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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중국,일본,대만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일본 아사히 신문 취재팀이 한,중,일 대만 4개국의 근,현대사를 중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한 아편전쟁 을 기점으로 하여 상호 연관 관계-동일 사건에 대한 각 나라 교과서에 기술된 시각, 사건이 일어 났던 장소의 현지 주민의 시각 등 - 를 취재 형식으로 다양하게 쓴 책. 앞에서 소개한 "쾌도난마 조선 정치"란 책과는 달리 4개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객관적 시각으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독자 스스로 판단, 평가가 가능하게 쓰여 있다. 특징이 있다면 각 장의 제목이 되는 주요 사건은 요점 형식으로 약술해 놓고 이 사건들의 이면에 일어난, 교과서에 기록할 수 없었던 내용들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사건들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쓰였다는 점이다. 총 10개 장으로 나누어 썼는데 아래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잘했는지는 모르겠고 힘은 엄청 들었다. 9년 세월이 지난 지금은 죽어도 못 할 일이다.
[아래]
*1장 : "아편전쟁과 메이지 유신"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청나라가 망국으로 가는 시발점이 된 아편전쟁과 강대국 일본이 탄생하게 되는 메이지 유신과의 상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와중에 과거 우리나라인 조선의 통치 계층-역사책들을 보면 통상 지배계층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 표현 보다는 통치 계층이란 표현이 덜 열 받는 것 같아 제가 만들어 봤습니다.^^-에 있던 우리 조상들이 어떤 행태를 하고 있었는가도 잠시 나온다. 결론을 말하자면 쌍욕만 나온다.
중국의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것은 1840년~1842년간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이보다 28년 늦은 1868년에 시작되었으니 한 세대 정도의 간극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이 서구 세력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막을 당시 일본과 교역을 하던 네덜란드 상인들로 부터 전해 듣고 우리도 언제 당할 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청나라도 강유위란 인물에 의해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반대 세력ㅡ당근 기득권 세력이겠죠 ㅡ에 의해 좌절당해 망국의 길로 치달았고 일본은 개혁에 성공하여 세계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그 결과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된다.
한 나라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소위 지도 계층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 가를 역사가 입증해 주고 있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다. (2022. 11. 12 여기까지 수정)
이때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과연 무얼 하고 있었을까?
뭐 뻔하지 않습니까?
자기네 일족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그런 식이었죠. 이 책에 의하면 조선은 가난하여-뜯어 먹을 게 없어-공격해 오지 않을 거라고 낙관했답니다. 죽일 조상님들 같으니 (자세한 내용은 제가 소개해 드린 "쾌도난마 조선정치"를 읽어 보시면 속이 뻥 뚫리고 깊이 아시고 싶은 분은 검색만 하면 죽죽 나오네요. 참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일자리는 줄어 드는 거죠. 참 !양날의 칼입니다.에그)
*2장은 청일 전쟁(1894~1895)과 대만 할양이란 제목입니다.
청일 전쟁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 대한 헤게모니 쟁탈을 목적으로 우리나라 땅에서 벌어진 일본 중국놈들 사이의 전쟁이라 국사책에도 자세히 나와 있는 내용이니 참조하시면 되고, 이 장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대만이 1895년 부터 일본 패망 까지 50여 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는 데 오히려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만인들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본 식민 통치시의 우리나라도 일부 역사학자가 식민지배 긍정론을 제기한 다는 걸 본 적이 있는 데 대만의 경우는 좀 구체적입니다.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옮겨 보면 "전염병의 퇴치, 제당 산업의 육성 특히 공과사의 구분을 철저히 주입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막간에 한마디^^: 1.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이유중의 하나가 50년 동안 최고 권력을 휘두른 서태후가 자기 여름 별궁인 이화원을 보수하고 자기 회갑 축하 비용으로 막대한 비용을 사용해 버려 국고가 고갈돼 해군 주력인 북양함대 전력을 증강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하면 국가 경영을 잘 할 것인가는 생각지 않고 일신의 즐거움만 찾고 앉았었으니 나라가 안 망하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명종조의 문정, 순조대의 정순, 그리고 일본 놈들한테 칼에 맞아 죽어서 그런지 뮤지칼까지 나오는 명성 등 다 자신과 자신의 일족만 생각한 인물들입니다.(쾌도난마 참조 -저자의 견해에 제가 공감하는 것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2. 우리나라의 신분제-양반,상민-철폐는 1894년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갑오 개혁 때문에 이루어 졌습니다. 가정해서 일본놈들 아니었으면 반상구분 철폐가 언제 이루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전문 학자들의 의견이 있는 데 아직 못 봤을 가능성이 있지만 조선왕조 통치 계급의 자기네들 끼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통치 행태를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본을 두둔할 생각은 결코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아무튼 박통 같은 지도자가 없었으면 절대 빈곤에서 벗어 났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걸 북한이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사례에서 보면서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올바른 통치 철학을 가진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3장은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라는 제목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러,일 전쟁은(1904~1905)청일 전쟁이 끝난후 정확히 10년 뒤에 일어나 일본이 승리한 전쟁입니다. 러시아와 맞장 뜨기 위해 10년을 준비 했다는 얘기입니다. 전사자는 일본이 러시아 보다 많은 84.000명(러시아는 5만명)이었다는 데 어쨌던 승리하여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고 같은 아시아인이면서도 다른 나라 아시아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 전쟁 후 우리나라(대한제국)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 식민지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아시아의 나라인 일본의 승리에 고무된 인도의 초대 수상이 된 네루가 옥중에서 감격의 편지를 쓰고, 중화민국의 국부가 된 손문이 감격을 하고-그래서인지 나중에 신해혁명을 위한 준비를 일본에서 많이 했다고 합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이끈 "판보이차우"란 인물은 1905년 일본에 무기나 병력의 원조를 받아보기 위해 갔으나 일본은 오히려 프랑스와 조선, 베트남 상호 지배 밀약을 맺고(1907) 판보이차우와 유학생들까지 추방했다고 합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써 감격하고 도움을 받아 보려고 한 다른 아시아 국가 지도자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내친 것이죠.
-아시아인들은 서구 세력과 싸워 승리한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 열광하고 지원도 기대했으나 오히려 배척당했다는 이야기이니 일본놈들은 정말 조심해야는디...작금의 상황도 뭐 달라진거 없잖습니까? 일본놈들 지금도 다른 아시아 국가는 한 수 아래로 보는겁니다. 하기사 미국에 진거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진 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 우리나라 지도층에 있는 인사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잘 대처해야 될 텐데 걱정입니다.에구.
이 장에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과 수탈의 시작이 철도 부설로부터 시작되었단 얘기, 독도 문제, 그리고 뮤지칼 명성왕후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명성왕후를 뮤지칼은 너무 미화했단 쪽에 저는 손을 들어 주고 싶습니다. 고종시대에 득세한 인물들을 보면 거의 민씨 아니던가요? 이것만 가지고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시바료따로의 소설"언덕위의 구름":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인데요, 읽을 만한 책- 러일전쟁을 왜곡한 책으로 수정(2023, 6월)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전 일본, 소설 둘 다 멀리하는 편이라 아직 안 읽었습니다만 관심은 계속 가지고 있었는 데 이 책이 상기시켜 주네요. ^^
*4장은 신해혁명(1911)과 민중 운동이란 제목으로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중심 인물인 쑨원과 일본과의 관계를 들여다 보고 우리나라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읍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설명하면 쑨원은 총 10년에 걸쳐 14회를 일본 방문하였으며 이때 쑨원의 뒤에서 적극 도운 인물이 "미야자끼 도오뗀"이란 일본인인 데 쑨원이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뒷 받침해 주었다고 합니다.중국 청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나중에 중국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인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일본인이 힘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굴러 가는 것은 아니니 쑨원이 청조를 무너뜨린 시기에는 일본의 협력이 필요했고 일본은 한편으로 이를 이용 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장에는 또 만년에 친일로 변절한 이광수의 일본에서의 반일 활동 행적에 관한 이야기,3.1운동에 얽힌 역사책에 없는 이야기 그리고 아Q정전으로 유명한 중국의 루쒼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5장은 만주사변(1931.9 18류따오후 사건 부터~1937 .7.7노구교 사건까지 약 6년)과 만주국(1932~1945)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9.18사건은 중국인의 항일 의식이 본격적으로 싹트고 투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일본의 만주 진출의 배경이 된 일본 국내 상황도 설명하고 있읍니다.
이 시기는 1929년 세계 대 공황과 맞 물려 있는 시기입니다.때문에 일본 국내 사정도 좋지를 않아 1932년농가에서는 딸을 내다 파는 일이 속출했고 결식 아동도 급증했다고 합니다.도시에는 실업자가 흘러 넘치고노동쟁의 건수는 최고로 많아졌으며 가족동반 자살도 급증했다고 합니다.절망적인 사회,경제 상황이 만주 진출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주국 관련해서는 오족(한,일,만주,조선,몽고)협화 정책의 거짓됨과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떠밀려 만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식민 살이를 하던 우리 민족의 서러운 삶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일본 패전후 남겨진 일본 고아들(잔류고아)에 관한 이야기가 관심을 끕니다.
패전 당시 만주에 살고 있던 일본인 수는 155만여명 이었는 데 이중 20여만명이 기아와 추위로 사망했고 이 와중에 2,808명의 일본 어린이들이 중국에 고아로 남겨져 중국인들에게 입양되어 길러졌다고 합니다.
적국의 아이들이었지만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냐는 생각으로 입양해 카웠다"는 중국인과 일본인 입양아들 사이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관계를 이야기해 주고 있읍니다.
*6장은 1937년 7월7일 노구교 사건부터 1945년 8월 종전까지 8년간에 걸쳐 일어난 중일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양국의 사망자 수는 이 전쟁에 최대 100만명을 파병한 일본이 약 45만명,중국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 부터 계산하여 군,민 합쳐 약 3,500만명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미,영,소련이 같이 일본을 상대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네덜랜드가 이미 독일에 항복한 상황이라 중국이 일본에 저항하는 힘을 유지시켜 독일전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이때 중국군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루트들을 "원장루트"라고 하는 데 많은 루트가 있었으나 일보군에 의해 차례로 제압당하고 마지막으로 큰 역할을 한 것이 중국 운남성 쿤밍에서 버마를 있는 루트(뗀멘도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도로도 결국은 일본군에게 제압당하고 이후에는 항공 지원을 했는데 이때 악천후와 일본 전투기의 공격으로 약 600여대의 전투기를 잃었다고 합니다.
1944년 이후 최종적으로는 일본군은 원장 루트를 제압하는데 실패하고 보급도 여의치 않아 운남성에서 많은 일본군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 여기서 중국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쿤밍 출신 "네얼"이란 음악가가 "의용군 행진곡"이란 곡을 작곡했는 데 원래 30년대 항일 영화 '풍운아녀"의 주제가였다고 합니다.이 곡이 항일전쟁 중에 사랍들에게 널리 불려지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채택되었다고 합니다.(작곡가는 23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수영하다 익사했다고 합니다.0
-그리고 항일 전쟁 영화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데 일본에게 쉽사리 나라를 뺏긴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은 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8년여에 걸쳐 일본과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에 항일 투쟁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의 주요 소재이며 지금은 코미디로 까지 영역을 넓혔고 일본과의 교류도 있어 일본인 역할은 일본 배우가 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합니다.(오래전에 "붉은 수수밭""r국두"란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는 데 이 영화들이 항일 영화입니다.오늘 아는 이가 추천해주는 데 "금릉 십삼채"란 영화도 있답니다.^^)
*7장은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국공 내전에 대하여 다루고 있읍니다.
-아시아,태평양전쟁:1941.12.8부터 1945.8.15까지 일본과 미,영,중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일본은 중국 본토에서의 전쟁과 동시 수행.전쟁 발발은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1시간 빨리 열국령 말레이 반도 코타바루에 상륙하는 걸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전쟁목적은 석유등 자급자족 자원 확보를 하기 위해 영국,네덜란드령을 공격하는 것이었는 데 영국을 공격하면 결국 미국이 참전할 거
로 보고 선제 공격하였다 합니다.이 전쟁으로 공식 집계된 민간인 포함 일본인 사망자는 310만여명 이라고 하는 데 중국만 해도 3,500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어떻게든 전쟁은 안 일어나야 되는 데 인류의 역사 는 전쟁과 함께 면면히 이어져 내려 왔으니 앞으로도 안 일어난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에구~!
미국과의 전쟁 발발 원인은 히틀러의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항복시키자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을 압박하였고 이에 반발한 미국이 41년 8월 대일 석유 수출을 전면금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원 확보를 위해 영국령 말레이지아,네덜란드령 인도 차이나를 점령하는 동시에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무너 뜨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미,영과 전면전을 하느냐 아니면 중국에서의 철군을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이느냐의 기로에서 전쟁을 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 개전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이면에는 "천황,수상 모두 미국괴의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도조히데끼 육군 장관을 위시한 수뇌부들의 만주국,조선 식민지를 모두 잃게 되고 수십만명의 전사자와 가족들 한테 면목이 없다는 논리에다 전쟁을 주도할 해군에서도 이미 전비 예산을 따 논 상태에서 전쟁을 회피하는것은 해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전쟁 반대파가 설 자리가 없어서 였다는 기막힌 이유도 나옵니다.
당시 개전 반대론자였던 "도오고 시게노리"외무장관은 미국의 대일 석유 금지를 초래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 점령지에서 북부로 철수하는 대신 미국은 일정량의 석유 수출을 재개하라는 을안을 제시하여 개전을 피하려고 하였고 미국도 11월 25일 "일본이 인도차이나 북부 주둔 일본군을 25,000명 이하로 줄이면 민수용 석유는 수출한다"는 3개월 유효 협의안을 제시하려 하였다가 다음날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 일본군 전면 철수"라는 강경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미국이 왜 강경론으로 바뀌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나 제가 읽은 딴책에서 미국의 "전쟁유도설 "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는데 만약에 잠정협정안 대로 되었다면 12월 개전은 일단 없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개전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가정이 가능한 데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는 것이니 소위 지도 계급에 있는 몸들이 지들 맘대로 결정하여 일으키는 전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잃고 다치는 평범한 사람들만 불쌍한겁니다.
사족:이 책 태평양 전쟁에 대한 언급이 이 정도 밖에 없읍니다.많은 이야기 꺼리를 기대했는 데 지면 관계로 생략한 것인지 아니면 자료 준비가 안된 것인지 좀 아쉽습니다.
-중국 국공 내전;중국내에서 모택동의 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군과의 싸움.중일전쟁 기간에는 대일전쟁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대릴 종전후 1946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내전에 돌입.초기에는 병력-국민당 430만,공산당 120만-및 물자에서 우세한 국민당군 우세.그러나 48년 이후 공산당 우세,49년 베이찡 무혈입성으로 공산당 승리하고 10월에 중화인민 공화국 선포,현재에 이르고 있음.장제스는 대만으로 피신,50년 3월에 총통으로 부활,지금의 대만 정부의 기초를 마련함.
압도적인 병력,물자의 우세에도 장제스 군대가 패한 가장 큰 이유는 민심의 이반-국민당 정부의부정부패,인플레.공산당의 민심을 끌어 들이는 토지 해방 정책,8년간의 전쟁에 지친 장병들의 전쟁 염증 심리-에다 초기 국민당을 지지하던 소련의 공산당 지지 선회로 일본군이 사용하던 무기의 대량 공급에 의한 공산당의 전력 강화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함.
이 장에서는 국공 내전시 국,공 양측에 편입되어 싸운 잔류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옴.(이에 관한 일본 "개미병사"란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
-국민당 편에서 싸운 일본군 이야기:포츠담 선언으로 항복한 중국 샨시성 주둔 일본군 1군 59,000명중 2,600명이 잔류하여 국민당 군 편에서 공산당과 싸우다 55명이 죽고 7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함.이들이 잔류하게 된 이유는 전범 용의자인 1군 사령관 "스미따 요시로"와 당시 공삿당에게 열세였던 국민당 쪽 군벌리더인 "엔시샨 "사이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 함-전범으로 처벌받지 않는 대신 일보군 병력을 잔류시켜 지원받는 조건.
기가 막힌 것은 잔류병사중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이 "자신의 의사로 남은 것"으로 간주되어 구 일본군으로서 보상도 못 받고 소송에서도 패했다 합니다.-죽일 놈들 .힘이 있는 놈은 힘없는 사람들 이용해 먹고 자신은 편히 잘 살고..요거 영화로 만들만 하지 않습니까?^^
-공산당 편에서 싸운 일본인 이야기:만주국으로 강제 이주되어 살다가 공산당군 부상병 호송대원이 된 두 일본인."효오도오"사까꾸치"의 경우-사까구치씨는 포격에 죽고 효오도오씨는 내전이 끝난 후 여기저기 떠돌다 58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며 귀국후 이들의 삶은 취직도 안되고 공안당국에 감시당하는 조국 일본에서 배척 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참고 사항*
-패전 당시 일본 재외 거류자는 총 688만명이었는 데 이중에 군인이 367만명(육군 330만,해군 37만),민간인과 거류민이 321만명이었다고 합니다.이들중 종전 4년후인 1949년 말 까지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잔류한 인원은 64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이중 유명한 잔류자 집단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한 1천명이 웃도는 일본군과 만주 지역의 잔류고아,부인 그리고 시베리아 억류자들이라고 합니다.
-국,공 양쪽 진영의 요구에 의해 중국에 잔류하며 착취당한 일본인은 2~3만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 의사,간호사,기술자등의 전문 인력이었다고 합니다.대표적인 사례가 전 관동군 비행대장 "하야시 야이찌로오"씨 로서 부하들을 이끌고 공군이 없던 공산당의 조종사 양성이나 기술 훈련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8장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장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하여는 "처음에는 내전이었다가 국제전으로 변했다.비공식으로 100여만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학살중 남측에 가담한 경찰이나 우익단체에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물들이 많았다.국공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도 중국이 참전한 이유는 한마디로 순망치한-적대국 미국과 국경을 맞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김일성 망명 정부를 만주에 세워 달라는 소련의 요청도 있었다 하며
남북 한 지원 외국인 병사중총 20만여명이 사망 및 행불되었는 데 이 중 18만여명이 중국 병사라 함.
한국전쟁은 일본의 전후부흥 기폭제가 되었는 데 자위대 창설,강화,미일 안보 조약의 체결등이 이루어 지고 일본을 공산권에 맞서는 방파제로 자리 매김하는 계기도 되어 오끼나와가 주요 거점이 되었다고 함.
한국전쟁은 대만으로 밀려간 장개석 국민당 정부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합니다.모택동 공산당 정부는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 데 미 7함대가 대만 해협을 막고 있어 망설이던 중 한국전이 터지면서 대만 보다는 북한 지원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현 상황 유지가 가능했다고 본답니다.
-베트남 전쟁:1954년 디에비엔푸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가 물러난 뒤에 제네바 협정에 의해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자본주의 표방 남베트남,사회주의 표방 북으로 나뉜 뒤 1960년 남부에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이 결성되어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군에 대항하여 투쟁.이에 미국은 1962년 도미노 이론을 근거로 남베트남 지원 군사원조 사령부를 현지에 설치 공공연이 지원.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1965년 북베트남을 전면 공격하였으나 전비확대,인명피해,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영향과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 심화로 인한 민심 이반으로 승전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판단 ,철수하고 1975년4월 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됨으로써 미국이 처음 패퇴한 기록을 남긴 전쟁.(이로써 식민 지배 종식을위한 베트남 10,000일의 투쟁이 끝나고 통일 국가가 됨-요건 제가 살 붙인 것임^^).미국 전사자: 58,000,부상자 30만,베트남 전사자:1백수십만 또는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에 1964~1973년 까지 연 인원 32만명을 파병:목적은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정권 정통성 확보를 위한 미국 환심 사기.한국전쟁 특수로 전후 부흥에 성공한 일본을 모델로 한 경제 부흥 전략-월남전 특수 효과는 총 10억 2천만 달러에 달했는 데 그중 72%가 군인,노동자의 송금,도로및준설 공사,수송등 무역외에서 벌어 들인 것이라 함.팔 것은 없을 정도로 경제력이 약했던 시기라는 얘기고 현 삼성,현대,한진,대우등이 월남점 특수로 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함.-이었다고 하며 실제로 월남전 특수가 우리나라 경제 부흥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함.
여기서 베트남 전에서 우리 군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한 사례에 대해 약간 언급이 있는 데 최근에 상당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책이 한권 나와 있읍니다.제목은 기억이 안나고 내용도 대충 읽었는데 읽으면서 느낌은 굳이 우리 편을 들자면"목숨을 담보로 한 전장터인데 적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옆의 전우가 죽어 나가는 그런 전투를 계속하다 보니 이성이 흐려졌을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싶고요,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을 인욯하자면 한국전쟁을 겪고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인 탓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도 있다고 합니다만, 제가 군 복무시 피교육생 내무반장을 해 본 경험으론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행사하는 데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다"라는 데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총 있겠다,저항 능력없는 아이,노인들이겠다,언제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전쟁터에서의 일부 분별력 없는 인간들의 자포자기성 행동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베트남 전쟁도 국제전이었읍니다.
남베트남측엔 미국,우리나라를 비롯대만,스페인,오스트렐리아,뉴질랜드,필리핀,태국등이 파병했고 북베트남 측엔 중국,구 소련,그리고 북한-공군 조종사-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베트남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1998년 고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과거의 한 때 불행한 시기가 있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유감 표명을 하고 이에 답해 베트남의 판간카이 수상이"과거는 일단락 짓고 미래를 보자"라고만 말했다고 합니다.중국식 경제 개혁을 꾀하는 베트남 입장에서 발전 모델인 우리나라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 까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9장은 국교 정상화라는 제목으로 일본과 피식민국이였던 우리나라,그리고 적국이었던 중국과의 수교 문제를 다루고 있읍니다.
-먼저 한일간의 수교 과정을 보면 51년 예비회담,52년 1차 본화담을 시작으로 15년간 7차에 걸쳐 진행되었는 데 1953년 "구보다"란 인물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등의 사례가 이어져 협상에 진척이 없었다고 합니다.그러다 1965년 6.22일에 "일본과 대한민국 사이의 기본 관계에 대한 조약(기본 조약)"과 (1)청구권,경제협력 협정 (2)어업협정 (3)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 협정 (4)문화재,문화 협력 협정등이 도오쿄에서 서명되얶고 기본 조약은 동년 12월에 발효되었다고 하며 이 때 영유권을 서로 주장한 독도 문제는 다루어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막간에 한마디:조약이 체결되기 전 해인 된 1964년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이 책을 보면 같은 해 6월 3일 학생과 시민 수만명이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박통은 계엄령을 발동,군사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당시 시위가 심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이 당시 시위 주요 이슈는 일본으로 부터 3억 달러로 "일본에게 입은 피해를 청산한다는 것은 굴욕외교의 극치"였다는 것인 데 당시에는 어린 저도 보상액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암튼 무상 3억불,유상 2억불이 종자돈이 되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초석이 다져졌다 하니 좀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6.3시위 참가자의 예로 이명박 전 대통령,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유영렬 국사편찬 위원회 위원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미국의 "공산권의 효과적 봉쇄책의 일환으로 한 일 관계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연결 시키려는 의도(안보 논리)"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점차 줄이고 일본에게 그 짐을 떠 넘기려 했으며 돈도 기술도 없던 박통 정권은 교섭을 타결해 일본에서 돈을 끌어 들일 수 밖에 없었다(경제 논리)"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해석입니다.식민지배의 책임 문제를 물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데 당시 어린 마음에도 너무 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 데 위 내란죄로 체포까지 되었었던 현승일씨도 나중엔 박통을 다시 평가했다니 결과론이지만 우리나라가 박통같은 지도자를 만난 건 "커다란 행운이 아니었나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 당시 일본에서도 학생들 간에 정상화 반대 시위가 있었다고 하는 데 시위 이유가 "한일 국교 정상화는 꼭 이뤄져야 할 일이지만 일본의 자세가 역사를 진지하게 보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고 하니 일본내 양식있는 사람들이 주도를 한 시위인 것으로 보입니다.-일본놈들 아직도 반성이 없이 오히려 극우 쪽으로 치닫고 있죠?암튼 조심해야 될 나라인 데 그런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 보다 쎈 이웃이라는 게 우리한텐 참 비극입니다.
-이제 중,일 국교 정상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국교는 전후 27년만인 1972년에 맺었다는 데 여기에 얽힌 비하인드(behind) 스토리가 있읍니다.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미간의 핑퐁 외교"가 시발점이었다는 데 1971년 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3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의 탁구협회 이사가 중국 탁구협회 간부에게 "미국 선수들을 중국으로 초청해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고 보고를 받은 모택동이 시기상조란 외무성의 보고를 받고 동의했다가 번복하고 초청해서 성사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석달 뒤 키신저가 중국을 다녀 가고 이듬해인 73년 2월 당시 미 대통령이던 닉슨의 방중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당시 키신저의 방중을 몰랐던 일본은 충격을 받고 7월 6일에 다나카 수상이 중국과 수교를 서두르겠다고 발표한 뒤 3개월 뒤인 9월25일에 중국으로 건너가 4일 후 국교 정성화 중,일 공동성명에 조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 미국이 중국에 먼저 접근하고 중국이 받아 들여 국교가 맺어지게 된 데는 '베트남 전에서 발을 빼고
싶픈 양국의 속사정-미국은 국내 반전 운동,중국은 문화 대혁명에 따를 경제적 어려움-이 일치 헸을 뿐 아니라 소련을 두려워 한 데서도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되어 있는 것을 나고야 세계 탁구대회를 매개로 풀어 나갔다고 합니디.
중일 간에는 비수교 20여년 동안 민간인 차원의 교류가 축적되어 있었고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심이 뿌리가 깊음에도 1차 대전후 지나친 배상 요구에 대한 반발로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예를 들며_그래서 그런지 중일 공동 성명에 "대 일본 배상 청구를 포기한다"는 조항이 있네요.참내!- 국교 정상화에 대한 선전 활동을 펼쳤으며 마오에 대한 인민들의 신뢰가 깊어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10장은 마지막 장인데 개혁,개방과 민주화란 제목입니다
먼저, 중국의 개혁,개방은 1978년 12월 13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등소평 주도로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4개 분야 근대화를 목적으로 국내개혁,대외 개방을 시작한 것을 말한다 합니다.모택동 사후 부인 강청등 4인방이 숙청된 2년뒤의 일로 주요 정책은 "인민공사를 해체하여 개별 농가에 자주적 권한을 주는 생산 청부제 도입,기업의 국유화 경영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개인 기업 경영을 인정하여 광뚱성 선전등에 경제 특구를 설치하여 외자를 적극 유치하여 부유해 질 수 있는 지역부터 먼저 부유해 지도록 한다-등소평의 "선부론"이라고 하는 정책을 말하는데 도서관에 가면 "선부론"이란 제목의 두툼한 책이 있읍니다.읽어 볼 까 하는 유혹도 잠시 느꼈지만 깊이 알 필요성을 안 느껴 읽어 보지는 않았읍니다^^-는 것이 주요 정책이라고 합니다.
이후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잠시 경제 활력이 떨어졌다가 1992년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개혁,개방을 대대적으로 선포,현재는 미국 다음가는 국력(GDP 기준)을 자랑하게 되었으나 도농,연안지역대 내륙지역의 빈부 격차,환경오염 문제등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도 산적해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중국의 모습은 결국 등소평이란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얘긴데 뛰어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흠집은 많지만 우리나라 박통도요^^) 한가지 짚고 넘어 갈 일은 중국의 발전 모델이 박통 시절의 우리나라인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이 책에서는 선행모델이 없었다고 되어 있는 데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 제시가 없어 제 생각이 맞는 것으로 결론 내려고 합니다^^
본문에 중국의 세계조강능력 1위인 빠오샨 제철소에 건설에 일본 신일본 제철소의 도움이 컸다는 얘기가 -우리나라 포스코도 그랬다지요?- 고인이 되신 박태준씨가 중국에서 국빈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아닌가요? 박태준씨의 도움이 컸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암튼 현재의 중국은 과거 중화-세계의 중심-라는 자부심을 다시 갖추려는 모습인데요,우리나라는 이래저래 피곤합니다.중국이 힘을 못 쓰면 일본놈들이 난리고 거기에 미국까지...미국은 멀리 있으니 일본,중국을 확 눌러 버릴 비책을 이끌어 낼 그런 지도자는 안 나오나요?^^에구구!
-민주화 운동 관련 해서는 우리나라 광주 민주항쟁 (1980.5.18)과 대만의 메이리 따오 사건에 대해 기술해 놓았는데요,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들 알고 계시니 만큼 사망 207명,부상2,392명 그외 행방불명 다수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는 것으로 마치고요-5.18관련 영화로는 최근 진구,한혜진 주연의 26년이란 영화가 있었는 데 흥행엔 별로 재미를 못 본 것으로 작품성은 판단하시고요,인상적인것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인물 묘사였는 데 "참!저렇게 대단한 담력이 있으니 하극상 쿠테타를 일으키지"하고 감탄할 정도로 인물 묘사가 살아 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이전에 김상중 주연 영화가 있었는 데 제목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고요,이정현이란 가수가 소녀 시절에 주연헌 "꽃잎"이란 영화도 있습니다.^^)
대만의 민주화 운동인 "메이리따오 사건"은 1979년 12월 대만 남부 까오슝시에서 일어난 반체제 운동 탄압 사건인데 12월10일 세계인권의 날 기념 집회를 하려고 한 것을 무허가라는 이유로 저지하여 20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하며 당시 주동 인물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반란죄로 유죄 판결 받았다고 합니다.
의견;우리나라와 대만의 민주화 운동은 시차가 채 1년이 안되는 사이에 일어났읍니다.두나라 다 독재를 했던 지도자의 사후에 일어난 공통점이 있구요,독재를 한 두 지도자가 자국을 부흥시킨 점에서도 같습니다. 대만의 민주화 운동은 우리나라의 광주유혈사태를 보고 80년대 부터는 비폭력 민주화 운동으로 전환하였는 데 87년 계엄령 해제로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 졌다고 하며 이점에서는 또 우리나라와 닮았다고 합니다.
책 소개를 마치며:
이상으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10개장의 내용을 나름대로 소개해 보았읍니다.내용들이 모두 우리역사와 연관 된 것인데다 중요한 내용이 많아 소개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렸는데도 미처 소개 못한 내용이 많습니다.4국의 역사 교과서를 비교한 내용이 대표적인데요.이것은 소화해서 기록하기가 정말 힘들어 포기한 케이스입니다.관심이 있으신 분은 따로 책을 구입해서 보시는 게 어떨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저도 애초에는 구입 의사가 없다가 마음이 변해 구입하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지니 정가 18,000원인데 14,400원에 판매하는 곳이 있어서 주문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기대하며 이만 마칩니다.많이 힘들었는데 공부도 많이 됐습니다.
[2013.3.10.0:52분 마침]
[여담]
1.요즘 글 쓰기 작업에 재미들려 정작 해야 할 그림 그리기 작업이 많이 지장 받고 있습니다. 글 쓰는 시간을 좀 줄여야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요게 세상 편한 자세에서 하는 작업이라 자연 들이는 시간이 많아 지네요.^^ 그림은 온 정신을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두 시간 정도 그리면 몸이 탈진 상태로 가서 다시 1시간 이상을 쉬어야 되거든요.그래도 요즘 즐겁습니다. 젊은 시절 부터 이리 살고 싶었는데 그놈의 생업땜시 못했거든요.넉넉한 환경에서 맘 편하게 자라게 해주는 부모를 둔다는 건 그래서 한 세상 살고 가는 삶에서 가장 큰 복이라고 요즘 와서 생각하는 데 만약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또 다른 삶을 꿈꾸지 않았을 꺼라는 보장도 없읍니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나 똑 같은 환경에서도 그에 대응하는 방법은 다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2. [2022. 11. 12] 이 자료는 어느 검색하신 분 덕분에 열어봤는데 9년 전에 쓴 글이다. 64세일 때. 이때와 지금 건강 상태를 비교해보니 늙고 병들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불과 9년 만에 이리 늙어 글쓰기는커녕 그림도 별로 못 그리고 있다. 만약에 책 한 권을 다 요약하는 이리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으면 건강 상태가 지금보단 낫지 않았을까? 후회막급이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게 인생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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