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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사비니 여인들의 중재」/「테니스 코트의 선서」|

Bawoo 2014. 6. 25. 00:40

 

1794년 7월 28일, 이른바 ‘공포정치’의 핵심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함에 따라 그와 친했던 다비드도 처형의 위기에 몰리지만 간신히 죽음은 피하게 됩니다. 다비드는 살기위해서 로베스피에르의 열정에 자신이 속았다는 변명을 하는 다소 비겁한 행보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5개월 동안 감옥에서 생활하는데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립니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자화상」, 1794년

 

81x6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는 다시 자유로워진 후에 파리 근교 생퀭에 있는 처제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1799년에 대작을 그리는데 바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가 그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기 전에 푸생의 그림을 먼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푸생은 고전주의 그림을 그렸고 다비드에게 영향을 준 화가입니다.

 

 

 

 

니콜라스 푸생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735년

 

154.6x209.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로물루스가 건국한 로마에는 여인의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여자가 부족하다는 것은 군대에 필요한 인구를 안정적으로 갖추기 어렵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자국의 인구증가를 위해 이웃의 여인들을 납치하기로 하고 사비니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기습을 해서 사비니 남자들을 쫒아내고 여인들을 강제로 납치합니다. 그림에서 로물루스는 빨간 망토를 들어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아래에서는 납치당하는 여인들과 납치하는 로마인들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사비니 남자들로 아수라장입니다. 저 멀리에서는 사비니 남자들이 로마인들에게 쫒겨나고 있으며 한 여인은 그쪽을 바라보며 구해달라는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비니 남자들은 3년 동안 수의를 입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년

 

385x5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는 사비니 남자들이 자신들의 여자들을 되찾기 위해 로마로 쳐들어간 장면을 그렸습니다. 전면에서, 두 아기가 이리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창을 상대에게 겨누고 있는 사람이 로물루스입니다. 맞은편에는 사비니의 타티우스가 대적하고 있죠. 그러나 여인들은 이미 로마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아기를 낳아 기르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싸움을 말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들어 사비니 군사들에게 보이며 싸움을 말리고 있고 또 어떤 여인은 타티우스의 다리를 붙잡고 말리고 있네요. 아마 전에는 타티우스의 여자였겠죠. 가운데 무릎을 꿇고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아기들을 보호하고 있고 뒤의 늙은 여인도 가슴을 내보이며 차라리 자신을 찌르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여인은 타티우스의 딸 헤르실리아인데 용감히 가운데 서서 양팔을 벌린 채 싸움을 말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로물루스와 결혼하여 이미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 뒤의 군인들도 헬멧을 벗어 올려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편, 손가락을 입에 물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아기가 참 인상적인데 이 아기를 보면 이 싸움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아기가 평화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은 서로 화해하고 한 민족이 됩니다.

 

 

 

다비드는 분명 이 그림을 통해 뭔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혁명이 시작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간 그 공포스런 시기에 자신도 주역으로 참여했으나, 이제는 화해하고 평화를 찾고 싶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은 아닐까 합니다.

 

 

 

한편, 다비드는 이 그림을 5년동안 유료로 전시하며 많은 돈을 벌게 되어 부유해집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등장에 그의 야심은 또다시 꿈틀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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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선서」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국가는 빚더미에 올랐고 신흥 중산계급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게 됩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다비드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는 1790년 9월에 자코뱅 당원이 되며 새로 발족한 아트 코뮌의 지도자로 선출됩니다. 혁명기간 중에 그는 혁명의 정신을 담거나 혁명의 와중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소재로 몇 개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혁명의 도구로 이용되어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선서」, 1791년

66x101.2cm, 베르사이유 궁전 박물관

   

이 그림은 자코뱅당의 의뢰로 그린 것입니다. 실질적인 프랑스 대혁명의 행동은 바로 저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국가가 파산에 이르고 정치·사회적 동요가 심해지자 루이16세는 1789년 5월 5일에 삼부회를 소집합니다. 이 삼부회의 구성은 성직자, 귀족, 제3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중 제3신분 의원들을 중심으로 영국식 국회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궁정 테니스 코트에 모여서 성문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임을 선서하는데, 다비드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작품은 미완성이지만 당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과 감격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중앙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장 실베스트르 베일리를 향해 열렬한 지지와 동참의 손짓을 하고 있고 창문을 통해 일반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펄럭이는 커튼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역동적인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베일리 앞에서 껴안고 있는 세명은 수도원 성직자, 일반 성직자 그리고 개신교 성직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이중 왼쪽 수도회 제의를 입은 사람은 당일 참석하지는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간 오른쪽에서 두손을 가슴에 얹고 감격하고 있는 사람이 로베스피에르입니다.

다비드는 1792년 9월에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는데 이를 계기로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 막강한 정치권력자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그리고 1793년 1월, 국민공회는 1791년 6월에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붙잡힌 국왕 루이16세의 처형을 결의합니다. 다비드도 찬성표를 던졌으며 왕은 결의 이틀 뒤에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루이 16세의 죽음」, 1793년, 컬러동판화

30.3x45.2cm, 까르나발레 박물관, 프랑스

 

루이16세의 사형을 집행한 사람은 샤를 앙리 상송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형집행관을 해왔는데 그 집안의 기록에 따르면 왕의 처형이 결정된 후 상송의 집에 어느 한 젊은이가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는 자신이 왕 대신 처형되겠다고 하며 왕과 같은 옷을 입고 처형장 주변에 있다가 사람들의 눈을 속여 바꿔치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서 잘 달래어 돌려보냈다죠. 상송은 자신이 국왕을 처형해야 한다는 괴로움으로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 당일 상송은 그의 두 동생들과 함께 만약 어떤 결사대에 의해 국왕 구출계획이 실행될 경우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왕이 도망칠 길을 열자고 결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기요틴의 칼날은 왕의 목을 자르게 됩니다.(아다치 마사카쓰의 「왕의 목을 친 남자」에서, 최재혁 옮김)

 

다비드는 혁명시기 정치활동을 하면서 혁명의 대의를 위해 죽은 세명의 혁명 순교자 그림을 그립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르 펠레티에에게 존경심을 표하다」, 1793년,

잉그레이빙, 11.5x18.6cm

 

르 펠레티에는 귀족으로서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인데 저녁식사 도중에 왕의 호위대였던 파리스에게 살해당합니다. 다비드는 그림으로 그를 혁명의 순교자로 기록합니다.

이 작품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데, 군주제를 지지했던 르 펠레티에의 딸이 작품을 구입한 후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165x128cm, 벨기에 왕립미술관

 

 

자크 루이 다비드

「바라의 죽음」, 1794년

119x156cm, 아비뇽 칼베 미술관, 프랑스

 

조제프 바라는 1793년 12월에 말 두필을 빼앗으려는 왕당파 당원들에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13살 소년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라의 죽음을 혁명에 이용하기 위해, 바라가 왕당파의 요구대로 “왕이시여 만수무강하라”라고 외치지 않고 “공화국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치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각색하여 널리 알렸습니다. 이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겨졌는데 다비드는 바라를 누드로 그리고 매우 여성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아마 순수한 소년의 죽음을 고결한 혁명의 정신과 연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훗날 빅토르 위고가 그의 작품 ‘레 미제라블’에서 이 바라를 모티브로 가브로쉬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 자료 출처: http://cafe.daum.net/wish-life/J1ls/443/릴리 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년 8월 30일 ~ 1825년 12월 29일)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속하는 유력한 프랑스 화가로, 이 시대의 탁월한 화가로 평가

받는다.

파리에서 출생하였고,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1774년에는 로마 상을 받았다. 이듬해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미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역사화를 그려

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는 한편, 근대 회화의 시조가 되었다. 다비드는 이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프랑스 혁명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고, 프랑스

공화국하에서 사실상 예술의 독재자 역할을 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했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문화재 보호에 앞장섰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렸으나 뒤에 국외로 추방되었다.

특징

1780년대 역사화에서 그의 지적인 특징은 로코코의 경박함에서 고전적인 엄숙함과 엄정함으로 취향의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이 변화는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시기의 도덕적 풍조와 조화를 이룬다.

이 시기에 그는 베네치아적인 색채 사용으로 유명한 앙피르 양식(Empire style)을 발전시켰다. 다비드는 많은 학생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는 19세기 프랑스 예술에서 (특히 아카데미적인 파리 살롱 회화에서)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 출처: 위키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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