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너 [William (Cuthbert) Faulkner]
미국의 소설가.
생애초기와 습작기
포크너는 북부 미시시피의 한 마을에서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머리 C. 포크너와 모드 버틀러 포크너였고, 소설가가 된 후 나중에 포크너 자신이 성에 'u'자를 덧붙였다. 곧 포크너가(家)는 옥스퍼드에서 80m 남서쪽의 리플리로 이사해 그곳에 정착했다. 옥스퍼드에서 아버지는 말[馬] 임대업과 공구상을 하다가 주립대학교의 경영이사가 되었다. 그 가족은 남부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남북전쟁 때 무공을 쌓았던 다혈질의 증조부 윌리엄 C. 포크너 대령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전쟁 후 포크너 대령은 리플리에서 테네시까지의 기차를 건설한 것 이외에도 〈멤피스의 백장미 The White Rose of Memphis〉(1881)라는 낭만소설을 썼는데, 이 책은 36번이나 재인쇄될 만큼 인기가 있었다.
어렸을 때 그는 빌리 또는 '메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헌신적인 하인이었던 캐롤라인 바는 노예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포크너는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으로 항상 동생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독서함으로써 상상력을 키웠다. 그당시 옥스퍼드에는 공립도서관이 없었지만 그 집에는 디킨스나 다른 많은 영국 고전을 포함해 상당량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공식교육에는 흥미가 없어 고등학교를 2년 다닌 후 중퇴했다. 당시 이웃집 소녀인 에스텔 올드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할 생각으로 할아버지의 은행에 근무했다. 한편 또다른 이웃이었던 필립 스톤이 그 가족의 법률고문이 되면서 그의 책읽기에 조언을 해주었고, 옥스퍼드에서 알려져 있지 않던 상징주의나 모더니즘 전통의 많은 책들,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스테판 말라르메 등의 작품을 소개해 주었다(포크너는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었음). 그는 또한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T.S.엘리엇, 콘래드 에이컨의 글도 읽었다. 에스텔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동양으로 떠났다.
포크너는 캐나다의 왕립 항공부대에 입대하여 1918년 수습비행사로 토론토에 갔지만 기본 훈련을 마치기 전에 전쟁은 끝났다.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그의 편지에서 밝혔듯이 '전역군인을 위한 특별배려'로 미시시피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생모임에 참여하여 문학지에 시를 기고할 정도의 시간만큼만 그곳에 다녔다. 그후 글쓰기를 배우면서 '종이·담배·음식과 약간의 위스키'를 살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21년 가을 뉴욕 시의 한 서점의 점원으로 일했다. 다음 3년 동안 옥스퍼드의 외곽지역에 있던 대학우체국의 우체국장을 지냈는데, 필 스톤의 말을 빌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우체국장'이었다. 스톤은 그의 첫 저서인 전원시 연작 〈대리석의 목신(牧神) The Marble Faun〉(1924)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대부분 조달한 사람이다.
1925년 전반을 뉴올리언스에서 보냈는데, 아마 이때가 포크너 자신은 별 말이 없었으나, 말 많은 문학 서클에 개입했던 거의 유일한 시기였던 것 같다. 또한 그때 그는 치명상을 입은 조종사가 조지아로 귀향하는 것을 그린 첫 소설 〈병사의 보수 Soldier's Pay〉를 썼다. 그당시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은 뉴올리언스 문학 서클의 중심인물이었는데, 포크너의 이 소설을 그의 출판업자에게 추천했다. 7월에 포크너는 느린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갔고, 곧 직접 걷기도 하면서 파리까지 여행했다. 레프트뱅크에서 혼자 사는 동안 다음 해 봄에 첫 소설이 출판되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달러 인세에 대한 선불로 뉴욕 여행, 옥스퍼드까지 기차삯을 치르고 크리스마스 전에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옥스퍼드에서, 또 여름 내내 미시시피 강 유역의 파스카굴라에서 몇 년 동안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주택 페인트공이나 목수, 골프 교사, 새우선의 갑판원으로 일했고, 루이지애나 늪지를 교묘히 드나들던 고속 모터 보트를 타고 럼주 밀수를 하기도 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러면서 대개 밤에는 열심히 글을 썼다. 그의 2번째 소설 〈모스키토스 Mosquitoes〉(1927)는 뉴올리언스 문학 서클에 대한 심각한 풍자적 묘사였다. 사실상 그것은 그러한 집단 따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고립무원의 상태와 비슷한 곳에서 미래의 작업을 해나가야만 했다. 소설이나 시 이외에도 단편을 썼고, 모든 단편들을 필 스톤에게 넘겨주어 그의 비서가 타이프 친 후 몇몇 잡지사로 보내졌다. 단편들이 항상 되돌아왔기 때문에 한때 스톤의 서류함 중 서랍 하나가 거절된 원고로 거의 가득 찼었다고 한다. 3번째 소설 〈묘지의 깃발 Flags in the Dust〉은 1927년 가을에 끝났으나 앞의 두 소설을 출판했던 업자에게 거절당했다. 포크너는 그의 작품이 다시는 장정본들 사이에 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를 시작하기 전 그는 '자 이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자 이제 나는 대중을 잊고 나의 상상력 속에서 살 수 있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묘지의 깃발〉은 〈사토리스 Sartoris〉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원고가 수정된 후 또다른 출판업자에 의해 마침내 수락되었다. 책은 1929년 1월에 출판되었다. 균형이 맞지 않고 때로는 감정이 지나친 이 작품은 마지막 습작품이고 또한 요크나파토파카운티라는 가공의 마을을 다루면서 나중에 깊이 발전시킨 많은 주제들을 나타낸 첫 작품이기도 했다(→ 색인 : 요크나파토파 전설).
또다른 출판업자가 수락했던 〈음향과 분노〉는 같은 해 10월에 나왔다. 귀족적인 콤프슨가와 사회질서의 쇠퇴와 소멸을 은연중에 그리고 있지만, 이 작품은 기교나 심리적 범위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그의 첫 걸작이었다.
에스텔 올드햄이 결혼에 실패한 후 중국에서 돌아왔고 그녀와 포크너는 1929년 6월에 결혼했다. 다사다난했던 그해 봄에 그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이야기"라는 〈성단 Sanctuary〉을 써서, 그것을 새 출판업자인 해리슨 스미스에게 보냈다. "맙소사, 난 이것을 출판할 수 없네. 우리 둘 다 감옥에 갈거야"라고 스미스는 대답했지만 원고를 돌려주지는 않았다. 늦가을에 포크너는 대학 발전소에서 야간소방원으로 근무하면서 〈죽음의 기간 As I Lay Dying〉을 썼다. 〈음향과 분노〉의 판매량보다는 그에 대한 여러 인상적인 서평들로 인해 편집인들이 그의 단편소설에도 재차 주목하게 되었다. 〈에밀리에게 장미를 A Rose for Emily〉은 국내잡지에 처음 실렸고(1930. 4), 곧 다른 작품들이 나왔다. 포크너는 무모하게 남북전쟁 직전에 지은 크고 낡은 집을 사서 그것을 로원오크라고 불렀다.
주요작품들
후에 그의 절정기로 알려지게 된 때에는 형편이 훨씬 좋아졌다. 그의 책은 면수만으로도 인상적이다. 1930~42년에 2권의 단편모음집과 2번째이자 마지막 시집 〈녹색의 가지 A Green Bough〉(1933)와 9권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이외에도 할리우드 영화에 관련된 일을 했고 자신의 톱과 망치로 직접 로원오크를 수리했다.
장편소설 가운데는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카운티의 군소재지인 제퍼슨에 어머니를 묻기 위해 화재와 홍수를 헤쳐나가는 가난한 백인 가족들의 여정을 다룬 〈죽음의 기간〉(1930)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성역〉(1931)이 있다. 포크너는 〈성역〉에 대한 마음을 바꾸어 교정을 보면서 그것을 고쳐 쓰기는 했지만 공포를 약화시키지 않았다.
〈8월의 빛 Light in August〉(1932)은 흑백혼혈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백인세계에서도 흑인세계에서도 살 수 없는 조 크리스마스를 그리고 있다.
〈파일론 Pylon〉(1935)은 떠돌이 비행사들에 대한 소설로, 막내동생 딘이 2년 전 포크너가 영화 일을 하던 때 구입했던 비행기를 몰다 죽은 해에 출판되었다. 이 죽음은 〈압살롬 압살롬! Sartoris:Absalom, Absalom!〉(1936)의 주인공의 죽음에서도 은근히 반영되어 있는데, 작품은 옛 남부에 대한 이야기로 그의 걸작 중 하나이면서도 심한 혹평을 받아 독자들이 외면했던 소설이다.
〈정복되지 않는 사람들 The Unvanquished〉(1938)은 남북전쟁 당시와 그 이후 사토리스 집안에 대한 이야기이고, 〈야생종려나무 The Wild Palms〉(1939)는 각 장마다 번갈아 2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대조되어 있는 작품이다. 〈촌락 The Hamlet〉(1940)은 3부작 중 1부로 무절제한 스노프가의 기원을 그리고 있으며 〈모세야, 내려가라 Go down, Moses〉(1942)는 미시시피 황야와 그 주변에 살았던 한 농장주인의 흑인과 백인 후손들에 대한 작품이다. 〈파일론〉을 제외하면 이 모든 소설들은 요크나파토파 연대기를 이루고 있다.
그러한 연대기는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Les Rougon-Macquart〉처럼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이 아니었다. 포크너는 그가 사는 마을, 자신의 친척 마미 칼리라 부른 캐롤라인 바가 해준 이야기, 옥스퍼드 광장에서 토요일 오후마다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 중 기억나는 것들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점차 그의 상상력 속에서 자라나 그가 말했듯이 '현실적인 것이 묵시적인 것으로' 승화되었다. 때때로 어떤 사건에 대한 그의 해설이나 인물 판단이 소설마다 바뀌었지만, 그는 그러한 불일치에 개의하지 않았다. 흔히 그는 "이제 이 사람들을 더 잘 알게 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결국 이 소설들은 다양성보다는 통일성 때문에 더욱 뛰어나다. 그들 모두 그 이전의 미국 소설에서는 다소 예외적이라고 할 만한 3가지 특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즉 많은 사건들이 부분적으로는 본질상 그들의 배경으로 인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장소의식과 살아 있는 과거에 대한 역사의식, 공동체의식 등을 담고 있다. 흔히 포크너의 화자(話者)는 그 공동체의 가상된 주장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인 주제에 있어 통일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들은 주제에 대한 접근에서는 극히 다양하다. 각 작품마다 작가 자신이 제기한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 새로운 방법이나 무수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때로 소설은 정신적 영상으로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8월의 빛〉은 더러운 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임신한 여인에 대한 영상으로 시작했고, 그때 문제는 어떻게 그녀가 그곳에 갔는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고 포크너는 말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그가 언제 첫 장을 쓰고 있었는지 몰랐었다고 한다.
〈죽음의 기간〉의 경우는 이와 달리 첫 단어를 종이 위에 적기 전에 이미 포크너의 마음 속에 전체 이야기가 잡혀 있었고, 뒤집힌 손수레에 걸터 앉은 채 이 작품을 아주 빠르게 썼다고 한다.
다른 3권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촌락〉·〈모세야, 내려가라〉 등은 처음 잡지에 기고되었으므로 그 이야기들을 하나의 소설로 짜맞추는 일이 문제였다. 3권 모두 완전히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포크너가 사용했던 방법 가운데에는 상징주의나 모더니즘 작가들을 읽은 데에서 배웠던 것(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나 다른 작가들이 발전시킨 내적 독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는 그 나름의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원칙을 습득하고 적용했으며 가능하다면 새 작품마다 그것을 더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내적 독백은 때때로 백치나 거의 광기를 부릴 정도의 사람의 이야기일 때가 있다. 그가 특별히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든 기교는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교로 마치 정글에 숨어 있는 도시처럼 작가는 소설의 주제에 맴돌고 있었다. 스타일의 문제에 있어 그는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인 것에, 단순한 것을 복잡한 것에, 혹은 불필요할 정도로 애매한 것에 대비시키고, 셰익스피어적인 뒤얽힌 과장을 남부지방의 유머와 대비시켰다.
그러나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아직 미지수이다. 1940년대 초반 내내 포크너는 거의 잊혀지는 것 같았다. 그의 소설이 유능하게 번역되어졌던 프랑스에서나 그의 소설을 존중했던 미국의 동료 소설가들에게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 대중들에 의해서 그의 작품들이 잊혀졌다. 〈촌락〉·〈모세야, 내려가라〉가 〈곰 The Bear〉 등의 뛰어난 이야기를 포함해 그의 최고작들을 담고 있기는 하나 거의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나갔다. 1945년 그의 소설은 사실상 출판되지 못했으며, 첫 출판업자의 창고 안에는 〈모스키토스〉 몇 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포크너 자신도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 살 수가 없어 많지 않은 봉급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대본을 쓰기로 하는 장기계약을 수락했다.
그가 2번째 명성을 얻은 것은 처음보다 더 극적이었는데, 1946년에 〈포크너 모음집 The Portable Faulkner〉을 출판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그의 요크나파토파 전설을 전체로 제시했고 그의 대부분 소설의 발췌문을 시간 순서로 배열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을 존중했던 몇몇 소설가들은 그것에 대해 계몽적인 글들을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대중들이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마지막 출판업자인 랜덤 하우스가 차례로 그의 책을 재출판했다.
1948년 포크너는 린치당하는 자부심 강한 한 흑인을 구해낸 백인 소년에 대한 새 소설 〈무덤의 침입자 Intruder in the Dust〉를 출판했다. 이것은 〈성단〉 이래 그나마 약간의 대중적 성공을 거둔 첫 작품이었다.
1950년초에 출판된 〈단편모음집 Collected Stories〉은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같은 해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남으리라는 예언의 유명한 연설을 했다. 대학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연구했으며 그것이 때로는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 포크너 작품의 출판을 부추기는 자료가 되었다.
사적인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포크너는 공인(公人)이 되었다. 그는 국무부의 업무로 해외여행을 했다. 1954년 페루·브라질, 1955년 열광적인 독자들이 있는 일본·필리핀·서유럽, 1957년 그리스, 1961년 베네수엘라를 방문했다. 그는 1957, 1958년 버지니아대학교에 거주작가로 있을 때 그의 외동딸과 손자들이 부근에 살고 있어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적어도 하나의 공적인 문제, 즉 미시시피에 있는 흑인들에 대한 문제에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게 되었다. 포크너는 흑인을 깊이 동정했으나 남부 민족주의의 강렬한 잔재를 갖고 있어 북부의 간섭 없이 남부가 결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견해로 많은 흑인과 백인들이 동요했고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포크너는 간간이 술을 많이 마셨으나 그의 출판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계속 창작에 몰두했다.
19551년 〈성역〉의 속편이 출판되었다. 3막극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미사 Requiem for a Nun〉가 그 작품으로 각 막마다 이야기체 서설을 첨부해 소설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1954년 포크너의 가장 긴 소설로 거의 10년 동안 작업해온 〈우화 A Fable〉가 출판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하사로 재림한 그리스도이다. 말년의 다른 소설에서 포크너는 그의 상상 속에서 계속 성장하는 요크나파토파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갔다. 그가 그 지방에 대해 회고해볼수록 그곳은 더욱 따뜻한 곳으로 변해갔다.
그즈음 그의 작품은 어느 정도 악마적인 열정이 사라지고 대신 인간성에 대한 좀더 부드러운 관점이 표현되었다.
〈마을 The Town〉(1957)·〈저택 The Mansion〉(1959)은 스노프 일가의 3부작을 이루고 있다. 〈약탈자 The Reivers〉는 포크너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년기의 향수 어린 희극을 그렸는데, 옥스퍼드 근처의 한 병원에서 죽기 겨우 한 달 전에 출판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는 헤밍웨이보다 1년 뒤에 죽었고, 그의 죽음은 미국 소설의 새로운 국면을 만든 한 세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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