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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이 재사 건물의 바로 뒤는 새로 설단한 묘역이다. 재사 영역과 묘역 사이는 상당한 단층이 마련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축대를 쌓고, 뒤쪽의 비탈 부분은 키 작은 나무를 심어 뒤덮게 하였다. |
건축 배경 |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의 묘소 아래 새로 선대의 묘들을 설단하고 묘사를 돌보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
건축 특징 |
현대식으로 웅장하게 지은 건물이다. |
건축 구성 |
와룡에서 정산으로 나가는 길. 주진교를 넘어 정산 가까이에 이르면 길 가에 역동 우탁의 재사가 보인다. 나지막한 산의 기슭. 산 위에는 역동 우탁의 묘소가 있다. 묘소는 동남향을 하고 있다. 우탁 묘소의 서남쪽 방향으로는 남향하고 선 단소가 있다. 새로 만든 단소이다. 그리고 그 단소의 아래쪽에 단소와 같은 방향으로 남향하고 선 재사가 있는 것이다. 재사 역시 만든 지 오래 되지 않는다. 재사는 세 영역으로 나뉜다. 공간을 □자 형상 둘을 이어붙인 형상이다. 서쪽의 □자 형상은 좀 작고, 동쪽의 □자 형상은 좀 크다. 서쪽의 □자 형상은 관리사이다. 4칸 규모이고 울타리 안에 동, 서 방향으로 지어져 있는 집이다. 남쪽으로부터 부엌, 방, 마루, 방의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현대식 생활을 할 수 있게 고려된 건물이다. 이 건물이 작은 □자 형상의 서쪽 끝을 이룬다. 작은 □자 형상의 북쪽 끝에는 작은 헛간채가, 동쪽 부분에는 큰 □자 형상의 서쪽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의 북쪽 끝부분에 작은 쪽문이 마련되어서 큰 □자 건물 쪽으로 통한다. 큰 □자 영역이 본채가 있는 곳이다. 본채의 정문은 닫혀 있다, 높은 솟을 대문이 양쪽으로 방을 거느리고 있다. 이 방의 좌우로는 높은 담장이 이어진다. 높은 대문 앞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거의 정사각형 모습의 안마당이다. 마당에는 포석이 깔리고, 잔디가 잘 심겨져 있다. 정면으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건물이 보인다. 높고 웅장하다. 새로 만든 집이지만 목조건물이다. 정정재(鼎井齋)라는 큰 글씨가 처마 밑에 나붙어서 이 집이 재사 건물임을 알게 한다. 건물의 전면은 유리를 끼운 문으로 처리되어 있다. 안팎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다. 방 안은 좌우로 같은 규모의 통 방을 두고 가운데는 마루방이다. 통방은 전면 1칸, 측면 3칸 규모이다. 동쪽 끝의 통방에는 영모실(永慕室)이라는 현판이, 서쪽 끝의 통방 안에는 역대 단양우씨 종친회장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다. 이 방은 아마도 임원실인 모양이다. 가운데의 통방에는 봉상정(鳳翔亭)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마루방은 바닥이 미끄러운 마루판으로 되어 있고, 벽도 천정도 현대식으로 미끈하게 처리되어 있다. 좀 전통이 가미된 현대식 회의실을 염두에 두면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작은 口자 영역과 큰 口자 영역을 가르고 있는 것은 정면 1칸, 측면 3칸 건물이다. 앞에 마루가 가설되어 있는 방들인데, 강의실(講誼室)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왔을 때 머무는 공간으로 이용되는 모양이다. |
현판 |
정정재(鼎井齋) |
재사의 강당 건물에 걸려있는 현판이다. |
강의당(講誼堂) |
영모실(永慕室) |
삼의문(三宜門) |
봉상정(鳳翔亭) |
강당 건물 마루방에 걸려있다. |
문중 이야기 |
- 우탁의 예안 정착 |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은 예안지방으로 내려와 안동지역 사림에 영향을 끼친다. 안동지역 사림은 15세기를 거치면서 양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고, 16세기를 거치면서 질적인 비약을 이루어낸다. 그리하여 16세기 이후의 조선 지식지도에 있어서 중요한 족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물론 퇴계 이황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게는 손꼽을 만한 스승이 없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 내려와 만년을 보낸 역동 우탁과 퇴계 이황을 확실하게 연결시켜서 선후 관계 속에 집어넣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분명한 사승 관계는 없을 지라도 지역에 뿌려진 역동 우탁이라는 씨앗이 은연중에 싹 트고 자라나 오랜 뒷날 퇴계 이황이라는 열매로 결실된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 이황 역시 이러한 우탁의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향촌의 사림과 힘을 합하여 역동서원을 세우고, 우탁을 배향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역동 우탁의 종가는 잘 유지되고 있지 않다. 오래된 가문이지만 고택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여기 묘소 아래의 재사 역시 오래된 가문답게 오랜 연륜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역동 우탁 가문의 전성시대가 고려 말기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부분이다. 우탁 이후 우성범에 이르는 4대는 고려 말기 이 가문의 영화를 대표한다. 우성범 이후는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관련문집 |
- 역동서책출납기(易東書冊出納記) |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서책의 출납을 관리하던 장부이다. |
관련유물 | |
- 단양우씨보계변정록(丹陽禹氏譜系卞正錄) | |
안동정병재사(安東鼎幷齋舍)의 단양우씨보소(譜所)에서 목판본으로 1911년 발간한 것이다. 이는 단양우씨 충정공(忠靖公)의 후손들이 계통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 충정공이 문희공(文僖公)의 손이라든가, 심지어 적성군(赤城君)의 양자(養子)라는 설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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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현록(尙賢綠) | |
우탁(禹倬, 1263∼1342)의 시문집으로 2권 1책의 목판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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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원재(追遠齋) | |
단양우씨 종친회에 보관되어 있는 현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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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정재사(鼎井齋舍) | |
단양우씨 종친회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이다. |
관련인물 |
- 우탁의 가계 |
우탁(禹倬, 1263~1342)은 자(字)를 천장(天章)이라 하고, 호를 단암(丹巖) 또는 백운당(白雲堂)이라 한다. 그는 고려 1262년(원종 3)에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우천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향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17세에 향공진사가 되었으며, 충렬왕 4년 29세의 나이로 지공거(知貢擧)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가 과거 급제 후 처음으로 얻은 직책은 영해(寧海) 땅의 사록(司錄)이었다. 이 때 영해군에는 팔령(八靈)이라는 귀신을 숭배하는 미신이 있어서, 군민들은 신사를 짓고 그 귀신을 아주 성대하게 제사지내곤 하였다. 우탁은 이 영해군의 사록으로 부임하자마자 이 팔령이라는 귀신을 제사지내는 신사를 부수어 바다 속에 쓸어 넣어 버렸다. 그리하여 미신적인 숭배 의식을 근절시켰다는 것이다. 우탁은 이 밖에도 아홉 고을에 걸쳐 요망한 귀신들을 숭배하는 사당과 허가받지 않고 세운 절들을 태워 버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건립한 절만을 제외하고 그의 손이 미칠 수 있는 땅의 모든 종교적 건축물들을 제거하여 버린 것이라고 하겠다. 우탁이 영해군의 사록이라는 직책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언제 어떤 벼슬자리로 나아가는지 하는 것들은 분명치 않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가 이러한 지방관의 직책을 거쳐 중앙으로 진출하며, 그래서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성균(成均) 줴주(祭酒)의 자리에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감찰규정 재직 시 그가 충선왕에게 도끼상소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우탁은 성균 줴주를 그만두고 은거한다. 그가 은거한 땅은 예안현 서남쪽 5리쯤 되는 곳으로, 현재의 안동군 와룡면 선양동이다. 우탁은 여기에서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후에 사람들은 우탁이 은거했던 마을을 지삼의(知三宜), 또는 지삼리(知三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학(道學)과 충의(忠義)와 절조(節操)의 세 가지 덕을 갖춘 우탁이 만년을 보낸 땅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호칭이라 한다. 우탁은 충혜왕(忠惠王) 3년, 1342년 2월 7일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주변 기록들에 의하면 우탁은 성리학 도입기의 최고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역(易)』에 대한 식견은 당대 최고의 것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한 우탁의 견해들은 지금은 독립된 자료로써 우리의 수중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애초에는 문자로 정리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탁의 저작으로는 『초학계몽편(初學啓蒙篇)』과 『가례요정편(家禮要精篇)』,『도주편(徒酒篇)』 등이 있었고, 『역논(易論)』과 『역설(易說)』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저작들 중에서 우탁의 성리학적 성취를 가장 분명하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역논』과 『역설』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적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우탁의 배위는 영천이씨이다. |
역동 우탁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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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생활 | |||||||||||||||||||||||||||||||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이 되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 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 |||||||||||||||||||||||||||||||
팔령신(八鈴神)을 물리침 | |||||||||||||||||||||||||||||||
우탁이 영해부사로 부임해 있을 때의 일이다. 영해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 음사 타파에 힘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우탁(禹倬)은 이렇게 하는 데 실제로 두드러진 행적을 남겼다.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가 신유학을 받아들이면서 유교 질서의 철저한 확립을 역사적인 사명으로 삼았음은 널리 알려진 바인데, 우탁은 그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것 같다. 우탁은 영해 사록으로 부임했다. 사록은 오늘날의 검찰 업무에 해당하는 일을 맡았으니 음사 타파가 자기의 소관이다. 우탁은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에 영해 사록이 되었는데, 군에 요사스러운 사당이 있어 팔령이라고 하며, 백성이 괴이한 귀신에 미혹되어 제사를 아주 난잡하게 만들었다. 우탁이 그곳에 이르러서 즉시 이것을 부셔서 바다에 빠뜨리니, 음사가 드디어 끊어졌다고 한다. | |||||||||||||||||||||||||||||||
도끼를 들고 대궐에 들어간 우탁 | |||||||||||||||||||||||||||||||
충렬왕이 승하하자, 원나라에 있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빈전(殯殿)에 제사를 행하고, 그 부왕(父王)의 후비인 숙창원비(淑昌元妃)가 거처하는 그 친정으로 가서 숙창원비를 간음했다. 충선왕은 숙비의 교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팔관회(八關會)도 멈추게 했으며, 숙비는 왕의 총애를 믿고, 그 방자하고 사치함이 이를데 없어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쳐 그 환심을 사기에 급급한 판이었다. 왕의 불륜과 숙비의 방자함에 뜻있는 선비들이 모두 분격했고, 백성들도 못 마땅히 여겼으나, 그 무렵 조정에는 나약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가득하여, 감히 바로 간(諫)하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우탁이 분연히 도끼를 가지고 거적 자리를 메고 대궐에 나가 왕의 비행을 직간하는 과감한 소를 올렸다. 가까이 모신 신하가 그 상소를 펴들고 겁에 질려, 차마 임금 앞에서 읽지를 못하여, 우탁이 소리를 가다듬어,“그대는 근신(近臣)이 되어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 허물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대의 죄를 아는가.”라고 꾸짖으니, 신하들이 모두 떨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
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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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한희유(韓希愈), 최유엄(崔有渰), 장일(張鎰), 홍자번(洪子藩), 유천우(兪千遇), 신연(申衍) | |||||||||||||
의리지학(義理之學)의 학문 | |||||||||||||
우리나라에 정전(程傳)이 비로소 들어왔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정전을 보고 그 학문이 바른 것을 알자 한 달 남짓 폐문(閉門) 연구하여 빠짐없이 해득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의리지학(義理之學)이 비로소 행하게 되었다.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은 주자가 상수(象數)로써 해석한 데 반하여 이학(理學)의 입장에서 주로 의리에 의거하고 순수한 공맹(孔孟)의 도덕으로 풀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역동의 정전을 얻은 후부터 역에 있어서 선유들이 어려워 해석하지 못하는 바를 다 깨우쳐 이수를 풀었다. 묘한 것을 찾는 공부가 익숙해져서 문득 보면 다 알고 혹 극히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반일이나 종일 연구하면 밝게 해석되고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삼일을 지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탁은 “천도(天道)는 경(敬)의 체(體)가 되고, 인도(人道)는 경(敬)의 용(用)이라 하여, 경은 인간을 가꿈에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바탕으로 자아를 확충하여 완성의 경지를 기하려면 한결같이 자신을 성찰하여 사심을 억제하고 자기의 본성에 갖추어있는 천리를 존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경을 지켜야만 한다.”고 했다. 경을 지키고 도를 행하려 전일하게 닦아 나가면 타고난 자질에 따라 쉽고 어려움의 차이는 있으나 비록 어리석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으니, 이는 곧 후천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
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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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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