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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嘆老歌(탄로가) 易東禹倬(1263-1342)

Bawoo 2017. 4. 10. 22:22


嘆老歌(탄로가) 易東禹倬(1263-1342)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없다. 


잠깐만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안동에서 역동과 관련된 유적은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묘소와 재실, 와룡면 오천리의 역동 유허비(경북유형문화재 제30호)와 역동서원등이 있다. 역동유허비는 원래 예안면 선양동 선생의 옛 집터에 세워졌으나 이곳이 안동댐 때문에 수몰되면서 1975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 역동서원은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복원되었다.


역동서원은 퇴계의 발의의 따라 1570(선조3년)에 예안 부포 오담에 세운 안동 최초의 서원이다. 이 나라 성리학의 거두 퇴계의 발의로 창건되었으니 이 서원의 위상은 남다르다. 서원이 창건되면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역동서원이 사액된 것은 1684년(숙종 10년)이다. 그 후,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69년에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1991년 안동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서원이 학교 안에 들게 되자 단양 우씨 문중에서 서원을 학교에 기증함으로써 역동서원은 안동대 부속서원이 되었다. 

잘 정비된 대학 교정 안에 서 있는 역동서원의 명교당에선 남녀 대학원생이 문짝에 창호지를 바르고 있었다. 바깥에는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의 활기가 손에 잡힐 듯했지만, 서원 안에 고인 것은 쓸쓸한 적요다. 입도문 오른편에 역동이 남긴 시조 두 수가 새겨진 시조비가 서 있다.




▲ 서원 입도문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없다. 
잠깐만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우탁이 남긴 세 수의 시조는 흔히들 '탄로가(嘆老歌)'로 불린다. 주제는 말 그대로 '늙음에 대한 한탄'이 다. 탄로가는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예안에 은거해 학문을 닦던 역동이 어느덧 백발이 되어버린 자신의 노화를 안타까워하며 읊은 노래다. 

눈을 녹이는 '봄바람'으로 백발을 녹여 자신의 젊음을 되찾겠다고 노래하는 첫 수는 '탄로'의 한탄 속에서도 인생을 달관한 여유를 보여준다. 노화를 체념하기보다 긍정하는 시적 자아의 정신은 '춘산'의 '봄'으로 드러나고 백발을 '해묵은 서리'로 표현하는 비유도 참신하다.

둘째 수에서는 자연히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면서도 '지름길'로 오는 '백발'을 노래하는 관조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셋째 수에서는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꽃밭)을 탐하는 화자의 인간적 욕구를 고백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에 맞서 보려는 인간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노화는 운명처럼 진행된다. 청춘의 덧없음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은 백발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의 주제는 '늙음의 한탄'에 그치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헛된 노욕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지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동이 남긴 시조는 실제 세 수지만, 역동서원 앞은 물론,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재실 앞 시비에도 두 수만이 새겨져 있다. 하필이면 빠진 것은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다고 진솔하게 고백하는 마지막 수다. 후인들은 고매한 성리학자의 '인간적 욕망'을 엿보는 것이 외람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역동 우탁의 묘소는 예안면 정산리 '웃솥우물'에 있다. 선생의 재사 정정재(鼎井齋) 오른편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선생의 묘소가 있다. 넉넉한 후손을 둔 덕분에 묘소는 물론이거니와 재사도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 예안면 정산리 '웃솥우물'에 있는 역동 선생의 재사인 정정재.


▲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역동의 묘소. 묘소 아래 선생의 재사 '정정재'가 있다.



재사의 삼의문 왼편에 있는 시비에 그의 한시 '영호루(映湖樓)'가 새겨져 있다. 이 누각에 올라 읊은 이 시에 대해 국문학자 조동일은 '앞뒤 시기 다른 몇 사람이 영호루를 두고 지은 시와 견주어보면 그 근처에 사는 농민의 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데 특색이 있다.'고 설명한다. 

嶺南遊蕩閱年多(영남유탕열년다)    영남을 여러 해 동안 두루 돌아다니면서, 
最愛湖山景氣佳(최애호산경기가)    이 물가 산의 경치를 가장 사랑하네. 
芳草渡頭分客路(방초도두분객로)    풀 향기로운 물결 머리 나그네 길 갈라지고, 
綠楊堤畔有農家(녹양제반유농가)    버들 푸른 둑 곁에 농가가 있구나. 
風恬鏡面橫烟黛(풍념경면횡연대)    바람 잔 거울 위로 눈썹 연기 비끼었고, 
歲久墻頭長土花(세구장두장토화)    오랜 세월 담 머리에 흙꽃이 자랐구나. 
雨歇四郊歌擊壤(우헐사교가격양)    비 갠 뒤에 사방 들에서 격양가 노래할 때, 
坐看林杪漲寒槎(좌간림초창한사)    숲가에 밀린 차가운 뗏목을 앉아서 본다. 

▲ 예안면 정산리 선생의 묘소




'성리학을 표방하며 고려 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였지만 아직 그 시대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할 단계가 아니었고 문학에서 이룬 바도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안동지역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고장으로 보면서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향토시가의 유풍이 '역동의 시조'를 기원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라는 시가문학사적 관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초기 성리학을 풀어 이 땅의 신유학의 문을 연 우탁은 만년에 쓸쓸한 '탄로'의 시간을 거쳐 여든한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천도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좌절했고, 안동 예안으로 퇴거해 후진을 길렀다. 

그는 혁신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가 쓴 세 수의 시조 작품은 700여 년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아 오늘날 이 시가 형식의 질긴 생명력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는 시대를 넘어 소통하는 문학의 면모와 늙음을 바라보는 눈길과 지혜에 고금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단양의 사인암은 역동이 지냈던 정4품 사인(舍人) 벼슬의 이름을 딴 암벽이다.


시조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형성,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문학 중 유일무이한 정형시다. 시조는 국문학사에 명멸해 간 여러 시가 형식 중 가장 생명력이 긴 갈래로 지금도 즐겨 불리고 있다. 현대인의 정서를 담는 데는 힘이 달릴 것 같은 이 오래된 시가 양식이 이 날까지 장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조의 형성은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 왕조의 지도 이념으로 각광 받게 된 주자학(성리학)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시조는 고려의 타락 부패한 불교를 극복하고 여말 이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떠오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 이른바 신흥사대부에 의하여 성립된 새로운 시형이었던 것이다. 

이들 신흥사대부는 원래 지방의 중소지주에 지나지 않는 향리 출신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배력을 행사했지만 지배체제를 합리화할 이념은 갖추지 못한 권문세족과 대결한 이들은 불리한 처지를 사상과 문학적 역량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결국 그들은 역사 창조의 방향과 논리를 휘어잡음으로써 승리를 거두어 조선 왕조를 열었다. 

현재까지 전하는 시조집에 작품을 남긴 고려 시대의 작가로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 1262~1342)과 충혜왕 때의 이조년, 공민왕 때의 이존오·길재·원천석·이색·정몽주 등이 있다. 이들이 여말선초의 신흥 사대부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 가운데 역동 우탁은 출생지인 단양의 단암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구계서원(영남대 구내로 이전), 예안의 역동서원 등에 봉안된 유학자다. 그는 성리학을 표방하며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다. 안향과 백이정이 원나라에 가서 신유학을 받아들였다면, 역동은 이를 홀로 깨쳐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한 사람인 것이다. 

역동은 관학의 확립에 힘쓰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명(講明)하면서 성리학의 이론과 실천적 태도를 강조하는 등 여말 유학 진흥에 힘썼다. 그는 경사(經史)에 능했고 역학(易學)에 깊었다. '역동(易東)'이란 선생이 '역'을 해득하여 강학함으로서 '동쪽'(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현재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다. 자는 천장, 시호는 문희, 본관은 단양이다. 태어나서 사흘째부터 울기 시작, 울음을 그치지 않자, 집안에서는 크게 걱정하였는데 한 노승이 지나가며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먼. 큰 인물이오." 하였다는 설화가 전하니 아무래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양에 남아 있는 역동의 유적으로 대강면에 있는 사인암이 있다. 우탁은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인 정 4품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냈고 이후 여기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런 연유로 인해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가 그를 기려 남조천 강변의 50미터 높이 기암을 '사인암'이라 지었던 것이다.


▲  김홍도의 사인암 주변의 바위에는 당시 우탁 선생께서 두었다는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김홍도의 그림 사인암   


단양 출신인 그가 경상도와 인연을 맺은 건 12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사록으로 부임하면서다. 그는 영해에 요괴한 신사(神祠)가 있어 백성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고 이를 철폐하고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그의 강직함은 이른바 '지부(持斧) 상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충선왕이 선왕인 충렬왕의 후궁과 밀통하자 그는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하였다. 신하들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왕을 모시는 신하로서 그릇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지금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일갈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왕이 부끄러워하였다. 

그 후 왕이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으므로 관직을 물러나 안동 예안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마을을 도학, 예의, 절조의 세 가지를 가르친 곳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지삼의(知三宜)'라 불렀다. 그러나 이 마을(예안면 선양리)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니 역동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다. 단양 우씨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신사를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다.[1]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로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로 있을 때 그곳에 휴양을 가서 이름이 붙여졌다.

1570년(선조 3) 이황(李滉)의 발의로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

관련 항목

退溪선생과 陶山十二曲

내성초등학교 교장 李 東 敬

. 머리말

. 도산십이곡의 분석

. 도산십이곡에 나타난 교육사상

. 맺음말

. 머리말

현대사회는 자기 상실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말기 외세에 의한 의존적 개화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상실이란 큰 병에 빠지게 만들었다. 더구나 일제의 침략과 6.25란 동족 상잔의 큰 비극은 인간의 존엄성도 비하시켰다. 그리고 경제적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주지적 형식주의에 빠져 인간 소외 금전 만능주의 풍조에 휩쓸리게 되었다. 현대사회의 자기 상실증이란 큰 병폐에 빠져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인간 교육이 더욱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의 삶을 스스로 이해하고 자기란 존재를 인식하고 인간으로 자기를 성찰할 때 인간 본연으로 삶을 영위하며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유교의 전통 윤리관에 의해 규범적 인간이 형성되었다. 그 당시는 도덕적 규범도 사변적인 논증에 의해서 규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노래 가락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켰다. 흔히 유학자라면 문학을 도외시하고 사상적인 면만 강조했다고 하나 성리학의 대가로서 4세기 동안 이 땅에서 추앙을 받아 왔던 퇴계도 문학을 애호한 사상가였다.

퇴계는 일찍이 학자로서 문장을 해득하지 못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문학을 알지 못하는 학자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퇴계의 도산십이곡에 나타난 교육적 사상을 규명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분석 고찰함으로써 현대 학교 윤리교육에서 지향할 점과 현대인의 교육적 수양을 고양하는데 하나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퇴계의 문학에 대한 편수는 매우 방대하다. 그러나 여기서 알고자 하는 것은 연시조로 된 도산십이곡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도산십이곡의 그 문학적 언어 발달 분야보다는 인간 존중과 윤리교육 차원에서 각 곡의 현대적 의미를 해석하고자 한다.

 

. 도산십이곡의 분석

퇴계가 문학가이라기보다는 성리학의 대가로서 지금까지 4세기 동안을 이 땅에서 스승으로서 추앙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퇴계 자신이 일찍이 학자로서 문장을 해득하지 못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문학을 알지 못하는 학자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퇴계는 문학에 있어서도 역시 하나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한 대가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가 쓴 도산십이곡이라는 시조는 실로 퇴계의 여러 편의 시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쉽게 보고 이해하도록 국한문혼용체로 쓰여진 교육적 시가이다. 특히 조선시대 모든 가곡집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1. <도산십이곡>에 대한 퇴계의 자평과 그 내용

이 도산십이곡은 도산잡영매화시 등과 함께 목 각본으로 도산서원 장서각에 판본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본 곡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는 퇴계 문집 중에 실린 퇴계 스스로 쓴 도산십이곡발이다. 퇴계는 <>의 첫머리에 본 곡에 대한 저작 동기를 밝혔다.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담패설로 되어 아름다움이 모자랐다. <한림별곡>과 같은 는 문인의 말씨에서 나왔으므로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늙은이의 실없는 장난기로 더하여 군자로서의 숭상할 바가 못되고 다만 李鼈(이별)이 지은 <육가>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많이 전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이것보다 나을 듯 하나, 역시 그 중에서 세상을 오만하게 보는 뜻은 있으나, 따뜻하고 부드러움과 다만 돈독하며 후덕함이 부족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퇴계는 특히 고려 시대 한림원에서 여러 선비가 지었다는 한림별곡과 조선시대에 장육당 이별(A.D 1300년경)이 지은 육가는 세상을 오만스럽게 보며 노래한 작품으로 보아 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사치스럽고 교사함의 한계를 엄격히 구별하였다.

여기에서 시풍에서 아름다움과 사치스럽고 교사함을 구별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아름다움)는 시경에 있는 것으로 溫柔敦厚(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돈독하여 후덕함)로 쓰여졌으며, (오만함)은 이별이 지은 육가를 대표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육가세상을 오만스럽게 봄으로 말하였으며, 교사하고 사치스러움은 한림원의 여러 선비가 지은 한림별곡으로써, (음란)衿豪放蕩(호사하며 방탕함)衰慢戱狎(힘없는 늙은이의 농담)하여 자기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퇴계는 이미 아름다움과 음란함에 대하여 엄격한 한계를 지은 동시에 또 우리의 곡이나 가사는 한시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또한 동시에 이를 쉽게 익히기 위해 우리에게 맞는 노랫가락의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노인(퇴계의 자신)은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어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俚俗(세상의 풍습)의 말로서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풍습을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퇴계는 우리의 곡이나 가사는 가락이 필요하고, 가락을 하려면 또 반드시 한글로 옮겨 적어야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 보아도 우리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또 자신의 시조가 장육당 이별의 육가를 대략 모방하였음을 도산유묵에서 밝혀놓았다.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다.

(故嘗略傲李歌, 而作爲陶山六曲者二焉)

 

여기서 퇴계는 이미 李歌(이별 육가를 말함)의 내용이 대단히 오만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결코 그 내용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 형태적인 모방에 있어서도 역시 전체가 아니고 부분이다.’라고 밝혔다.

도산십이곡의 본제는 도산육곡-지일도산육곡-지이로 되었고 지일. 지이가 각각 육곡으로 되어 있으므로 합하여 십이곡이 되는 것이다. 퇴계는 그 전육곡에서는 를 말한 것이요, 후육곡에서는 을 말하였음을 스스로 밝혔다.

 

도산육곡을 지은 것이 둘인데, 其一에는 지를 말하였고, 其二에는 학을 말한 것이다.

우리의 옛 시조는 대부분 풍설과 화초만을 읊은 낭만적이요 풍류적인 음률로서 거의 천편일률로 지어져 있는 것에 비하여, 여기서는 을 향하여 비상한 적극성을 띠었던 것이다.

퇴계는 본 곡에 대한 중요한 응용은 가락에 있음을 말하였을 뿐 아니라,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을 도산유묵에서 말하고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책상머리에 비스듬히 하여 머리를 팔로 꿰어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한편 그들에게 춤을 추게 함으로써 거의 더러움(세상의 나쁜 풍속이나 생각)을 씻을 수 있으며, 마음을 새롭게 하고 서로 어울리게 하는데 있어서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와의 어울림이 함께 할 것이다.

 

퇴계는 시가와 음악을 향유함에 있어서는 연령의 한계를 지을 것도 없이 가장 쉽게 노래를 부르고 들으면서 남녀 노소가 함께 어울리면서 즐기고 가정이나 사회의 융화를 이룩하는 하나의 필수적인 과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로써 세파에 휩쓸리고 골몰하던 인생으로서 깃들기 쉬운 야비함과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인생의 끝맺음과 사회의 안녕 질서를 이를 통하여 이룩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온유돈후의 시의 가르침이다. 이 작품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혹시 이것으로 인하여 세속에 맞지 않을 우려가 있을 것으로 말하였다.

 

돌이켜 생각하건 데, 나의 곡이 약간 이 세상 풍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큰 문제를 일으킬 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음률에 안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이에서 스스로 곡이 세상 풍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음을 먼저 밝힌 것은 퇴계 자신이 벼슬길에 있어서 나아가고 물러섬의 어려운 점을 굳은 기개로 지켰으므로 당시 임금의 간곡한 초빙과 일반 국민의 성심 어린 여망, 문인학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벼슬에서 서슴없이 물러나는 뜻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것이 곧 당시 사회에서 여러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한글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연산군(A.D 14761506)의 폭정을 에워싼 이른바 언문사옥의 아픔을 오히려 가시지 못한 때인 만큼, 혹시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근신에서 나온 심경이었다. 그러므로 퇴계는 일찍이 그의 문인 추연 우성전(A.D 15441593)에게 <답우경선서>의 별지 중에도 다음과 같은 신중한 사연이 들어 있다.

 

(도산십이곡) 는 다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염려하였을 뿐, 공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터인 바, 꼭 돌려 보낼 것은 없겠다.

(其詞(陶山曲) 只爲他人慮耳 公必無是,不須見還.)

 

자의 밑에 도산곡 이라고 퇴계 스스로가 주를 붙여 놓았다.

 

아직 노래가 완성되기 이전에 연습으로 써서 서랍 속에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꺼내어서 취미 삼아 보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에 의하여 그 내용에 따라 판단에 맡기기로 하였다.’

 

퇴계 자신이 자기 문집을 만들지 않았으며, 이는 모든 일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 신중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행하는데도 그의 신중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이는 뒷날 세상에서 이 시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개인적 판단하도록 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 <도산십이곡> 각 곡의 해석과 분석

이제 본 곡에 대한 내용을 문학적 내용보다는 교육적 차원에서 전후 십이곡을 생각해 보면은 다음과 같다.

도산십이곡의 각 곡의 내용을 한마디로 집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으며]

제 일장에서 12장까지 순서대로 서술해 보기로 하자.

사학수도, 성대무과, 물기영재, 소은미인, 회아양우, 흔상도묘, 만권생애, 이목총명, 고도금행, 막자타상, 만고상청, 성우지한,이라고 할 수 있다.

(1) <도산육곡> 지일 - 언지

<仕學殊途> (사학수도 : 벼슬과 학문의 길은 다른 것)

이런엇다며 뎌런엇다

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다

泉石膏肓을 고텨 므슴 其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이 이러며 어떠하리

하물며 자연을 좋아하는 병을 고쳐 무엇하리

 

제 일곡에서 강조한 내용을 알아보면 학문을 터득한 도의를 높이 지닌 선비가 나아갈 길은 오로지 두 갈래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학문(求道)의 길이요, 또 하나는 벼슬(榮達)의 길이다. 다만 선비의 뜻에 따라 이 두 가지 길이 분리될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닌 긴밀한 연속이지만 선비의 (능통함)(깨달음)에 따라 분리될 경우가 있다. 이는 곧 선비가 영달하며 천하를 구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자기의 몸을 의지하여 이름을 나타내는 곳을 찾는 것이 역시 올바른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제 일곡의 첫머리에서 선비가 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앞에 놓여있음을 명확히 밝힌 놓았다.

퇴계도 본 곡을 짓기 9년 전인 (A.D 1556) 이미 종 이품인 공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처음부터 벼슬길에 뜻을 끊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사화의 휴유증이 남아있어 벼슬길로 나아가는 데 상당히 신중하게 고심을 하였다.

퇴계가 벼슬의 길을 버리고 학문의 세계로 돌아오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사화였다.

이 제 일곡의 초장에 이른바 이런은 학문을 이른 것이요. ‘저런은 벼슬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초장의 전체가 거의 태종 이방원(A.D 13671422)<하여가>와 같다.

 

이런들 엇더

저런들 엇더 해동가요

 

태종의 <하여가>에서 이런은 이방원과 같이 역성혁명을 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신진세력들과 영화를 누리자는 것이었고, ‘저런은 고려의 옛 충절을 지키려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하여가>에서는 정치 권력적인 차원에서 말하였으나, 제일곡에서 이런저런은 벼슬의 길과 학문의 길인, 즉 자기 수신의 길과 부귀 영달의 길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작품의 문장은 비록 다름이 없으나 내포된 뜻은 서로 거리가 가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중장에서는 초야의 우생은 자연을 벗삼고 학문을 즐기려는 어리석은 선비로 자처한 평안한 정이 넘쳐흘렀고 종장에서는 이미 자연에 심취되어 있는 선비는 병을 고치지 않아도 평온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연 속에서 학문을 전념하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영달에 눈이 어두운 현대인에게 많은 귀감을 주는 점을 시사한다.

<聖代無過> (성대무과 : 태평성대에 아무 허물없이 지내는 것)

煙霞로 지블삼고 風月로 버들사마

太平聖代오로 늘거가뇌

이 듕에 이른 허므리나 업고쟈 其二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자연으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네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초장에서는 윗 제 일곡의 천석고황의 굳은 맹세 즉 자연에 몰입되어 학문을 하며 생활할 것을 강조하며 연하의 집(이때의 연하는 선경의 경지, 또는 전원 생활)에 풍월(자연)의 벗과 함께 유유자적하게 살 것을 말하고는 중장에는 사화로 피폐해진 사회 질서가 바로 잡혀서 모두가 편안해질 것을 바라면서 한 학자의 몸으로 학문을 닦고 병을 수양하며 인생을 마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일찍이 퇴계의 생각으로서 묘당의 공사가 그릇된다면 우리들 산림의 지락도 여의치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중장의 의미는 한편으로는 태평성대임을 기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의 사화 같은 것이 없는 태평성대가 계속되기를 산림의 선비로서 강력히 기원하였다.

종장에서는 중장의 태평성대를 바라면서 또 자기 반성으로 들어가 태평성대에서 남은 소망은 자기의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허물이나 없어야 할 것을 스스로 일깨워 마지않았다. 여기에서 퇴계의 반성적 수신관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勿欺英才> (물기영재영재를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지 못하고 속이는 것)

淳風이 죽다 眞實로 거즈마리

人性이 어디다 니 진실로 올마리

天下許多英才를 소겨 말솜<其三>

?좋은 풍습이 죽었다하니 진실로 거짓말

인성이 어질다하니 진실로 옳은 말

이 세상 많은 영재를 어찌 속여 말씀할까?

 

이 제삼곡에는 중명종때 사화로 인하여 사류(사림파)가 산림(고향 즉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현실 도피)에 돌아와서 자기자신의 일신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앞서 끼친 유업을 이어받고, 사회의 수많은 영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서 다음 사회에 밝은 광명을 열어주는 교화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을 제시하였다.

초장에서는 淳樸한 이 나라의 民風이 다 죽었다.’하여 거짓말을 퍼뜨린 자(그 당시 자기 영달에 눈이 어두운 관학파의 일파)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폄하하는 사람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는 한편, 중장에서는 인성이 어질다하니 진실로 옳은 말에서는 孟子(:. B.C 372289)의 성선설을 거듭 주장하였다. 주자학이 완성된 뒤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은 사화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학술적으로 혼란이 극심함이 이루 말할 수없이 심하였다. 옳지 못한 유학자 무리들이 이 땅의 영재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택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이것이 곧 영재를 속이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퇴계는 이를 불쌍하게 여겨 청년들이 혼미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올바른 교육을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교화의 필요성을 나타낸 곡이며. 오늘날 청소년들을 위한 참교육의 실현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所恩美人> (소은미인 : 임금의 은혜에 고마와 하는 것)

幽蘭在谷自然이 듣디 됴해

白雲在山自然이 보디 됴해

이 듕에 彼美一人를 더욱 닛디 몯

一云 이듕에 고온 니믈 더욱 닛디 몯<其四>

 

?그윽한 골짜기에 난이 피어 있어 경치가 좋다

산 위에는 흰구름이 있어 경치가 본래 좋다

이 경치로 좋은 임금이 더욱 그리워 지내?

이 제사곡은 조선시대에 최초의 완연한 사미인곡이라고 볼 수 있다. 종장에서 주석으로 나타낸 뜻과 같이 사미인곡에서 이 듕에 고은니믈 더욱 닛디 몯와 동일하다고 본다. 이는 밝고 성스러운 태평성대의 이상적인 군주를 연모한 것이다. 이 사미인은 역시 시경에 글귀가 있었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포은 정몽주(A.D 13371392)의 사미인사가 있으나 모두 한자로 되어있다. 한글로 된 것으로는 송강 정철(A.D 15361593)의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의 이전에 있어서는 곧 퇴계의 이 곡이 유일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시조는 13장으로 된 정형시인 동시에 그 결정적인 요체는 오로지 종장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장 유란은 숨은 선비를 뜻하며 중장에는 아무런 세상의 세파에 물들지 않는 청산의 희디흰 구름을 이끌어 벗삼았다. 이제 난초의 깊숙한 향내를 맡으면서, 구름의 유유한 자태를 보면서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이 한 곡에서 유감없이 묘사하였다.

유란은 숨은 선비를 뜻하며 고결한 선비에게 희열을 끼칠 수 있는 백운(이 때 선비의 지조, 높은 이상)도 사랑하여 마지않았지만, 더욱이 저 고운 님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또 미인이란 하나의 군주 개인의 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실로 백성의 최고 책임자로서 겨레와 나라의 흥망과 성쇠가 모두 이 한사람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군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변함이 없으며, 즉 우국충정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국정의 책임자는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는 왕도사상을 엿볼 수 있다.

 

<懷我良友> (회아양우 : 자기를 낮추며 친구를 기다리는 것)

山前有臺臺下有水로다

 며기오명 가명 거든

엇다다 皎皎白駒머리  는고 <其五>

?산앞에 대가 있고 대 아래 물이 흐르는구나

때를 만난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

어떠타 울어대는 흰 망아지는 그리 무심 하는고?

 

위의 제사곡에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애국 신민의 사상에서 흘러나온 정서로서 끝까지 초지일관하였다. 이어서 제사곡이 연군의 정을 나타내었다면 제오곡은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 아름다운 벗을 기다리는 정이 간절히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교교백구는 시경 가운데 백구를 빌려서 옥같이 맑고 흰 아름다운 벗을 기다리는 정서를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초장에서는 먼저 도산 산수의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였다. 메 앞에는 천연대와 운영대가 높이 솟아있고, 그 대 아래에는 낙동강 물이 흐른다. 이어서 중장에는 세상의 때를 잊은 해오라기 떼는 서로 친하여 잘 노닐고 있다. 여기에서 오명 가명 거든은 적막한 곳에 어진 벗이 많이 찾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란 知心의 벗을 이를 수도 있거니와, 또는 문인학자들을 지칭할 수 있으며 학문적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겨 있다.

또 시경에 있어서의 백구의 본뜻은 어진 선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그런 뜻으로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종장에서는 어진 선비가 국정에 나오지 않을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배운 사람일수록 어려운 일에 회피하고 자기의 안위에만 돌보는데 그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와서 국정에 올바르게 참여하자는 뜻으로 간주할 수 있다.

 

<欣賞道妙> (흔상도묘 : 봄을 맞이하며 도를 즐기는 것)

春風花滿山秋夜月滿臺

四時佳興사롬과 가지라

魚躍鳶飛 雲影天光어늬 그지 이슬고 <其六>

?춘풍에 온산이 꽃으로 물들고 가을밤에 달빛이 가득 하네

사시사철 즐거움이 삶과 같구나

하물며 어약연비 운영천광이사 어디 때에 끝이 있을까?

 

이 제육곡에서는 도산서당 앞의 은밀한 진리의 비경 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감상하는 것이다.

초장에서는 다만 봄바람에 꽃이 피고 가을 저녁의 달로써 사시 풍경을 봄바람의 꽃과 가을밤의 달을 자연의 대표로 삼았을 뿐이요. 중장에서는 사시 아름다운 흥을 취하는 사람과 같이 변모하는 것으로 밝혔다. 종장에서는 이천연대와 운영대의 모두 평범한 자연의 경치에서 아름다움을 취하였지마는, 막상 높이 나르는 솔개는 하늘에 닿고 뛰노는 고기는 물에서 노는 것은 위와 아래, 나타난 것과 숨은 것의 아름다움의 비경인 活發發地를 흔상하는 그 참 다운 즐거움에서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어약연비는 역시 시경에서 비롯된 말이다. 중용의 <귀은장>에서 이 시를 이끌어서 조화가 유행하는 자취를 따라서 의 나는 것과 의 뛰노는 것이 모두 상관 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이것은 도가 위와 아래에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며 자연의 조화로 보았다. 다음의 운영천광은 주자시 중에 나오는 말이다. 朱子는 연못에 비치는 천광과 운영으로 자연 속에서 책을 보는 것으로 즐거움으로 삼았다. 앞에 언급하였지만 도산의 천연대와 운영대라고도 볼 수 있다.

퇴계는 본 곡을 짓기 4년 전인 1561년에 지은 도산잡영과 도산기 중에서 이 사계절 따라 자연의 즐거움을 말한 바 있었거니와 또 연비와 어약에 대한 기록한 것과 읊은 것이 있었고, 또 천광, 운영을 읊은 시도 없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본 곡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사상은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며, 인간은 항상 자연을 멀리할 수 없으며 자연 속에 삶을 찾아야 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자연보호. 환경보호의 면을 찾을 수 있다.

(2) <도산육곡> 지이 - 언학

<萬卷生涯> (만권생애 : 학문을 가까이 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

天雲臺 도라드러 琓樂齋 簫洒

萬卷生涯樂事無窮얘라

이 듕에 往來風流를 닐어 므슴<其一>

 

?천운대로 돌아들어 완락재가 깨끗한데

책 읽는 즐거움은 끝이 없어라

이 중에 풍류가 없으면 말하여 무엇 할고?

 

전육곡 마지막 제육곡 도산의 천연대와 운영대를 거쳐 도산 서당으로 들어와 학문을 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초장에서는 서재인 완락재 위치와 그 맑고도 아름다운 도산 주위의 자연경관을 동적으로 자세히 소개한 것이었다. 이 완락재에 관하여서는 이미 주자의 명당실기 중에서 樂而玩之뜻을 말하는 것이며, 또 시를 읊어 주자가 스스로 주를 붙여서 玩樂의 뜻을 거듭 밝혔다.

朱子의 명당실기 중에 持敬明義動靜循環하는 그 공이 周子의 태극론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 있으므로 이를 완락하면 족히 외모를 잊을 수 있겠다.’는 말이 있기에 이제 이로서 서재의 이름을 삼아 날로 깨닫고 반성을 하려한다.

뒤를 이어서 중장에서는 많은 책을 읽는 것으로써 즐거움이 그지없음을 밝혔다. 이는 학문을 하는 것이 선비의 최고 즐거움으로 삼았다. 종장에서는 왕래풍류를 잃어서는 아니 됨을 말하였다. 선비는 멋과 맛을 지녀야 한다. 또한 여기서는 문인 지우를 말할 수 있으나, 여기서 왕래풍류는 주로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즐기는 것이다.

이는 논어에서 이른바 벗이 먼 곳으로부터 이르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의미이다. 앞의 해석을 다시 한번 서재 주위의 환경이 이렇게 깨끗하고 또 독서로서 생애의 즐거움이 그지없으나 이중에서 오가는 풍류가 없어서는 아니 됨을 밝힌 것이다. 조화적인 삶을 영위하자면 지식에만 편중된 사람이 되지 말고 멋을 아는 사람이 되자는 뜻, 즉 우리의 풍류도 사상이 깃들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교육에서 추구하는 전인 교육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耳目聰明> (이목총명 : 학문을 갖추어 재질이 총명한 것)

雷霆破山야도 聾者몯 듣

白日中天야도 瞽者몯 보

우리耳目聰明 男子聾瞽 디 마로리其二

 

?우뢰가 산을 무너뜨려도 귀 먹은 사람 못 듣나니

해가 중천을 떠도 눈 먼 사람은 못 보나니

우리는 귀눈이 밝은 사람으로 이런 사람과 같지 않으리?

 

중장에서는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하려는 이로서는 먼저 재질이 갖추어져야 할 것을 말하였다. 아무리 웅장한 멧부리를 깨칠만한 우룃소리와 하늘에 높이 솟은 밝은 햇빛일지라도 귀머거리와 소경에게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이는 인간 중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귀머거리와 소경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임을 밝힌 것은, 정상적인 인간이 사리분별도 못하고 학문을 게을리 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뒤를 이어 종장에서는 이 세상 만물 중에서 나무도 돌도 아닌 인간이요, 인간 중에서 보고, 듣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사람으로서 배움을 게을리 해서 안 된다는 뜻이다. 바로 오늘날 오감을 통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으로 직관주의 교육관이 담겨있다.

<古道今行> (고도금행 : 옛 도덕을 오늘에 행하는 것)

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古人을 몯 봐도 녀던 길 알

녀던 길 알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其三>

 

?옛 사람도 나를 못 보고 나도 옛사람을 못 뵈니

옛 사람을 못 보아도 거닐 던 길이 앞에 있네

거닐 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거닐고 어떠할고?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밝고 옳은 것을 올바르게 이어받고 배우러 오는 자에게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초중장에서 고인은 옛날에 학문을 하던 사람을 말하며 란 자기 자신 즉 지금 사람으로서 옛사람과 이제 사람인 서로 만나지 못한 체 얼굴도 모르고 말로 통한 일이 없었으나, 옛 사람이 걷던 길(학문를 닦는 일)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장에서는 녀던 길이 뜻하는 것은 사람을 인도하는 길 즉 학문 또는 문화라 뜻한다. ‘온고이지신이라 할 수 있으며 옛 사람들의 행하던 문화와 전통을 답습하라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광명하고도 정대한 길이 앞에 열려있다 할지라도 지금 사람들이 그 길을 버리고 가지를 않는다면 그 길은 무식하고 궁함을 면하지 못할 것임을 말하였다.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지화사회화하는 길은 옛날 사람들이 행하던 학문을 익힘으로써 문화의 전수하는 것이 자기 완성에 있다고 본다.

 

<幕作他想> (막작타상 : 작정한 것은 굳게 지키라는 것)

當時예 녀던 길흘 몃려 두고

어듸 가 니다가 이제도라온고

이제나 도라오나니 년듸  마로리 <其四>

?당시의 거닐던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오는고

이제야 돌아오나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아야지?

중장에서는 퇴계 스스로 30여 년간 벼슬길에 나가서 학문을 소홀했던 것이다. 즉 중년 이후에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병든 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뜻이다.

중장의 어듸가 니다가 이제도라온고에서는 학문 이외의 다른 길 즉 선비로서 외도(벼슬)했다가 뒤늦게 깨닫고 학문의 길로 돌아왔음을 기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도산기> 중에서 간곡히 언급을 하였다. 종장에서는 이미 이 길로 돌아온 이 몸이 다시는 어느 방면(벼슬)으로 뜻을 옮기지 않아야 할 것을 굳게 맹세한 것이었다. 위 시조에서 퇴계는 학문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학문을 계속 정진하여 탐구하고 진리 발견에 추구하여 인간의 삶의 지혜를 얻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萬古常靑> (만고상청 : 학문을 근면하게 수행하라는 것)

靑山엇뎨萬古에 프르르며

流水엇뎨晝夜애 긋디 아니

우리도 그치디 마라 萬古常靑 호리라 <其五>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 그치지 아니한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언제나 변함없이 푸르리라?

 

학문을 하는 자세는 근면 성실하게 아무런 말없이 자기 목표를 지키며, 자연법칙과 같이 그대로 변함이 없다. 靑山(변함이 없음)과 같아야 하고 밤낮(근면함)을 가리지 않고 오랜 세월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여야 공부를 쌓은 후에도 계속 정진하는 근면성을 흐르는 물같이 하여야 함은 초중장에 먼저 밝혔다. 제사곡과 다른 점은 어디에서 어떤 일(공부 이외에 벼슬)을 하던 공부는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뜻이다. 뒤를 이어 종장에서는 자연의 법칙처럼 계속 반복하고 끊임없이 공부를 하여 진리를 터득하자면, 교육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학문을 터득하자면 반드시 계속하고 반복하여야 하면 여러 번 지속적 되어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오늘날 평생교육과 같다.

 

<聖愚之閒> (성우지한 : 학문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

愚夫도 알며 거니 긔 아니 쉬운가

聖人도 몯 다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낫 듕에 늙주를 몰래라 <其六>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 다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그 중에 늙은 줄을 몰라라?

 

학문이란 학자로부터 어리석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도 자기 스스로가 학문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성현도 학문을 다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보아서는 학문이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종장에서는 퇴계는 은연중 스스로가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임을 생각하고서 꾸준히 노력하여 늙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을 같게 보아 학문에서 교육의 평등사상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태도나 터득의 정도에 따라서 그 도달점이 모든 이가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학문을 열심히 닦으면 그 즐거움이 우주 사이를 충만 한다. 이를 학문세계에서는 그 극치의 경지를 더듬는 즐거움이 같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곡은 지이에 있어서도 제육곡의 마지막 장이다. 본곡 전체적인 면에 보아서도 십이곡의 최종 가락으로서 마치 古樂(늙은이의 즐거움)에서 곡이 끝남으로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듯 하며, 인간 만사를 초월한 노학자가 신선과 같이 보인다.

도산십이곡 중 전육곡 은 언지를 내용으로 하여 지은 것이다. 전육곡에서 각곡의 주된 사상은 자연과 어울림, 반성적 수신관, 참교육의 실현, 애민사상, 자연보호이다. 그러므로 주로 자연과 인간간의 교호적인 관계에서 학문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 비하여 후육곡에서 전인교육, 직관주의교육, 사회교육, 인격완성교육, 평생교육, 평등교육 즉 학문적 수신관을 나타내었다.

 

전육곡은 학문의 목적을 노래로 하였다면 후육곡은 교육의 방법을 노래하였다.

퇴계는 엄격한 유교사회에서도 도산십이곡과 같이 가사를 지어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가사를 통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3. <도산십이곡>이 끼친 영향

(1) <도산십이곡>이 끼친 영향

이 도산십이곡 이 창작된 뒤에 퇴계는 스스로 어떠한 문제가 일어날까 보아서 서랍 속에 깊이 간직하였음을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또 이와 달리 구태여 제자에게까지 숨기지 않고 그 내용을 추연 우성전에게 보인 일이 있었다. 이는 친근하게 찾아오는 제자에게까지 숨겼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본 곡은 이미 퇴계의 당시에 상당히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이를 애송하는 이도 많았거니와 이에 영향을 받아서 작품 중에 그에서 끼친 뜻이나, 또는 형식을 참고하여 사용한 일이 적지 않았음도 사실이었다.

잠곡 김육(A.D 15801658)은 일찍이 그의 스승 지산 조호익(A.D 15451609)<행장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매양 봄날이 화창하여 풍경이 밝거나, 또 가을 날씨가 맑고 서늘할 때에는 두 세 사람 초립동과 함께 거닐기도 하려니와, 더러는 깊은 물위에 배를 띄우고는 노래 잘 부르는 자로 하여금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노래하여 유연히 스스로 즐겨 피로를 잊었었다.

지산은 퇴계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다. 그러면 지산은 본곡을 애송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이름 높은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락에 옮기게 하여 스스로 감상하고서 유연 자득 즐거움을 삼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 눌은 이광정(A.D 16741756)은 일찍이 그의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 강좌 권만(A.D 1680?)이 말 위에서 도산육곡을 부르는 것을 듣고서 한시 한편을 읊은 일도 있었다.

 

옛날을 생각하며 우리 李夫子 이시여, 조용하게 자라는 것은 도산에서 있고 도산은 앞뒤가 겹겹으로 쌓여있어 한가함에 지락이 있을 뿐 아니라, 말 위에서 시험삼아 한 곡 부르니 고을이 적막한 산중으로 되어있어 메아리쳐, 한번 부르고 또 한번 불러보니 구름처럼 도심이 생기네. 힘들지 않고 정신이 평온해질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있겠는가?

 

그 시에 의하면 강좌는 본 곡을 가장 즐겨 불러 말을 탄 체로 불렀을 뿐 아니라, 어느 때고 늘 노래를 불러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다. 이를 본 눌은 도 시가로써 그 아름다움을 흥미롭게 서술하여 전하고 있다.

또 대산 이상정(A.D 17111781)은 본 곡의 뜻을 취하여 한시를 읊고 이어서 스스로 주석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 시는 곧 본 곡 지이의 제사곡의 뜻을 빌려 쓴 것이다.

 

집 떠난 지 몇 해가 되었으며, 어느 곳에 방황하다 이제 돌아오는가? 이제 와서 집안 일을 하려해도, 가르침이 없는 집에 주인이 있겠는가?

 

또 퇴계의 후손인 향산 만도(A.D 18421910)는 기천 권승하(A.D 18071890)의 행장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께서 도산의 노래가사와 시 문장 및 소학의 좋은 말과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아침저녁으로 가르쳤었다.

 

이는 본 곡이 뒷날 유교사회에서 자녀 교육의 교본으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이 아이들 교육내용으로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노래를 불러 쉽게 깨우쳤다. 도산십이곡은 흥을 일으키는 노랫가락이나 시가로만 불러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교육적 내용으로 이루어 있었으므로 도덕적 교육 시가로 불러졌다.

 

. 도산십이곡에 나타난 교육사상

1. <도산십이곡> 일반적 의미

퇴계가 지은 시의 편수는 약 2000수 이상이 된다. 그 가운데 시와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는 도산십이곡뿐이다. 이 발이 쓰여진 것은 조선 명종 20(A.D 1965)으로 그의 임종을 앞둔 5년 전일이다. 도산십이곡은 문학적으로 보아 높은 운은 향기가 풍기는 듯 참으로 芝蘭에 들어간 것과 같은 청아한 맛이 있는 명작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그보다는 도학적 시가의 대표작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돌이켜 보면, 자연과의 이탈로 자기 상실이란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러한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마음속에서 자연을 찾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자연을 단순한 객관적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를 하나의 아름다운 인간상으로 보았다. 도산십이곡 가운데서 전육곡 마지막 곡에서 그 내용이 더욱 뚜렷하다.

悟道(묘리의 깨달음)한 퇴계는 자연 속에서 즐기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자연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장소로 생각하였다.

그의 자연관은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이 아니라 천지자연과 더불어 마음속의 질서와 평화를 이룩하려는 有爲自然 思想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자연은 인간과 서로 어울릴 수 있으며, 자연은 인간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산십이곡은 언지, 언학을 논한 자연을 노래한 시. 교육을 내용으로 한 시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후육곡의 곡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철학적 삶으로 유유자적하였고, 도학적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정신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감성을 개발하고 인품을 닦도록 지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문학을 도덕적으로 승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과 같은 차원으로 이끌어 놓은 미적 윤리 학자였다. 그의 삶의 통일적 전체에 대한 조화와 균형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삶의 유기적 질서에 대한 표상이었다.

욕심이 없는 삶의 즐거움은 철학적 명상이 일어나게 하였으며 이 끝없는 원천이 자연이었다고 생각된다.

자연에 대한 몰입에 일체감과 사랑, 그리고 경이와 관조는 그의 인격실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요산요수라 할 수 있으며 도산전육곡()이 가장 자연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었다. 도산십이곡이 淸嚴簡淡(맑고 엄숙하고 간결하며 담백함)하여 까다롭지 않고 곧은 도리와 사심이 없는 맑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리에 임하기를 쉽고 정직하고 마음에서는 자연에 도달하기를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도산십이곡에서 성리학적 인간관. 세계관은 곧 천리(진리)의 축소라 볼 수 있으며 인간과 천리를 엿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을 관조하는 안목이 특출하여 자연과 융화하는 표현이 뛰어났다.

둘째, 우주 자연의 도와 천리(자연의 이치)로 일관된 시풍을 이루어졌다.

셋째, 사람의 수양은 언제나 학문과 융화되어야 한다는 도학자의 면모가 엿보인다.

넷째, 모든 대상을 靜觀靜審(조용하게 바라보고 판단)하는 성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다섯째, 격조 높은 사색이 깔려 있다.

여섯째, 그의 시적인 특징은 온유돈후, 질박, 담여한 기풍을 절감하게 되었다.

 

끝으로 도산십이곡이 감성과 이성의 교감으로 됨 것을 알고 나면 퇴계는 사고 법칙만을 따지는 관념론자가 아니라 진리 감각을 구현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시와 철학의 만남은 퇴계로 하여금 새로운 진리를 사색하는 구도자의 활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가 이루어 놓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적 통일이 따뜻한 인간성의 소유자, 아름다운 인간상 구현, 삶의 느낌을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 <도산십이곡>의 교육적 의의

(1) <도산십이곡>과 국어 교육

퇴계는 우리의 곡이나 가사는 한글로 표기를 해야만 정확한 (노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가사는 한시와는 소리를 내는 것이 달라서 한글로 표시되어야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모화사상에 젖은 유학자들은 우리의 가사조차 한자로 이역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도산십이곡>을 창작할 때 그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노인(퇴계 자신)은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긴 하나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조용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 문득 느낀 바가 있어 시 (여기에서 한시)로서 표현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퇴계 당시 한시를 말함)는 옛날 시(향가나 가사)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일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속의 말로서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나라 풍습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학자(지식계급)로써는 한글을 쓴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지배계급인 학자들은 어려운 한문을 써야만 실력과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과 문화적 괴리감이 생기게 되어, 결국은 민족공동체 의식이 결여된다. 즉 단일민족이 동일한 글자를 사용해야 만이 만족공동체 의식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도산십이곡이 한문이 아닌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져서 누구나 부를 수 있게 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즉 퇴계가 국어를 사랑했다는 점에서 대중성 내지 만민평등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도산십이곡이 대중교육의 선봉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국어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2) <도산십이곡>과 우리 가락

우리 나라에서 시는 한글이나 한문으로 쓰여져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퇴계가 쓴 시 가운데는 한자로 적은 것과 한글혼용체로 된 것이 있다. 그 한글혼용체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이 도산십이곡을 비롯하여 단가 12곡과 가사 5곡이 있다. 그의 시가는 순수한 우리 것을 소재로 하였다. 지봉 이수광(A.D 1563-1628)은 당시에 많이 불러지던 시가를 열거하면서 역시 퇴계의 시가를 제일로 취급하였다.

우리 나라 시를 다른 나라 글자로 빌려 썼더라도 조선사람의 민족적 정서, 사회적 환경, 시대적 사조의 특성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더 좋은 가락, 즉 부르기 쉽게 표현하자면 한글로 쓰는 것이 최고일 것이다. 퇴계는 본 곡의 중요성은 오로지 노랫가락에 있다고 도산십이곡의 서문에서 밝혔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지었다.

아이들도 아침, 저녁에도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귀 기울여 들어보기도 하거니와 또한 아이들도 스스로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춤을 추도록 하여 괴로움을 씻도록 하였다. 이 때 공감대가 생기면 노래를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가 어울릴 것이다.

여기서 시가와 음악은 누릴 수 있는 나이의 한계를 그을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같이 어울리고, 가정이나 사회의 화합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노랫가락을 통하여 문화의 대중성, 교육의 평등 성을 엿볼 수 있었다.

오늘날 대중가요가 일부 계층에 기울여진데 대해서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또 건전한 가요를 청소년들에게 권장함으로써 건전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가락이 그만큼 청소년 정신 건강에 중요함을 밝혀 주었다.

3. <도산십이곡>의 교육적 내용

도산십이곡에서 교육적 내용을 살펴보면 전육곡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뜻을 세우는 언지로 구성되었으며, 후육곡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학문을 하는 일 언학으로 지어졌다. 오늘날 교육적으로 언지는 동기유발로 학문을 하는 이유와 하는 방법을 나타내고 언학은 교육목적을 제시했다고 본다. 이 점에서 도산십이곡을 다른 가사와 비교해 볼 때 교육적 시가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교육적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자는 반드시 올바르게 지도하여 사회의 인재를 길러내어야 한다.

둘째,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인간이 형성된다. 좋은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였다.

셋째, 인간의 영달이나 물질적 풍요는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는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체득하는 가치 있는 삶이 있다.

넷째, 학문을 갈고 닦는 데에서 진리를 터득함으로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다섯째, 학문을 하면서 자연과 벗하여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퇴계의 도산십이곡은 , , 三間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 어느 곳,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부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오늘날 대중가요는 교육적 사상성보다 흥미위주로 지어졌으며 특정한 계층에서만 즐겨 부르고 일정한 기간만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데 대해서 도산십이곡은 교육적 내용이 심겨진 곡이라 할 수 있다.

4. <도산십이곡>이 현대교육에서 적용

첫째, 어문일치 교육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표현하는 데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로 언어를 한자로 표기하여 음과 글자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대중은 문자 표현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특히 우리 곡이나 가사는 한시와 달라서 읊는 것이 아니라 노랫가락이 필요하였다. 퇴계는 이 때 우리 시를 한글로 쓸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로써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며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며 국어사랑, 어문일치교육으로 국어 교육에 많은 교훈을 준다.

둘째, 청소년을 위한 참교육 실천

지적 위주 일변도의 교육으로 인하여 주정 적인 면보다 주지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청소년들은 정의감을 잃고 있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 청소년의 범죄가 예전에 비하여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비행의 횡포가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 의식 결여, 정서적 긴장과 가치관의 혼란, 부모의 애정과 보호의 결핍에 인한 것이다.’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전육곡()天下에 허다 영재를 소겨 말슴 할까에서 교사가 청소년들에게 참교육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교육자로써 자세와 청소년을 위한 참교육 사상이 농축되어 있다고 본다.

셋째, 책임구현 교육

마음가짐은 항상, 자주, 자유, 자각의 상태에 있게 되어 만사 만물의 변화에 따라 바른 것을 지키고 사람의 욕심의 나쁨을 막아낼 수 있다.’라고 했다. 여기서 正心은 늘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물 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육곡(5)의 종장 엇다다 皎皎白駒머리 는고는 인간의 자주성, 책임감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넷째, 자연과 환경보호 교육

자연에서 정신세계를 추구하여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였으며 자연 속에서 건전한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삶의 전체를 자연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게된다고 했다. 특히 전육곡()의 흔상도묘는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구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자연보호 사상인 요산요수을 인간에 심어 주도록 하였고, 모든 것을 자연의 마음에 獨往玩詠(독왕완영:홀로 거닐며 읊으며 감상함)하려던 것으로 자연과 인감의 조화성에서 삶의 본질을 추구했다. 현대 환경교육 즉 자연보호교육 차원에서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전인교육

퇴계는 앎과 배움은 그것 자체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의 길에 각오도 중요하나 심신의 휴양 또한 중요하다.’ 또한독서하는 틈에 때로 놀아서 정신을 진작시키고 마음을 안정케 하라.’ 여기서 볼 수 있는 학문의 건강 여기서 멋을 더하였던 것이다.

<후육곡()>의 종장에서 이 중에 왕래 풍류를 닐어 므슴에서 인간의 멋을 강조하였다. 이는 신사도 교육 즉 전인교육에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현대학교 교육에서 주지주의 일변도 교육에 좋은 본보기가 된다.

여섯째, 인간성 개발 교육

儒學敎育은 가르치고 배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노력과 감화력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의 사귀는 것에 대하여 긍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교육의 실마리를 말하는 것이다. 후육곡()의 종장에서 우리는 耳目聽明 男子로 농고 디 말로리는 장애자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하지 않으면 개발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학문을 닦지 않으면 나무나 돌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사람의 오감을 통한 인간성 개발 교육에 중점을 둔 것이다. 현대 지식 일변도 암기교육으로 개인차를 무시한 교육에서 많은 지향점을 제시해 준다.

일곱째, 입지 교육의 실현

퇴계는 배우려는 자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학습자 자기의 진로 희망에 따라 사람의 인격이 형성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개인차에 맞게 지도해야 한다. 특히 후육곡()에서 그 사상이 뚜렷하였다. 현대 획일적인 지식편중 일변도에 크나큰 교훈을 주며 입지교육의 강조를 입지 견고하며 바른길로 향한다.’라고 주장하였다. 학교에서도 개성에 맞는 뜻을 심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덟째, 진리 탐구 실천교육

인격도야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은 하나이지만 체(주체)와 용(쓰임)의 진리 탐구하는 방법에서 퇴계는 박학, 심언, 신사, 명변독행이라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으며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는 진리와 탐구와 실천도야의 병행을 의미한다. 후육곡()에서 학문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정진하고 탐구함으로 진리를 발견하고 인간의 삶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경험주의 교육관의 시발점이 되며 오늘날 교수학습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홉째, 평생교육 사상

평생교육이란 그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여러 가지 현상을 효율화함으로써 교육 역량을 극대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급격한 사회변동에 부응하기 위하여 계속 공부하여 개인 성취를 가변성 있게 하고, 교육의 장으로 제도적 교육이외에도 가정, 사회 등이 있다.’ 이와 같이 후육곡()의 종장에서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 상청하리라에서 자연의 법칙처럼 학문을 도중에서 그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학습의 계속성을 주장하므로 평생 동안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열번째, 평등교육사상

도산십이곡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음률에 맞도록 썼다는 것은 어문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글을 천시 여기는 유교사회에서 대단한 혁신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한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백성으로 쉽게 배우고 익히도록 하여 학문의 보편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을 엿볼 수 있다.

후육곡()에서 愚夫도 알며 거니 긔 아니 쉬운가, 聖人도 몯다 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에서 학문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평등교육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도산십이곡에서 그의 교육과 윤리 사상이 함께 농축된 것으로 정서교육이 황폐해진 현대교육에서 여러 방면에서 많은 교훈을 시사해 주며 그의 시가에 함축된 자연, 인간, 시대의 새로운 삼간을 추구하여 새로운 교육사상을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 맺음말

퇴계 문학에 대해서 현대적인 견해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퇴계 하면 조선시대에 성리학자로서 인간 수양론에서 이기이원론의 고답적인 유학자로 생각되어 왔다. 그의 저서 또한 성리학에 관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서순화의 윤리적으로 다루어진 작품을 찾아보면 여러 편의 한시와 한글로 된 단가형식으로 이루어진 가사가 있다. 그 중에서 도산십이곡을 살펴 볼 것 같으면 한시가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을 때 국한문 혼용체로 정서적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날 널리 전파되었음은 대체로, 어느 특수계층을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부를 수 있도록 내용이 쉽게 지어졌다. 이는 국한문 혼용체로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반하여 곡 자체가 너무 방탕하거나 천하지 아니하며 순후하고 교화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 옛 시조나 한시에서 볼 것 같으면 자기의 감정을 천편일률적으로 읊은 낭만적인 내용으로 되어있다. 퇴계가 도산십이곡을 지을 당시만 해도 유학자들은 한글을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나 퇴계가 도산십이곡 저술에 대한 동기와 정의를 밝히기 위한 자술적인 서문이 있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남긴 작품으로써 원래의 제목은 도산육곡-지일과 도산육곡-지이라 하여 전후 합하여 십이곡이라 한 것이다.

전육곡 중에는 뜻을 세우는 것으로 후육곡에서는 배움을 주제로 논하는 가사로 되어있다. 이는 교육에서 자기의 뜻을 세우고 난 뒤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사람의 시가에서 몇 편이 윤리적인 내용으로 된 것이 있으나 도산십이곡처럼 체계적으로 지어진 것은 없다. 여기에 비하면 12곡으로 전. 후편으로 을 지향하여 표현한 것이 가장 특색 있는 작품이다.

퇴계는 본 곡에 대하여 지은 내력과 정의를 스스로 밝혀 놓은 해제인 도산십이곡에 발을 남기었다.

그 당시의 가사나 한시는 주로 중국의 시경에서 모든 근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퇴계의 시학 역시 시경에 연원 하여 그 가락과 멋을 더하여 교화를 시키는데 두었으며, 특히 溫柔敦厚로써 시나 가사의 주된 내용으로 지어졌다.

오늘날 개인의 연정이나 퇴폐적으로 된 내용에 비하여 도산십이곡은 자연과 인간과 조화적인 노랫가락으로서 구절구절 내용적으로 반복이 되지 않고 쉽게 단가로 읊어 교화시킨 점이 그 당시 경색된 유교문화 사회에서 놀랄 만한 일이며, 특히 퇴계는 노랫가락과 한글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한문화 속에서도 한글 혼용체로 서술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단순한 유학자가 아닌 실용자적인 면모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실로 우리의 곡이나 가사는 한시와 근본적으로 달라서 음이 아닌 노랫가락의 필요함과 또 창을 하려면 반드시 한글이어야 함을 밝혔다. 이는 민족적 교육의 주체사상의 면을 엿볼 수 있다.

퇴계는 또 이에서 창의 효과적인 것을 밝혀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늙은이와 젊은이의 동고동락에서 이룩되는 과정이다. 사회의 융화에 대한 역할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속에서 현대적 교육사상인 어문일치 교육, 청소년을 위한 참교육 실천, 책임구현 교육, 전인교육 사상, 인간성 개발 교육, 입지 교육의 실현, 진리 탐구 실천 교육, 평생교육, 평등교육사상을 주장하였다. 또한 도산십이곡에서 민족수호정신인 한글 애호와 자연과 조화적인 삶과, 어느 특정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두 구가하여 애송함으로써 평등사상으로 인간을 애호하는 퇴계의 교육사상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풍악서당 남해
글쓴이 : 남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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