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Anton Josef Bruckner, 1824년 9월 9일 ~ 1896년 10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향곡과, 종교음악, 모테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긴 길이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의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생애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교사 보조로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고, 결국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러 스승에게 작곡이나 대위법 등을 배워나갔으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 등에서도 교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11개의 교향곡과 3개의 미사,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생전의 그의 음악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는 그가 바그너의 추종자로 알려져 브람스를 신봉하는 많은 비평가의 무조건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조차도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제프 샬크 형제 등은 항상 그의 곡을 청중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브루크너의 곡을 개작하도록 압박했고, 이런 압박이 브루크너 자신의 유악함 내지 꼼꼼함이 덧붙여져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수많은 개정 원고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의 7번 교향곡, 8번 교향곡, 테 데움의 공연에서 성공을 맛볼 수 있었으나 너무나 늦은 성공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도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밑에 안장되어 있다.
작품
브루크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실내악 작품이나 피아노 독주곡 등을 음반으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서양고전음악에서 브루크너 작품들의 위치는 슈만, 브람스가 계승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조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개성화된 내용의 결합이며 이러한 경향은 구스타프 말러로 계승된다.
한편,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였기에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이후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종교음악은 대규모 합창과 교향악의 결합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장엄미사의 맥을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향곡
그의 가장 주요한 작품은 11개의 교향곡이다. 모든 교향곡은 공통적으로 전형적인 4악장 형태를 갖추었으며, 각 악장 내의 구조에서도 거의 비슷비슷하다. 그의 교향곡의 특징이 금관부에 상당히 강조를 둔다는 점과 음악적인 재료를 하나하나 쌓아서 마지막에 터뜨린다는 점이기 때문에, 그의 교향곡은 편성에 비해 매우 장중하고 진지하다. 이런 음악적인 색채의 특성은 그의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경험과 그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습작, 0번, 1번
1863년에 작곡된 F 단조 교향곡는 바그너 음향에 대한 습작의 의미를 가지지만 슈만이나 멘델스존의 영향도 엿보이는 특이한 작품이다. 이후 1864년에 D 단조 교향곡을 일단 완성시키고 1866년(44세)에 교향곡 1번을 완성한다. D 단조 교향곡은 훗날 1869년에 재작업을 마치고 브루크너 자신에 의해 '0번'으로 번호가 매겨진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교향곡 0번은 1864년에 시작하여 1869(47세)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교향곡 1번은 1877년과 1891년에 다시 개정되며 출판된 도시명을 따서 '린츠판'(1877년)과 '빈판'(1891년)으로 불린다.
2번 ~ 5번
1872년판 교향곡 2번은 기존의 교향곡 구성(알레그로-느린악장-스케르초-피날레)에서 2, 3악장의 순서를 뒤바꾼,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구성을 취하지만 주변에서 '감히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따라한다'는 시선이 두려워 1873년에 기존 순서로 환원한다. 이후 1877년까지 지속적으로 개정을 한 흔적이 남아있다.
바그너가 헌정을 받아들인 에피소드 때문에 교향곡 3번은 '바그너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교향곡 3번은 1873년(49세)에 완성되었으며 바그너 음악의 인용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훗날 바그너에 대한 실망감과 주변 지인들의 참견이 작용하여 바그너 음악의 인용은 1877년과 1889년의 개정작업과 함께 점차적으로 사라진다. 이즈음 곡부터 브루크너만의 특색이 짙게 나타난다.
아름다운 선율 때문에 가장 많이 알려진 교향곡 4번은 1874년(50세)에 완성된다. 1874년에 완성된 교향곡 4번에 대해서 후세에 붙은 '낭만적'이라는 부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초판 4번은 오히려 2번, 3번과 맥을 같이 하는 점이 더 많다. 1878(54세)년에 교향곡 5번이 완성되었으며 같은 해에 교향곡 4번의 4악장 개정이 이루어진다. 특히 이 교향곡 4번은 고친판이 많아서 작곡가의 의도가 가장 제대로 반영된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브루크너 판본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개정은 1880년에 완성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적' 교향곡은 1880년판을 기초로 한다. 이후 1881년과 1886년에 연주용으로 소폭 개정되었다
Symphony No 5 B flat maj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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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 5중주와 6번
1879년에 완성된 현악 5중주는 비록 실내악의 편성을 가지고 있지만 브루크너 교향곡의 작풍이 고스란히 들어간 특이한 작품이다.(그렇다고 이 오중주를 교향곡으로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전 브루크너 교향곡의 중심은 금관이었다. 상대적으로 현악파트가 유려하지 못했던 그의 교향곡은 현악 5중주를 기점으로 점차 유려한 현악파트를 가지게 된다. 1881년(57세)에 작곡된 6번 교향곡은 현악 5중주에서 얻은 현악파트 작곡기법의 진전에 대한 뒤풀이 성격이 강하다.
마지막 3부작
바그너가 브루크너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점점 실망했다고는 하나 바그너를 우상시하는 그의 태도 자체는 변하지는 않았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음을 듣고 브루크너는 작곡 중인 7번 교향곡의 2악장에 바그너를 추모하는 애도가를 넣었다. 1885(61세)년에 완성되고 아르투르 니키쉬에 의해 초연된 교향곡 7번은 브루크너를 진정한 교향곡 작곡가의 반열에 들어서게 만든다. 아름다운 선율로 교향곡 4번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졌으며, 교향곡 입문에도 가장 알맞은 곡이다.
자신감을 가진 브루크너는 교향곡 2번에 잠깐 시도했다가 철회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구성(알레그로-스케르초-아다지오-피날레)을 새로운 교향곡에 적용한다. 1887년(63세)에 완성된 교향곡 8번의 초연은 실패로 끝나고 주변 사람들의 '훈수'로 인해 1890년에 개정되고 개정된 교향곡 8번도
성공적으로 초연되었다. 8번 교향곡은 가장 대규모의 곡이다. 역시 수정 작업이 많은 교향곡 중 하나이다.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9번은 3악장까지 완성되었으며 4악장은 스케치와 일부 오케스트레이션만 남아있다. 브루크너의 유언 중에 4악장 대신 테 데움을 연주하라고 했으나, 3악장까지를 완성된 형식으로 볼 수도 있어 많은 연주자들은 주로 3악장까지만 연주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4악장 완성본을 함께 연주한다.
9번 교향곡 4악장 완성 시도
개정과 판본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의 교향곡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개정 원고와 판본의 문제다. 브루크너는 생전에 자신의 곡을 지나칠 정도로 자주 개정했고, 개정의 정도에서도 거의 새 곡을 쓰다시피한 정도였으며, 그 모두를 고스란히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등에 남기고 있다. 이러기에 어느 것의 그의 참 뜻을 반영하고 있느냐에 대해 악보 편집과 인쇄에서 그 주관자의 의견은 분분하다. 따라서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차례 다른 원고로 이루어진 브루크너 교향곡 악보 전집이 출판되었다. 최초의 악보 편집과 인쇄는 대부분 브루크너의 제자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고 브루크너 자신의 의도보다는 그 제자에 의한 임의 편집이 난무했다. 그 바람에 그의 음악은 제대로 이해되기 힘든 지경에 처했다.
이런 경향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1932년에 일어났는데(1931년 마지막 브루크너 교향곡 개정자인 프란츠 샬크가 사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Sigmund von Hausegger라는 지휘자가 브루크너의 마지막 교향곡을 두 가지 판본, 즉 기존에 쓰던 제자 뢰베에 의한 판본과 브루크너 자필 악보에 기반한 새로운 판본에 의해서 연주한 것이다. 그 파장은 엄청났고, 이 때부터 브루크너 원전 찾기 열풍이 시작되었다. 로버트 하스Robert Haas가 최초로 원전 전집 악보를 출판했고, 그의 작업을 이어받은 레오폴트 노박Leopold Nowak은 또 다른 원전 전집 악보를 출판했다. 이 두 사람에 의한 전집 두 가지는 현재까지도 가장 권위있는 브루크너 교향곡의 악보로 인정받고 있다. 하스Haas의 전집 악보(3번은 하스 사후에 외저Oeser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그가 판단하기에 브루크너 최후의 생각에 가장 가깝다고 보는 원고 하나만을 취하여 첨삭하거나 두 원고를 취합한 형태(2번과 8번이 대표적이다.) 출판한 것인 데에 반해, 노박Nowak은 브루크너가 남긴 각각의 원고에 대해(단, 2번에 대해서는 1872년판과 1877년판을 혼합한 형태) 모두 출판을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종교 음악
교향곡 작곡가이기 이전에 브루크너는 합창곡 작곡가였다. 그의 첫 대규모 합창 음악은 특이하게도 레퀴엠(1849)이다. 다른 작곡가들이 말년이나 임종에 앞서 레퀴엠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브루크너는 20대의 나이에 레퀴엠을 작곡한다. 레퀴엠도 개정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서 1854년과 1892년에 개정되었다. 아베 마리아(1861)는 그가 르네상스 작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이며 이후 고전주의 양식을 융합한 로쿠스 이스테(1869)와 함께 초기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교향곡도 마찬가지지만 브루크너의 장기는 종교음악에서도 대규모 합창음악쪽에 무게가 실려있다. 대표적으로 세 곡의 미사와 테 데움을 들 수 있다. 특히 e 단조 미사(2번: 1866)는 교향악과 합창의 조합이 인상적이다. 한편 테 데움(1881)은 브루크너가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 대신 연주하도록 유언을 남길만큼 역작이며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된다.
기타
때로는 브루크너와 말러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교향적 전주곡이 있다. 1974년 빈 국립 도서관에서 피아노 듀엣 곡으로 발견되었고, 후에 알브레히트 귀르싱에 의해 관현악 곡으로 편곡되었는데, 그는 본래의 관현악 총보(빈, 도블링어에 의해 출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브루크너의 학생들 중 한 사람의 작품인 듯 싶다.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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