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전투 또는 애산 해전(중국어 간체: 崖山海战, 정체: 厓山海戰)는 1279년 3월 19일 중국 남부 광주(廣州)의 애산에서 벌어진 원나라와 남송의 최후 결전이다. 원나라의 군대가 10배 넘는 병력인 남송의 해군을 격파한 이 전투로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다. 한자 문화권 외에서는 현대의 지명을 딴 야먼 전투(중국어 간체: 崖门战役, 정체: 厓門戰役)로 더 알려져 있다.
개요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고 남송 공종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멸망했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文天祥), 장세걸(張世傑) 및 진의중(陳宜中) 등 일부 남송의 유신들은 임안 함락과 동시에 공종의 서형 조하를 황제(단종)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천주(泉州)의 실력자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포수경(蒲壽庚)을 포섭하여 화남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포수경(蒲壽庚, 1245년 ~ 1284년 이후?)은 푸젠 성 취안저우 시를
중심으로 남해 무역으로 세력을 떨친 색목인 호족이다. 송말원초 시대에 남해무역을 30년 간 담당한 인물로, 중국 내외무역의 대표적 인물이다.1276년에 바얀에 포섭되어 원을 섬기기 시작했고 1278년에 복건행성의 중서좌승이 되었다>
서서히 강남에서 광둥 성으로 밀려난 옛 남송군은 병사한 단종의 후임으로 동생인 조병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남송 소제이다. 이후 선단으로 해상을 떠돌며 저항을 계속하여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이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한편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남송군과 대등한 전투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옛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공 대책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옛 남송군은 패주했다. 이것에 절망한 신하 및 간부들이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 와중에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대학의 강의를 배안에서 하였다. 그러나 2월 6일 저녁쯤 패배를 깨닫고, 소제를 업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원나라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그 후
육상에서 저항운동을 벌이던 문천상은 이 전투 이전인 1278년에 원나라의 포로가 되어 대도(지금의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 왕조는 뛰어난 문인이던 그를 등용하기 위해 설득을 여러번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1282년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국통일을 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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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강화하자 무너지는 남송
세계를 말발굽 아래 무릎 꿇린 몽골제국이었으나 가까이에 있는 남송과 고려의 공략에는 유독 어려움을 겪었다.
우구데이는 조카 바투를 유럽으로 보내 러시아 제공국을 복속시키고 폴란드와 헝가리마저 초토화했으나 정작 자신은 남송을 상대로 한 치의 땅도 넓히지 못했다. 몽케 역시 훌라구를 보내 중동을 평정했으나 남송을 상대로는 쓰촨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렇듯 완강히 버티던 남송에 어두움이 드리운 것은 1270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것이다.
몽케의 뒤를 이어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으로 바꾸고 1268년 남송 공략을 재개했다. 남송은 양쯔강 중류의 요충지 양양과 번성에서 농성했으나 원은 6년여 간의 포위 끝에 함락시켰다. 1274년 수도인 항저우가 포위되자 공종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7세 어린 황제 옹립하고 세계 제국 몽골에 항전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송은 1127년 정강의 변으로 금에 당시 수도 카이펑을 내주고 고종이 바다로 도망치는 일까지 있었음에도 강남을 회복, 남송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적을 되살리고자 했음일까. 문천상·육수부·장세걸 등 주전파는 종친인 조시를 단종으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파천 와중에 단종이 7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죽자, 역시 7세인 이복동생 조병이 뒤를 이어 소제로 즉위했다.
계속되는 원의 추격에 지금의 홍콩 근처의 무인도인 애산에 몰린 남송은 1000여 척의 함대를 한 곳에 묶고 황제와 대소 신료, 그리고 모든 병력을 선상에 모았다. 원은 남송 함대에 화공을 가해 단숨에 불사르고자 했지만 남송군이 배의 표면에 진흙을 칠하고 긴 나무 막대기로 화공선이 함대에 달라붙지 못하게 해 실패로 끝났다. 원은 작전을 바꿔 남송 함대를 포위하고 소모전을 강요했다.
원의 집요한 소모전에 남송군이 지쳐갔다. 마침내 1279년 3월 19일, 원군이 총공세를 단행했다. 오랜 포위와 소모전, 굶주림에 지친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한 육수부는 남송의 마지막 황제 소제를 업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투신하기 직전까지도 남송 회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소제가 성군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대학'을 강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애산 전투 끝나자 고려에는 "일본 원정 준비하라"
애산 전투의 결과 남송이 멸망함으로써 고려에는 시련이 찾아왔다. 남송을 멸한 쿠빌라이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원에 맞서고 있던 일본으로 다시금 눈을 돌렸다.
고려에 선박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마련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충렬왕은 거듭 고려의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쿠빌라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900척의 대선단이 1년 만에 급조되었다. 배를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군량미까지 공출해야 했던 고려 백성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281년 다시 한 번 단행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재차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정도원 기자 united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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