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戰後 출생 작가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권8 중)

Bawoo 2015. 5. 26. 23:37

한창훈: 올 라인 네

느 섬을 배경으로, 구르고 굴러 막판에 섬까지 오게 된 다방 아가씨 이미정이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겠다고 매달리는 섬사내 용철과 하룻밤 여관행을 하고 나오다 파출소장에게 걸려 잤느냐 안 잤느냐를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용철과의 관계를  맛갈나게 풀어나간 소설. 황석영 작가의 말에 따르면 색시 구하기 힘든 섬사람들은 육지에서 돌고돌다 마지막으로 섬으로 굴러 떨어진 아가씨들을 대상으로 아내 만들기 작업을 했다고 함. 요즘 국내에서 아내될 여자 구하기 힘들어 동남아에서 구하는 것과는 비슷한.

 

올 라인 네코는 배가 출항할 때 선장이 "닻이라든가 부두에 매놓은 밧줄 같은 것들을 모두 벗겨 내라는 소리'라고 함.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미정이 용철을 만나 자신의 족쇄-빚, 접객부 생활-을 벗어던지게 된다는 은유적 표현도 담고 있다.

 

'울 라인 네코'는 한편의 블랙코미디인데, 한참 재미있다. 우리다방 미스리, 가명은 다혜, 호적명으로 미정. 그네가 섬총각의 강퍅한 구애에 못 이겨 여관에 가서 흥감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조심스럽게 여관을 나오는데 마침 성매매 특별단속 중인 파출소 소장님에게 목격당했다. 그네는 성매매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남자와 함께 온갖 (웃기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내용 발췌>

* 미정은 간밤에 용철과 잤다.

  무시하고 거절하고 외면하다가, 설마 섬에 있는 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다가, 세상이라는 것이 생각도 못 한 일이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가를 증명이라도 해내듯(하긴, 섬에서 커피를 배달하게 되리라는 것도 꿈도 못 꾸었던 일이지만) 사내와 함께 잔 것이다.

  그것은 설득이었고 항복이었고 선택이었다. 한 사내의 대책없는 접근에 자신이 세웠던 방호벽을 스스로 허물었던 것이다. 역시, 사내란 이래야 한다고 결심하고 면사포 없는 신부처럼 다소곳이 여관방 열고 들어갔던 게 어젯밤이었다. 늦게 만난 것 벌충이라도 하듯 부지런한 첫날밤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성매매라니.

 

 

* "나는 다혜씨랑 살고 싶은디."

  시간을 채워야 할 필요가 없었으면 그대로 나갔을 것이다. 미정은 남은 오십오 분을, 이봐요 아저씨, 돌 던진 게 장난이라 해도 개구리는 맞아 죽어요, 농담도 사람 골라가면서 해요, 노래 안 해요? 또 그러신다, 비록 오봉댄서지만 우리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알아요? 사람 이렇게 무시하면 안 돼요, 정말, 하다가 제 설움에 겨워 눈물까지 찔끔했다.

  "그래도 삽시다."

 

 

* 사내의 강렬한 눈빛을 막아내며 몸과 마음만 만신창이가 아니라 한때 알았던 사내 때문에 빚이 이천만원이나 걸려 있다는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고것은 내가 무조건 갚아주겄소."

  미정은 다시, 말씀은 고맙지만 내가 못나 결국 이렇게 되었고 항구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멋모르고 행해졌던 그 어수선과 불편과 고통을 이제는 내 손으로 보란 듯이 깔끔하게 처리해버리고 싶으며 훗날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사내다운 사내 만나 연애도 다시 하고 결혼도 할 생각이며 그것은 섬이 아니라 육지가 될 것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다음날 전화가 또 왔다.

  "밤새 생각해봤는디요, 아무래도 내가 말을 잘못했는갑소. 같이 살잔 소리 인자 안 하께요. 하지만 좋아한단 말이요. 사랑한당께요."

  그 말은 학생들 암기과목 공부하듯 여객선 터미널에서, 싸롱 불빛 아래에서, 배 갑판 위에 물옷 입은 채 서서, 해수욕장 모래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노을 지는 방파제에서, 면사무소 골목 입구에서, 우체통 옆에서 거듭 되풀이됐다. 그리고 파도 거칠게 쳐올라오는 다리 난간에서도 이어졌다.

  "도대체 왜 이러세요."

  "사랑한당께요."

  "진짜예요? 왜요, 도대체 왜 나를 그래요? 왜 나한테 그래요?"

  "좋은 것이 죄요?"

  "......"

  "외로운께요, 외로우믄 고것 하나만으로도 사랑하게 되등만요. 다혜씨도 외로울 것 아니요. 나는 외로운 것이 치가 떨리요. 그런께 나도 다혜씨도 둘이 같이 안 외로웠으믄 좋겄소."

 

 

* "아이."

  "어허. 올 라인을 얼른 네코하랑께."

  "아, 아. 알았어, 알았어."

  미정은 옷을 벗었다. 항구에서 살았던 사내랑 헤어지고 닫아 걸었던 몸이었다. 한때는 죽어도 남자 앞에서는 옷을 벗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적도 있었다. 사내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신세 망치는 짓을 안 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다가 이 먼 섬에서 결심이 무너졌다. 그것은 선택이었고 사랑이었다. 그것 말고는 갖다붙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노을장 401호는 난데없이 풍랑 속의 배 한 척이 되었다. 밤새 격랑이 몰아치고 잠깐 동안 수평을 되찾았다가 뒤이어 새로운 파도 속으로 찾아들어 부딪히고 흔들리고 치솟아오른 다음 타고 넘었다.

 

 

* "글쎄, 나도 잘 몰르겄어, 그러나저러나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커?"

  "천천히도 말할 수 있지만, 속이 터져서 워디 그렇게 돼요?"

  용철은 그래놓고 한동안 침묵했다. 둘 사이가 진정한 연인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고민을 집중심화 단기간 코스로 마쳤는지 오래지 않아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미정을 향해 성큼 걸어오더니 단숨에 끌어올려 입을 맞췄다. 미정은 깜짝 놀랐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좋다고도 못 하고 싫다고도 못 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입맞춤은 길었다.

 

 

*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직접 찾아뵙고 인사 올리는 것이 도리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전화로 먼저 인사 드립니다. 저는 박용철이라고 합니다. 어머님 딸 미정씨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어저께 같이 잤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상호 간에 전화통화만으로라도 날을 잡았으면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미정씨 바꿔드리겠습니다."

  미정은 얼결에 받아 아무튼 이따가 다시 전화한다며 끊었다.

  "이젠 됐소?"

  두 눈 말똥히 뜨고 선 용철을 한동안 바라보던 소장은 이윽고 문을 가리켰다.

  "그래,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어떡하겠어. 그나저나 꼭 결혼 해야 돼. 내가 지켜볼 모양이여."

  "걱정하지 말고 부주나 많이 들고 오시오."

  미정은 마침내 파출소 문을 나섰다. 바쁜 시간대 지난 바다는 갈매기만 한가로운데 자신은 도대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손목을 끌고 걷다말고 용철은 무슨 생각으로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밀고 꼬집고 때려도 소용이 없다. 힐끗 보니 현관 유리문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소장이 졌다는 몸짓을 쓰윽 하고 있었다. 미정은 문득 가을햇살이 따스했고 품이 포근해졌다.

  "올 라인 네코!"

  잠시 입을 뗀 용철이 또 그 소리를 했다. 품에 안고 보니 다시 생각이 났다는 말이겠지만, 미정에게는 저를 붙들고 있는 여러 족쇄들이 순간 사라지는 말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