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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경제>사이렌의 달콤한 유혹, 디플레이션

Bawoo 2015. 2. 2. 11:37

민방위훈련 때마다 귀청을 째는 소음을 내는 *사이렌<상세 해설은 하단 참조>. 그러나 본래 어원은 전혀 달랐다. 거친 파도가 치는 벼랑 끝에서 리라(고대 악기)를 켜며 노래를 부르는 그리스신화의 요물이 사이렌이다. 달콤한 노랫가락은 뱃사람들의 넋을 빼앗았다. 짙은 안개 너머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위절벽을 향해 배는 돌진했다. 아차 하는 순간 뱃사람들은 사이렌의 웃음소리와 함께 검은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최근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달콤한 노랫가락이 들린다.

 

한 피자업체는 한 판에 9900원짜리 피자로 대박을 냈다. 일주일 동안 2초에 한 판씩 15만 판을 팔았다. 화들짝 놀란 패스트푸드점들도 2000원짜리 아침을 앞다퉈 내놨다. 연말연초 매출을 죽 쑨 백화점들은 3000억원대 명품세일 대전을 준비 중이란다. 소비자로선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런데 어쩐지 꺼림칙하다. 자꾸 1990년대 초 일본이 떠오른다. 엔고 거품 붕괴로 소비가 얼어붙자 가격인하 전쟁이 불붙었다. 100엔 숍도 나왔다. 이젠 낯익은 ‘가격 파괴’란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일본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물가상승률이 2년 연속 1%대로 기다 마이너스로 떨어지자 ‘착한 디플레이션’이라고 칭송했다. 전후 고도성장기를 거친 일본인들로선 물가 하락이 은총이라면 모를까 재앙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게다. 신고전파 주류경제학 교과서도 물가와 소비는 반비례한다고 가르쳐왔다. 물가가 떨어지면 소비가 살아난다는 공식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의 법칙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제였다. 서민으로서도 물가가 떨어진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그 반대인 인플레이션보다 위험한 건 이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당장 서민 가계부에 주름을 지운다. 고통이 피부에 와 콱콱 박힌다. 이와 달리 디플레이션은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달콤하다. 싫증나지 않는다. 디플레이션 우려는 양치기 소년의 허풍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유권자가 흥겹다는데 판 깨고 나설 정치인이나 관료가 나올 리도 만무하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냉·온탕 정책을 오가며 실기(失機)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물가와 소비가 반비례한다는 주류경제학 이론이 미처 진단치 못한 고질병에 걸려 있었다. 바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직 쓰나미와 고령화다.

 90년대 후반 일본을 휩쓴 가격 파괴 열풍의 이면엔 ‘단카이세대(團塊世代)’로 불리는 베이비부머의 퇴직 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패전 직후인 47~49년 태어난 단카이세대는 수명도 갑자기 늘었다. 장래가 불안해진 건 당연하다. 금리조차 뚝뚝 떨어졌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비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미래를 고사시키는 독배가 됐다. 가격 파괴 바람이 거셀수록, 금리가 떨어질수록 소비가 늘기는커녕 더 위축되는 ‘경제학의 역설’이 벌어진 이유다. 더욱이 이 늪은 한 번 빠지면 어지간해선 헤어나기 어렵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퍼부은들 미래에 대한 베이비부머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달랠 순 없어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쩌면 이와 꼭 닮았는지 소름 끼칠 정도다.

 딱 한 장 우리가 더 가진 카드가 있다면 후발주자란 이점이다. 물가 하락에 박수만 쳤던 일본의 말로가 어땠는지 지켜봤다. 단지 돈 풀고 금리 낮춘다고 사이렌의 저주에서 깨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퇴직 후에도 은퇴하지 못하고 30년 이상 구직시장을 헤매야 하는 ‘반퇴(半退)시대’가 이미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1차에 그친 일본의 단카이세대와 달리 우리 앞엔 2차, 3차 베이비부머 퇴직이 기다리고 있다. 본격적인 퇴직 쓰나미가 덮치기 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일본보다 더 혹독한 고난의 행군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든, 기업이든, 가계든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중앙일보-정경민 경제부장

 

< 참고>

세이렌

세이렌

세이렌(그리스어: Σειρήνες)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얼굴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전설의 동물이다.

 

세이렌은 이탈리아 반도 서부 해안의 절벽과 바위로 둘러싸인 사이레눔 스코풀리(Sirenum Scopuli)라는 섬에 사는 바다의 님프들이다. 하신 아켈레오스가 무사 멜포메네나 스테로페, 혹은 테르프시코라에게서 낳은 딸들로, 모두 3명(피시오네·아글라오페·텔크시에페이아 혹은 파르테노페·레우코시아·리기아) 혹은 4명(텔레스·라이드네·몰페·텔크시오페)이라고 한다.

 

세이렌은 여성의 유혹 내지는 속임수를 상징하는데, 그 이유는 섬에 선박이 가까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드는 충동질을 일으켜 죽게 만드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특히 암초와 여울목이 많은 곳에서 거주하는 이유도 노래로 유인한 선박들이 난파당하기 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세이렌의 노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어서 수많은 남성들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세이렌은 두 차례에 걸쳐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오뒤세우스는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결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결박을 풀지 말라고 했다.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오뒤세우스는 결박을 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귀마개를 쓴 부하들은 명령에 순종하여 그를 더욱 단단히 결박하였다. 결국 선박의 항해는 계속되었고 노랫소리는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 섬을 지나갈 수 있었다. 이에 세이렌들은 모욕감을 느껴 단체로 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뛰어난 음악가이자 시인인 오르페우스가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아르고라는 선박을 타고 항해하던 도중에 세이렌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오르페우스가 세이렌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맞대응하자 이에 모욕감을 느낀 세이렌이 바다에 몸을 던져 바위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자살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가 자신의 수수께끼가 풀리자 역시 자살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경보(警報)를 뜻하는 사이렌(siren)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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