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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 경제를 위한 좋은 규제의 조건

Bawoo 2015. 5. 19. 22:02

묘하게도 교통과 경제는 서로 닮았다. 운전하다보면 가장 짜증나는 것이 꽉 막힌 도로다. 속도를 잃으면 교통으로서의 의미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에서 속도의 상실은 소득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경제학원론에 나오는 피셔의 교환방정식(M*V=P*Y)이 그것이다. 돈의 공급(M)과 그 순환속도(V)를 곱한 것은 항상 명목소득(P*Y)과 같다는 말이다. 미국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5년간 미국의 통화 공급(M)은 연평균 7.4% 늘었고 국민소득(Y)은 평균 2%를 밑돌았다. 교환방정식에 의한다면 물가(P)는 5% 이상 올라야한다. 하지만 실제 물가는 이를 훨씬 밑돌고 있다. 디플레이션 공포를 만든 범인은 다름 아닌 낮은 수준의 화폐유통 속도(V)였다.

속도를 얻기 위해선 신뢰가 중요하다. 돈에 속도가 붙지 않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둘 다 규제가 없을수록 소통이 원활해진다는 것도 닮았다. 교통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곳곳에 설치된 교통표지판이나 신호등은 흐름을 막는 주된 요인이다. 경제에서도 좋은 규제가 있듯이, 교통에서도 속도와 신호등 규제 등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규제방식이다. 규제의 방법에는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시스템이 있다. 포지티브시스템(열거주의)에서는 법률이나 규정에 의해 허용된 것만 할 수 있고 나머지는 금지된다. 네거티브시스템(포괄주의)은 그 반대이다. 자유와 창조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은 당연히 네거티브시스템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우리나라 금융은 후진적인 포지티브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은행과 증권, 보험은 서로 벽을 쌓고 경쟁을 피해갔으며 정부가 허용하는 금융상품만 판매했다. 법률에서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은행들은 부실자산을 매각하고 싶어도 자산유동화 상품을 만들 수 없었다. 많은 금융회사들이 도산해야만 했다. 규제 때문에 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이러한 현상은 허가와 인가라는 이름으로 경제 전반에 관행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단 경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통문화에서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포지티브시스템 속에 살고 있었다.

최근 정부는 비보호 좌회전을 허용해서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U턴 하라고 허용된 곳에서만 U턴이 가능하다. 좌회전 하라고 된 곳에서만 좌회전 할 수 있다. 비보호 좌회전도 허용된 곳에서만 가능하다. 포지티브시스템인 것이다.

반면 자동차의 대중화를 먼저 실천한 미국은 네거티브시스템의 교통신호체계가 주를 이룬다. 미국에서는 U턴 금지가 명시된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서 U턴이 가능하다. 직진 신호인 파란색이 켜지면 표지판이 없어도 항상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처럼 비보호 좌회전을 마치 시혜처럼 허용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

이러한 제도의 차이는 교통표지판의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U턴과 비보호좌회전 표지판을 설치해야만 한다. 미국에서는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는 곳에서만 선별적으로 U턴 금지와 좌회전 금지표시가 있을 뿐이다.
시스템의 차이는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의 지불로 나타난다. U턴할 표지판을 찾아다니는 수많은 운전자들의 사회적 비용과 그 많은 표지판을 설치해야 하는 비용은 과히 천문학적일 것이다.

무역이나 금융과 같은 산업에서는 네거티브시스템의 도입이 늘어나고 있다. 창조경제는 하지 말라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는 전반적인 네거티브시스템의 도입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교통이나 경제나 ‘도긴 개긴’이다. 경제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허용하는 것은 차선의 선택이다. 산업은 물론 문화에서도 규제는 풀어주고 위험한 장소에서만 비보호 좌회전을 불허하는 것이 창조경제를 위한 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는 아침이다.

 

* 출처: 머니투데이 김상범 세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