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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동선생(易東先生) 탄노가((嘆老歌)

Bawoo 2018. 12. 10. 13:57

 

고시조의 멋과 풍류"

 

역동선생(易東先生) 탄노가((嘆老歌) 신후식

 

역동 우탁 선생님 시조비

안동대학교내에 역동서원이 있고 그 앞에 역동 우탁 선생님 시조비가 있다.

시조비의 전체 높이는 226㎝로 2단의 지대석 위에 화강석에 오석을 박아 중앙에는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8괘를 새기고 왼쪽에 天地定位山澤通氣(천지정위산택통기)를 오른쪽에 雷風相薄水火不相射(뇌풍상박수화불상사)를 종서로 새겼으며 그 위 대석을 두고 둥근 기둥모양의 받침 위에 높이 106㎝ 좌우 154㎝ 전후 42㎝의 오석에 탄노가 2수를 새겼고 뒷면에 安東文化硏究所(안동문화연구소)가 易東禹倬先生(역동 우탁 선생)을 追慕(추모)하여 세웠다 1992년 10월 일 傍孫 相洪 謹書(방손 상홍 근서)라고 새겼다.

 

春山에 눈 노긴 바람 건 듯 불고 간데 업다

져은 듯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우희

귀 밋태 해 무근 서리를 노겨 볼가 하노라

 

 

한손에 가싀 들고 한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싀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졔 몬져 알고 즈렴 길노 오더라.

 

사람이 늙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늙음을 한탄하는 ‘탄로가’ 3수가 전하는데 표현이 소박하고 감각적이며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늙는 길(세월)과 백발(늙음)을 구체적인 공감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의인화하였고,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인생무상 속에서도 인생을 달관하는 자세가 해학적인 표현 속에 실감 있게 나타나 있다.

 

예안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며, 새로 들어온 주자학을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백발이 되었음을 읊은 것이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은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봄바람이 눈 덮인 산을 녹이듯 자연의 위대한 힘을 빌려 인간에게 찾아오는 백발을 없애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는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져머 보려터니 청춘이 날 소기고 백발이 거의로다

잇다감 곳밧츨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

 

“늙지 말려이고”는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찾아드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을 탐하는 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이따금 꽃밭을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라고 솔직히 고백하며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늙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질서에 맞서보려는 안간힘과 죄책감이 인간미를 더해주고 있다고 하나 시비에는 없다.

 

오늘의 역동 선생이라면 늙음 자체는 어쩌지 못하더라도 백발쯤은 다양한 염색약으로 문제도 될 것이 없을 터인데.......

 

‘시조’가 최초로 기록된 ≪악학습령 樂學拾零≫

 

탄노가는 고려 및 조선 초기의 가곡을 수집해놓은 ≪악학습령 樂學拾零≫에 등재되어 있다

 

악학습령은 병와유고(甁窩遺稿)의 하나로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효종 4)∼1733(영조 9)]의 유고 10종 15책을 보물 제652호로 일괄 지정하여 경북 영천시 청통면 성내동의 이수창(李秀昌)이 관리하고 있다. 이형상이 편찬한 이 시조집은 필사본으로 편자가 자필로 기록한 저서목록에 ‘악학습령’으로 되어 있고 병와연보에 따르면 1713년이다 표지 없는 책을 심재완(沈載完)이 ≪교주역대시조전서 校註歷代時調全書≫에서 가칭 ‘병와가곡집’이라고 한 것이 그대로 통용되어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이라고도 한다.

 

이형상의 초고본에 가필하여 정조 때에 완성했다는 등 연대의 확정에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연보의 창작연대를 존중하면, ≪악학습령≫이 가장 오래된 시조집이며, 작품수는 1,109수로 유명씨 172명의 작품 595수 무명씨 작품 514수로 가장 많은 작품이 수록된 시조집이고, <음절도 音節圖>에 “조선조의 김성기1)가 지은 거문고의 악보를 어은이 남긴 악보라 하는데 이를 ‘시조’라 한다(고려조의 정과정 정서2)의 악보가 어언유보3)와 같다 (本朝金聖器作琴譜 稱漁隱遺譜 謂之時調(麗朝鄭瓜亭敍譜與漁隱遺譜同)라 하여 ‘시조’라는 명칭이 신광수[申光洙1712(숙종 38)∼1775(영조 51)]의 ≪석북집 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 15에서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李世春)(一般時調排長短來自長安李世春).”이라고 한 구절의 ‘시조’보다 앞선다

역동 우탁 선생

 

안내판에는 역동 우탁 선생(1263-1342)의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본명은 탁(倬)이며 자는 천장(天章) 혹은 탁보(卓甫)라 했고, 호를 단암(丹巖) 혹은 백운당(白雲堂)이라 했는데 세칭 역동(易東)이라 부르고 시호는 문희(文僖)라 한다

 

고려 원종 4년(1263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여 안향(安珦)에게 수학(修學)하고 17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된 후 여러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감찰규정(監察糾正), 성균좨주(成均館祭酒) 등 요직을 거친 다음 벼슬을 버리고 안동 예안에 물러나 학문과 후진양성으로 여생을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동은 원종 4년에 태어나 충혜왕 복위 3에 별세한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로. 시조 현(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영해사록(寧海司錄)일 때 영해에는 팔령신사(八鈴神祠)가 있어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극진히 받들고 자주 제사지내는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여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고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 (程朱學)을 수용하고 깊이 연구하여 후학에게 전했다. 정이(程蓬)가 주석한 ≪역경≫의 〈정전 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해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로 시조 4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퇴계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 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라 역동의 위상을 요약하면

 

첫째, 학문적으로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열어나간 선구자였고 특히 역학의 대가로서 추앙 받았다.

 

둘째, 관료로서 과감히 미신을 타파하고, 군왕의 패륜행위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부상소(持斧上疎)를 감행함으로서 후대 관료의 귀감이 되었다.

 

셋째, 안동전통문화 속에서 역동은 도학, 예의, 절조(知三宜)를 상징하는 향토의 선현(先賢)이라 퇴계와 그 문도들에 의해 존숭 받았고 조선조 안동 선비문화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넷째, 한국 시가문학사적 관점에서 안동 지역은 사대부가 치사(致仕)하여 도학적 이념과 자연 합일을 우리말 시가로써 노래한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창도한 곳인데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중심으로 한 향토시가의 유풍은 역동의 시조를 기원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고 따라서 역동은 이 지역 최초의 시조작가로서 소중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출처 : 영일서단(해맞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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