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러시아의 작가.
일류 극작가이자 근대 단편소설에서 가장 앞선 거장으로 꼽히며 19세기말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특출한 존재이기도 하다. 걸작으로는 〈갈매기 Chayka〉·〈바냐 아저씨 Dyadya Vanya〉·〈세 자매 Tri sestry〉·〈벚꽃 동산 Vishnyovy sad〉이 있다.
청소년시절
체호프의 아버지는 농노 출신 식료품 잡화상으로 근근히 살아가면서도 신앙심이 두터운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체호프에게 가게 일을 시켰고 그를 자신이 지휘하는 교회 성가대에 들게 했다. 후에 체호프가 작품에 그려낸 어린시절의 경험은 생기 넘치고 흥미진진한 것이었지만 그 기억은 어머니의 다정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 소년들을 가르치는 지방의 한 학교를 잠시 다닌 뒤 타간로크의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0년간 이 학교를 다니면서 당시로서는 가장 훌륭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교과과정은 딱딱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 일색이어서 그는 평생 이 과목들을 싫어했다. 학교를 다닌 마지막 3년 동안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혼자 생활을 꾸려야 했는데, 이는 아버지 가게가 파산하자 새 출발을 위해 식구들이 모스크바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1879년 가을 체호프는 모스크바의 식구들과 합류했고 1892년까지 이곳에 주요기반을 두고 활동했다.
그는 곧 의과대학에 들어가 1884년 의사자격을 얻고 졸업했다. 그무렵 벌써 식구들의 경제적 대들보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형편없는 보수로 고용되어 있었고 저널리스트인 알렉산드르 형과 예술가인 니콜라이 형은 차례로 방랑길을 떠나 거의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구들의 비공식적인 가장이 된 그는 신문·잡지에 기고하거나 희극적 소품을 써서 별도의 수입을 올림으로써 커다란 책임감과 정력을 보여주었으며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기꺼이 부양했다. 이와 함께 꾸준히 의학공부를 하며 바쁜 사회생활을 했다. 체호프는 유머 잡지의 일화 작가로서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888년경 그는 이미 '수준이 낮은' 대중들에게 널리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후기작품을 한데 모은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썼다. 이 과정에서 약 1,000단어로 쓰는 짤막한 희극적 소품을 이미 하나의 작은 예술형식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그는 희극적 작품에서 다루던 광적인 우스꽝스러움을 기묘하게 가미해 다양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불행과 절망을 다룬 진지한 작품도 시도했는데, 점차 이 진지함에 빠져 그는 곧 희극성보다 진지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문학적 성숙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재물을 처음 발표하면서부터 20대 초반의 체호프는 문학적 진전을 이룩했다. 모두 성공을 거둔 이들 연작은 그때까지 쓴 작품보다 훨씬 진지하고 훌륭한 수준이었다. 마침내 1888년 체호프는 처음으로 중요한 문학잡지인 〈세베르니 베스트니크 Severny vestnik〉에 작품을 발표했다. 〈대초원 The Steppe〉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기점으로 그는 드디어 과거의 희극적 소설과 결별했다. 〈대초원〉은 어린이의 눈을 통해서 본 우크라이나 여행을 서술한 자전적 작품으로, 1888년부터 1904년 죽을 때까지 그가 수많은 신문·잡지와 선집에 실은 50여 단편소설의 효시였다. 체호프의 명성은 주로 이 후기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쓴 성숙한 희곡에 기초를 두고 있다.
1888년 체호프는 처음으로 진지한 내용을 다룬 단편소설에 몰두했다. 유머는 이제 밑바닥에 숨어버렸지만 그래도 항상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다. 또한 작품의 수를 줄이더라도 질을 추구하고자 애썼으며 발표하는 작품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대초원〉의 뒤를 이어 발표한 몇 편의 심오한 비극적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루한 이야기〉(1889)이다. 죽어가는 어느 늙은 의학교수의 심리를 파헤친 이 작품은 젊은 작가로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놀라운 통찰력과 정교한 기법을 보여준다. 희곡 〈이바노프 Ivanov〉(1887~89)는 작가 또래의 젊은이가 자살하는 장면으로 절정을 이루는 작품인데, 〈지루한 이야기〉와 함께 체호프의 이른바 임상소설군에 속한다. 정신적·육체적인 병자의 경험을 심층적으로 탐구한 이 작품들은 작가가 의사라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체호프는 실제로 이따금씩 의사로 활동했다. 1889년 무능하고 동정심 많은 형 니콜라이가 체호프 자신의 목숨도 앗아간 결핵으로 죽자 그는 염세적이 되었다. 때로는 이 염세관이 체호프 자신이나 그의 전체 작품의 유형으로 잘못 평가되기도 한다.
1880년대 후반 체호프는 자기 예술의 목적에 대해서 무척 고민했음이 틀림없다. 그가 비평가들의 주목을 끌만큼 유명해지자, 비평가들은 그가 뚜렷한 정치적·사회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작품에 어떤 방향성을 부여하지도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비정치적이고 특정 철학에 구속받지도 않으며 추상적인 허세를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던 체호프를 괴롭혔다. 1890년초 그는 혼자서 머나먼 섬 사할린 섬으로 사회학적 조사를 하러 훌쩍 떠남으로써 이 피곤한 도시의 지적 생활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9,650㎞나 떨어진 사할린은 차르 체제하의 유형지로 악명높은 섬이었다. 그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부설되기 전이었으므로 마차와 배를 타고가는 여정은 길고도 험했다. 무사히 도착해 지역 상황을 연구하고 주민 인구를 조사한 뒤 배편으로 홍콩을 거쳐 실론(스리랑카)으로 갔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곳에서 출판한 〈사할린 섬〉(1893~94)은 러시아 형벌학사상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체호프는 자신의 많은 작품을 출판해준 부유한 신문 경영자 A.S.수보린을 동반하고 첫번째 유럽 여행길에 나섰다.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가까운 벗이 거의 없었으므로 26세나 연상인 수보린과 함께 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체호프는 수보린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였으나 정치적으로 반동적 경향의 신문인 〈노보예 브레먀 Novoye vremya〉의 발행자인 그로 인해 얼마간 인기를 잃었다. 결국 체호프와 수보린은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이 신문의 태도 때문에 결별했다. 체호프는 드레퓌스를 옹호했으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에서나 예술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 그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나치게 정치성을 띤 인물을 위험하다고 보았다. 사할린 답사를 전후해 체호프는 희곡의 습작과 실험을 계속했다. 장황하고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4막극 〈숲의 정령 Leshy〉(1888~89)은 나중에 많이 삭제되어 기적적인 예술에 의해 위대한 희곡 〈바냐 아저씨〉로 탈바꿈했다. 시골 장원의 목적 없는 삶을 훌륭히 파헤친 작품으로 개작한 이 작업은 1890~96년에 이루어졌다. 그무렵에 쓴 다른 작품으로는 보드빌 단막 익살극인 〈곰 Medved〉(1888)·〈청혼 Predlozheniye〉(1889)·〈결혼 Svadba〉(1889)·〈기념일 Yubiley〉(1891) 등이 있다.
멜리호보 시기(1892~98)
의사이자 의료 행정관으로서 1891~92년의 대기근 구제사업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에서 80㎞ 떨어진 멜리호보 마을에 영지를 사들였다. 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고 집안 살림을 도맡은 누이동생 마리야와 늙은 부모와 함께 약 6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곧 이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학교를 세우기 위해 돈을 모았으며 종종 치료를 받으러 온 농부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는 또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여러 곳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집을 늘 개방했다. 이는 창작과는 무관한 생활인 듯했지만 멜리호보 시기는 단편소설에 관한 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다. 사실 〈나비〉·〈이웃사람들〉(1892)·〈익명의 소설〉(1893)·〈흑의의 수도승〉(1894)·〈살인자〉(1895)·〈아리아드네〉(1895)를 비롯한 많은 걸작이 이 6년 동안 나온 것이다. 이제 시골생활이 작품의 주요주제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은 〈농부들〉(1897)이다. 구성 때문에 평범하게 보이는 이 단편 연작은 체호프의 어떤 작품보다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작가가 러시아 농부들을 감상적이고 온순한 모습으로 제시하는 그때까지의 관례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갈매기〉(1896)는 멜리호보 시기에 쓴 유일한 희곡이다. 1896년 10월 17일(구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4막극인 이 작품은 희극으로 오해되어 혹평을 받았고 실제로 야유가 빗발쳐 공연이 중단될 뻔했다. 크게 상심한 체호프는 2막 공연 도중 객석을 떠났고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시는 희곡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2년 뒤 이 작품은 신설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다시 공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극작가로서 체호프의 자질을 재정립시켜주었다. 〈갈매기〉는 각각 2명의 작가와 여배우가 대표하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을 조명하고 있는데, 몇몇 장면은 친구들의 삶의 모습을 재연한 것이다.
얄타 시기(1899~1904)
1897년 3월 체호프는 결핵으로 인한 각혈로 고생했다. 의사로서 그는 꽤 오래 전에 증상을 자각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병자나 다름없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멜리호보의 영지를 팔아 크림 반도의 해변 휴양지 얄타에 별장을 세웠다. 이때부터 매년 겨울에는 대부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적 생활을 포기하고 얄타나 프랑스령 리비에라에서 지냈다. 그의 희곡은 이제 막 진정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므로 이런 생활은 매우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연극에 출연했던 여배우 올가 크니퍼와 사랑에 빠져 결국 1901년 결혼했다. 이때가 그가 평생에 단 한번 진정한 사랑을 경험했던 때일 것이다. 그러나 크니퍼가 배우활동을 계속하기를 고집해 그는 겨울 동안은 대부분 아내와 떨어져 살았고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재정 문제에 관해서는 어두웠던 그는 1899년 정규적인 고료를 받기 위해 희곡을 뺀 모든 걸작들의 판권을 A.F.마르크스에게 7만 5,000루블이라는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팔아넘겼다. 마르크스는 1899~1901년에
10권으로 된 체호프의 전집을 처음 출간했으나 이때는 이미 작가 스스로 많은 초기 작품을 부정한 뒤였다. 그런데도 이 전집은 자료를 덧붙여 1903년 재판되었고 여러 모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얄타 시기에 체호프는 단편소설 창작을 줄이고 희곡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 희곡 작품인 〈세 자매〉(1901)와 〈벚꽃 동산〉(1904)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위해 쓴 것이었다. 그는 이 극장을 설립한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 단첸코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힘입은 바 컸지만 작품의 리허설과 공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곡이 비극이라기보다는 희극에 가깝다고 되풀이해 주장했던 그는 종종 연출가들이 생의 무상과 권태에 한숨 짓는 주인공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어둡게 다루는 데 대해 불만이 쌓여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그때까지 과장된 연기를 펼쳤던 러시아 무대에 웅변조를 벗어난 자연스러운 방식을 도입한 혁신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으나,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작품을 가볍게 다루기를 바라던 체호프의 눈에는 여전히 자연스럽지도, 웅변조를 벗어나지도 못한 것으로 비쳤다. 체호프의 원숙기 작품은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지만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벼운 연출을 바라는 그의 요구가 충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지방 소도시에 사는 젊은 3자매의 갈망을 지극히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세 자매〉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다룬다면 작품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쇠락해가는 러시아 지주 계층을 신랄하게 묘사한 작품인 마지막 희곡 〈벚꽃 동산〉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희극이며 어떤 점에서는 익살극이기도 한데, 등장인물들은 매우 통렬하게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희극적이다. 1904년 1월 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의 작품 초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희비극이었다. 언제나 소란을 혐오하던 작가가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는 상태에서 극장으로 실려와, 자신의 등단 25주년(이것도 잘못 환산한 것이었음)을 축하하는 허풍스런 연설들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무렵 그는 이미 러시아에서 저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으나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콘스탄스 가넷등 여러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보급했고 영어권에서는 그를 숭배하고 모방하는 작가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그러나 핵심을 교묘히 피해 겉으로는 성실한 문체로 써내려간 그의 작품은 말해진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내용들이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 난해하기 때문에, 작가들이 모방하거나 비평가들이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사후 40여 년 만인 1944~51년에 전집 〈A.P. 체호프의 작품과 편지 전집 Polnoye sobraniye sochineny i pisem A.P.Chekhova〉이 발간되어 어느 정도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비로소 그의 작품들이 러시아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20권으로 된 이 전집 중 8권이 수천 통에 이르는 그의 편지가 실려 있는 책이다. 명랑하고 재치 넘치는 이 편지들은 그가 절망적인 염세주의자라는 생전의 평가를 뒤집었다. 문학사가 D.S.미르스키에 따르면 이 편지들은 러시아 서간문학의 본보기로서 푸슈킨의 편지들에 버금가는 것이다. 체호프는 여전히 주로 극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비평가들은 단편소설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며 특히 1888년 이후의 단편이 훨씬 중요하고 문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 다음 백과-R. F. Hingley 글 >
대표 작품- 출처: 위키백과
단편
- 〈관리의 죽음〉(1883)
- 〈우수〉(1885)
- 〈키스〉
- 〈사랑에 대하여〉
- 〈귀여운 여인〉(1898)
- 〈약혼녀〉(1902)
- 〈개를 데리고 있는 여인〉(1899)
- 〈카멜레온〉(1884)
- 〈초원〉(1888)
- 〈6호 병실〉 (1892)
- 〈사할린 섬〉(1890)
- 〈아리아드나〉
- 〈결투〉(1892)
극
'♣ 문학(文學) 마당 ♣ > - 작가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귄터 그라스 (0) | 2014.12.16 |
---|---|
오웰 [George Orwell] (0) | 2014.12.13 |
포크너 [William (Cuthbert) Faulkner] (0) | 2014.12.11 |
토마스 만 [Thomas Mann] (0) | 2014.12.10 |
고골리 [Nikolay (Vasilyevich) Gogol] (0) | 2014.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