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 (종교 개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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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524년 ~ 1525년 | ||
장소 | 현대의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알자스, 체코 일대 | ||
결과 | 농민반란의 진압과 관련자 처형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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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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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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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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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獨逸農民戰爭, 독일어: der Deutsche Bauernkrieg)은 1524년부터 1525년 사이 중부 유럽의 독일어 권역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던 농민들의 항쟁이다. 농민 대전쟁, 농민 대항쟁 등으로도 불린다. 독일 농민 전쟁에 가담한 30만여 명의 가난한 소작농 가운데 10만여 명이 귀족들에게 학살되어 진압되었다. 분드슈 운동, 후스 전쟁과 함께 16세기 독일 지역의 경제적·종교적 운동의 일부로 파악되기도 한다.
독일 농민전쟁은 오늘날 독일 남서부에 해당하는 알자스 인근 지역에서 개별적인 항쟁으로 시작되어 동부로 확산되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전파되었고[1], 스위스의 여러 주에도 영향을 주었다.
농민들은 포병도 기병도 없이 빈약한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군사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고 지휘체계를 갖추지도 못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농민들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농민전쟁을 비난하고 귀족의 편에 섰다.
원인과 진행
16세기 독일 사회는 자본주의의 진행으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구분되고 있었는데, 농민들은 무산계급에 속해있었다. 그들의 삶은 유산계급(부르주아와 영주)의 착취인 과다한 소작료와 세금으로 인하여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그러던중 이들은 마르틴 루터가 주도하는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으로'를 부르짖으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불공평한 사회가 개혁될 수 있다고 보았다. 농민들의 사회개혁의지는 1524년 독일농민들이 영주들의 착취에 맞서 싸운 민중항쟁인 독일농민전쟁으로 실천되었고, 종교개혁자(이전에는 라틴어로 쓰였던 전례용어를 독일어로 번역)인 토마스 뮌처가 민중항쟁을 이끌었다.
농민군들은 마르틴 루터의 지지를 열렬히 원했으나, 마르틴 루터는 그들을 '기독교도가 아닌 자들(unchristian)'이라 규탄하고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토마스 뮌처가 이끈 농민군들은 마르틴 루터를 따르는 영주들에 의해서 학살당했고, 뮌처도 5월 25일 처형되었다.
평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농민전쟁을 계급투쟁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도 뮌처의 독일농민전쟁에 대해 사회주의 혁명의 전통이 뮌처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외부 링크
-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에 대한 평가 기사,<이상 위키백과>
독일농민전쟁 (獨逸農民戰爭 Deutscher Bauernkrieg)
종교개혁기 독일의 대농민봉기 (1524-25). 규모, 지역적 확산, 전투의 치열함 등으로 보아 농민전쟁이라 한다.
[원인]
13세기부터 장원제도가 무너지자 독일농민의 자립화가 진행되었다.
부역은 현물이나 금납지대(金納地代)로 바뀌고 농민의 인두세·상속세·결혼세 등도 저액의 현물 또는 금납 공조(貢租)로 되어 봉건적 지배권이 흔들렸다.
이에 대해 영주계급 특히 영방(領邦)국가는 15세기 후반에 들어와 농민을 억압하기 시작하여 부역 부활,
현
물·금납지대 증액, 농노제 부활, 촌락공유지 용익제한, 촌락자치 제한 등의 정책을 취했다. 이것이 봉기의
원
인이 되었다.
[봉기]
농민전쟁의 전사(前史)는 1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1476년 뷔르츠부르크 부근 니클라스하우젠에서 목부(牧夫) 한스 베하임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교회의 부패
를 공격하는 설교를 하자 남독일 전역에서 수만 명의 순례자가 찾아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93년에는 알자스 슐레트슈타트에서 분트슈 봉기가 발각되었다. 분트슈란 긴 가죽끈이 달린 농민화인데 봉
기의 상징으로 깃발에 그려졌다. 1502년 슈파이어 주교관구 운터그롬바흐에서 농노 요스 프리츠가 분트슈
봉기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이 발각된 뒤 그는 13년 프라이부르크 근방 렌에서, 17년 오베르라인 각지에서 분트슈 봉기를 조직
했다. 이 때 루터의 종교개혁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과정]
농민전쟁은 1524년 6월 23일 남서독일 슈바르츠발트 슈튈링겐백작령의 봉기로 시작된다. 무력이 없는 영
주측이 교섭에 응했기 때문에 10월에 봉기는 일시 해산했으나 겨울 동안에 조직이 강화되어 25년 봄에는
남서독 전역으로 퍼졌다.
우선 2월 중순 오버슈바벤에 바르트링겐·알고이·보덴 호반의 세 농민단이 결성되고 3월 초순 <그리스도교
인 형제단>을 결성했다.
그 공동강령이 메밍겐시(市)의 피혁공 제바스티안 로처가 기초한 <12개 조항>이다.
로처는 해박한 성서지식을 근거로 목사선임의 자유, 농노제와 1/10 세금 폐지, 부역·지대·조세 경감, 공유지
해방 등의 요구를 제시하였는데, 이 강령은 전독일 농민의 공통강령이 되었다. 3월 중순에는 각 지역의 여러
농민단이 결성되어 많은 수도원·성채를 태웠다. 그러나 영주들이 반격에 나서, 북독일에서는 작센공(公)이 5
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튀링겐 농민군을 격파하고, 남독일에서는 봉건영주연합군이 4월 4일 라이
프하임 전투의 대승을 시발로 각지의 농민단을 격파함으로써 6월 중순에는 전역에서 봉기가 진압되었다.
[결과]
농민 희생자는 10만에 달하고 전후에 중한 벌금이 부과되어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중·소영주와 제국도시의
세력은 실추되었으나 영방국가만은 그 체제를 확립하고 그 주도권하에 종교개혁이 추진되었다.
* 서양의 역사와 문화 유럽 바로알기-http://cafe.daum.net/eurohc 글에서 발췌
* German Peasants' War-영어위키백과
* 출처: 정보-책-"역사가 기억하는 정복과 확장"(285~290쪽)
'♣ 역사(歷史) 마당 ♣ > - 독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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