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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Russian literature, ― 文學]

Bawoo 2014. 12. 24. 21:45

러시아 문학 [Russian literature, ― 文學]

 

러시아어로 씌어진 문학작품.

 

러시아 문학의 적용범위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기록문학이 생겨난 11~16세기는 류리크 왕조가 지배하는 동슬라브족의 동맹체인 키예프 루시의 문학을 가리키며, 16~20세기초는 통일 러시아 문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중심부 문학이지 전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 1917년 이후의 러시아 문학은 러시아 공화국만의 문학을 가리키며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공화국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러시아 문학은 보통 11~17세기말의 고대와, 그후 근대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눈다. 근대는 다시 17세기말부터 1917년까지의 혁명 이전과 혁명 이후로 구분한다. 러시아의 고대문학은 대략 서유럽의 중세문학에 해당되는데 처음에는 키예프 루시가 문학을 주도했으나 몽골의 침략기인 13세기에 지방 문학의 중요도가 높아졌고 15세기말~16세기초에 이르는 동안에는 모스크바가 문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대 러시아 문학은 키예프의 대공 블라디미르가 988년에 동방정교회로 개종해 루시와 비잔틴 제국, 그리고 문학과 정교회가 결합하면서부터 내내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에서는 동슬라브족이 예로부터 입으로 전하던 구전서사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근대문학의 시작은 서구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미 17세기에 서구화는 눈에 띌 만큼 이루어졌으나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18세기초부터 20세기초까지는 서구, 특히 프랑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영국의 영향도 찾을 수 있는데, 18세기 중엽에 정기간행물이 많이 창간된 것이나 감상주의의 융성 등을 들 수 있다. 유럽의 시각에서 볼 때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전성기는 19세기였다.

1917년의 혁명은 근대 러시아 문학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혁명 이후의 문학은 고대부터 혁명 이전까지 쌓아온 전통을 발판으로 발전했지만 어느 정도 정치상황에 좌우되었으며 생활과 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친 소련 공산당의 엄중한 통제와 지도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작가와 국가(당)간의 심화되는 갈등이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유럽 문학과의 접촉이 재개되었고 작가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19세기초의 가장 위대한 시인은 알렉산드르 푸슈킨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도 탁월한 기교와 주제의 다양성을 볼 수 있지만 그를 어떤 시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은 작품은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1823~31)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이념과 등장인물의 조화, 도시와 시골 사회의 묘사, 가볍고 유머러스한 논평과 인간심리의 사실적 통찰의 결합, 단순하고도 깊이있는 언어의 구사 등을 이루어냈다.

초기의 장편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yudmila〉(1820)·〈카프카스의 포로 Kavkaski plennik〉(1822)·〈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ysky fontan〉(1824) 등은 대체로 가볍고 민속적이거나 낭만적 형식으로 씌었다. 그러나 〈집시 Tsygany〉(1824)·〈눌린 백작〉(1825)·〈콜롬나의 작은 집 Domik v Kolomne〉(1830) 등에서는 인간의 약점에 대한 해학적인 동정심을 가미해 더욱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장난스러운 풍자적 문체를 사용했다. 이 시기에 푸슈킨은 가장 뛰어난 서정시이자 흔히 인용되는 수사적인 시 〈예언자 Prorok〉를 썼다. 1820년대 후반과 1830년대 초반에 쓴 걸작으로는 〈폴타바 Poltava〉(1892)와 역작인 운문 동화 〈살탄 왕〉 등이 있다. 1833년에는 〈청동기사 Medny vsadnik〉를 썼는데, 이 작품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보잘것없는 인간을 휩쓸어버리는 자연의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푸슈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장대한 건설 이념과 그 저변에 깔린 공포를 그린 이 〈청동 기사〉를 능가하는 작품을 다시 쓰지 못했다. 그의 시적 드라마로는 사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31)가 있다.

 

이 시대 또 한 사람의 대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1837년에 푸슈킨의 죽음에 부치는 시를 써서 갑자기 유명해졌는데 그로 말미암아 카프카스로 추방당했다. 낭만주의적 경향이 가장 뚜렷한 그의 서사시 〈므치리 Mtsyri〉(1840)·〈악마 Demon〉(1829) 등은 카프카스에서 얻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푸슈킨 이전의 작가 중에서 이반 안드레예비치 크릴로프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우화를 러시아 문학의 보고에 남겨놓았다. 푸슈킨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바실리 주코프스키는 시인이자 번역가였으며 카람진의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시어 창조에 기여했다. 푸슈킨과 동시대의 시인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사람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바튜슈코프와 예브게니 아브라모비치 바라틴스키가 있다. 이 시기의 '시민' 시인(시는 사회적·시민적 명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시인들) 중에서는 데카브리스트인 콘드라티 표도로비치 릴레예프가 가장 뛰어났다. 그는 재정의 압제에 반감을 표현하고 이에 대해 싸우다 맞이하는 죽음을 찬미했다. 19세기 러시아 시인들 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시인은 표도르 이바노비치 튜체프로 유명한 시 〈마지막 사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가장 독보적인 시인은 시민시의 대표자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였다. 그의 장편설화시 〈코가 빨개지는 추위 Moroz krasny-nos〉(1863)는 농민들의 삶을 묘사하면서 사실주의와 전설을 잘 융합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에서 시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고 산문창작활동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푸슈킨은 만년에 차츰 산문에 힘을 기울였다.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Geroy nashego vremeni〉(1840)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의 바이런적 주인공은 레르몬토프 세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로, 재능은 뛰어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파괴적 욕구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19세기 소설가 중 처음으로 폭넓은 인기를 누린 작가는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자고스킨이었다. 1612년에 러시아가 폴란드군을 물리친 전투를 다룬 그의 소설 〈유리 밀로슬라프스키 Yuri Miloslavsky〉(1829)는 조야한 민족주의 정신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가장 인기있는 낭만주의 소설가는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투제프(필명 마를린스키)였다.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문작가로는 니콜라이 고골리가 있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고골리는 이방인의 시각에서 러시아인을 관찰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된 문체와 묘사를 통해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사회의 도덕적 결함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고골리의 풍자적 희극 〈검찰관 Revizor〉은 1836년에 상연됨으로써 그의 비상한 영향력을 입증해주었다. 이 작품은 어느 지방도시에 사는 타락한 관리들을 다루었지만 사실상 러시아라는 국가 전체의 소우주를 제시한 셈이었다. 이 작품이 상연 금지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고골리 자신이 유일하게 긍정적 인물이라 칭했던 웃음 덕분이었다. 얼마 후 그는 유럽 여행을 떠나 잠시 로마에 체류하면서 유명한 소설 〈죽은 혼 Myortvye dushi〉(1842)의 제1부를 완성했다. 그러나 고골리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이며 전제주의의 옹호자였으므로 비평가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처럼 이전에 그를 러시아 문학에서 '자연주의'파의 지도자이자 농노제의 적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고골리의 마지막 작품의 하나인〈외투 Shinel〉(1842)는 자연주의파 형성에 기여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하급관리를 다룬 소설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고

 

골리의 가장 뛰어난 계승자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였는데 〈가난한 사람들 Bednye lyudi〉(1845) 등의 초기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와 가난하고 타락한 하급관리를 주로 다루었다. 1849년에 그는 혁명조직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 직전에 감면되어 추방당했다. 10년 뒤에야 그는 유럽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잡지 〈브레먀 Vremya〉의 편집장으로서 문학적 명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1863년 폐간되었고 2번째 잡지 〈에포하 Epokha〉 역시 엄청난 빚만 남긴 채 파산했다. 그는 이렇게 절박한 상태에서 최초의 위대한 장편소설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1866)을 썼다. 그의 다른 대작들 〈백치 Idiot〉(1868~69)·〈악령 Besy〉(1871~72)·〈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1879~80) 등은 모두 작가의 놀라운 극적 재능, 사상적 소설가로서의 폭넓은 사실주의, 심리적 통찰력의 깊이, 삶의 비극적 측면을 묘사하는 능력, 그리고 탁월한 순간적인 조명을 보여주었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이와 비극적인 영역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단편소설이나 장편소설도 단순히 시사적인 여러 문제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농노가 지주보다 우월하게 묘사된 〈사냥꾼의 수기 Zapiski okhotnika〉는 러시아 농촌을 시적인 분위기로 묘사해 공감을 자아내는 농부들의 모습과 결합시켜 결과적으로 농노제 폐지에 기여했다. 처음 발표한 몇 편의 소설로 그는 진보적 사상가이자 당대의 우수한 산문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세대차의 쟁점을 다룬 그의 최대 걸작 〈아버지와 아들 Otsy i deti〉은 젊은 인텔리겐치아를 격분시켰는데(그들은 소설의 허무주의적 주인공 바자로프가 자신들을 희화화한 것이라 생각했음), 이후 그는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인기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러시아 사회의 모든 계층에 관한 씁쓸한 진실을 토로한 〈연기 Dym〉(1867)와 러시아 혁명운동을 분석하고 커져가는 지배계급의 세력을 예언적으로 조명한 〈처녀지 Nov〉(1877)는 급진파의 반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19세기의 또다른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대체로 문학계에서 초연했다. 2편의 대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는 그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가 1870년대말 급진적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뒤에 그때까지의 자신의 예술을 부정했을 때조차 이 최고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지닌 작가적 특성은 체험이라는 물리적 현실을 거의 영화적인 기교와 회화적 정확성으로 묘사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을 강렬하게 조명하는 천재적인 능력에 있었다. 동시에 그는 많은 인물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심리적으로 분석해 그들의 도덕적 문제와 진리추구를 규명해낼 수 있었다. 〈크로이처 소나타 Kreytserova sonata〉(1891)·〈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yicha〉(1886)·〈부활 Voskreseniye〉(1899) 등에서 발휘된 창조적 천재성은 많은 후기작품들의 오점이라 할 철학적·종교적 신념을 압도했다.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는 그의 뛰어난 소설 〈오블로모프 Oblomov〉(1859)에서 사실주의적 세부묘사를 거듭함으로써 게으른 주인공을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또 다른 주요소설가 알렉세이 피셈스키는 〈천(千)의 혼 Tysyacha dush〉(1858)에서 지방관료의 출세와 파멸을 그렸다. 19세기의 위대한 풍자작가 미하일 살티코프는 급진주의 운동의 대들보로서 19세기 가장 탁월한 소설 중의 하나인 〈골로블료프 일가 Gospoda olovlyovy〉(1876)를 썼다. 주인공 이우두슈카('작은 유다'를 뜻함)는 게으르고 쓸모없는 술고래로 고골리가 창조한 가장 추악한 인물을 능가했다.

 

러시아 최초의 주요 희곡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리보예도프의 운문희극 〈지혜의 슬픔 Gore ot uma〉(1822~24)이다. 고골리의 〈검찰관〉에 버금갈 만큼 러시아 희곡 발전에 질적·양적으로 크게 기여한 작가는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오스트로프스키로 〈파산 Bankrot〉(1850)·〈뇌우 Groza〉(1860) 등의 작품에서 모스크바 상인 계층의 비열한 상업윤리·무지·잔인성 등을 폭로하고 비난했다.

 

회고문학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특히 풍부하게 발견된다. 이 분야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작품은 세르게이 티모페예비치 악사코프의 〈가족 연대기 Semeynaya khronika〉(1856)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제1세대를 회고하는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지난 날과 생각 Byloye i dumy〉(1852~68)이다.

 

단편소설은 〈주술에 걸린 방랑자 Ocharovanny strannik〉(1873)의 저자 니콜라이 레스코프, 광기를 예리하게 분석한 〈붉은 꽃 Krasny tsvetok〉(1883)의 저자 프세볼로트 가르신 등 많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러나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인정받은 작가는 희곡의 탁월한 혁신가이기도 한 안톤 체호프였다. 체호프는 정치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최초의 러시아 작가였다. 그의 단편 대부분은 의과대학생이었던 시기와 그뒤 젊은 개업의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쓴 것이다.

그는 〈대초원 Step〉(1888)·〈지루한 이야기 Skuchnaya istoriya〉(1889) 등의 위대한 단편과 4대 희곡 〈갈매기 Chayka〉(1896)·〈바냐 아저씨 Dyadya Vanya〉(1897)·〈세자매 Tri sestry〉(1901)·〈벚꽃 동산 Vishnyovy sad〉(1903~04) 등에서 의사를 등장시켜 작중인물을 통해 인간의 약점과 괴로움을 전문적으로 진단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쌓은 의학수련을 반영했다.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쿠프린, 러시아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등은 모두 20세기초 산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작가는 노동자계급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토로한 막심 고리키였다.

가난과 학대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일찍부터 혁명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낭만적인 산문시 〈바다제비의 노래 Pesnya o burevestnike〉(1901)는 "폭풍이다! 폭풍이 몰려온다!"라는 후렴으로 혁명운동의 힘찬 구호가 되었다. 첫번째 희곡이자 가장 인기를 얻은 〈밑바닥에서 Na dne〉(1902)로 고리키는 사색하는 낙오자들을 러시아 무대에 올려놓았다. 〈어머니 Mat〉(1906) 등의 초기 장편소설을 제외하면 그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자전적 3부작 〈유년시절 Detstvo〉(1913)·〈세상속으로 V lyudyakh〉(1915~16)·〈나의 대학들 Moi universitety〉(1923)이다.

 

19세기말의 상징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시의 부활을 주도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솔로비요프였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세계는 추상적·형이상학적 실체를 나타내는 상징의 체계라는 믿음을 표현했다. 콘스탄틴 발몬트와 발레리 브류소프도 재능있는 시인이었지만 가장 위대한 시인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였다. 혁명과 신을 묵시록적인 전망 속에서 결합시킨 그의 〈열둘 Dvenadtsat〉(1918)은 12명의 적군(赤軍) 병사가 그리스도의 인도로 신세계의 사도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밖의 주요 상징주의 시인으로는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이바노프, 표도르 솔로구프, 안드레이 벨리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전문지식을 현실개념에 도입했다. 그리스 학자인 이바노프는 그리스도와 디오니소스 일체설을 주장했고,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 벨리는 고골리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소설들로 자신의 철학을 나타냈다.

상징주의의 지배에 대한 반동으로 시인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는 1911년에 장인기질과 표현의 명징성을 강조하는 아크메이즘이란 시 운동을 창시했다(→ 색인 : 아크메이스트). 아크메이즘의 지도적 시인은 구밀료프의 부인 안나 아흐마토바였다. 그녀는 혁명 전에 감동적인 서정시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지만 소비에트 시기에는 탄압을 받았다.

 

1910년에는 벨리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흘레브니코프가 가장 혁명적인 시 운동을 창시했다. 미래파의 창립 선언은 1912년 〈공공 취향에 가하는 따귀 Poshchochina obshchestvennomu vkusu〉라는 제목으로 등장했는데, 여기에 서명한 예술가 가운데는 혁명 후 여러 운동의 '계관시인'적 존재가 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코프스키도 있었다. 미래파는 인위적으로 보이는 기존의 문학형식을 버리고 일반대중의 언어를 채택함으로써 독자의 의식을 자극하려고 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처음에 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했으나 후기의 풍자극 〈빈대 Klop〉(1929)·〈목욕탕 Banya〉(1930) 등에서는 소비에트 관료제에 대한 환멸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정치적 환멸 속에서 1930년 자살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미래파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1917년에는 〈누이는 나의 삶 Sestra moya zhizn〉(1922)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를 출판했다.

 

1953년 이후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인 1962~63년에는 문학이 형식에서나 소비에트 사회의 비판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전보다 자유로워진 기간으로서 머뭇거리는 해빙의 조짐이 드문드문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에도 파스테르나크가 오랜 침묵 끝에 쓴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는 출판이 금지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원고를 서유럽으로 반출시켰고 결국 1957년 이탈리아에서 책이 출판되었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했고 이 건을 계기로 러시아 문학은 지리적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훌륭한 작품, 특히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작품은 러시아어로 씌어졌을망정 서유럽에서 출판되었다.

한때 정치범이었던 랴잔의 이름없는 교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62년에 스탈린 강제수용소의 일과를 진솔하게 그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din den iz zhizni Ivana Denisovicha〉를 발표하자 당국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뒤 당국과 작가동맹 관료들은 그러한 폭로를 방지하고 긍정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나타내는 낙천적 문학을 부활시키기 위해 새롭게 입지를 밝혔다. 〈암병동 Rakovy korpus〉(1968)·〈제1원 V kruge pervom〉(1968) 등의 스탈린 사회의 묘사를 전개시킨 솔제니친의 후기소설은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이 작품들은 타자기로 직접 쳐서 만든 사본, 즉 사미즈다트(samizdat)인 자가출판의 형태로 얼마 동안 유통되다 마침내 서유럽으로 반출·출판되었다. 솔제니친은 1974년에 국외로 추방당했다.

 

해빙기의 작가동맹과 주요문예지들은 젊은 작가들의 등단을 도와주었다. 가장 유능한 신예 작가들은 얼마 후 문학형식과 소비에트 생활을 탐구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허용된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경계선을 넘었기 때문에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의 선례를 따라야만 했다. 그들 중 가장 탁월한 작가는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블라디모프, 바실리 파블레비치 악쇼노프 등이었다. 보이노비치의 〈이반 촌킨 일등병의 삶과 기이한 모험 Zhizn i neobychaynye priklyucheniya soldata Ivana Chonkina〉(1975)은 순진하고 예민하며 나약한 주인공을 내세운 통렬한 풍자이며 블라디모프의 〈충실한 루슬란 Verny Ruslan〉은 수용소에 있는 개의 눈을 통해 스탈린 치하 러시아와 그 유산을 조명하고 있다. 악쇼노프의 가장 훌륭한 소설 〈화상 Ozhog〉(1980)은 1960년대의 젊은이들이 조국의 이전 시대를 재발견하고 현재를 재평가하면서 고통스럽게 성숙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부 훌륭한 산문작가들이 갈등과 논쟁이 한창인 중에서도 국내에서 계속 출판을 했다. 그중에서도 농촌작가들이 가장 뛰어났는데, 이들은 시골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기술적 '진보'의 시대에 인간의 정신적 발전을 조명했다. 바실리 벨로프, 표도르 아브라모프, 발렌틴 라스푸틴이 이 작가군에 속한다. 바실리 슉신의 함축성있는 단편소설은 최근에 도시화된 농촌 주민의 해체된 의식을 반영했다. 반면에 유리 트리포노프는 섬세한 심리적 통찰력이 엿보이는 아주 모호한 산문을 통해 현대 소비에트 지식인의 윤리적 딜레마를 노출시켰다. 그의 작품은 때로 소련 역사를 바라보는 공적인 시각 전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듯이 보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초에 시 낭송은 어느 정도 허용되던 정치적·문화적 주제에 관한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고 종종 넓은 운동장을 꽉 메우는 공공행사가 되었다. 예브게니 예프투셴코의 웅변적인 시민시는 이런 행사에 적합했다. 당국이 시 낭송회에 점차 우려를 표명하자 테이프 녹음이 좀더 편리한 수단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민요, 수용소 노래, 가요 등을 배경으로 기타 반주를 곁들인 불라트 오쿠자바, 알렉산드르 갈리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등의 서정시를 감상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는 철학적 성향의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와 요세프 브로트스키(1972 망명), 실험적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그리고 부드럽고 회고적인 벨라 아흐마둘리나 등이 있다. <출처: 다음백과-石玲仲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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