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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Bawoo 2014. 11. 11. 23:46

허먼멜빌 [Herman Melville]

 

 

Herman Melville 1860.jpg

 

1819. 8. 1 미국 뉴욕 시~ 1891. 9. 28 뉴욕 시.

미국의 소설가·시인.

개요

걸작 《백경》(모비 딕 Moby Dick〉(1851)을 비롯해 바다를 소재로 한 소설들로 특히 유명하다.

가계와 성장기

멜빌의 가계와 어린시절의 체험들은 그의 예술적인 시각의 저변에 깔린 갈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앨런 멜빌과 마리아 갠즈보트 멜빌 사이에서 4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뉴욕에 정착한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 출신들로서 미국독립전쟁은 물론 경쟁이 치열한 새 나라의 상업과 정치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 토머스 멜빌 대령은 1773년 '보스턴 차(茶) 사건'에 가담했으며 뒤에 뉴욕의 수입상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피터 갠즈보트 장군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친구였으며 영국과 싸울 때 뉴욕 주의 북부지방인 스탠윅스 요새를 방어해낸 지휘관으로 유명했다.

1826년 아버지 앨런 멜빌은 아들에 대해 "말이 늦고 이해력도 다소 느린 편이나…… 유순하고 붙임성이

있는 성격"이라고 썼다. 그해에 성홍열에 걸려 시력이 나빠졌으나 남자고등학교까지 다녔다. 1830년 가업이었던 수입업이 망하자 가족은 올버니로 돌아왔고 그는 잠시 올버니 아카데미에 다녔다. 1832년 앨런 멜빌이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극도로 어려웠다. 장남 갠즈보트가 가족을 책임지게 되었고 아버지가 하던 펠트와 모피사업을 넘겨받았다. 멜빌은 2년 동안 은행원 생활을 했으며 몇 달 동안은 매사추세츠주 피츠필드에 있는 아저씨 토머스 멜빌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형과 함께 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무렵 멜빌의 가족은 가문의 성의 철자를 'Melvill'에서 'Melville'로 바꾸었다.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멜빌은 1835년 올버니 고전학교에 다녔고, 지역토론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피츠필드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교사생활이 맞지 않아 3개월 뒤 올버니로 돌아왔다.

방황과 항해

멜빌은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젊은시절의 대부분을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한 노력에 바쳤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안정에 대한 추구가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을 이룬다. 그의 방황은 형이 파산해 가족이 랜싱버그(지금의 트로이) 근교로 이사한 1837년에 시작되었다. 안정된 직업을 얻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그는 이리 호 운하사업에 자리를 얻으려고 랜싱버그 이카데미에 들어가서 측량을 공부했다. 그러나 일자리가 생기지 않자 형 갠즈보트는 그에게 1839년 6월 뉴욕을 출발해 리버풀로 가는 무역선 세인트로렌스호의 캐빈 보이 자리를 얻어주었다. 이 여름 항해를 통해서도 선원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시 가족들은 여전히 친척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었다. 힘들게 일자리를 찾다가 교사로 일했으나 학교가 문을 닫아 보수도 받지 못했다. 피츠필드를 떠나 일리노이로 온 아저씨 토머스도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1841년 1월 멜빌은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퍼드에서 출발해 남태평양으로 항해하는 포경선 애큐시넷호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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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6월 애큐시넷호는 지금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있는 마르케사스 제도에 정박했다. 멜빌이 이곳에서 겪은 모험은 다소 낭만적으로 윤색되어 첫 소설 〈타이피족 Typee〉(1846)의 소재가 되었다.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7월에 멜빌과 동료 한 사람은 배에서 도망쳐 약 4개월 동안 식인종으로 알려진 타이피족의 손님이자 포로로 지냈다고 한다. 실제로 8월에 멜빌은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 루시앤의 선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타이피족〉의 이야기가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경험이 멜빌에게 미친 상상적 여파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위험이 도사리는 타이피의 이국적인 계곡을 혼잡하고 공격적인 문명에서 떨어진 목가적인 성역으로 표현했다.

 

멜빌은 포경선의 수입 중 1/120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항해에 수입이 없었고, 반란에 가담해 타히티 감옥에 갇혔다가 곧 도망쳐나왔다. 이 일련의 사건을 토대로 2번째 소설 〈오무 Omoo〉(1847)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가벼운 어조로 반란을 익살스럽게 묘사했으며, 과거에 선의(船醫)였다가 표류자가 된 롱 고스트와 함께 한 섬 여행기를 그린 것이다. 멜빌은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하면서 타히티 원주민들에 대한 식민지 사업과 특히 전도사업의 타락에 반감을 느꼈다. 실제로 이 여행은 1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11월에 그는 매사추세츠 주 낸터킷에서 출항하는 포경선 찰스앤드헨리호(이것이 그가 탄 마지막 포경선이었음)의 작살잡이로 취직했다. 6개월 뒤에 하와이 제도의 라하이나에 상륙해 3개월 이상을 혼자 지내다가 1843년 8월 군함 유나이티드스테이츠호의 보통선원이 되었고 1844년 10월 보스턴에 내렸다.

전성기

멜빌은 형편이 훨씬 나아진 가족과 합류했다. 1844년 대통령선거에서 제임스 K. 포크가 당선한 뒤, 형 갠즈보트는 런던에 있는 미국 공사관의 비서로 임명되어 정치적 명성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당시 가족이 그의 남태평양 이야기를 매우 흥미있게 듣자 용기를 얻어 글로 옮기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타이피족〉은 즉각적인 환영과 동시에 비난을 받았고, 1년 뒤에 나온 〈오무〉 역시 비슷한 반응을 얻었다. 형 갠즈보트는 그가 작가로서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뇌질환으로 죽었다. 가장이 된 멜빌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더욱 글쓰기에 전념했다. 1847년 8월에 매사추세츠 주 재판장의 딸 엘리자베스 쇼와 결혼하면서 한층 어깨가 무거워진 그는 미국 재무부 등에서 공직을 얻으려고도 해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1847년에 3번째 소설 〈마디 Mardi〉(1849)를 시작했고 문학잡지에 평론이나 기타 글들을 고정적으로 기고하게 되었다. 뉴욕에서 새로 사귄 문학가들은 그를 자기 소설 속의 인물처럼 외향적이고 박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았으며, 어떤 작가는 그를 "시가를 문 스페인 사람 같은 눈빛을 가졌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멜빌은 다른 작가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가진 것을 싫어했다. 그의 아내는 겨울에 춥고 불이 없는 방에서 글을 쓰는 등 멜빌의 전혀 다른 면모를 회고한 바 있다. 그는 3번째 책 〈마디〉가 이전 소설들과 다를 것이므로 자기를 〈타이피족〉과 〈오무〉의 작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출판업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일반 대중이나 비평가들 모두가 그 격하고 풍유적인 환상과 다양한 문체들의 혼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소설은 또다른 폴리네시아의 모험처럼 시작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곧 '아름다움과 순수 그 자체'인 일라(Yillah)를 찾는다는 상징적인 탐색에 뛰어들며 그것은 결국 고통과 실패로 끝난다. 이 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 대한 실망을 감추기 위해 그는 곧이어 독자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방식으로 〈레드번 Redburn〉(1849)과 〈하얀 재킷 White Jacket〉(1850)을 썼다. 1849년 10월 멜빌은 〈하얀 재킷〉에 대한 런던 출판업자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 비평가들은 〈하얀 재킷〉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미국 해군의 폐단을 거세게 비판한 점에서 강한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레드번〉과 〈하얀 재킷〉은 많은 점에서 〈타이피족〉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깊은 문제의식과 우수를 담고 있다. 멜빌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참새와 같은 가냘픈 눈빛'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으며, 특히 〈법에는 법으로 Measure for Measure〉·〈리어 왕 King Lear〉의 음산한 대목을 주목해서 읽었다. 이러한 독서는 깊은 공감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그는 전에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던 랠프 월도 에머슨의 초월주의나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낙관주의와는 반대되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또한 1850년 봄에는 인간 내면에 있는 선과 악을 깊이있게 탐구한 내서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 글씨 Scarlet Letter〉를 읽으면서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그해 여름에 멜빌은 피츠필드에 있는 호손의 집 가까이에 농장을 사서 '애로헤드'(Arrowhead)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사람은 이웃해 살면서 마음의 벗이 되었다.

 

멜빌은 출판업자들에게 1850년 가을에 소설을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이것이 바로 〈고래 The Whale〉에서 〈백경〉으로 제목을 바꾼 소설이다. 그러나 탈고가 지연된 것은 농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해야 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호손이 그에게 열어주곤 했던 새로운 전망들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호손과의 교제는 멜빌의 창작력에 불을 붙였다. 멜빌에게 그것은 든든했으며 신비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것으로, '무한한 공감'이었다. 그러나 차갑고 내향적인 성격의 호손에게는 깊은 감정을 그런 식으로 계속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점 사이가 멀어졌고, 1856년 호손이 미국 영사로 있던 리버풀을 방문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들은 거의 낯선 사람들과도 같았다.

 

〈백경〉은 1851년 10월 런던에서 그리고 1개월 뒤에 미국에서 출판되었으나, 처음에는 호평도 수입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딕'이라는 고래를 잡으려다가 결국 고래에 의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줄거리만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고래잡이에 대한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이허브 선장의 도착된 위대함과 피쿼드호의 아름답고도 무서운 항해를 통해 멜빌은 인간 영혼의 다의적인 패배와 승리, 창조적 충동과 파괴적 충동의 융해 등 자신의 보다 진지한 관심사를 극화했다. 그의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멜빌은 보편적인 은유를 찾아낸 것이다. 몇몇 친구들은 그가 미치지 않았는지 걱정할 정도로 세상을 등진 채 은둔하다가, 거의 단숨에 〈피에르 Pierre〉(1852)에 착수했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작품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예술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우울한 사생활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어린시절에 충분히 경험한 가난에 대한 굴욕스러운 반응, 순수함, 성실성에 대한 아버지의 주장 밑에 깔린 위선 등에 대해 쓰고 있다. 어머니는 한때 그의 숭배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녀의 사랑이 지닌 고결함마저도 성애(性愛)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이었다. 〈피에르〉는 이러한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멜빌의 어두운 상상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은유로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출판되자 악평과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쳤다. 불과 33세에 이처럼 고배를 마신 그는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1853년에는 뉴욕출판사의 화재로 그의 책 대부분이 불에 타는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꾸준히 창작에 힘썼다.

 

호손과 그의 작품에 접하기 이전에 구상한 〈이즈라엘 포터 Israel Potter〉는 1855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웬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명료한 문체와 겉보기에 단순한 주제를 갖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글을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퍼트넘스 먼슬리 매거진 Putnam's Monthly Magazine〉에 실린 〈서기(書記)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1853)·〈The Encantadas〉(1854)·〈베니토 세레노 Benito Cereno〉(1855) 등은 점차 그를 사로잡은 물질주의와 인간의 위선에 대해 경멸과 절망을 반영하고 있다. 1856년 기분전환을 위해 유럽과 근동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가 쓴 일기의 가장 강렬한 대목들은 비열한 상업성으로 부패한 미국을 절망에 가득찬 눈초리로 풍자한 〈사기꾼 The Confidence-Man〉(1857)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기꾼〉은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3차례 미국 순회강연을 한 뒤 1860년 쾌속범선 '미티어'(Meteor)의 선장인 동생 토머스와 함께 케이프혼을 항해하려고 했으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만두고 말았다.

말기

시를 쓰려고 소설을 포기했으나 출판전망이 좋지 못하자,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공직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861년 그가 구하던 영사관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남북전쟁이 터지자 해군에 지원했으나 역시 불합격되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시절의 불안정한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장인이 물려준 유산이 다소 도움이 되었고 점차 부담스워졌던 '애로헤드'도 팔았다. 1863년말 가족은 뉴욕 시에서 살게 되었다. 남북전쟁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것을 주제로 첫 시집 〈전쟁물과 전쟁의 양상 Battle-Pieces and Aspects of the War〉(1866)을 자비로 출판했다. 이 시집이 출판된 지 4개월 뒤에 마침내 뉴욕 부두의 세관검사원이 되어 안정된 수입을 얻게 되었다. 건강이 나쁜데도 그는 밤이나 주말, 휴가를 가리지 않고 글쓰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1867년 아들 말콤의 총기자살사건이 일어났는데, 재판부는 이것을 우발적인 사고로 판결했지만 말콤이 죽기 전날 밤 아버지와 다툰 것은 분명했다. 둘째 아들 스탠윅스는 1869년 선원이 되었으나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1886년 샌프란시스코의 병원에서 죽었다. 이처럼 연이은 재난들과 19년간의 세관원 생활로 그의 창작력이 떨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888년 2번째 시집 〈존 마르와 선원들 John Marr, and Other Sailors;With Some Sea-Pieces〉 역시 자비로 출판되었다. 당시 멜빌은 친구들과 친척들의 유산으로 3년째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1889년의 글에 의하면 그는 이 여가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떤 일'들에 바치고 있다고 했는데, 마지막 시집 〈티몰리온 Timoleon〉(1891)도 이때 씌어졌다. 보다 중요한 일은 산문으로 다시 돌아가 마지막 작품인 소설 〈빌리 버드 Billy Budd〉를 완성한 것인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후인 1924년에 출판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명을 쓴 수병 빌리가 분개하여 사악한 선임 위병을 우발적으로 죽인다. 선상폭동으로 위협을 받던 시절이라 빌리는 교수형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악이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므로 빌리는 선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이 작품은 삶과 전적으로 화해한 것은 아니지만 체념한 뒤의 평화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원고는 1891년 4월 19일자로 끝나 있는데, 멜빌은 5개월 뒤에 죽었다. 그의 일생은 행복하지도 않았고 물질적인 면에서 성공하지도 못했다. 1840년대말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죽음은 단 1줄의 사망기사로 끝났다.

 

그의 작품은 자신이 사는 시대와의 갈등으로 인한 내적인 긴장 속에 기만적인 현실과 불안정한 개인의 정체성을 문제시하는 20세기를 예고하는 듯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은 결코 현실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상징들은 〈백경〉에 나오는 죽어가는 고래, 고래등의 지방덩이, 배의 원목 등과 같은 가시적이고 극히 현실적인 사실들에 기초해 있다. 셰익스피어처럼 멜빌에게도 인간은 원숭이인 동시에 만물의 영장인 복합적인 존재이다. 또 세상은 피쿼드호처럼 '하나는 하늘을 똑바로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목표를 향해 지루하게 달려가는 2가지의 상반된 영향'하에 있는 것이다. 멜빌의 승리는 이렇게 자신의 통찰을 끝까지 기록하며 인내한 데 있었다. 그의 작품은 여러 해 동안 무시되어 왔으나, 현대 비평은 그를 미국의 위대한 작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D. E. S. Maxwell 글 >

 

허먼 멜빌과 아내의 무덤

 

허먼 멜빌은 1819년 8월 1일 앨란과 마리아 갠세부르트 멜빌(Allan and Maria Gansevoort Melville) 사이의 셋째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그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인 토마스 멜빌 소령은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피터 갠세부르트(Peter Gansevoort) 장군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와 친했으며 1777년에 스탠윅스 요새를 방어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어린 멜빌을 다소 발달이 느린 아이로 묘사한 바 있듯이, 멜빌은 성홍열로 인해 쇠약해졌고, 그 병으로 인해 시력도 영구적으로 나빠졌다. 멜빌가(家)는 수입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1830년에 파산했으며, 그 뒤에 가족은 뉴욕주 올버니로 이사갔다. 거기에서 허먼은 올버니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 전에는 뉴욕 맨해튼의 콜롬비아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1832년 세상을 떠난 이후, 8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 모두는 허드슨 강이 있는 뉴욕주의 랜싱버그로 이사 갔다. 허먼과 그의 형제인 갠세부르트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그 곳에서 허먼은 1835년까지 있었고, Albany Classical School을 몇 달 동안 다닌 적이 있다.

멜빌의 방랑 기질과 가족의 생계를 스스로 도와야겠다는 소망 때문에, 그는 에리 운하에서 측량사 일거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대신 그의 형이 도움을 주어 리버풀로 가는 뉴욕 여객선의 선실 승무원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배로 항해하여, 런던까지 갔다가 같은 배로 돌아왔다. 이 때의 경험에 기반을 두어1849년 Redburn: His First Voyage가 출판된다.

그 이후 1837년부터 1840년까지 멜빌은 3년간 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성공적인 좋은 한 때를 보냈다.

그 후 멜빌의 가슴에 모험 정신을 되살아나게 해준 것은 Richard Henry DanaTwo Years Before the Mast를 읽게 된 것이었다. 그 책은 1840년 출간되었으며, 그 즉시 인기를 얻었다. 멜빌도 그 시기에 그 책을 접했음이 틀림 없고, 그로 인해 선원이 되는 경험을 하고픈 마음을 키워갔다.

1840년, 그는 태평양행 배를 타고 항해하였다. 후에 멜빌은 그의 인생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열 여덟달 간의 여행을 통해 그는 《모비 딕》을 저서하였다. 1842년 7월, 식인종들과 3주의 동거를 통해 그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인 《타이피 족》(Typee)를 써낸다. 이는 원주민 여인과의 불륜적인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출처: 한국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