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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東 禹倬 先祖 한시 - 映湖樓

Bawoo 2017. 4. 10. 22:21


映湖樓  
                                                                      禹倬


嶺南遊蕩閱年多   [영남유탕열년다]   영남을 여러해 두루 다녀보니 
最愛湖山景氣加   [최애호산경기가]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산수 더욱 사랑하게 되는구나

芳草渡頭分客路   [방초도두분객로]   꽃다운 풀 우거진 나룻터는 나그네 헤어지는 길
綠楊提畔有農家   [녹양제반유농가]   푸른 버들 언덕가엔 농가 몇 채 있구나

風恬鏡面橫煙黛   [풍염경면횡연대]   바람 잔 물 위에는 안개 자욱 빗껴 있고
歲久檣頭長土花   [세구장두장토화]   세월 오래된 담장 위엔 이끼가 자라있구나

雨歇四校歌擊攘   [우헐사교가격양]   비 개인 들녘에선 격양가 소리 들리는데
坐看林秒漲寒   [좌간임초창한사]   숲가에 앉아 오가는 뗏목 바라본다


恬;편안할 념.     黛;눈썹먹 대  ;휘초리 초.나무끝 초.      漲;넘칠,불을 창.    ; 나무 벨 차, 떼. 뗏목 사 

 


  영호루 (映湖)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에 있는 고려시대 정자. | [개설] 영호루가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때의 일이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남쪽으로 몽진하여 경상북도 안동에 이르게 되었다.   공민왕은 자주 영호루에 나아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고 군령을 내렸으며, 배를 타고 유람하거나 물가에서 활을 쏘며 심회를 달랬다. 홍건적이 물러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이곳을 잊지 못하여 1366년(공민왕 15) 겨울 친히 붓을 들어 ‘영호루(映湖樓)’ 석 자를 써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권사복(權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주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예 습작]




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다.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단양 우씨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신사를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다.[1]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로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로 있을 때 그곳에 휴양을 가서 이름이 붙여졌다.

1570년(선조 3) 이황(李滉)의 발의로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