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세계문학약사

프랑스 문학사

Bawoo 2014. 12. 20. 20:47

프랑스 문학사

 

중세 이래 프랑스는 유럽의 지적생활에 있어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어느 시대나 프랑스 문학작품과 프랑스어는 국경 너머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고대 그리스, 라틴 문학의 모방에 바탕을 둔 문화전통을 발전시켰다. 프랑스의 이 고전주의 전통은 이성, 형식의 완전성, 언어의 순수성을 존중했다.


1820년대부터 고전주의적 이상은 낭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대해서 상상력의 주장을, 사회적 규범에 대해서 개인을 옹호했다. 시의 영역이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에 의해 넓혀졌고, 20세기 모더니즘 혁명의 결과로서 모든 시 형식이 다시 정의되었다. 소설부분에서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 Com die Humaine>으로부터 에밀 졸라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가능성의 탐구와 개척이 이루어졌다.


20세 초반까지 유럽의 지적, 예술적 생활의 중심이었던 파리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그 지위가 쇠퇴하고, 프랑스어의 국제적 지위도 크게 약해졌다. 그러는 가운데도 '누보 로망'의 제창자들은 이 장르의 관례에 철저한 공격을 가했으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작가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인 탐구에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중세(8∼15세기) 


프랑스문학의 시조는 중세 갈로 로망어로 씌어진 문서인 <스트라스부르의 맹약(842)>이다. 이것은 프랑스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내는 자료이다. 프랑스어 형성과 더불어 문학작품이 곧바로 꽃핀 것은 아니다. 라틴어가 여전히 공용어로 쓰였으며, 문학적 표현 도구로 존속하였다. 한편 당시 지식 계층이던 성직자가 라틴어로 된 서적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문학적 문학은 <성녀(聖女)외랄리의 애가(881)>이다.


1040년 무렵 씌어진 <성(聖)알 시전>도 같은 성격의 것인데 이는 민중교화를 위한 종교문학으로서 성자전의 유형에 속한다. 이밖에도 다수의 성자전이 나온 것으로 여겨지나, 운문의 형식과 표현력의 깊이에서 문학적인 면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무훈시 


1200년까지 거의 모든 프랑스 문학은 운문이었고 구두로 청중에게 전달되었다. 종글뢰로하고 불리는 유랑가수들이 트루베르라고 불리는 북프랑스의 시인들로부터 작품을 사서 악기에 맞추어 노래 부르며 방방곡곡을 다녔던 것이다. 중세 사회가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무훈시라는 서사시로서 80여 편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것은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1100)>이다. 작자 미상의 <롤랑의 노래>는 사를마뉴가 스페인의 이교도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후위군의 지휘관이던 롤랑이 피레네의 협곡 롱스보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뿔피리를 불러 구원군을 청하기를 거절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다는 이야기이다. 봉건사외의 2대 원리, 즉 명예(군주에 대한 충성)와 신 (크리스트교)이 잘 조화되어 있다.


브르타뉴 설화


중세의 설화문학은 12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 기원을 십자군 원정에서 끌어왔고, 또 어떤 것들은 고대문학에서 끌어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켈트족 전설인 브르타뉴 설화였다. 중세에 널리 인기 있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숙명적인 사랑이야기는 토마(12세기)의 프랑스어 고본에 의해 전해진다. 원탁의 기사들의 모험담은 아서(아르튀르)왕 전설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 장르의 대 작가는 크레티엥 드 트루아로 그는 1165∼82년에 이 글을 썼다. 그의 작품은 <랑슬로:스레를 탄기사 Lancelot, le cheval‍ier la charrette(1172년 경)>, <이벵:사자를 이끄는 기사 Yvain, le cheval‍ier au lion(1173경)>, <페르스발 Perceval‍> 등이다.


여우이야기 


13세기에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부르주아 문학이 크게 발달, 이를 대표하는 것이 운문 설화체인 <여우 이야기>와 파블리오, 서정시인 뤼트뵈프이다. 사자 블 왕이 군림하는 동물 왕국에서 여우 르나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우스꽝스런 이야기들은 봉건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장미 이야기


프랑스의 알레고리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은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였다. 전편은 기욤 드 로리스, 후편은 장 드 묑에 의해 각각 씌어졌다. 기욤 드 로리스는 우의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명예에 대한 시림을 분석했고, 장 드 묑은 그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고자 우주, 인생, 종교, 도덕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이며,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운동의 시대로서,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라블레, 롱사르, 몽테뉴가 높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사상의 전달에는 아직도 라틴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논쟁한 다음 내놓은 <우신예찬(1511)>과 칼뱅의 <크리스트교 강요(1535)>도 라틴어로 쓰여졌다.


16세기 중엽에 7명의 시인들에 의해 플레야드라는 시파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프랑스어를 고대 그리 어, 라틴어의 수준으로 높이고자 했다. 뒤벨레가 쓴 <프랑스어의 옹호와 선양(1549)>은 플레야드파의 선언서가 되었는데, 이에 호응하여 많은 학자들도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시가 찬란하게 꽃피었다. 압운과 시인 장 마로의 아들이자 제자인 클레망 마로는 궁정시인으로서 롱도, 발라드, 경구, 서간시에 뛰어났다. 신교도로서 박해를 받은 그는 이단자로서 감옥살이를 한 뒤 시집 <지옥(1526)>에서 신랄한 어조로 재판을 풍자했다.


리용에서는 모리스 세브(1510년 경∼60년경)를 비롯해 <시집(1545)>으로 페르네트 뒤 기예가, <작품집(1555)>으로 루이스 라베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세브는 특히 그의 긴 연예시 <델리(1544)>로 유명했다.


산문문학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5부작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가 1532∼64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 가장 유명한 작품은 미셸 드 몽테뉴(1533∼93)의 <수상록(1580∼88)>일 것이다. 몽테뉴는 이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려고 했는데 이는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한 일기를 그리려고 한 이었다.


17세기(고전주의) 


17세기 초에는 귀족 계급이 서서히 상류사회로 편성되었는데, 이 변화는 특히 오노레 뒤르페의 전원소설 <아스트레(1607∼27)>와 그 영향으로 랑부에 후작 부인이 처음으로 연 살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문학 살롱에서 발달된 프레시오지테는 폐단도 있었지만, 프랑스어를 명료하고 우아한 언어로 만드는데 이바지했다. 한편, 이 프레시오지테에 대한 반동으로 발레스크 작가군이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작가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는 상상력과 개인 감정을 멀리하고 명료함, 질서, 규칙으로 프랑스어를 정화했다.

 

<방법서설>의 저자 르네 데카르트는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간주함으로써 합리주의의 기초를 세웠는데, 바로 이 진리의 예찬이 프랑스 고전주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리고 1600∼1630년 가장 인기 있었던 연극 장르는 희비극과 목가극이 있었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 고전주의 문학은 꽃피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은 라로슈푸코 공작의 <잠언집(1665)>, 17세기 심리소설의 걸작인 라 파에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1678)>, 그리고 시인인 니콜라 부알로, 몰리에르, 장 라신, 라퐁텐이 있었고, 철저한 가톨릭의 옹호자 자크 베니뉴 보쉬에의 <설교집>과 <세계사 서설>이 있다.


18세기(계몽사상) 


17세기말부터 교회, 귀족, 왕권 등 전통적인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이성의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먼저 이성은 기존 지설의 핵심과도 같았던 신앙의 원리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비판 작업은 퐁트넬과 피에르 벨에 의해 발전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철학자들의 그룹이 조직되어 합리적인 철학의 총화와도 같은 <백과사전>을 펴냄으로써 이성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주요편집자는 달랑베르, 드니 디드로로 이들은 무신론자로서 크리스트교의 도덕을 공격했다.

 

진보를 믿었던 18세기 계몽시대의 모든 철학자들과는 달리 장 자크 루소는 진보에 이론을 제기했는데, 그는 <학예론>에서 자연은 선하나 문명은 그것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인간 불평등기원론(1755)>에서는 불평등의 기원인 사유재산제도에 기초를 둔 현대사회 질서의 부정을 고발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은 27년 후 혁명가들의 성서가 되었고, 인권과 시민의 권리를 낳게 했다. 볼테르는 서사시, 철학시, 풍자시 등 온갖 장르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최대의 시인은 앙드레 새니에로 그의 격렬한 <풍자시>는 옥중에서 쓰여진 것이다. 18세기에는 소설이 크게 발달했다.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1721)>에서 철학적 소설양식을 창조했고, 르사주는 <질 블라스>라는 작품으로 사실주의적 소설을 창조했다.


심리소설 또는 감성소설을 마리보의 <마리안의 일생(1731∼41)>과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1731)>에 의해서 대표되고, 사드 후작의 소설 <쥐스턴:미덕의 불행(1791)>은 '새디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음란하고 잔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18세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자전적 회고록이다. 생 시몽의 <회상록>, 루소의 <고백록(1765∼70)> 등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대혁명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 대혁명은 문학의 과거와의 연결을 단절시켰다. 작가들은 세련된 사교계의 제약과 갖가지 규칙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에 따라 문학의 영역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체제 아래 웅변술이 매우 발달하여, 미라보와 같은 천재적인 웅변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미국 여행과 영구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그의 호교론적(護敎論的) <크리스트교의 정수(1802)>를 내놓았다. 스탈 부인의 3대 작품으로는 세계주의적이고 여권주의적인 소설<코린(1807)>과 두 논문<문학론(1800)>과 <독일론(1810)>이 있는데, <독일 >에서는 프랑스인에게 '낭만주의'라는 하나의 새로운 문학을 계시했다. 프랑스 낭만주의는 전(前) 세기의 고전적 규칙과 철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왕정복고와 7월 왕조시대에 발달된 자아와 예술의 해방운동으로서, 그것은 질적으로 작가의 개성이 감수성과 상상력, 감정 토로와 자연애호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특히 루소와 샤토브리앙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스칼부인은 낭만주의 문학의 이론을 제시했다. 게다가 바이런, 월터 스콧, 실러, 괴테 등과 같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이 영향을 미쳤다. 낭만파는 1823년경 샤를 노디에의 살롱에서 최초의 세나클을 구성했으며, 1827년에 빅토르 위고가 그의 희곡 <크롬웰>에 쓴 서문이 이 새로운 유파의 선언서로 인정받게 되었다.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풍조는 특히 시에서 뚜렷했다. 비련의 감정을 담은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명상시집(1820)>, 빅토르 위고의 <동방시집(1829)>, <빛과 그림자(1840)>이 대표적이고, 제라르 드 네르발의 <몽환들(1854)>은 최근 들어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양한 종교적 신화와 초자연적 지신에 의존하는 그의 고뇌에 찬 비교적 탐색을 시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들레르, 말라르메의 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낭만극은 삼일치의 법칙, 장르의 규칙 등 모든 고전극의 인습을 깨뜨렸다. 위고의 운문극 <에르나니(1830)>의 초연은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도전이었고 낭만주의의 승리였으며, 뒤이어 <뤼 블라스(1838)>의 성공이 이어졌다. 1831년 대(大)알렉상드르 뒤마의 <앙토니>가 상연되었을 때 낭만주의 세대는 앙토니에게 자기 이상에 맞는 주인공, 즉 침울하고 열광적이고 반항적인 인간을 발견하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비니의 <채터턴>은 그 농축된 단순성에서 고전극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뮈세의 <로렌자초(1834)>는 낭만주의의 걸작으로서 셰익스피어의 극에 비견된다. 낭만주의 소설을 오래 전부터 루소, 스탈 부인, 샤토브리앙에 의해 준비되었고, 1820년대에는 역사소설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월터 스콧의 프랑스어 번역 작품의 영향에 의해 촉진되었다. 역사소설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1844)>는 대중소설로 변모했다. 스탕달은 19세기의 감수성을 가진 18세기적 합리주의자이다. 그의 두 걸작은 <적과 흑(1830)>, <파름의 수도원(1839)>인데, 이 소설들의 주인공을 통해 스탕달은 오직 '행복의 추구'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르주 상드는 처음에는 이상주의 낭만주의 가 넘쳐흐르는 소설 또는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소설을 썼으나, 나중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를 띤 전원생활의 감상적인 이야기를 담은 걸작 <악마의 늪(1846)>, <사랑의 요정(1849)> 등을 내놓았다.


낭만주의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더불어 사실주의로 변해갔다. 90여 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포함하는 방대한 <인간희극>은 부르주아 계급의 정확한 묘사, 배경의 진실성 등 사 적인 특성에 의해 가치가 있다. 이밖에 메리메의 <카르멘(1845)>가 대표적으로 이 장르의 최고 걸작이다.


1850년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1848년의 2월 혁명 후 과학이 사회적, 지적 생활을 지배하자 문학에서도 낭만주의 대한 반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의 시대이다. 당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1830∼42)>가 낳은 실증주의는 거의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에른스크 르낭은 종교연구에도 실증주의적 방법을 적용했고, 이폴리트텐은 실증주의적 분석을 계속하여 생물학적 결정론을 주장했는데,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이론에 미친 텐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테오필 고티에에 의해 프랑스 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즉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방향을 돌리게 된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위해 고티에를 비롯하여 고답파(高踏派)의 거두 샤를 르콩트 드릴과 샤를 보들레르 등은 자신들의 작품에서 낭만주의적 요소와 고답파적 요소를 보이고 있지만 강력한 암시력에 의해 상징주의를 예고하고 있었다. 또한 1851년 12월 쿠데타 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된 빅토르 위고는 이 시기에 <레 미제라블(1862)>을 발표하였다.


사실주의는 시(詩)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리얼리즘은 본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화풍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그것이 문학에 적용되었고, 사실주의 이론은 샹플뢰리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그 이론은 아주 다양하며, 흔히 자연주의란 말과도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하여 플로베르, 보들레르, 알퐁스 데, 모파상, 공쿠르 형제, 뒤마, 에밀 졸라 등은 모두 사실주의 작가이자 자연주의 작가이다. 사실주의이자 자연주의 작가들의 대표작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1877)>, <나나(1880)>, <제르미날(1885)>,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1883)>, 알퐁스 도데의 <방앗간 소실(1869)>, <자트(1876)> 등이 있다.


그러나 1880년 이후 자연주의는 쇠퇴하고 상징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상징주의는 고답파 시의 딱딱하고 사늘한 형식과 자연주의 산문의 사진적 수법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러나 상징주의 운동은 주로 시의 혁신운동이었는데, 이 시의 혁신은 3명의 선구자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의 대표작은 폴 베를렌의 <지혜(1888)>, 아르튀르 랭보의 <일뤼미나시옹(1886)>, 스테판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1876)>이 있다. 이밖에 상징주의 최대의 시인은 모레아스, 앙리 드 레니에, 에밀 베라랭 등이다. 비평가로는 장르의 진화를 추구한 페르디낭 브륀테이르, 개인 연구에 뛰어난 에밀 파게, 인상주의의 쥘 르메트르, 상징주의 운동의 위대한 비평가 레미 드 구르몽 등이 있다. 이 시대에 귀스타브 랑송은 브륀티에르의 뒤를 이러 문학사의 방법을 확립해 오랫동안 그 권위자가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제 1차 세계대전은 기성 작가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젊은 대에게는 방향을 잃게 하고 반항심을 품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다다이즘 운동) 영감을 직접 잠재의식 속에서 끌어내려고 했다(초현실주의 운동)


전통적인 시를 제외한 현대시는 말라르메를 거친 발레리의 주지주의와 랭보를 거친 초현실주의로 갈라졌다. 주지주의파의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는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말(1948)>의 작가 자크 프레베르의 시는 샹송 가스 조르주 브랑상과 자크 브렐의 노래들과 함께 민중시로서 명성을 떨쳤다. 대전 후 프랑스 시의 주류는 르네 샤르, 피에르 에마뉘엘, 이브 본푸아로 대표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알이 바르뷔스의 <포화(1916)>와 같은 반전소설을 낳았다. 전후 프랑스 작품은 외국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발레리 라르보는 <연인들, 행복한 연인들(1923)>에서 내적 독백을 적용했다. 대전 직후에는 소설도 무의식의 연구 쪽을 향해갔으나, 세계공황 때91923∼32)부터는 사회 묘사와 윤리 문제로 관심이 옮겨갔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무의식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로이트,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탐구되었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27)에서 무의식의 심연을 뚫고 들어갔고, 앙드레 지드는 <교황청의 지하도(1914)>에서 무동기의 행위를 그렸다. 이외 로제 마르탠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1922∼40), 조르주 뒤아멘의 <파스키에가의 기록(1933∼45)> 등이 대표적인 가족소설의 계열에 속한다. 이들외 앙드레 말로는 <인간의 조건(1933)>, <희망(1937)>에서 중국 혁명과 스페인 내전을 그 면서 인간의 윤리에 대해 제기했다.


누보 로망(Nouveau Roman)


1954년의 문학적 사건은 19세 처녀 프랑수아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었는데, 이는 고전적, 전통적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러나 전통적 소설 개념은 알랭 로브그리에, 클 드 시몽, 나탈리 사롯트, 미셀 뷔토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로베르 팽제, 장 케롤 등의 '누보 로망'에 의해 오랫동안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 소설가들은 소설의 전통적인 틀 (연대순, 줄거리, 등장인물의 성격 등)과 작자의 전지전능성을 거부했다. 1963년에는 르노도상이 장 마리 르 클레지오의'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조서(調書)>에 주어졌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지적인 누보 로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 동향


1868년의 학생 봉기사건은 여권운동을 활성화했다. <제2의 성(1944)>의 작가 보부아르의 뒤를 이어 여러 여성소설가들이 여성의 조건을 다루었는데, 클레르 에츠렐리, 마리 카르디날, 상탈 샤와프, 엘렌 시크수, 그리고 뒤라스 등이 이에 속한다. 1980년 중반까지의 프랑스 소설을 '포스트 누보 로망의 실험적 소설로부터 전통적 형식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나타냈다. 미셀 투르니에는 '새로운 고전 작가'로 인정받는 현대의 최대 작가이고 <마왕(1970)>, <유성(1975)>, <질과 간(1983)>,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1968∼78년 5개의 소설에서 문학상을 받았다. 이 시대가 준 좌절감은 역사소설에 한결 흥미를 느끼게 했는데, 1980년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를 비 해 잔 부랭, 클로드 시몽, 크리스티안 생제 등이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마르셀 파뇰의 소년시절, 나탈리 사롯트의 <소년시절(1983)> 등과 같은 전기 또는 회고록도 많이 읽혀졌으며, 필리프 솔레프의 <여자들(1983)>, 조르주 바타유, 앙리 마쇼 등 난해한 작가들의 소설도 독자층을 넓혀갔다.


비평 


비평정신은 20세기 고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자크 리비에르에 의해 발생된 <신프랑스 평론(약칭 N. R. F.)>은 특히 이 비평정신을 무의식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 의해 갱신된 인간의 인식에 적용했다. 제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가장 중요한 비평가는 'N. R. F'의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였다.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작가에 대한 완전한 공감으로 비평을 하기보다는 설명하고 서술하는 쪽을 택했다. 그와 함께 발레리 라르보와 에드몽 잘루의 비평작품에는 유럽정신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앙드레 쉬아레스와 샤를 뒤 보스는 비평 속에서 영적인 획득물을 찾았는데, 특히 쉬아레스는 베르그송적인 방법에 따라, 지관 의해 작가의 영감과 직접 통하려고 했다. 피에르 라세르와 쥘리앵 벵다의 비평은 그들과는 달래 주지주의적이다. 데카르트적 인도주의자 알랭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식과 행동의 비평가였다.


알베레스, 모리스 나도, 피에르 앙리 몽, 클로드 에드몽드 마니, 가에탕 피콩 등의 비평은 인간 존재가 놓여져 있는 조건에의 추구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비평'으로 한데 묶여져 있다.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비평가들이 등장했는데,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의 창시자인 레비 스크로수, 미셀 푸코, 롤랑 바르트 등의 있다. 푸코의 '낱말과 사물(1966)'은 1940년대에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비중을 가졌는데, 그는 그후 <지식의 고고학(1966)>, <성의 역사(3권, 1976∼1984)> 등을 내놓았다.

 

* 출처: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