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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덕순씨 일대기(여성으로 태어나 최악의 삶을 살았을 경우를 가정한 이야기)

Bawoo 2015. 1. 24. 22:38

점심시간이 죽도록 싫었다. 선생님이 무서웠다.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엄마는 돈 벌러 가야 했다. 어린이집 문 앞에서 엄마는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 눈에 물이 맺히는 게 얼핏 보였다. 식판을 받아 들었다. 싫어하는 김치가 또 있었다. “먹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삼켜!” 구역질이 났다. 뱉어버렸다. 선생님의 커다란 손바닥이 뺨에 날아들었다. 방바닥에 굴렀다. “주워 먹어!” 땅에 떨어진 김치를 입에 넣었다. 억지로 삼켰다. 눈물이 솟구쳤다.

 초등학생 땐 방학이 싫었다. 친구들은 이 학원 저 학원 옮겨 다녔다. 늘 혼자였다. 손에 쥔 급식카드가 전부였다. 방학 내내 점심으로 삼각김밥과 빵을 먹었다. 편의점 알바 언니가 가끔 우유를 줬다. 짜장면도 먹고 싶은데 카드를 받지 않았다. 하루 4000원짜리 카드론 치킨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 엄마가 재혼을 했다. 새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하는 일 없이 PC방에서 살았다. 엄마에게 늘 손을 벌렸다. 돈을 주지 않으면 손찌검을 했다. 엄마 몰래 슬쩍슬쩍 내 몸을 만졌다. 엄마도 알았나 보다.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어느 날 새 아빠가 우릴 찾아왔다. 엄마를 불러오라고 인질극을 벌였다. 친아빠를 죽이고 내게 몹쓸 짓을 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객선에 올랐다. 크고 낡은 배였다. 떠들고 놀다 새벽녘에 잠들었다. 크게 선회하는 느낌에 눈을 떴다. 배가 기울어 있었다. 객실에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했다. 장난 같았다. 친구들과 낄낄거렸다. 배가 점점 더 옆으로 누웠다. 계속 대기하라고만 했다. 무서웠다. 친구들이 말렸지만 기어나갔다. 가까스로 밖에 이르자 어선들이 보였다. 뛰어내리라고 했다. 어부들이 물에서 나를 끌어올렸다. 배는 더 기울었고 대기하던 친구들과 사라져 갔다.

 대학은 실망스러웠다. ‘족보’만 공부해도 좋은 성적이 나왔다. 교수님은 자기 미래에 더 관심을 가졌다. 연구실적과 정부사업 공모에만 힘썼다. 4년 내내 취업 준비에 매달렸다. 응시 족족 미끄러졌다.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졸업을 미뤘고 학교에서 눈치를 줬다. 학자금 대출금만 차곡차곡 쌓였다.

일자리를 얻었는데 ‘열정’만 사고 돈은 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배고파서 더 못했다. 빚은 늘어만 갔고 개인워크아웃 신청을 했다. 겨우 취직했는데 이른바 비정규직이었다. 혹시나 기회를 잡을까 기대를 품었다. 장그래처럼 죽도록 뛰었고 장그래처럼 보기 좋게 잘렸다.

 아는 분이 창업한 회사에 취업을 했다. 월급은 적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열심히 일했고 승진도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다. 노후 대비를 위해 연금저축도 들었다. 대출을 받아 조그마한 아파트도 마련했다.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다. 그렇게 계속 될 줄 알았다.

그때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쳤다. 회사가 휘청거렸다. 사장이 불러 좀 쉬라고 했다. 얄팍한 퇴직금 봉투를 내밀었다. 아무 소리 못하고 짐을 쌌다.

 대출받아 동네 빵집을 차렸다. 될 만하니까 임대료를 올려달랬다. 문 닫고 나온 자리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생겼다. 파출부부터 건물 청소까지 온갖 일을 다했다. 그래도 대출금 갚기에 벅찼다. 자식 결혼도 시켜야 했다. 아파트 팔고 변두리 전세로 옮겼다.

 병치레하던 남편이 돌아갔다. 윗동네 사글세로 옮겼다. 자식 본 지도 몇 해가 지났다. 손주가 보고 싶다. 오란 소리도 못한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점점 잦다. 몸도 안 아픈 곳이 없다.

방문을 꼭 닫고 번개탄을 피웠다.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웠다.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 열심히 살았는데… 잘못 살았네요. 근데 나, 정말 힘들었거든요.”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과 발표된 통계지표로 재구성한 가상인물의 삶이다. 이 중 하나도 겪지 않았다면 당신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 중앙일보-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