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상
문천상(文天祥, Wén Tiān xiáng, 1236년 ~ 1282년)은 남송의 정치가로, 자는 이선(履善)이고 호는 문산(文山)이며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다. 본래 '천상'은 자이고 이름은 운손(雲孫)이었는데, '천상'을 이름으로 삼고 자는 송서(宋瑞)로 바꾸었다. 훗날 다시 자를 '이선'으로 바꾸었다.
생애
1236년에 남송에서 태어나 1255년에 진사에 수석로 합격하였다. 1259년, 남송이 몽고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수도를 옮기려하자 이를 반대, 결국 면직되고 말았다. 그러다 1275년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원에 대항했다. 1276년에 원과 강화를 맺기 위해 바얀의 진중으로 갔다가 바얀이 문천상의 기량을 두려워하는 바람에 갇혀 버렸다. 그 사이에 남송이 멸망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 북송되던 도중 탈출하여 도종의 장자 익왕을 받들고 잔병을 모아 싸운다. 1278년에 그렇게 싸우던 도중 오파령 전투에서 패하여 장홍범에게 체포되고 만다. 이 후, 원나라에서는 장홍범이나 쿠빌라이칸이 관직을 주며 회유하려고 계속 노력했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대도로 이송되어 약 3년간 갇혀 있는 동안 옥중에서 정기가를 지었다고 한다. 1282년,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하다 사형되었다. 향년 46세. 쿠빌라이칸이 크게 아까워하였다고 한다.
평가
문천상은 소수민족의 흡수와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을 다스렸던 모든 민족을 끌어안으려는 역사 공정의 관점에서 보면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문천상과 같이 특정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경우, 이 공정의 관점에서는 충신이 아닌 단순히 중국의 통일 정권수립을 방해한 역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북송의 충신인 악비의 경우도 논란이 되고 있다. 악비는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한족 왕조 송나라를 지켜낸 후대의 귀감이 된 만고의 충신이지만, 이 공정의 관점에서는 악비를 다민족 화합을 방해한 악적이라고 깎아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조 자료
- 김희영 편저-이야기 중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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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부
이후 홍콩 근처의 어느 섬에 임시로 황궁과 거처를 잡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다시는 왕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남중국해 바다에 같이 투신하여 죽었다.
이들의 죽음을 끝으로 남송도 같이 멸망했다.
후일 이 전투는 애산 전투가 되었고, 남송의 최후를 알린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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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걸(張世傑)
(?? ~ 1279)
장세걸은 탁주(涿州) 범양(范陽) 출신 인물로, 문천상, 육수부와 함께 남송 삼충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문천상이 망국을 향한 꺾이지 않는 절의를, 육수부가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면 장세걸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어주는 인물일 것이다.
임안이 위기에 빠지자 장세걸은 문천상과 함께 임안 내에서의 결사항전을 주장하였지만 승상 진의중(陳宜中)이 이를 말렸다. 이후 문천상은 임안으로 쇄도해오는 몽골군과 교섭을 시도했다가 억류당했다.
결국 임안이 몽골군에 의해 위기에 빠지자 송공제는 항복하였다. 그러나 육수부를 필두로 하는 일부 대신들은 익왕(益王) 조하(趙昰), 광왕(廣王) 조병(趙昺)과 함께 복주로 피신하였으며, 장세걸 또한 이에 합류했다. 이후 육수부, 진의중, 장세걸은 논의 끝에 두 황족 중 나이가 많았던 송단종을 옹립하고 계속 저항하기로 한다. 북쪽으로 끌려가던 문천상또한 탈출후 이에 합류, 추밀사직을 수여받고 저항군을 이끌었다.
복주 또한 몽골군에게 함락당했으며, 이에 절망에 빠진 진의중은 이탈하였다. 그러나 육수부와 장세걸은 포기하지 않고 남쪽 광주까지 조정 대신과 황제, 황족을 이끌고 피신하여 오늘날의 홍콩 근처의 어떤 섬에서 조정을 꾸렸다. 이곳에서 송단종은 병이 들어 사망하였지만 두 대신은 송소제를 옹립하여 남송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대치는 이항의 합류로 끝났다. 이항이 합류하자 장홍범은 군을 재정비한후 네갈래로 갈라 남송군을 사방에서 협격하였다. 이에 장세걸은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정예병을 중군에 집중시켰으며 육수부와 송소제를 데려오게 하였다. 최후의 돌파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육수부와 송소제에게는 남송군뿐만 아니라 원의 군대도 접근하고 있었고, 이에 육수부와 송소제는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세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밤이 올때까지 방어전을 지휘하다 야음을 틈타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이후 장세걸은 해릉산까지 나아가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태풍에 의해 익사하고 말았다(이는 열전의 기록이고 본기에는 스스로 물에 빠져 자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평가 *
* 출처: 위키백과, 엔하위키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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