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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의 비]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of France,프랑스어: Henriette Marie de France)

Bawoo 2015. 1. 30. 22:22

 

헨리에타 마리아

 

HenriettaMariaofFrance02.jpg
마담 루아이얄
재위 1619년 2월 10일 ~ 1625년 6월 13일
전임자 프랑스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후임자 마리 테레즈
잉글랜드 왕비
스코틀랜드 왕비
재위 1625년 6월 13일 ~ 1649년 1월 30일
전임자 덴마크의 앤
후임자 브라간사의 캐서린
배우자 찰스 1세
자녀 찰스 제임스
찰스 2세
메리, 프린세스 로열
제임스 2세
엘리자베스
앤 공주
캐서린
헨리
헨리에타 앤
본명 Henriette Marie de France
왕가 혼전: 부르봉 왕가
혼후: 스튜어트 왕가
부친 앙리 4세
모친 마리 드 메디시스
출생 1609년 11월 25일(1609-11-25)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루브르 궁
사망 1669년 9월 10일 (59세)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샤토 드 콜롱베
매장지 생 드니 (1669년 9월 13일)

종교

로마 가톨릭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of France,프랑스어: Henriette Marie de France, 1609년 11월 25일 - 1669년 9월 10일)는 프랑스의 공주로, 잉글랜드 왕 찰스 1세(Charles I)의 비(妃)이다. 찰스 2세제임스 2세의 어머니이고 메리 2세(Mary II)와 앤 여왕의 할머니이다.

 

유년기

1609년 프랑스 루브르 궁에서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그 비(妃) 마리 드 메디시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한 살 때 부왕 앙리 4세가 암살당하면서 어머니와 오빠 루이 13세의 궁정에서 자라났다.

혼인

1625년 6월 13일 15세에 잉글랜드 켄트 주 캔터베리에 있는 성 오거스틴 교회에서 24세의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와 혼인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 국가인 프랑스의 왕실에서 태어나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던  종교상의  이유로 영국 국교인 성공회[1]의 방식으로 치러지는 영국의 대관식은 치르지 않았다.

 

혼인 초 두 사람의 관계는  종교, 성격, 왕의 총신인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의 이간질로 몹시 냉랭했다.  또 친정인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 수행원들을 지나치게 많이 데려와  이들의  막대한 체류비를  찰스 1세가 부담하게 하여 찰스 1세를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찰스 1세는 결국 자신의 비(妃)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돕는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와 시녀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을 프랑스로 돌려보내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새 왕국에 정을 붙이지 못한 헨리에타가 모국인 프랑스를 향해 있는 창가 주변을 자주 서성이는 장면이 목격되자  격노한 찰스 1세는 헨리에타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면서 그녀와 이혼하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안나 마리아(Infanta Maria Anna)와 재혼하려고 계획하기도 했다.

 

이 시도는 결국 실패했으나 이후에도 부부는 만날 때마다 서로 싸우고 반목하면서 몇 주간씩 만나지 않았고 얼굴을 재대면하면 참지 못하고 서로 공격하곤 했다. 헨리에타는 남편 곁에서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끔 늘 유도하는 버킹엄 공작을 몹시 싫어했다.

 

1628년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하자 부부 관계는 개선됐고 정략 결혼한 당대 부부  중에는 서는 보기 드물게 화목한 정도로까지 발전됐으나  반면에 캔터베리 대주교인 윌리엄 로드나 스태포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와 같은 영국 내의 실력자들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을 가진 헨리에타가 남편인 왕과 사이가 좋아지면서  점차 커지는 영향력을 경계했다. 그들이 걱정하던 대로 아내 헨리에타에게 감화된 찰스1세는 예전과 달리 로마 가톨릭 교회도 친밀하게 느껴  친프랑스적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전 시작

1630년경 왕권과 신권의 충돌로 영국 정계가 점차 갈등에 빠져들면서 점증하는 헨리에타의 국정 참여는 논쟁의 대상이 됐다. 헨리에타는 스페인과 외교상 접근을 추구하였던 청교도 신하들을 매우 혐오했고 하원을 선점해 그들에게 일격을 가하기도 했다. 청교도와 왕당파 간 내전이 시작되면서 헨리에타는 남편인 찰스1세를 돕고자 도처에 자금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그 대상이 로마 교황 우르바노 8세, 모국인 프랑스 왕실등 주로  로마 가톨릭 교회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영국인의 분노를 샀고 이는 찰스 1세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1638년 예수회 수사였던 리처드 블런트가 죽자  자신의 개인 예배당인 서머싯 하우스에서 장례 미사를 치러 주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642년 8월, 분쟁이 시작됐을 때 헨리에타 마리아는  2월경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에 있었다. 헨리에타는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원조금을 모았으나  1643년 초까지 잉글랜드에 입국하지 못했다.    나중에 많은 무기와 군대로 무장하고서  영국 동해안에 있는 요크셔 주 블리들링턴에 상륙했고 요크에 본부를 만들고서 남아 있던 왕실 세력과 합류했다.

 

헨리에타는 남편인 찰스1세와 옥스퍼드에서 재회하기까지  영국 북부에서 군인들과 함께 몇 달을 기다려야만 했고  1644년 4월  출산을 하고자  엑시터로 떠난 이후로는  두 사람은 서로 다시 보지못했다. 성공회를 믿는 영국과 달리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개입과 그에 따른 엄격한 여러 조항을 찰스1세가 강경하게 거부하면서 왕권 붕괴가 확실시되자 헨리에타는 1644년 7월  자녀들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했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영국에 공화정이 세워지자 왕관을 잃은 헨리에타와  여러 자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푸대접 받으면서 궁핍하게 생활해야헸다.

망명과 말년

헨리에타는 독특한 인물인 케넬름 딕비 경을 자신의 재무 관리인으로 삼아서 파리에 정착했다. 태어난 곳인 루브르궁에서 머물긴 했지만 당시 루브르는 파리를 싫어했던 루이 14세와 그 사람의 모후 안 도트리슈에게 버려지다시피한 궁이었던 탓에  생활은 곤궁했다. 언젠가는 성공회를 믿는 영국에 되돌아가 왕관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헨리에타는 망명 왕당파들과  장남 찰스가 막내아들인 헨리를 성공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로 교파를 바꾸게 하려고 시도하자 몹시 화내기도 했으나   미래의 찰스 2세제임스 2세인 두 아들은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 비밀리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1660년 10월 잉글랜드에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  잉글랜드로 돌아가 1665년까지 런던의 서머싯 하우스에서 거주했으나 그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거주했다. 

1669년 프랑스 샤토 드 콜롱베에서 별세한 후 프랑스 왕족들의 묘소인 생 드니에 안치됐다.

자녀

  • 찰스 제임스, 콘월 공작(Charles James, Duke of Cornwall) : 요절
  • 찰스 2세(Charles II)
  • 메리, 프린세스 로열(Mary, Princess Royal)
  • 제임스 2세(James II)
  • 엘리자베스 공주(Elizabeth, Princess of England) : 요절
  • 앤 공주(Anne, Princess of England) : 요절
  • 캐서린 공주(Catherine, Princess of England) : 요절
  • 헨리, 글로스터 공작(Henry, Duke of Gloucester) : 요절
  • 헨리에타 앤, 오를레앙 공작 부인(Henrietta Anne, Princess of England, duchess d'Orléans)

주석

  1. 이동 흔히 성공회를 영국 국교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 영국 국교는 영국 성공회뿐이고 기타 성공회 교회는 자치하는 관구 교회이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