폴 매카트니를 데리고 왔다. 폴은 쿼리맨의 형편없는 실력에 실망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한 눈에 간파하고

 존을 만나기 위해 백스테이지로 갔다.

존 레논 : (술에 취해) 어... 노래를 한다고? 그럼, 한 번 해봐. (기타를 건넨다)
폴 매카트니 : (기타를 받으며) 함 해볼까나. 근데... 이건 오른 손잡이 기타인데... 난 왼손잡 이거든...

거꾸로 된 거 없을까?
존 레논 : (기분 상한)싫음 싫다고 해.
폴 매카트니 : 아.. 아냐.. 할게.

폴 매카트니는 당시에 유행하던 곡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혹자는 폴이 존 레논의 기타를 치지 못했을 거라 주장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정말 그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폴과 존은 나중에 밴드 생활을 하면서 장난 삼아 서로 기타를 바꾸어

 어색하나마 연주를 하곤했다고 한다. 야구로 치자면 그들은 스위치 히터였던 셈이다). 폴의 노래에 존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폴이 다양한 악기 연주와 작곡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사숙고한 끝에 폴에게 쿼리맨 가입을 제의했고, 이때부터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컴비 작곡가 레논-매카트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누가 곡을 만들던 간에 '레논/매카트니'라고 표기하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은 비틀즈가 해산할 때까지 지켜졌다.

 이렇게 존과 폴은 서로 죽이 맞아서 엄청난 양의 습작을 해서 작곡 실력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악기 연주력은 이렇다할 발전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스쿨버스 안에서 만나 친해진 폴의 1년 후배인 조지 해리슨이 이듬해 쿼리맨에 가입하게 된다.

당시 조지 해리슨의 기타 실력은 프로급이었던 지라 퀴리맨은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버그라운드(그래봤자 리버풀 클럽가이지만)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다.

#4 지옥에서의 한철 - 혹독했던 함부르크 시절

리버풀 클럽가에서 연주를 하던 쿼리맨은 이름을 실버 비틀즈(Silver Beetles)라 고친 후 고생을 작정하고 함부르크에 가서

예상대로 죽도록 고생을 한다. 1960년과 '61년 사이의 함부르크 생활에서 비틀즈는 별의별 레퍼토리를 다 연주하는데

이것이 이후 비틀즈의 다양한스타일의 음악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하루에 보통 8시간 연주는 기본이었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해도 리드 보컬이 혹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하모니를 넣어서 리드 보컬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론 역시 비틀즈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다.

이 시기의 비틀즈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비디오로 출시된 그들의 전기 영화 <백비트(Backbeat)>를 보면 된다.

실제 비틀즈와 비슷한 사람들을 캐스팅해서 찍은 이 영화는 초기 비틀즈의 베이시스트였던 존 레논의 친구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 시기 비틀즈는 5인조로 존, 폴, 조지 그리고 스튜어트와 드러머 피트 베스트였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스튜어트는 이 시기에 독일인 사진작가 아스트리드와 사랑에 빠져

원래 자신의 꿈이던 화가로 전향하지만 얼마 못 가 뇌일혈로 사망하게 된다.

잠시, 백 비트에 관하여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 한 토막.

폴 매카트니 : 영화에서 'Long Tall Sally'를 부르는데... 이건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건 제 레퍼토리거든요. 이건 말이에요.

엘비스가 'Anyone Who Had A Heart'를 부르는 거나 디온 워윅이 'Heartbreak Hotel'을 부르는 거랑 같은 겁니다.

어쨌든 스튜어트가 밴드를 떠나자 자연히 베이스가 공석이 되었고 그 자리를 폴 매카트니가 떠맡게 되었다.

조지는 리드 기타리스트였기 때문에 베이스 자리는 존 아니면 폴이 맡아야 했는데, 존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죽 해왔기 때문에

베이스를 치기 싫어해서 피아노와 기타를 오가던 폴이 어쩔 수 없이 베이스를 맡아야 했다고 한다. 폴은 이 시기부터

죽 바이올린 모양의 호프너 베이스를 사용했는데,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폴 매카트니의 후광으로 인해 꾸준히 팔리고 있다.

 폴은 베이스가 튀는 악기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기피했지만, 나중에는 베이스가 맘에 들어 비틀즈 시절 동안

 다양한 주법을 선보였다.

다시 그의 인터뷰 한 토막.

폴 매카트니 : 우리는 모두 튀고 싶어했어요. 근데 베이시스트는 뚱뚱해서 뒤에서 묵묵히 연주하는 그런 거잖아요.

우린 서로 하기 싫어했어요. 그러면 여자들한테 멋있게 보이지 않잖아요.

그는 코드 진행에 따라 근음 위주로 연주하던 고전적인 연주법에서 탈피하여, 멜로디어스한 리프와 코드에서 벗어나는 진행 등을

선 보였다. 그의 이러한 플레이는 윌 리, 빌리 시언, 스탠리 클락 같은 유명한 베이시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 운명적인 만남 2 - 리버풀 캐번 클럽

다시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캐번 클럽에 고정 출연을 하게 된다. 이들은 이미 그 지역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들이 소문은 리버풀에서 큰 음반 가게를 하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들어가 1961년 11월 어느 날에 그들을 보러 캐번 클럽에

오게 된다. 그들의 다이내믹한 연주에 홀딱 반한 브라이언은 그들의 매니저가 되어준다. 브라이언은 비틀즈를 데뷔시키기 위해

바쁘게 뛰어 다녔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기대했던 영국의 유수 레이블 <데카(Decca)>에서마저

오디션에서 그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이크 스미스(데카 레코드의 A&R) : 기타 밴드는 별 볼일 없어.

데카 레코드의 이러한 실수는 후에 팝 역사상 가장 큰 오판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실망하지 않고

그들을 EMI의 서브 레이블 소속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에게 데리고 갔다. 조지 마틴은 그들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고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의 조건은 드러머 피트 베스트를 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피트 베스트는 밴드를 떠나고

그 자리를 행운의 사나이 링고 스타가 채우게 되었다. 링고 스타는 당시 상당히 인기 있었던 드러머로 비틀즈와는 함부르크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리고 밴드 이름에서 '실버'를 빼고 또한 스펠링을 바꿔 비틀즈(The Beatles)로 확정지었다.

한편, 캐번클럽은 비틀즈가 무명 시절에 무려 281회나 공연을 했을 만큼 그들에게 유서 깊은 장소이다.

 이곳은 비틀즈로 인해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며 이어지고 있다. 지난 해 12월 폴 매카트니는 36년만에 캐번 클럽에서

로큰롤 콘서트를 가졌는데 무료로 배포되는 티켓을 구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이 표를 주면 몸을 바치겠다는

 제의(?)를 노골적으로 해서 화제가 되었다.

#6 신화의 시작 - 애비 로드 스튜디오

비틀즈는 조지 마틴의 지휘 아래 1년 가량 데뷔를 위한 피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나중에 유명해진

'이 올바른 표현인 듯)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첫 싱글 'Love Me Do'를 녹음했다. 이들은 이 곡을 1962년 10월에 발표하는데

 이 싱글은 UK 차트 20권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그 뒤에는 비틀즈를 차트에 한 순위라도 더 높이 올리기 위한

 브라이언의 작전(?)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음반 유통을 훤히 꿰고 있던 브라이언의 비틀즈 싱글 '사재기'였다.

비틀즈는 그해 말에 마지막으로 함부르크에 가서 스타 클럽에서 13일간 공연을 가지는데,

이것은 올해 [1962 Live At The Star Club In Hamburg]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다.

데뷔 싱글이 성공을 거두자 두 번째 싱글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조지 마틴에 의해 'Please Please Me'로 결정되었다.

 원래 이 곡은 느린 템포의 곡이었는데 조지 마틴의 조율에 의해 경쾌하게 바뀌어 그들의 최초의 넘버원 히트곡이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가 1963년 4월에 발표되었다. 불과 9시간만에 레코딩을 끝마쳐

그들이 '확실하게 준비된 밴드'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이 앨범은 동명 타이틀곡과 함께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앨범에는 나중에 티파니가 리메이크하기도 한 경쾌한 로큰롤 넘버 'I Saw Her Standing There'를 비롯하여

 'Love Me Do', 'Please Please Me', 'Do You Want To Know A Secret' 등의 히트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 존은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줄리안 레논(Julian Lennon)을 낳았다. 비틀즈의 히트곡 'Hey Jude'의 모델이기도 한

줄리안 레논은 1984년 [Valotte Atlantic]으로 데뷔했으며 1998년 [Photograph Smile]까지 모두 5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비틀즈는 이 인기에 힘입어 같은 해에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를 같은 해 말에 공개한다. 'She Loves You'와

'All My Loving' 그리고 척 베리의 고전 'Roll Over Beethoven'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Meet The Beatles]로

발매되어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한다.

#7 브리티시 인베이전 - 6개 앨범의 융단 폭격

미국에서 최초의 히트곡은 'I Wanna Hold Your Hand'였다. 이 노래가 빌보드지에서 1위를 하자 그들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인기 프로였던 에드 설리번 쇼에 3주 연속으로 출연하면서 콘서트를 펼쳤다.

미국의 비틀즈 열풍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발매하는 싱글마다 1위를 차지하다 보니 차트 1위부터 5위까지 비틀즈의 곡이

 올라있을 정도였다. 소위 오빠 부대라 일컬을 비틀매니아(Beatlemania)가 그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그들이 덮고 잤던 담요가 조각조각 나뉘어 팔리기도 하고, 그들의 목욕한 물을 병에 담아 팔자는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모두 비틀즈와 같은 헤어스타일에 그들과 같은 복장을 차려입었다.

미국에서의 열풍이 어느 정도였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1964년 한 해 동안 비틀즈의 앨범이 6장이나 발매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보다 1년 늦게 데뷔한 탓도 있지만 팬들의 성화와 비틀즈의 끊임없는 창작열의 결과였다. 비틀즈는 영국 발매반과

미국 발매반이 약간의차이가 있다. 미국 시장 데뷔 앨범 [Meet The Beatles]가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자 3개월도 되지 않아

 [The Beatles' Second Album]이 선보이며 싱글 커트곡 'She Loves You'가 앨범과 싱글 차트를 점령했고

순회공연 중에 찍은 영화 의 사운드트랙이 6월에 영화와 함께 공개되었다. 그 사이 이미 영국에서 히트했던

 'Can't Buy Me Love'와 데뷔 곡 'Love Me Do'가 미국에서 정상을 차지했고, 영화 주제곡인 'A Hard Day's Night'도 1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3장의 앨범이 모두 1위를 차지했고, 싱글은 5곡이나 넘버 원을 차지했다. 비틀즈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7월 달에는 [Something New]를 발표했고, 11월에는 [The Beatles Story]가 발매되었고 새로운 해로 바뀌기 전에

이들은 영국의 정규 앨범 4집 [Beatles For Sale]의 미국판인 [Beatles '65]를 발표해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싱글 'I Feel Free' 역시 정상을 밟는다. 이로써 비틀즈는 미국 시장(=세계 시장) 데뷔 한 해에 확실하게 미국 점령에 성공했다.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8 음악적인 진화 그리고 완성 -헬프!에서 페퍼 상사까지

1964년에 미국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돌아온 비틀즈는 1965년부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비틀즈의 음악은

기타, 베이스, 건반, 드럼 등의 단순 편성으로 라이브를 염두해 둔 곡들이었다. 또한 보컬도 함부르크 시절부터 애용해 왔던

중첩된 코러스 일색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 이 시점에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65년부터 발표한 [Help!],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ley Hearts Club Band]를 통해서

그들의 변화의 과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의 초기의 순수함과 경쾌함만 가지고 계속 승부했더라면

 신화는 창조되지 못했을 것이다. [Help!]는 비틀즈의 두번째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Help!', 'Ticket To Ride', 'Yesterday' 등

3개의 넘버원 싱글이 나왔다. 특히 20세기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인 'Yesterday'는현악 4중주의 반주 아래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전의 비틀즈 음악과는 다른 위대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발매된 [Rubber Soul]은 그들 최초의 명반으로 일컫는 앨범으로 'Norwegian Wood', 'Nowhere Man', 'Michelle',

'Girl', 'In My Life' 등 명곡들을 대거 수록하고 있다. 이듬 해에 발표한 [Revolver]는 실험성이 한층 더 증폭된 앨범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이 사용된 명곡 'Eleanor Rigby', 'Love To You', 'Yellow Submarine' 같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967년에 발표한 [Sgt. Pepper's Lonley Hearts Club Band]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의 실험이 집대성되고 완성되고 만다.

그들이 좋아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담은 인상적인 재킷의 이 앨범은 대중 음악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해준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고, 무려 113주간이나 차트에 머물렀다.

1965년 초 영화 를 촬영하기 전에 링고가 모린 콕스(Maureen Cox)와 결혼을 했고, 존과 조지는 LSD를 시작했으며

그 와중에 영국 여왕 생신 때 멤버 전원이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1966년에는 조지가 패티 보이드(Pattie Boyd)와 결혼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조지 해리슨의 절친한 친구였던 에릭 클랩튼은 조지의 아내인 패티에게 반해 'Layla'를 만들었고,

 패티는 조지와 이혼하고 에릭 클랩튼과 결혼했다.

뭐니뭐니 해도 이 시기의 최대 해프닝은 존 레논의 실언이었다.

존 레논 : 우리는 예수보다 더 인기가 좋다.나는로큰롤과 기독교 중 어느 것이 먼저 사라질지 모른다.

존 레논의이 실언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기독교 단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는 비틀즈 앨범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그들의 음반과 책들이 불태워졌다. 따라서 비틀즈는

그들의 미국 투어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존 레논은 사과를 해야 했다.

존 레논 : 그건... 비틀즈가 현대 매스미디어를 통해 예수보다 더 잘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를 모독하려 했던 건 아닙니다.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존 레논은 이런 식으로 해명을 했다. 이 시기 존 레논에게는 그의 인생을 바꿀만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노 요코와의 만남이었다.

#9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만남 - 불행의 전조

존 레논과 오노 요코와의 만남은 그의 비틀즈 생활은 물론이고, 이후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1966년 레논은 우연히 미국에서 건너온 일본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그는 갤러리를 구경하다가 사다리 위에 있는 망원경을 발견하고는 올라가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는 단지 'Yes'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존 레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는 바보가 된 느낌을 받았는데

그가 생각한 전위예술이란 피아노를 망치로 부수는 것 같은 주로 '반대'와 '부정'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스'는 그에게 매우 신선했다. 그래서 그는 사과와 못들로 둘러싸인 그 장소에 얼어붙은 듯 서 있어야 했다.

거기에는 '망치로 못을 박으세요'라는 글씨가 씌여 있었다.

존 레논 : 못을 박아도 될까요?
오노 요코 : 안되는데요. 행사는 내일부터거든요.

그것을 보고 갤러리 주인이 황급히 다가와 오노 요코에게 말했다.

주인 : (눈치보며) 박아보라고 해. 저 사람 부자라서 그 작품을 살 지도 몰라.

오노 요코 : (존 레논에게) 좋아요. 대신 5실링을 내세요. 제가 가짜로 5실링을 드릴테니까 가짜로 못을 한번 박아 보세요.

순간, 존 레논은 바로 이 여자라는 감이 왔다고 한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필이 꽂힌 것'인데 필자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으로 그들은 코드가 서로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10 해체로 가는 길 - 'Magical Mystery' 투어에서 'Let It Be'까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그들은 '페퍼 상사'로 음악적으로 정상에 섰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운의 시작이었다.

 비틀즈를 지금까지 있게 하는데 정신적인 지주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Sgt. Pepper Lonely Heart Club Band]가 한창

 뜨고 있을 무렵인 '67년 8월에 약물과용으로 죽었다. 비틀즈에게 그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비즈니스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개성의 소유자들인 비틀즈 멤버들을 트러블 없이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비틀즈 전면에 부상한 인물이 바로 폴 매카트니였다. 비틀즈 초기부터 존 레논과 쌍두마차를 이루며 밴드를 이끌어

 오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게 중심이 폴 쪽으로 기울어졌고, 결정적으로 '페퍼 상사' 앨범 때부터 음악적인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 그래서 브라이언 죽음 뒤에 사사건건 앞에 나서는 폴을 다른 멤버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폴은 1967년에 TV영화 를 기획하여 제작 전과정에 개입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혹평을 받게 되었다.

사운드 트랙은 'Hello Goodbye', 'Penny Lane', 'All You Need Is Love'의 넘버원 곡들로 인해 체면을 건졌지만,

영화는 졸작으로 비틀즈 최초의 실패로 기록된다. 이 때문에 멤버들은 폴을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다. 존은 오노 오코와 사귀면서 비틀즈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노와 음악 작업을 함께 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개인적으로 음악 작업을 했다.

그러다 다시 이들은 새 앨범 작업을 하기 위해모였는데 수록곡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서로 작업을 해온 결과물들을

 양보하지 않아 도저히 한 앨범에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비틀즈의 앨범에는 폴과 존의 작품 위주로 실렸고,

조지의 것은 한 앨범에 한 곡 정도 실렸기 때문에 조지의 불만이 가장 컸었다. 존과 폴의 경우도 서로의 곡을 양보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명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우는 1968년작 [The Beatles]는 두 장짜리 더블 앨범으로 발표되어야 했다.

이 앨범은 멤버들의 능력들이 하나로 결집된 전작과는 달리 멤버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앨범이 되어

그 자체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앨범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멤버들 간의 골을 깊어져만 갔다.

그 해 말에 존은 신시아와 이혼을 했고,1969년 초에는 오노 요코가 이혼을 했다. 그리고 3월 달에는 폴이 린다 이스트만과

몰래 결혼을 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존도 오노 요코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새해 벽두에 비틀즈 멤버들이

만화 캐릭터로 등장한 영화 <옐로 서브마린>이 공개되었고, 동명 타이틀의 사운드 트랙도 몇 곡의 신곡을 포함시켜 발매되었다.

폴은 밴드를 다시 뭉치게 하려고 1966년 이후로 중단되었던 공연을 제의했지만 멤버들이 반대를 했다.

그래서 그는 초창기 스타일의 앨범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것은 멤버들이 받아들여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비틀즈는 그들의 레코딩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기로 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멤버들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고 말았다. 게다가 그 영화에는 오노 요코에게 집착하는 존과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폴, 그리고 그들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조지와 링고의 불만 등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결국 모든 작업이 끝나고 그들은 'Get Back'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발표하려 했으나 멤버들의 의견 차이와 비즈니스적인 문제로 인해 발매되지 못했다.

다음은 훗날 존 레논이 인터뷰에서 밝힌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코멘트이다.

기자 : 영화 를 봤을 때 어땠습니까?
존 레논 : 슬펐습니다. 그건 폴에 의한, 폴을 위한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죠. 사실 그게 비틀즈 해산의 중요한 원인입니다.

 당시 우리는 지겹도록 폴의 들러리를 서야 했습니다. 브라이언이 죽은 뒤부터 그런 일들이 벌어졌지요.

1969년 여름 비틀즈는 마지막 앨범을 만들기 위해 조지 마틴과 함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 모였다.

서로들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한 탓인지 이렇다할 트러블 없이 순조로운 협업으로 앨범을 완성했다.

그들의 마지막 스튜디오 작업의 결과물인 [ABBEY ROAD]는 '페퍼 상사'에서의 팀워크와 '화이트 앨범'에서의 개개인의

돌출된 능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걸작이 되었다. 당연히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으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앨범의 성공과는 별개로 비틀즈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해 가을 존 레논은 플라스틱 오노 밴드 데뷔 공연을 가졌으며, 조지도 솔로 앨범 [Wonderwall Music]을 발표했고,

폴 역시 영화 음반 [Family Way]를 내놓았고, 링고는 영화배우 활동을 했다.

폴 매카트니는 1970년 4월 10일에 더 이상 비틀즈를 지탱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탈퇴 선언을 했다.

그리고 비틀즈는 10년이 채 못되는 짧은 활동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한달 후 보류 중이던 [Get Back] 앨범은 타이틀이 비틀즈의 해산과는 어울리지 않아 [Let It Be]라는 타이틀로 공개되었다. 'Get Back', 'Let It Be', 'The Long And Winding Road' 등의 주옥같은 넘버 원 곡들을 담은 이 앨범은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은 조지 마틴이 프로듀서를 맡지 않은 유일한 정규 앨범으로 필 스펙터가 제작을 담당했다.

#11 남겨진 이야기들 - 솔로 활동과 편집 앨범들

조지 해리슨은 1970년 [All Things Must Pass]를 필두로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수록곡인 'My Sweet Load'는 싱글 차트1위를 기록했다.

1987년 [Cloud Nine]에 이르기까지 10여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90년대 이후에는 일본에서의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을 뿐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한 때 표절 시비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비틀즈 시절에 맘껏 발휘하지 못했던

실력을 솔로 앨범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링고 스타는 비틀즈 시절에는 음악적으로 가장 취약했지만 정작 솔로로 나서서는 누구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과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는 음악 외에도 영화나 TV 프로그램 패널, 그리고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솔로 앨범은

1970년 [Sentimental Journey]을 필두로 지난해 [I Wanna Be Santa Claus]에 이르기까지 20장에 달하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은 1973년에 발표하여 빌보드 앨범 차트 2위까지 올랐던 [Ringo]였다.

그는 링고가 일본어로 읽으며 사과라는 뜻이라 일본기업의 사과 주스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폴은 비틀즈 해산 이후 자신의 집에서 원 맨 밴드 형식으로 녹음된 솔로 앨범 [McCartney]를 발표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1971년부터는 아내 린다 매카트니와 함께 윙스(Wings)를 결성하여 다수의 차트 넘버원 앨범과 함께

70년대를 풍미했다. 1980년에 폴은 다시 솔로로 전향하며 다시 집에서 원 맨 밴드 형식으로 만든 앨범 [McCartneyⅡ]를 발표했다.

 이후 스티비 원더와 함께 한 'Ebony & Ivory'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90년대에 들어서 [Standing Stone]과

 같은 클래식 작품집을 내는가 하면, 지난 해에는 초창기 로큰롤 스타일을 들려준 [Run Devil Run]을 발표하며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을 과시했다.

한편, 존 레논은 음악 활동 외에 신좌파 운동과 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68년 오노 요코와 충격적인 누드로 재킷을 꾸민 [Two Virgins]를 필두로 1969년에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해

 1970년에 [John Lennon/Plastic on-o Band]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솔로로 1971년 [Imagine],

 1974년 [Walls and Bridges] 등 넘버 원 앨범과 함께 다양한 수작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1975년 [Rock 'n' Roll] 이후

 5년만인 1980년에 컴백 앨범 [Double Fantasy]를 발매하지만 그 해 12월 8일 그의 광적인 팬을 자청하는 마이크 채프먼에 의해

 아파트 앞에서 총으로 살해되었다. 올해가 바로 존 레넌 사망 20주기가 되는 해이다(삼가 그에게 명복을...).

존의 사망으로 그 동안 꼬리를 물며 계속되던 비틀즈 재결성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3명의 멤버들은

1995년 다시 모여 존 레넌이 죽기 전에 만들어 두었던 데모 곡인 'Free As A Bird'에 하모니와 악기 연주를 덧씌워

 팬들이 그토록 바라던 재결성(?)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이 곡은 [Anthology] 시리즈의 일환으로 제작되었고,

그 이전에 비틀즈의 BBC 방송국 세션을 모은 [Live At The BBC]가 1994년에 발표되었다. 이 라이브 앨범이 성공을 거두자

1995년부터 다음 해까지 각각 더블 앨범으로 제작된 앤솔로지 시리즈 3개가 연속적으로 발매되었다. [AnthologyⅠ]은

 쿼리맨 시절부터 비틀매니어 시절까지의 시기의 세션들을 모았고, [AnthologyⅡ]는 [Help!] 시절부터

 [Magical Mystery Tour]까지 음악적 완성기를 다루고 있으며, [AnthologyⅢ]는 화이트 앨범 때부터

[Abbey Road]까지 분열시기의 세션을 모은 것이다.

#12 에필로그 - 비틀즈의 뉴 밀레니엄 베스트 앨범 [1] 리뷰

비틀즈는 약 8년간 활동하면서 빌보드 앨범 차트에 14장의 앨범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싱글은 'I WannaHoldYour Hand'부터 'The Long And Winding Road'에 이르기까지 무려 20곡이나 1위에올려놓았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비틀즈의 베스트 앨범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붉은 색 재킷에 [1962-1966]이라 명명된

초기 베스트를 모은 더블 앨범과 푸른 재킷에 [1967-1970]이라 는 타이틀이 붙은 후기 베스트를 모은 더블 앨범이 그것이다.

전자는 빌보드 차트 3위를 기록했고, 후자는 1위를 기록해 비틀즈의 위용을 새삼 떨쳤다.

하지만 올해 발매된 [1]이 아마도 비틀즈 베스트 앨범의 백미 중의 백미이다. 사실 많은 아티스트들의 베스트 앨범이 있어왔지만

비틀즈의 이번 앨범과 같은 베스트 앨범을만든 적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머라이어 캐리가 차트 1위곡 위주로 베스트 앨범을

꾸미긴 했지만 그것은 비틀즈의 이번 앨범에 비하면 함량 미달이 아닐 수 없다. 세상 그 어떤 뮤지션이 이렇게 강력한

 베스트 앨범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비틀즈의 넘버 원 싱글은 미국에서 20곡이지만 UK 차트와 합치면 27곡이 넘는다.

수록곡은 1964년 5월에 미국에서 1위를 차지했던 'Love Me Do'로 시작해서 1970년 6월에 마지막으로 1위를 차지했던

 'The Long And Winding Road'로 끝난다. 이번 베스트 앨범은 CD의 한계 시간이 80분에 가까운 79분 12초의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다. 이 시간에는 27곡 밖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다른 넘버 원 곡인 'Please Please Me'와 같은 싱글은 실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이 앨범은 그냥 때가 되어 나온 그저 그런 베스트 앨범이라기보다는 아직도 비틀즈를 넘어서는 밴드가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인 셈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밀레니엄에도 당분간 이런 기록을 만들 수 있는 뮤지션이 있으랴

하는 의미심장한 거만함(?)까지 느껴지는 앨범인 것이다. 알찬 앨범이라는 말을 가끔 쓰지만

 이것은 그 정도를 넘어선 꽉 찬 완벽한 앨범인 것이다.

출처 : FREE-ZONE
글쓴이 : gungwoo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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