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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3충신>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

Bawoo 2015. 3. 27. 22:22

 

문천상 

문천상

문천상(文天祥, Wén Tiān xiáng, 1236년 ~ 1282년)은 남송의 정치가로, 자는 이선(履善)이고 호는 문산(文山)이며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다. 본래 '천상'은 자이고 이름은 운손(雲孫)이었는데, '천상'을 이름으로 삼고 자는 송서(宋瑞)로 바꾸었다. 훗날 다시 자를 '이선'으로 바꾸었다.

생애

1236년에 남송에서 태어나 1255년에 진사에 수석로 합격하였다. 1259년, 남송이 몽고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수도를 옮기려하자 이를 반대, 결국 면직되고 말았다. 그러다 1275년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원에 대항했다. 1276년에 원과 강화를 맺기 위해 바얀의 진중으로 갔다가 바얀이 문천상의 기량을 두려워하는 바람에 갇혀 버렸다. 그 사이에 남송이 멸망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 북송되던 도중 탈출하여 도종의 장자 익왕을 받들고 잔병을 모아 싸운다. 1278년에 그렇게 싸우던 도중 오파령 전투에서 패하여 장홍범에게 체포되고 만다. 이 후, 원나라에서는 장홍범이나 쿠빌라이칸이 관직을 주며 회유하려고 계속 노력했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대도로 이송되어 약 3년간 갇혀 있는 동안 옥중에서 정기가를 지었다고 한다. 1282년,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하다 사형되었다. 향년 46세. 쿠빌라이칸이 크게 아까워하였다고 한다.

평가

문천상은 소수민족의 흡수와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을 다스렸던 모든 민족을 끌어안으려는 역사 공정의 관점에서 보면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문천상과 같이 특정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경우, 이 공정의 관점에서는 충신이 아닌 단순히 중국의 통일 정권수립을 방해한 역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북송의 충신인 악비의 경우도 논란이 되고 있다. 악비는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한족 왕조 송나라를 지켜낸 후대의 귀감이 된 만고의 충신이지만, 이 공정의 관점에서는 악비를 다민족 화합을 방해한 악적이라고 깎아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조 자료

  • 김희영 편저-이야기 중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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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부

1236~1279. 자는 군실(君實)
남송 최후의 충신이었고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인물.
1256년, 역시 남송의 마지막 충신이던 문천상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급제 후 진사(進士)가 되어 예부에서 활약했다. 그러다 1276년 임안원나라에게 털리면서 송공제가 항복하자, 끝까지 항복할 수 없었던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이 셋은 송단종, 소제 등을 데리고 임안을 떠나 길고 긴 방랑길에 오른다.

 

방랑길에 오른 직후 세 충신들은 회의를 거쳐 나이가 많던 조하를 황제로 올렸으니, 그가 송단종이었다. 동남지방의 해안선을 따라 항전을 계속했지만, 이미 머릿수가 많은 원나라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호족들도 하나 둘씩 원나라에 항복하고 있었다. 특히 화남지방의 재력가 포수경을 포섭하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그런 와중에도 육수부는 송단종과 조병(소제)의 스승 역할을 계속해서 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복건성 근처에서 단종이 나이 10살에 죽게 되자, 결국 조병을 황제로 올리게 된다. 그 때 조병의 나이 겨우 7세.

이후 홍콩 근처의 어느 섬에 임시로 황궁과 거처를 잡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원나라는 상대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당시 나라가 온전하던 고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고려보다 더 상태 안 좋았던 남송이 버틸 수 없는 상황

 

1279년 2월, 세불리를 느꼈던 장세걸배수진을 친다는 각오로 섬에 있던 황궁과 거처를 모두 태우고 모든 병력을 배 위에 올렸다. 그리고 배들을 모조리 묶었다. 물론 배에다가 진흙을 발라서 불이 쉽게 안 붙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 상황에서 육수부는 여전히 소제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이 교육시키고 있었다. 소제도 육수부도 황제와 그의 스승이라 하여 특별대우 같은 거 받지 않았고 배 위에서 신하와 병사들과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온갖 고생을 하였는데...


1279년 3월, 마침내 원나라가 마지막 공격을 개시했다. 송의 잔여 병력들과 장군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도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경서를 강독하고 있었으나, 원나라 병력들이 아주 가까이까지 오자 어린 황제를 껴안고image


"폐하께서는 송공제의 치욕을 당하시면 안 됩니다!" 라는 말을 하였고 이에 소제는

"다시는 왕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남중국해 바다에 같이 투신하여 죽었다.

이들의 죽음을 끝으로 남송도 같이 멸망했다.

 후일 이 전투는 애산 전투가 되었고, 남송의 최후를 알린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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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걸(張世傑)
(?? ~ 1279)

장세걸은 탁주(涿州) 범양(范陽) 출신 인물로, 문천상, 육수부와 함께 남송 삼충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문천상이 망국을 향한 꺾이지 않는 절의를, 육수부가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면 장세걸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어주는 인물일 것이다.

 

장세걸은 문천상, 육수부와는 달리 군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소교(小校)에서 시작해 도통(都統)직까지 승진하였으며, 임안이 원나라의 공격에 위기에 빠지자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임안으로 들어가 유수용(劉帥勇) 등과 함께 초산(焦山)에서 방어전을 펼첬으나 패했다.

 

임안이 위기에 빠지자 장세걸은 문천상과 함께 임안 내에서의 결사항전을 주장하였지만 승상 진의중(陳宜中)이 이를 말렸다. 이후 문천상은 임안으로 쇄도해오는 몽골군과 교섭을 시도했다가 억류당했다.


결국 임안이 몽골군에 의해 위기에 빠지자 송공제는 항복하였다. 그러나 육수부를 필두로 하는 일부 대신들은 익왕(益王) 조하(趙昰), 광왕(廣王) 조병(趙昺)과 함께 복주로 피신하였으며, 장세걸 또한 이에 합류했다. 이후 육수부, 진의중, 장세걸은 논의 끝에 두 황족 중 나이가 많았던 송단종을 옹립하고 계속 저항하기로 한다. 북쪽으로 끌려가던 문천상또한 탈출후 이에 합류, 추밀사직을 수여받고 저항군을 이끌었다.

 

  복주 또한 몽골군에게 함락당했으며, 이에 절망에 빠진 진의중은 이탈하였다. 그러나 육수부와 장세걸은 포기하지 않고 남쪽 광주까지 조정 대신과 황제, 황족을 이끌고 피신하여 오늘날의 홍콩 근처의 어떤 섬에서 조정을 꾸렸다. 이곳에서 송단종은 병이 들어 사망하였지만 두 대신은 송소제를 옹립하여 남송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은 남쪽 끝에 세워진 작은 망명정부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들이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남송인들의 저항의 구심점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쿠빌라이는 장홍범(張弘範)을 원수로, 이항(李恒)을 부원수로 삼아 2만에 달하는 정예군을 남하시켰다. 장홍범은 먼저 외곽에서 게릴라전으로 방어선을 유지하던 문천상을 오파령 전투에서 격파, 포로로 잡고 이후 광주의 남송 조정을 압박하였다. 결국 1279년 2월, 당시 남송의 방어전을 지휘했던 장세걸은 애산항으로 이동, 이곳에서 배수진을 친다는 각오로 섬에 있던 황궁과 거처를 모두 태우고 모든 병력을 배 위에 올렸다. 그리고 배들을 모조리 묶었다. 물론 배에 진흙을 발라서 불이 쉽게 안 붙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미 당시 몽골군은 강력한 해군력까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장세걸은 최후의 남송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장홍범은 처음에는 화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애산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필요한 해로와 육로를 모두 봉쇄하고 굶기기에 들어갔다. 남송군은 보급이 끊겨 매우 굶주렸으나 장홍범은 쉽게 남송군을 격파할 수 없었다.

 

이런 대치는 이항의 합류로 끝났다. 이항이 합류하자 장홍범은 군을 재정비한후 네갈래로 갈라 남송군을 사방에서 협격하였다. 이에 장세걸은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정예병을 중군에 집중시켰으며
육수부송소제를 데려오게 하였다. 최후의 돌파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육수부와 송소제에게는 남송군뿐만 아니라 원의 군대도 접근하고 있었고, 이에 육수부와 송소제는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세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밤이 올때까지 방어전을 지휘하다 야음을 틈타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이후 장세걸은 해릉산까지 나아가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태풍에 의해 익사하고 말았다(이는 열전의 기록이고 본기에는 스스로 물에 빠져 자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평가 *

문천상이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의를 지켰고, 육수부가 나라의 마지막과 그 운명을 같이했다면, 장세걸은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않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저항을 멈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송 삼충신 중 하나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았다 할 수 있다.

 

* 출처: 위키백과, 엔하위키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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