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편에 선 개혁가 “영주 비위 맞추는 루터, 또다른 교황일 뿐…” 맹비난
“당신이 제후들을 책망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오. 당신은 다시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소. 당신은 새로운 교황으로 그들에게 수도원들과 교회들을 선물로 주고 있소. 그래서 그들은 당신에게 만족하는 것이오.”
루터를 새로운 교황으로 비난하는 이 글은 시의회가 칼슈타트(1480∼1541)의 글을 압수하기 위해 인쇄소를 뒤질 때 함께 발견된 것이다.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루터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선배교수였다. 그는 루터가 바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을 때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계급적인 교회제도를 배척하고 사회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복장 착용을 반대해 농부들의 옷을 입고, 교회에서는 서로 형제라고 부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루터와 달리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성서에 맞지 않는다고 제단, 성상, 성화를 부수어 버렸고, 교회 수입을 평신도 위원회에 맡겨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금과 가난한 처녀들을 위한 결혼 지참금으로 분배하게 했다. 아울러 성직자의 결혼을 찬동했고, 매매춘과 구걸 행위를 금지시켰다.
시의회는 칼슈타트와 그의 동조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적 공동체와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성상파괴운동과 더불어 기존의 사회질서까지 흔드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에 불안해했다. 그는 시의회에 전 독일인이 교회개혁에 참여할 때까지 종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 사이에 바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던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몰래 돌아왔다. 1522년 8월 23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그는 8일간 행한 설교에서 개혁자들이 성경 지식은 남다르지만 급진적 개혁은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적그리스도가 좋아할 빌미를 제공한다고 비판했다. 루터는 개혁은 혼란이 아니라 자유와 질서 위에서 행해져야 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교했다.
루터는 권력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칼슈타트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루터가 지나치게 권력과 타협한다며 루터와 갈라섰다.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루터의 영향 아래 있던 시의회는 칼슈타트의 글을 금지했고, 그의 글을 압수하기 위해 인쇄소를 뒤졌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책자 ‘변론’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 책자에서는 루터를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비텐베르크의 교황’으로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자는 칼슈타트가 쓴 것이 아니었다. 이 책자를 쓴 사람은 토마스 뮌처(1490∼1525)였다. 루터를 비판하는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당신이 전에 보름스에서 주권을 그렇게 고백했던 것은 당신이 그 주둥이를 잘 어루만져 꿀을 발라 주었던 귀족들 덕분일 것이오. 왜냐하면 그 귀족들은 당신이 당신의 설교로 그들에게 보헤미아의 선물(교회 재산의 세속화)을 주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영주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수도원들이 바로 그것이요. 만일 당신이 보름스에게 주춤거렸다면 당신은 석방되기는커녕 귀족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을 것이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교황과 황제에 반대했던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사실 루터는 이단 심문을 받고 진작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루터가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보호와 지원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기 때문에 루터는 운신의 폭이 좁았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 역학 관계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고민 끝에 농민전쟁에서 루터는 농민편이 아니라 영주들의 편에 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루터의 보수적인 입장은 급진파들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토마스 뮌처도 그러한 급진파 중 한 사람이었다. 토마스 뮌처가 루터에 대적하는 이 글을 쓸 때는 아직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이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릴 때 농민들은 영주들과 달리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다. 그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고 기독교인의 자유를 선언하자 농민들은 새 세상이 열렸다고 기뻐했다. 농민들은 루터의 주장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미로 해석했다. 루터가 농민의 요구를 무시하던 영주들과 고리대금을 즐기던 자본가들을 비판하자 농민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정작 루터는 ‘폭력’에 의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반대했고, 성경 말씀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를 원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상황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농민들의 반란이 1524년 6월 남부 독일에서부터 시작됐다. 뤼펜 백작 부인이 연회에 쓸 딸기와 달팽이 껍데기를 모아 올 것을 요구하자 과도한 세금과 노동에 지쳐 있던 농민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반란이 시작됐다. 한스 뮐러라는 평범한 농민이 주동이 된 이 반란은 영주와 귀족들에 대항하는 농민전쟁으로 발전됐다. 농민 반란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1524년 말 독일의 3분의 1이 농민의 수중에 들어갔다. 농민반란 초기에 농민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온건한 방식으로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그들이 1525년 2월에 작성한 12개 조항에는 그러한 요구가 잘 나타나 있다.
①목사는 회중에 의해 선택돼야 한다. ②가축의 십일조제도를 폐지하고, 곡물의 십일조는 목사와 다른 공동체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 ③복음 정신과 기독교인의 자유사상에 배치되는 농노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④농노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자유인들이므로, 더 이상 소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⑤귀족들이 약탈해 간 수렵권, 어획권, 벌목권 등을 농민들에게 되돌리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 ⑥과도한 세금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⑦농노에게 부과되었던 강제 노역은 폐지돼야 하고 정당하게 보수로 지불돼야 한다. ⑧과도한 소작료는 폐지돼야 한다. ⑨)귀족들에 의한 새로운 법 제정을 반대하며, 공정한 법의 집행과 성문화된 독일의 법으로 환원돼야 한다. ⑩영주들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유한 모든 공유지는 영주와 농민이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 ⑪과부와 고아를 불의하게 억압하는 상속세와 사망세는 폐지돼야 한다. ⑫위의 요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회돼야 한다.
농민들은 이 12개의 요구사항이 루터의 복음과 일치한다고 보고, 지배계급들과 화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루터는 농민들에 대한 영주들의 탐욕을 비판했지만 결국에는 영주들 편에 서고 말았다.
토마스 뮌처는 농민혁명 이전부터 루터에게 지배계급인 영주가 아니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의 편에 서라고 요구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루터를 새로운 ‘비텐베르크의 교황’으로 비판하며 농민들과 함께했다. 그는 종교개혁의 횃불로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작은 교회서 하층민 비참한 삶 목격… “만인은 평등” 부르짖고 처형당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 작센주 하르츠에 있는 작은 동네 스톨베르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전통적인 인문학 과정을 마친 후 프랑크푸르트 오더에서 신학수업을 받았다.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특히 교부 철학자, 신비주의자, 요아킴 폰 피오레 그리고 성서공부에 관심을 기울였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 1516년 프로제에 있는 수도원의 수석신부로 일하였다. 그리고 1517∼1518년 브라운슈바이크 마르티네움시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뮌처는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기 이전부터 면죄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올렸을 때 당연히 그는 종교개혁 사상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루터가 활동했던 비텐베르크로 가 머물면서 필립 멜랑히톤과 알게 됐고, 1519년 7월에는 루터를 만나기도 했다.
루터는 그를 종교개혁의 열성당원으로 인정해 츠비카우의 교회 사제로 추천을 했다. 츠비카우의 성마리아 교회에서 담당 사제인 요한 실비우스 에그라누스가 휴가여행을 간 사이 뮌처는 그의 일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에그라누스가 다시 복직하자 츠비카우의 작은 카타리파 교회를 담당하게 된다. 이 카타리파 교회를 담당하면서 그에게 변화가 시작된다.
성마리아 교회의 구성원들이 상류층과 중산층이었다면 그가 담당한 카타리파 교회는 수공업자, 광부, 그리고 직조공 등 하층민들이 출입하는 교회였다. 그는 이 교회를 통해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적 성향을 띤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사회개혁도 주장했다. 그들의 대표자격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히는 ‘8항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위정자와 성직자들에 대해 비판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고 평등한 위치라면 또한 모든 것이 공동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고 쥐새끼 같은 왕을 더 이상 섬기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색욕에 가득 차고 나쁜 성직자들과 뚱뚱한 호색가들은 없어져야 한다.”
이때부터 뮌처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 왔던 신비주의와 또한 츠비카우 예언자들의 영향으로 성서 문자에 집착하는 인문주의적 입장을 떠나 직접적인 성령체험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뮌처가 이런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게 된 것은 성마리아 교회의 담당 사제인 에그라누스와의 분쟁 때문이었다. 에그라누스는 에라스무스주의자로 인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에그라누스가 중산층의 입장을 대변하며 훌륭한 삶을 지향하는 조용한 인문주의자였다면, 뮌처는 평신도들의 삶의 고통을 함께하며 예수의 고난이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뜨거운 심장의 신학자였다. 에그라누스와 뮌처의 반목과 갈등은 도시가 양분되는 결과를 가져 왔고, 그 결과 폭동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에그라누스를 지지한 시의회는 1521년 4월 16일에 뮌처를 해임했다. 뮌처는 츠비카우를 떠나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고향이자 천년왕국적 전통이 살아 있는 프라하로 갔다. 그는 프라하에서 설교했고, 그곳에서 그의 신학적 입장을 나타내는 최초의 신학문서인 ‘프라하 선언’을 쓴다.
이 선언에는 루터와 또 다른 그의 입장을 내세운다. 프라하 선언에서 뮌처는 루터의 ‘문자적 믿음’에 대해 ‘영적 믿음’을 대립적으로 내세웠다. 그가 영적 믿음을 내세운 이유는 루터가 주장하는 문자적 믿음이 성령과의 만남이 없을 때 얼마나 현학적이고 기만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민중이 문맹자였던 시대에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제들은 그러한 점을 이용해 성서의 내용을 차단하며 은폐시킬 수 있다. 뮌처는 성서를 통해 증언되는 ‘가련한 민중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그렇게 차단되고 은폐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해 뮌처는 이 프라하 선언에서 세 부류의 무리들에 대해 비판한다. 첫 번째 부류는 성서를 은폐시키는 사제들과 승려들이며, 두 번째는 민중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영주들이고, 세 번째 부류는 ‘죽은’ 지식을 대변하는 ‘멍청한 불알 달린 박사들’이었다. 뮌처는 이렇게 프라하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야심차게 표명하고, 추종자들을 모았지만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잠시 고향과 할레의 수녀원에서 일하다가 알스테트의 요한 교회의 사제로 일하게 된다.
그는 알스테트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독일어로 예배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독일어 예배는 루터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다. 독일어 예배는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을 예배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독일어 예배를 드린 목적은 가난한 평신도에게 성서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뮌처는 더욱 분명하게 루터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뮌처는 루터가 쓰라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고 달콤함만을 강조하며 반쪽 그리스도만을 가르친다고 비판했다. 뮌처는 민중의 고통과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했다.
뮌처의 설교는 지배계층의 달콤하고도 안락한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뮌처는 1524년 7월 13일 독일의 영주들에게 불려가 설교했다. 그 자리에서도 그는 영주들에게 민중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칼을 빼앗아 성난 백성들에게 줄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파멸할 것이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당연히 영주들은 뮌처의 설교에 위협감을 느꼈다. 작센의 영주 요한은 뮌처를 법정에 출두하라고 요구했고, 뮌처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파이퍼가 있는 뮐하우젠으로 도피했다. 뮐하우젠도 그의 영향으로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그를 추방했다. 그는 추방된 뒤 독일 서남부의 폭동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다시 추종자들의 요청으로 뮐하우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농민 봉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점점 더 사회개혁자의 길로 나선다. 그 사이 뮐하우젠에도 독일 남부에서 불타오른 농민반란의 불씨가 옮겨 붙었다. 물론 뮐하우젠의 봉기에는 뮌처의 선동도 작용했다. 뮌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종으로 기드온의 칼로 경건치 못한 자들을 대적하라고 선동했다. 1525년 뮐하우젠 근처 프랑켄하우젠에서 농민들과 영주들 간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뮌처는 직접 농민들을 이끌었다. 조직된 정예군대와 압도적인 수를 가진 영주들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패했고, 뮌처는 사로 잡혀 고문을 당했다. 1525년 5월 27일 훈풍이 불어오는 날 53명의 동료들과 함께 처형을 당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고 자기의 계획을 이렇게 고백했다.
“영주이든 백작이든 귀족이든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런 원리를 행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 목을 치거나 교수대에 매달려야 한다.”
종교개혁뿐 아니라 평등과 자유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짧은 생애를 불꽃같이 살다 간 신학자 뮌처는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 아이콘이었다. 동서독이 서로 대립하던 시절 뮌처는 동독 화폐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선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그가 꿈꾸었던 종교적 이상의 세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하나님의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다고 그는 순교자의 죽음으로 증언하고 있다.
국민일보 -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토마스 민처의 생애와 사상- http://theologia.kr/45784
* Thomas Müntzer-영어위키백과
*출처: 정보-책"역사가 기억하는 정복과 확장"282~284쪽/ 자료 수집- 위키백과 및 국민일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