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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Bawoo 2015. 1. 30. 20:18

 

                    찰스 1세

찰스 1세의 초상화
찰스 1세의 초상화

잉글랜드의 왕
스코틀랜드의 왕
재위 1625년 ~ 1649년
종교 성공회
왕비 프랑스의 헨리에타 마리아
이전 왕 제임스 1세
다음 왕 공석
(사실상 올리버 크롬웰)

찰스 1세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는 1625년 3월 27일에서 그가 처형되던 1649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하던 이다.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출생한 찰스1세는 의회와 벌인 권력투쟁으로 유명하다. 찰스1세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했고 절대 권력을 얻으려고 했으므로, 많은 영국인은 찰스1세를 두려워 했고 찰스1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특히 의회의 동의 없이 하는 과세를 강하게 반대했다.

 

찰스 1세의 통치기는 기독교다운 갈등으로 가득했다. 의회와 여론이 반대하는데도 영국 종교개혁 이후 탄압받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자인 헨리에타 마리아와 혼인한 찰스1세는 진일보해 영국 성공회 대주교인 리처드 몬타규윌리엄 로드와 유대를 강화했다. 찰스1세는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했다. 대주교 윌리엄 로드는 성공회에서 감사성찬례성사 집전에 사용하는 성공회 기도서를 개정했다. 찰스1세의 많은 신하는 개정된 기도서 내용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유사하다고 느꼈다. 찰스1세는 이후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강요하는 종교 개정을 단행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전쟁은 영국을 약화시켰고 찰스1세 몰락에 결정타였다.

 

찰스1세의 통치 말년은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으로 얼룩졌다. 찰스1세는 의회파(찰스1세의 권력에 도전), 청교도(찰스1세의 로마 가톨릭 교회 우대 정책에 반대)와 맞섰다. 제1차 영국내전(1642년~1645년)은 찰스1세의 패배로 끝났고 의회파는 찰스1세가 입헌군주제를 수용하길 기대했으나 찰스1세는 제2차 영국내전(1648년~1649년)을 일으켰다. 결국 재판에서 찰스1세는 대역죄사형을 선고받았다. 향년 49세.

이후 잉글랜드는 왕정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연방으로 불린 공화정을 세웠다. 1660년 왕정 복고로 찰스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차기 왕이 되었다.

 

  • (영어) 찰스 1세 - 영국 국가기록원
  • 찰스 1세 연대기
  • 찰스 1세 공식 사이트
  • 의회 공문서 보관소에 찰스 1세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이 있다.
  •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찰스 1세
  • 1642.8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뉜 잉글랜드의 내전이 시작되다

    1642년 8월 말, 영국 중부의 노팅엄 북부의 성채에 깃발이 내걸렸다. 붉은 바탕에 마치 닥스훈트처럼 길게 몸을 늘인 사자 세 마리가 금실로 수 놓인 깃발. 그것은 영국 국왕을 상징하는 표시였다. 그리고 그 깃발의 내걸림은 곧 왕이 반역자들에 맞설 병력을 소집한다는 의미였다.

    “만세! 만세! 국왕 만세!”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 왕의 깃발이 내걸리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기사들과 귀족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얼마 후 왕이 왕세자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일제히 모자를 벗어 던지고, 칼을 뽑아 휘두르며, 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에는 왠지 모를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손을 흔드는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표정에도 그 불안은 좀처럼 감추기 어려웠다. 이렇게 해서 1차(1642~46), 2차(1648~49), 3차(1649~51)에 걸친 영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절대왕권이라는 모래성

    내전의 씨앗은 언제 뿌려진 것일까? ‘장기의회’가 소집된 1640년? 의회가 왕에게 <권리 청원>을 제출한 1628년? 찰스 1세가 즉위한 1625년? 아니, 근본적인 문제는 엘리자베스 1세나 그 이전 시대부터, 영국의 ‘절대군주제’가 안고 있는 모순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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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률상 왕은 주권자였고, 그의 통치권은 신성불가침이었다. 그의 왕국에서 왕이 할 수 없는 일은 원칙적으로 하나도 없었다. 의회는 입법기구도, 대의기구도 아니라 왕의 소집에 따라 자문에 응하는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었고, 의회를 통해 절대왕권에 대항하는 귀족과 지방 호족의 실권은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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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5년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 이후 왕은 세금을 징수하거나 병력을 동원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또한 조선이나 절대주의 프랑스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왕의 관리가 지방을 다스리지도 못했으며, 왕의 ‘위임을 받은’ 지방 호족인 치안판사들이 지방행정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영국의 절대왕권이란 모두가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존립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굳이 왕권이라는 것이 없어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날이면 왕정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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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다이크가 그린 찰스 1세

     

  • 그런 생각이 점점 커지게 된 계기는 종교 문제가 제공했다. 본래 영국이라는 나라는 종교 때문에 나라가 뒤흔들린 경험이 많았다. 헨리 8세 시절 영국 국교회가 세워지고 가톨릭 교회가 탄압을 받다가, 메리 1세 시절에는 거꾸로 신교도들이 숱하게 학살되었으며, 다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가톨릭이 수세로 몰려 영국 왕위가 가톨릭교도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최후를 재촉하기도 했다. 이렇게 백 년 사이에 심각한 종교 갈등이 최소한 세 차례나 일어났고, 이제는 국교회가 주도권을 잡은 가운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잉글랜드에서는 새로 청교도가 나타남으로써 또 다른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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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엘리자베스 1세가 직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음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가가 왕위를 잇게 된다.스튜어트가의 제임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를 탄압하며 국교회의 지배권을 확인했지만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즉위한 그 해에 프랑스 출신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왕비로 맞는다. 그녀는 부르봉 왕가의 핏줄이었고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기에, 찰스 1세가 메리 1세나 메리 스튜어트처럼 영국을 가톨릭화하려 할 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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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에 찰스 1세가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분쟁의 소지는 더 커졌다. 윌리엄 로드는 이른바 ‘고교회파’로서, 영국 국교회의 틀을 지키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일부 회복하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드는 매우 완고하고 전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국교회의 세력권에 침투해 들어오는 청교도를 막기 위해 그들의 귀나 코를 자르는 악형을 남발했다. 하지만 결과는 청교도 과격파들의 목소리만 키워 준 데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윌리엄 로드는 1639년, 장로교가 세력을 떨치는 스코틀랜드에서 국교회의 힘을 늘리려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둔다. 여기에 반발하여 스코틀랜드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찰스 1세는 전쟁 준비를 위해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의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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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에 이어 정치와 경제적 이권의 문제가 걸려 있었다. 튜더 왕조 시절 비교적 왕실에 고분고분했던 귀족과 지방 호족들은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며 점차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함은 물론 아일랜드까지 하나로 묶어 ‘대영제국’을 건설할 꿈을 꾸었다. 그러자면 먼저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왕권은 신이 내린 것으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관습적 권한을 넘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건설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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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회의 반발은 심해졌고, 제임스 1세가 죽었을 때는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뒤를 이은 찰스 1세가 아버지의 방침을 계승해 계속해서 왕권 강화를 꾀하자, 의회는 1628년에 <권리청원>을 내놓는다.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비롯해서 왕권도 건드릴 수 없는 일련의 ‘자유권’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였다. 찰스 1세는 일단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지만, 몇 개월 후 의회를 해산하고는 이후 11년 간 한 차례도 의회를 열지 않으며 유력한 신하들과의 소통을 단절한다. 의회를 열고 닫는 것이 왕의 고유권한이었기에 의회파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만큼 분노와 불만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그 동안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을 피하기 위해 각종 명목으로 특별세를 거두며 재정을 충당했다. 하지만 마침내 스코틀랜드 정벌을 위해 정식으로 세금 징수 승인이 필요했으므로, 할 수 없이 의회 대문에 박았던 대못을 뽑아낸 것이다.

    크롬웰, 찰스의 꿈을 깨트리다

    11년 동안 울분을 삭혀야 했던 의회는 마침내 개원하게 되자 그야말로 “막 나가기” 시작했다. ‘국왕독재’의 상징이던 특별재판소를 폐지하고, 왕의 측근인 윌리엄 로드와 스트래퍼드 백작을 체포해 스트래퍼드는 처형해 버렸다. 그리고 왕이 다시 의회 문을 닫지 못하게 ‘의회는 최소한 3년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는 규칙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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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11년 만에 열린 의회는 1653년에야 폐회되는 ‘장기의회’가 되었고, 그 사이에 주권은 국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는 이념이 불거지면서 왕과 의회는 점점 양립할 수 없어졌다. 상황은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아일랜드 총독 출신인 스트래퍼드가 처형되자 “잉글랜드의 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다시 잉글랜드에서 “왕과 왕비가 프랑스와 짜고 신교도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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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에 의회는 국왕의 재가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아일랜드에 진압군을 파병하기로 결의하고, 다시 찰스 1세의 잘못을 2백 개 조항에 걸쳐 시시콜콜히 나열하며 “삼가 시정을 요구한다”는 <대항의문>을 내놓는다. 그러자 찰스 1세는 결의문 통과를 주도한 다섯 의원을 체포하고자 몸소 의사당에 난입했으며, 의회는 이들 의원을 내달라는 왕의 요구를 면전에서 무시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의회는 지방의 민병대를 의회의 통제 아래 둔다는 법안을 결의했다. 이에 맞서 찰스 1세는 노팅엄으로 갔고, 거기서 국왕의 깃발을 내걸게 된다. 곧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 어느 한쪽에 가담하며 둘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잉글랜드 남부는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신에게서 왕권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찰스 1세의 그림(왼쪽), 싸움터로 나서는 크롬웰

     

  • 내전 초기는 왕당파에게 유리한 흐름이었다.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실전 경험이 없는,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불러 모아 만든 집단이었으며 그나마도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645년에 올리버 크롬웰의 ‘신모범군(New Model Army, ‘신형군’이라고도 한다)’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전문직업군다운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로 막강한 위력을 떨쳤다. 특히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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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롬웰 군대는 싸움터에서도 늘 기도서를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들의 적인 국왕군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는”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위해 성스러운 싸움을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신모범군의 전공이 두드러짐에 따라 의회파 내에서 크롬웰의 입지도 커졌고, 그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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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1646년 4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면서 1차 내전은 끝났다. 찰스 1세는 이후 내내 의회파의 손아귀에 있었으나, 계속 외부와 비밀 연락을 하며 국면 전환을 꾀했다. 의회파 사이에 알력이 빚어지고(이번에는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의 충돌이 중심이었다), 급기야 왕당파가2차 내전을 일으켰을 때,그는 자못 희망에부풀었으리라. 하지만 1년여 만에 다시 승리를 거둔 크롬웰은 이제는 더 이상 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굳게 결심한다.

    승자와 패자, 그들이 남긴 것

    찰스 1세의 처형

     

  • 1648년 12월, 크롬웰의 군대가 의회를 기습했다. 그들은 찰스 1세의 처단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 약 2백 명을 총칼로 위협해 의사당에서 내쫓고, 그 중 일부는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크롬웰 지지파들만 남은 의회(이를 ‘잔부 의회’라고 불렀다)가 왕을 재판하기 위한 최고법원을 창설했다. 그의 재판은 7년 동안 진행된 내전의 논리를 압축하여 무기가 아닌 논설과 법률용어로 재현하는 자리였다. 검찰 측은 왕의 권한은 제한적인데 찰스 1세가 월권을 하며 폭정을 자행했다고 고발했고, 찰스 1세는 주권자인 왕의 권한은 무한하며 그런 비판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당한 재판을 받는 게 아니라 반역자들에게 희롱당하고 있을 뿐이라며, 재판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법정은 10일 만에, 이미 정해져 있던 판결을 내렸다.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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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처형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그리고 그의 목에 도끼가 휘둘러졌고, 잠시 후 집행관이 찰스 1세의 목을 집어올려 군중들에게 보였다. 이는 재판을 통해 신민들이 그들의 군주를 처형한 최초의 일이었다. 앞서 메리 스튜어트도 사형에 처해졌으나,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신민들이 아닌 잉글랜드 왕실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제 144년 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또 하나의 왕이 찰스 1세의 뒤를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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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해서 영국은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찰스 1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이 바뀌지는 않았다. ‘호국경’으로 사실상 대통령과 같은 권력을 손에 쥔 크롬웰은 곧바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혁명을 진압해야 했다. 또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지지하는 왕당파들과 보다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수평파 등의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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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롬웰은 결국 자기 손으로 장기의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일종의 군사통치를 하는 등 독재정치를 펴던 끝에 1658년 사망했다. 그러자 불과 2년 뒤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가 왕좌에 앉았다. 그렇다고  내전과 청교도 혁명이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국왕주권을 대체하는 의회주권론은 점차 국민주권론으로 발전되어 갔고, 왕권과 신권이라는 중세 영국의 모순 섞인 전통은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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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는 찰스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화이트홀 거리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국회의사당이 나오는데, 정면에 서 있는 것은 크롬웰의 동상이다. 승자와 패자, 왕권주의자와 신권주의자. 이처럼 극명하게 대립했던 역사인물 두 사람을 이토록 가까운 거리를 두고 기념하는 의미는 영국 정치사가 안고 있던 모순을 나타내기 위함일까. 저마다의 미망에 잠겨 영욕의 일생을 보낸 두 영혼에 대한 배려일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찰스 1세나 청교도 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국내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다. 페터 벤데의 <혁명의 역사> 는 청교도혁명에서 동독의 89혁명까지 17개의 혁명을 시대순으로 조명했다.

    중국 CCTV의 <대국굴기-강대국의 조건, 영국편> 은 영국이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산업혁명 시대를 중심으로 보며, 그 과도기에 찰스 1세와 크롬웰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다루고 있다.

    함규진 이미지
    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