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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증시>증시는 바뀐 게 없다

Bawoo 2015. 5. 18. 20:22

한국 증권시장의 전형적인 패턴은 이렇다. 지루하게 횡보하던 주가가 꿈틀거린다. 거래도 활발해진다. ‘어어’ 하는 사이 주가가 제법 오른다. 주도주가 먼저 치솟는다. 조금 지나면 상대적으로 덜 오른 종목에 매수세가 뻗친다. 시장에 갑자기 낙관적 전망이 넘친다. 증시 전문가들이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언론도 눈치채고, 증시 소식을 크게 다룬다.

 긴가민가하며 망설이던 개인투자자들이 드디어 매수에 나선다. 소문이 춤을 춘다. 조급한 마음에 어떤 기업인지도 모른 채 주식을 덜컥 산다. 개인이 사는 동안 누군가는 팔고 있다. 십중팔구 기관과 외국인이 이익을 내고 처분하는 것이다. 사고파는 사이 주가는 좀 더 오른다. 용기백배한 개인이 더 사들인다. 큰돈을 벌 것 같은 환상에 빚을 내 투자하기도 한다. 거래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급기야 ‘코스피지수 마의 벽 돌파’ 같은 기사가 몇몇 신문의 1면 톱을 장식한다. 대략 이때가 최고점이다.

 눈치 빠른 기관이나 외국인은 대충 팔고 나온 뒤다. 뒤늦게 들어간 개인이 주식을 덜컥 떠안는다. 주가가 떨어지자 신문에는 ‘개인들 한숨’ 같은 기사가 나온다. 장밋빛 예측은 쏙 들어간다. ‘실물경제가 좋지 않은데 주가가 너무 올랐다’는 등골 오싹한 진단만 덩그러니 남는다. 늘 뒷북을 치는 증권당국이 주가조작을 적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락기에 접어들어도 주가가 떨어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적당한 가격에 처분할 기회가 몇 차례 온다. 하지만 개인들은 본전 생각이 간절하다. 손실을 보고 과감히 팔지 못한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주식을 안고 간다. 몇 개월 또는 몇 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주가가 꿈틀거리면 지긋지긋한 주식을 팔아 치운다. 공교롭게도 그때부터 주가가 본격 상승한다. 다시 1면 톱을 장식할 때까지.

 이게 수십 년간 반복돼온 패턴이다. 경기가 좋을 땐 주가가 많이 오르고, 조정은 조금만 받는다. 욕심을 내지 않는 한 주식투자로 이익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새처럼 실물경제는 좋지 않고, 넘치는 돈의 힘으로 주가가 오를 때는 예측불허다. 내세울 만한 게 없으니 적당히 포장해 주가를 끌어올린다. 테마주가 이런 경우다. 작전세력이 시세를 불법으로 조작하기도 한다.

 주식은 남들과 거꾸로 해야 남길 수 있다. 팔 때 사고, 살 때 팔아야 한다. 심하게 얘기하면, 상한가 때 팔고, 하한가 때 사들이는 뱃심이 있어야 한다. 개인이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고도의 정보력·분석력은 물론 정신력·체력까지 갖춰야 가능하다. 개인에게 직접 매매보다 기관이 운용하는 펀드를 권하는 게 이런 어려움 때문이다.

 정부가 펀드를 통한 간접투자를 권장하고 육성해 왔지만, 지난달 코스피 시장에서 개인 비중이 60%에 달했다. 1990년대에도 개인이 60% 선이었으니, 그동안 나아진 게 없다. 한술 더 떠 코스닥은 개인 비중이 90% 안팎이다. 개인끼리 난타전을 벌이는 셈이다. 정상은 아니다. 과열 우려를 낳는 상하이 증시의 개인 비중이 80%다. 코스닥이 더 높다. 빚내서 투자하는 신용융자 잔고도 지난 20년 새 1조8000억원에서 7조원(코스닥 3조8000억원 포함)으로 증가했다.

 한국 경제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1%대 저금리가 이어지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부동자금이 800조원으로 추산된다. 혼탁한 증시로 선뜻 들어오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도는 돈이 많다. 반대로 한탕을 노리는 투기성 자금도 적지 않다. 장롱이나 대여금고에 숨는 돈도 있다. 시중에서 5만원권이 사라지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

 800조원과 실물경제를 튼실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증시가 해줘야 한다. 부동자금이 시장으로 들어오고, 그 돈으로 기업이 이익을 내 직원에게 돌려주고, 직원이 소비를 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있는 유망 벤처에 자금을 대는 것도 증시의 몫이다. 안타깝게도 증시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 개인이 빚내서 주먹구구 투자를 한다. 작전주가 인간의 욕망을 파고든다. 수수료 수입에 매달리는 증권사는 단타매매를 부추긴다. 당국은 시장 흐름을 쫓아가기 바쁘다. 이런 풍토에서 독일 같은 히든챔피언(강소기업)은 나오기 힘들다.

* 중앙일보 -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