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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프랑스의 우울

Bawoo 2014. 10. 14. 22:33

올해 노벨 문학상은 프랑스에 돌아갔다.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다. 소설 몇 편 읽은 알량함으로 작가를 논하는 만용을 용서한다면 나에게 모디아노는 우울, 프랑스어로 ‘모로지테(morosite)’의 작가로 각인돼 있다. 희망이 안 보이는 음울하고 침체된 상태가 모로지테다.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날씨 같다고나 할까. 우울한 모디아노의 수상 소식이 우연 같지 않게 느껴질 만큼 지금 프랑스는 우울하다.

 잠시 프랑스에 다녀왔다. 모처럼 다시 본 프랑스는 더 이상 내가 알던 프랑스가 아니다. 두꺼운 만년필처럼 생긴 전자담배를 목에 걸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과 발 디딜 틈 없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보란 듯이 전자담배 연기를 품어대는 중년남자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프랑스는 이제 흡연자의 천국이 아니다. 실내금연은 우리보다 훨씬 엄격하다. 최근에는 호주처럼 담뱃갑에 온갖 흉측한 사진을 싣는 법안까지 발의됐다. 담배 구걸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정도로 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현재는 과거보다 우울하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우울할 거라는 불안감이 프랑스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재정적자와 멈춰선 성장, 두 자릿수 실업률은 프랑스의 우울을 대변하고 있다. 누적 재정적자는 2조 유로(2700조원)로, 국내총생산(GDP)의 95%까지 불어났다. 실업률은 11%에서 꿈적도 않고 있다. 르몽드는 프랑스의 경제 상황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는 독일과 유럽연합(EU)의 압력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내년도 사회보장 지출을 500억 유로(67조5000억원)나 삭감하는 긴축예산안을 편성했다. 이에 반발하는 각계각층의 분노가 대규모 파업 사태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불만의 가을과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에어프랑스 조종사들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저가항공사인 자회사 소속 조종사 임금 삭감을 추진하는 데 반발한 조종사 노조가 들고 일어나 에어프랑스는 2주 동안 발이 묶였다. 그에 따른 손실만 하루 2000만 유로(270억원)에 달했다. 재정지출 삭감에 따라 수입 감소가 예상되는 교원과 공무원, 공공기관 근로자는 물론이고 정부 시책에 불만을 가진 약사, 의사, 간호사, 공증인에 판사들까지 파업 대열에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지지율은 더 이상 떨어질 게 없는 수준까지 하락했다. 지지율 14%는 프랑스 제5공화국 사상 최저 기록이다. 개혁을 약속했지만 이룬 건 없이 여배우와 염문이나 뿌리고 있는 그에 대해 사회당 지지자들조차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프랑스인을 위한 프랑스’를 내세운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약진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14명의 주요 지자체장을 탄생시킨 데 이어 최근에는 처음으로 2명의 상원의원까지 배출했다. “이제 남은 건 엘리제(대통령궁)뿐”이라는 그들의 호언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정치권은 신뢰를 잃었다. 사리사욕과 권력에 탐닉하는 무능한 집단이란 인식이 팽배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씨가 안 먹히는 분위기다. 특히 정부는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파업공화국’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프랑스는 2008년 한 해 동안 파업 참가자의 총 근로일수 기준으로 140만 일(日)의 손실을 기록했다. 반면 같은 기간 독일은 13만1000일에 불과했다. 프랑스병을 고치려면 무엇보다 노사관계 개혁이 급선무지만 올랑드 정부는 손도 못 대고 있다.

 프랑스 동쪽 끝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서 라인강을 건너면 바로 독일이다. 다리에 국경 표시 같은 건 아예 없다. 걸어서도 건너고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건너기도 한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오는 사람들보다 프랑스에서 독일 쪽으로 가는 사람이나 차량이 훨씬 많다. 스트라스부르와 연결되는 독일의 작은 도시 켈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담배가게다(사진). 프랑스에선 말버러 한 갑이 7유로(9500원)지만 독일은 5.4유로(7300원)다. 생필품도 대체로 독일이 싼 편이다. 시내버스나 자동차를 타면 20분도 채 안 걸리기 때문에 켈은 장을 보러 온 프랑스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프랑스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희망을 잃은 우울한 프랑스 밖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독일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호주로 떠나고 있다. ‘개혁 부전증(不全症)’에 걸린 프랑스는 정체를 넘어 침체 상태다. 모디아노의 노벨상 수상은 우울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작은 위로인지도 모르겠다.

* 출처: 중앙일보-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