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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장군>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

Bawoo 2015. 5. 7. 22:36

발터 모델
1891년 1월 24일 ~ 1945년 4월 21일
발터 모델 상급대장, 1943년 4월 2일 백엽검 기사십자훈장 서훈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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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죽은 곳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
별명 방어의 사자, 방어전의 마스터, 동부전선의 수호자, 총통의 소방수
복무 독일 제국(1918)
바이마르 공화국(1933)
국방군 육군
복무 기간 1910년 ~ 1945년
최종 계급 Collar tabs of Generalfeldmarschall of the Heer.svg원수
지휘 3 기갑 사단(1940년 11월)
41 기갑 군단(1941년 10월)
9 군(1942년 1월)
북부 집단군(1944년 1월)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1944년 5월)
중부 집단군(1944년 6월)
B 집단군(1944 8월)
OB West(1944년 8월부터 9월)
주요 참전 동부 유럽 전선

서부 유럽 전선

서훈 내역 다이아몬드 검 백엽 기사십자장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 1891년 1월 24일 ~ 1945년 4월 21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전쟁 당시에 '방어전의 마스터(Master of Defence)'라는 칭호와 함께 1인자로 공인되었으며 전사학자들에게도 현대전에서 가장 뛰어난 방어 지휘관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종 계급은 독일 국방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생애

제1차 세계 대전

보병장교로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도 참전하였고 용맹을 떨쳐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이때 여단장이었던 오스카 폰 프로이센 왕자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포격에 여단이 큰 피해를 입는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모델 중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서훈과 함께 장군참모 과정 이수를 직접 주선하였다. 무공을 많이 세운 만큼 부상도 많았는데, 특히 1915년의 어깨 총상과 1916년의 다리 부상은 동맥을 다쳐서 긴 시간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퇴원 후 전선에 복귀한 모델을 오스카 왕자는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기간 동안 참모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를 한스 폰 젝트가 오스만 제국 파견 근무시 연락장교로 동행토록 하였으며 귀국 후 최고육군지휘부(OHL)의 병참 장교로 배치하였다. 1918년 2월, 오스카 왕자와 한스 폰 젝트의 추천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한다. 랭스 공세에도 참전하여 대위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중요 전장과 참모 장교를 모두 경험하였고 세 번의 부상에서 살아 남았다.

 

*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1866년 4월 22일 슐레스비히 ~ 1936년 12월 27일 베를린)은 독일군 상급대장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 장군을 맡았으며 1919년에서 1926년까지 라이히스베어(Reichswehr) 참모총장을 지냈다

전간기

장군참모 과정을 마친 엘리트 장교임에도 모델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에 실망하여 이대로 군에 남을지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병력 10만명과 장교 4000명, 무기 개발과 보유까지 제한 된 상황에서 '독일군의 아버지' 한스 폰 젝트가 선발한 4000명의 정예 장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해 1월의 대규모 기동 훈련에서 폰 란차우 장군은 모델에 대하여 "상급 지휘관에 걸맞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남겼다. 모델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에리히 루덴도르프, 한스 폰 젝트의 큰 신임을 받았으며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장군참모로서 그의 행적은 이들 두 사람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방어의 사자, 방어전의 마스터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적인 영국군에서조차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명장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Fritz von Lossberg) 보병대장의 참모로 뮌스터에서 4년간 근무하게 되는데 로스베르크 장군이 주관하는 전술 회의와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가하며 의견을 굽히지 않던 모델은 '마법사의 제자(Zauberlehrling)'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훗날 '동부전선의 소방수(Feuerwehr der Ostfront)' 발터 모델이 펼쳐낸 방어 전법은 '서부전선의 소방수(The Fireman of the Western Front)' 로스베르크 장군의 수제자임을 입증하며 스승의 1차 대전 당시 별명까지 계승하게 된다.

 

루트비히 베크의 추천으로 베를린 참모본부에 근무하기까지 모델은 일선의 부대장과 작전, 병참, 기술 등

다양한 병과의 참모 장교를 폭넓게 경험하였으며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이 소련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에

의거한 교환장교 훈련에 병무국 교육과장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수행, 6주 간 소련에 머무르며 기갑부대를 활용한 기동전 교리를 접하고 소련군의 무장 수준에 대한 심도 있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1930년대 중반,

모델은 해외와 독일의 기갑부대 발전 사항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초창기 참모본부에서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소수의 장교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및 서부전역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 당시 드레스덴에 주둔 중인 4군단의 참모장이었던 모델은 폴란드 남부 침공 계획을 입안하였고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하여 16군 참모장으로 영전하였다. 프랑스 침공에 참전하여 스당 돌파와 마지노선 우회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영국 상륙 계획을 입안하여 16군의 훈련에 몰두하나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보직을 변경,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모델은 여기서 병과에 상관없는 종합 훈련을 창안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참모들은 처음엔 가중된 업무로 인하여 모델을 싫어했지만, 이는 매우 선진적이었고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독소전쟁 초기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3기갑사단장으로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 기갑군 휘하로 배속된다. 전차부대 실전 지휘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러한 인사 조치에 불만도 있었으나, 모델은 교량이 파괴된 시하라 강 도하를 포함하여 4일 간 310km를 질주하며 소련군 14기계화 군단을 해체시켜버리고 개전 2주 만에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 받아 모델에게는 제1기병사단의 지휘권까지 주어졌고 제3기갑사단은 '모델 집단(Gruppe Model)'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당시 위대한 구데리안이라는 칭송까지 받으며 프랑스 침공을 능가하는 독일 기갑전의 신화를 써내려갔다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포위전에서 모델은 구데리안 기갑군에서도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하였고 그 무훈을 인정받아 기갑대장으로 진급한다. 특히 갑작스러운 키예프로의 방향 전환에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측면이 150마일이나 노출되었으나 최선두의 모델은 이러한 위험성마저 분쇄하며 돌격을 거듭하여 9월 14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의 선봉인 제16기갑사단과 합류하면서 키예프 포위망을 완성시킨다.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전투에서는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3기갑군 휘하의 41기갑군단장으로 참전하여 모스크바 20km 앞까지 도달하였으나, 강추위 및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모델은 최후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며 제3기갑군의 후퇴를 엄호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너져버린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권총을 손에 든 채로 한계 지점의 전선까지 오고가며 지휘를 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독소전쟁 중기

종전 후 오랜 시간 동안 스탈린그라드 주위를 둘러싼 남부가 주전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뒤늦게 르제프 공방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특히 소련의 붕괴 후 공개된 사료에 의하면 1년 여의 시간 동안 적어도 4차례의 대규모 작전이 중부 르제프 전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1942년 1월, 9군 사령관으로 갑작스레 임명된 모델은 강추위가 독일군의 발을 묶은 것 만큼이나 소련군의 발을 묶었기에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고 판단, 돌출된 지형 탓에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부대까지 강하하여 ("완전히 섬 안에 갇혀 있는 셈이로군." 첫 전선 시찰 후 모델의 소감) 수적으로도 4:1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예비 부대의 정확한 투입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여 사방에서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최상의 타이밍에서 공격으로 전환, 오히려 소련군을 궤멸시키며 간격을 닫아버렸고 로코솝스키의 겨울 공세로 인하여 와해 직전까지 갔던 9군을 도중에 지휘하게 된 1차 르제프 전투에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르제프 돌출부에서 끊임없이 격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의 명장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부대를 특유의 공세적 방어로 모조리 패퇴시키는 위업을 달성하여 '방어의 사자(Abwehrlöwen)'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6]

쿠르스크-오렐 전투

1943년 7월 5일, 모델의 9군은 쿠르스크 전투의 북방공세를 맡아서 오렐에서부터 남하하여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방어선을 공격, 이를 양단 직전까지 가며 독일군의 손실을 압도하는 피해를 입혔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작전 목표인 쿠르스크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전투 개시 일주일만인 7월 12일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 의하여 오렐의 사령부에 주둔 중이었던 2기갑군이 공격당하면서 급히 회군하였다.

쿠투조프 작전은 오렐 탈환과 소련군 입장에서 철천지간 원수인 발터 모델의 9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나 모델은 9군 뿐 아니라 2기갑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오렐에서 후퇴하는 헤릅스트라이제(Operation Herbstreise;가을여행) 작전을 개시한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0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참모 1명만 동행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오렐에 남아서 작전을 지휘하던 모델은 최후까지 아군을 엄호하던 12기갑사단과 함께 하겐 라인(모델이 히틀러의 '후방 방어선 구축 금지' 지령을 무시하고 휘하 공병들에게 명령하여 독단적으로 구축해 놓은 브랸스크 방면의 방어 진지)에 도착한다. 특히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와서 퇴각 작전에서 오히려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전략적 측면에서도 9군은 소련군 전략예비대의 거대 부분을 약화시켰고, 덕분에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사령관 이하 9군 장병 전원은 7주 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용전을 펼쳤으며 특히 전장의 폭이 400km까지 확장된 상황에서도 모델은 이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끊임없이 최전선을 오가며 시간 단위로 직접 공군 폭격 지시를 내리고 예비대 투입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9군 주력 공격부대인 하르페 전투단을 지휘하여 하루 평균 200대가 넘는 소련군 전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 9군이 양단될 수 있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했던 돌출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며 전선의 지휘 체계를 굳건히 유지한 로타르 렌둘릭(Lothar Rendulic) 보병대장, 혼성 부대를 지휘하여 기갑전에서도 맹위를 떨친 요하네스 프리스너(Johannes Frießner) 보병대장의 무훈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들 세 명의 장성은 이듬해 상급대장으로 진급,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독소전쟁 말기

1944년 1월, 갑작스레 늑대굴로 호출되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은 긴급히 방어선을 재편성했고, 특히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작전을 입안하여 총통의 승인을 받는다.

 

특이한 것은 그 동안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모조리 해임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델은 작전안에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의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공세로 전환하여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임을 강조하여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으며 덕분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에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무사히 퇴각, 판터 라인에 도착하여 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1944년 3월 이 공적으로 모델은 원수로 진급하였다.

 

1944년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전략적 후퇴를 받아들이지 않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고 후임자로서 모델이 임명되며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 공세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겨눈 것이었다.

 

6월 28일,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혼자서 동부전선을 책임졌는데 당시 바그라티온 작전에 의해 궤멸된 독일군은 부대원이 1명 뿐인 경우에 장비와 보급품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모델은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냈고 소련군의 진격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지프스키(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адзиевский)의 제2 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었다. 이 공적으로 모델은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Retter der Ostfront)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1944년 안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고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으로 인해 공군 지원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소련군 대 독일군의 전력비가 5: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만슈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등 유능한 장성들이 한꺼번에 해임된 상황에서 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지켜낸 발터 모델의 수완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서전에서 '이토록 어려운 동부전선 중앙의 상황에서 모델 원수는 전선 재건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최상의 인물이었으며 오직 자신의 용맹함으로 이를 해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모델이 재건한 방어선은 그의 서부전선 전임 이후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이 동부전선 방어 전략의 요충지로서 활용하게 된다.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동부전선을 재구축한 발터 모델에 대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자(Miracle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리델 하트는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내어 전선을 재건하는 경이로운 재능'이라 기록하였다.

서부전선 말기

1944년 8월, 에르빈 롬멜의 부상과 귄터 폰 클루게의 해임으로 서부 전선의 지휘 체제가 진공 상태에 빠지자 '귀관이 서부전선에서도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명령을 받은 모델은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 팔레즈 포위망에 갇혀 있던 독일군의 4할을 탈출시키는데 특히 군단장 4명과 사단장 25명을 생환시켜서 서부 방어선을 재편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서부전선 총사령관직은 다시 현역에 복귀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를 임명하여 모델로 하여금 B집단군 사령관에 집중하도록 조치한다.

서부전선 재건

노르망디 상륙 이후 독일군의 퇴각을 무질서한 패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점령지를 축소하면서 주둔 병력을 서부방벽으로 이동시켜 다시금 전선을 구축한 독일군 방어 전략이 성과를 거둔 것이며 당시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조차도 1944년 9월 29일자 서한에서 '독일군이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전선을 완성시켰다.'고 결론을 내렸다.

 

모델이 총사령관에 부임하기 전의 서부전선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워왔으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달리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조차 장병들의 사기를 고조시켰으며 특히 G군집단 사령관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Johannes Blaskowitz) 상급대장에게 최대한의 지휘 권한을 부여, 총통 직할 명령들을 교묘하게 무시하고 하인리히 힘러의 개입을 배제하며 B집단군과의 연계 지점에 증원 부대를 투입하여 결과적으로 G군집단 18만 5천명이 무사히 퇴각한 것은 노르망디 상륙 당시 거듭 혼선을 빚었던 서부전선 지휘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모델은 OB West 부임 이후 블라스코비츠와 직접 대면할 수 없었고 통신조차 거의 두절된 상황에서 대규모 연계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베르너 폰 프리치, 루트비히 베크가 물러나면서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좌천된 모델이 드레스덴의 4군단으로 전임되었을 때 상급 부대인 3집단군 사령관이 블라스코비츠였고, 같은 루터교 신자였던 그가 모델을 많이 챙겨주면서 두 사람의 가족들도 친하게 지내왔던 오랜 인연 덕분이었다고 한다.

 

1944년 9월에는 영미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재편성 중이던 SS기갑사단을 즉시 투입하고 3시간 만에 방어선을 구축, 아른헴을 방어하고 작전을 분쇄하는데 공훈을 세웠다.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 정예부대를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으니 그야말로 발터 모델이 방어전의 1인자임을 공고히 한 전투.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전만 거듭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고 한다.

 

이어서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명장 오마 브래들리와 코트니 하지스가 지휘하는 미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서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연합군 측의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미국의 오마 브래들리에게 승리를 거둔 장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전사에서도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재조정한 후 밀착방어선을 형성한 당시의 독일군의 전과를 '서부 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 Miracle At The West Wall)'이라 기록하고 있다.

아르덴 대공세

10월에 '라인 강 수비 계획'을 처음 전해들은 모델은 히틀러가 설정한 작전 목표가 불가능함을 잘 알고 핫소 폰 만토이펠, 자신의 오랜 참모장인 한스 크렙스와 2개월에 걸쳐 의논하며 대안 작전(작은 해결책, 작전명 가을안개; Operation Herbstnebel)을 제안, 어떻게든 대규모 공세 작전을 취소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12월 2일,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이 동부전선에서 효율적으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부대를 아르덴 대공세로 투입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시작된 회의에서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펜을 목표로 하는 것은 확률이 낮은 도박임을 강조하며 '작은 해결책'을 다시금 제안하였다. 모델은 침착하고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긴 시간 동안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며 발언하였고, 히틀러마저도 중간에 끼어들지 못하고 말없이 경청하였다. 결국 총통이 모델에게 양보한 것이 있다면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나 진행 과정에서 안트베르펜 점령 확률이 낮아질 경우에는 작은 해결책으로 작전 목표를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에 있어 모델 원수와 나를 지원하는 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의에 참석했던 80명의 고위 장교들 중 어느 누구도 애매한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발언하거나 질문하려 하지 않았다." -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

 

아르덴 대공세의 초반에는 히틀러와 요들의 작전안에 명시된 공격 시간(11:00)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 칠흑 같은 안개 속 적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틈을 타 미리 정해진 목표에 효율적인 포격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에서 전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 루트를 이끌어낸 뒤 일몰 후에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만토이펠과 모델의 새로운 작전안으로 기습에 성공을 거둔다. 공세 초기 독일군의 성과 덕분에 독일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와 인기가 급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 측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맑게 개인 12월 23일에 진격 속도가 둔화되었고, 이 날 모델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크렙스에게 작전이 실패하였음을 명시적으로 알리고 히틀러에게 공격 중단을 건의하였다. 12월 28일에야 히틀러는 모델의 지속적인 건의를 받아들여 '작은 해결책'으로 전환하였지만 너무 늦은 후였다.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시키고 서부 전선의 기적을 통해 간신히 지켜낸 B집단군의 정예 병력과 장비, 연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드레스덴 폭격의 여파

1945년 2월 13일,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 당시 발터 모델은 드레스덴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던 아내와 딸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2월 16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의 작전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모델은 가족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잠시 동안 드레스덴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가를 구하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한다. 모델은 부관인 테오도르 필링(Theodor Pilling) 대령을 드레스덴으로 보냈고, 필링 대령은 모델의 아내와 딸을 구출하여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최후의 명령

1945년 3월, B집단군은 루르 공업지역 사수를 명령받았으나 레마겐의 철교를 탈취한 미군은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 루르 포켓 작전을 성공시키며 완벽한 제공권을 활용하여 루르 일대를 폭격한다. 모델은 포위망의 완성 전에 보유하고 있던 전차로 역습을 가하여 미군 3기갑사단장을 전사시키는 등 탈출구를 확보, 휘하 전 병력을 마르부르크 방면으로 탈출시켜려 했으나 히틀러로부터 후퇴불가 현지사수(Ruhrfestung) 명령만이 반복되면서 결국 루르에 전군이 고립된다.

 

모델은 텔레타이프와 항공편을 통해 서부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과 히틀러에게 몇 차례나 후퇴 의사를 타전했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고 4월엔 휘하 참모인 빈리히 베어(Winrich Behr) 소령과 귄터 라이히헬름(Günther Reichhelm) 대령을 포위망에서 탈출시켜 베를린의 총통사령부에 출석, 직접 히틀러에게 B집단군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금 허가를 구하였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한스 크렙스(Hans Krebs)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네로 명령, 즉 연합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대비해 루르의 산업시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전해지나 모델은 제국 군수부 장관 슈페어와 처음부터 협력하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전투 손실마저 최소화하여 독일 산업 지대의 7할을 차지하고 있던 루르를 지켜낸다. 그런 그에게 미군의 매튜 리지웨이 소장이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어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하였다. 모델은 서한을 손에 든 채 참모장인 카를 바게너에게 질문하였다.

 

"우리는 역사의 빚 앞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일을 모두 한 걸까?" 바게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모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패배한 사령관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난처한 침묵이 이어졌고 모델은 스스로 답했다. "고대의 패장들은 독을 마셨다."

 

같은 날인 4월 15일, 국민돌격대라는 이름 하에 훈련도 받지 못하고 총을 손에 든 유소년들과 노년층으로 구성된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린다. 제대증을 받지 못한 장병들에겐 보급 물자가 모두 소진되는 4월 18일, 자유롭게 항복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 날, 루르 전역의 모든 전투가 종결되었고 미군에 항복한 포로는 32만 명(국민돌격대 25만명, 일반 장병 6만 8천명)에 가까웠다.

 

이후 모델은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만난 발터 막시이너 하사와 어린 병사들이 고위 장성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에 놀라자 모델은 병사들의 이름, 고향, 군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집으로 돌아가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났어.'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달라고 전해주게'라고 말했다고 막사이너 하사는 기록하였다. 적어도 이 순간의 모델 원수는 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던 평소의 모습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1945년 4월 20일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을 거부한 채 동행한 참모들과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괴벨스는 서부 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침묵을 깼다.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었다.

1945년 4월 21일, 종전 이후

다음날 아침, 모델은 빈리히 베어 소령을 긴히 불러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친필 편지와 결혼반지, 소지품이 담긴 봉투를 건네었다. 귀관의 실력과 경험이면 해낼 수 있을 테니 이것을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에 모델의 그러한 최후를 원치 않은 베어는 함께 살아남을 것을 간청하였고 몇 분의 침묵 끝에 모델은 이렇게 말하였다.

 

"베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 육군 원수로서 조국에 승리를 가져올 수도 없었고 수백 수천이 넘는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몽고메리, 혹은 미군 앞에 서서 ‘내가 모델 원수다, 항복하겠다.’라며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다시금 베어는 포위망에서 탈출할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설득하였고 모델은 신중하게 최악의 결말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오솔길 밖으로 나와 일행들과 합류한 뒤 베어는 식량을 구하고 탈출 루트를 모색하기 위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고 모델은 이를 허락하였다.

정오 무렵 귀환한 빈리히 베어에게 필링 대령과 미하엘 중령이 모델 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려주었다.

 

아들인 한스게오르크 모델(Hansgeorg Model)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사관후보생으로 동부 전선에서 전투 중 지휘관인 만토이펠이 아버지의 최후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종전 당시엔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후일 서독 연방군에 입대, 그가 집필한 교범이 오늘날에도 미국 공군의 훈련 교리로 사용될 만큼 탁월한 전문성을 인정 받았으며 준장으로 7기계화여단장, 연방군 정보본부장을 역임하였다. 한스게오르크 모델 장군은 독일 국방군 원수의 자제 중 연방군 장성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로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군, 독일 국방군, 서독 연방군에 이르기까지의 장군참모 역사와 인명록을 집대성하여 연방군의 기틀을 다졌다. 이는 독일 연방군 시대에 이른 현재에도 꾸준히 갱신되어 출간되고 있다.

 

1955년 7월, 한스게오르크는 빈리히 베어의 도움을 받아 사망 장소에 가매장되었던 아버지 모델 원수의 유해를 휘르트겐 숲 인근 독일 군인 묘지에 이장한다. 마켓 가든 작전, 휘르트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에서 자신의 지휘를 받았던 부하들과 사후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