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의 아버지는 조지 3세의 셋째 왕자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Prince Edward, Duke of Kent, a son of King George III)의 딸로, 1819년 5월 24일 여자 의사인 Doctor, Frau Siebold 에 의해서 Kensington Palace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별명은 작은 공주 Drina라고 불리어졌으나, 엄격한 모친은 항상 빅토리아라고 불렀다.그녀는 켄싱턴 궁 Kensington Palace에서 자라며, 3살 때 까지는 독일어 밖에 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 영어를 배웠고, 오페라를 좋아해서 이탈리아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유모의 독일어를 요람 속에서부터 듣고 자라서 가정에서는 독일어를 썼으며 평생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는 못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빅토리아의 생후 7개월만에 죽자 어머니인 The Duchess of Kent는 빅토리아가 괴이하고 보수적인 아버지의 동생 컴벌랜드 공작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항상 그녀를 혼자 놀게 하지 않았고, 항상 주위에서 그녀를 지켜 보았다. 그녀에게 친구는 고사하고 혼자 있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고, 18세까지 잠을 자는 곳도 어머니의 침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야했다.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즉흥적이고 진지했고, 거만하고 지배적 속성을 지닌 것과 동시에 삶과 열정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여왕이 되어 나이를 먹었을 때 용모, 펑퍼짐하고 두꺼비처럼 변형된 툭 튀어나온 눈, 무뚝뚝한 불독같은 입을 주로 기억하지만 18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녀는 아주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 반 금발, 그닥 튀어나오지 않은 파랗고 순진한 눈 등 토실토실한 얼굴이 숲속의 요정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그다지 예쁘지 않은 잇몸을 드러내고 기꺼이 웃었으며 그만큼 많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고 말할 수 있다." 왕실의 시종은 어린 공주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는 미소직고, 그녀는 극히 자연스런 걸음을 뗄 때마다 웃는다.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웃음으로서 누구든 상대의 마음을 저절로 풀리게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부터 모든 이를 사로 잡았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왜냐면 그녀는 까다롭고 흠이 많은 왕들의 기나긴 명부를 이어받아 권좌에 올랐으니까. 이미 하노버 가는 그녀의 장래에 대해 계획을 세워놨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는 미친 왕 조지 3세의 아들이며 모친 쪽도 끔찍한 인물들로 가득 찬 색스 코버크의 독일 공작 부인이었다. 그런데도 그 어머니와 벨기에 레오폴드 왕은 두 왕실, 어린 빅토리아에게 영국 왕조와 독일 작센 왕조의 타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엄격한 분위기에서 준엄한 도덕성을 교육시켰다.
1830년 조지 4세(George IV)가 죽자 윌리엄 4세(William IV)가 왕이 되고 윌리엄 4세가 1837년 6월20일에 죽자(윌리엄 4세의 두 딸은 일찍 요절해서)18세의 Alexandrina Victoria 가 영국의 왕에 즉위하게 되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침실에서 벗어나 새 침실을 꾸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세계 최강대국의 권좌를 지키는 위엄에 찬 인물이라는 점과 자신의 직분을 자유럽게 수행하는 일에 스스로 열광하여 세상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화제거리로 삼았다.
그녀는 일기에 "나는 항상 '거대함'을 안고 모든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일이 그렇게도 '좋을 수'없다."라고 쓴다. 그녀는 격렬한 아동기적 발상과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고유의 투박함과 지식, 동시에 범상한 격식을 빠뜨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밑줄과 대문자로 자신의 기록을 채워나갔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그녀는 11세 때 이미 자신이 여왕이 된다는 사실과 그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며 여왕의 위엄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예리한 지각과 뚜렷한 이상을 지켜나갔다. 그녀의 위치는 구전이나 전설에 등장하는 여왕처럼 오만하며 겸손하고, 복잡하며 단순했다.
레오폴트 왕은 조종자로서 빅토리아를 색스 코버그의 왕자 앨버트와 어떻게든 결혼시킨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과 사촌간으로 빅토리아 여왕보다 3개월 후 출생했다. 앨버트의 부친은 도락을 일삼는 호색한으로 그런 남편의 푸대접에 지친 그의 어머니 루이즈 왕비는 왕실의 한 장교와 파리로 도망쳐 얼마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죽었다. 앨버트가 4살 때 일이다.
★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 (Queen Victoria and Prince Albert)
앨버트는 지혜로웠지만 소심하고, 우울하고, 병색이었다. 아동기에 듣고 겪었던 일들은 그를 지독하게 엄격하고 가정적이며 청교도적으로, 음악과 독서와 공부에 치중하고 사냥과 등산을 좋아하지만 여자들로부터는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전지전능한(?) 레오폴드가 자신의 조카 앨버트를 위해 지도교사로 두었던 스톡마르 남작은 이렇게 쓴다. "왕자는 항상 여자보다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여자들과의 관계에 거의 만족하지 못 했다."
가족들이 자신들을 결혼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들은 빅토리아가 16세 때 처음 만나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사촌에게 매료당했다.그녀의 눈에 비친 앨버트는 큰 키에 멋진 외모와 파란 눈이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그녀는 당시 일기에서 현기증이 날 정로 멋진 사총에 대해 무수한 주석을 달고 있다. 그의 입술, 그의 치아, 그의 눈길, 그의 상냥함에 대해 미친듯이 밑줄을 긋고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사촌 앨버트."라고 적는다. 반면 앨버트는 빅토리아를 "친한 친구같은" 사촌이라는 묘사로 그친다.
앨버트가 떠나자 빅토리아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침통해 했다. 두 사람은 3년간 만나지 못 하는데 1839년 Victoria는 19살로서 이미 왕이 되어있었을 때였다. 그녀는 색스 코버그의 사촌이 도작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마음의 준비를 못한 상태였다. "나는 아직 2,3년간 결혼할 생각없다." 앨버트도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적었는지 여러번 여행을 미루고 있었지만 철두철미한 레오폴드는 이미 두 사람의 결혼을 기정 사실로 굳혀놓았다.
그 때부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빅토리아는 월요일에 결혼하겠다는 뜻을 수상에게 통보하고 화요일에는 앨버트에게 청혼했다. "나는 '나의 청혼'을 받아들여 준다면 행복이 넘쳐흐르리라고 말했다."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애정을 가질 수 있는 필요한 존재일까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영원히 당신의 노예가 되겠소. 당신의 충직한 앨버트."
알버트가 승락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팔을 벌려 그를 껴안았다. 그들은 다음해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날 빅토리아 여왕은 흰 옷을 입었는데 결혼식날 신부가 흰 드레스를 입는 것은 그녀로부터 유래되었다.( 당시에는 흰색이 순수와 순결을 의미했기 때문.)
빅토리아 여왕의 첫번째 영국수상은 Lord Melbourne 이었다. (Victoria's first prime minister was Lord Melbourne.)
Lord Melbourne는 수상이 되자 빅토리아 여왕을 왕으로서 존경했고, 빅토리아 여왕도 그를 수상으로서 지지했으며 그의 정당을 물심양면으로 지지 하자, 나중에 남편인 알버트공이 무슨 일이 있어도 특정의 정당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할 정도였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처음에는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여왕은 가난한 외국인 왕자와의 결혼에 대해 가난뱅이 남편이 처가 살이를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떠돌자 곤혹스헙고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20살에 불과한 두사람의 성격 차이 역시 만만찮았다. 그녀가 새벽녘이 될 때까지 춤추고 싶어하거나 뜨는 해를 보고 싶어하면, 앨버트는 밤 10가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가 활기차고 어수선하다면 그는 지적인 병자이자 슬픈 분위기를 띤 남자였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기이할 만큰 굳건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결혼 6주만에 빅토리아는 임신을 했다. "그런 일이 나를 놀라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여왕은 연달아 아홉 번의 출산을 했는데 그 기간이 대개 11개월 이상을 넘기지 못 했다. 두사람은 마지막 출산 이후 친대에서 모포를 차지하기 위해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다투었다.
다혈질 빅토리아는 이방 저방 따라다니면서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남편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그럴 때면 앨버트는 그 순간을 피해 자기 방에서 달아난 적이 많았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그에게 있어 여왕은 그에게 맡겨진 존재이자 그의 의무였지만 막상 자신의 의미는 찾지 못 했다. 1861년 세상을 떠나기 수개월 전 앨버트는 스톡마르 남작에게 이렇게 쓴다. "내일이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 21년을 맞이하는데 그간 얼마나 많은 장애들이 우리의 결혼 생활을 가로막았는가? 그러나 그 와중에서 우리의 결혼 생활은 활력에 찬 뿌리를 돋아내며 신선하고 청아하게 지속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모랄의 숲을 거닐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익명의 이름으로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도 하면서 날마다 무미건조한 국가 대사에 파묻혀 살았다.
여왕은 어느날 남편의 방문을 두드렸고 알버트는 안에서 대답했다.
"누구요?"
"여왕이에요"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왕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당신의 아내예요"
그러자 문은 바로 열렸다.
빅토리아는 앨버트보다 훨씬 전제적이고 권위적이었지만 실용적 감각과 융통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반면 앨버트는 관념적이고 도덕주의자에 융통성이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불가변성을 자식들에게도 적용했는데 특히 장남인 버티(황태자 에드워드 7세)에게만은 엄격하고 억압적으로 대하며 그가 17살 때 성인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지적과 함께 "인생은 책무로서 이루어진다."는 교서를 보냈다. 그것을 읽고 버티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자식에게까지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명석한 차녀인 앨리스는 생전 아버지 알버트의 가장 좋은 상대 중 하나였다. 나이를 먹을 수록 그의 멋진 용모는 급격하게 망가지고 체중과 턱살이 늘었으며 머리가 벗겨졌다. 그에게 남은 것은 경이로운 느낌을 주는 깊고 우울한 눈빛 뿐이었다. 어느 날 공식행사에서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그는 장티푸스에 걸렸지만 투병도 않고 조용히, 1861년 젊은 나이인 42세때 장티부스에 걸려서 한달 후에 사망했다.
알버트공이 죽자 빅토리아 여왕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제 나를 빅토리아라고 불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빅토리아 여왕은 하노버가의 광기에 붙잡힌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반쯤 실성한 그녀는 머리맡에 앨버트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의 셔츠를 안고 잠이 들었다. 덕분에 시녀들은 매일 존재하지 않는 알버트를 위해 의상을 준비하고 세면할 물을 갈았다. 이러한 의식은 40년 동안 빅토리아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되었다.
윈저성으로 들어가 여왕은 모든 공식 일정을 포기하고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왕이 국사의 일선에 나서지 않자 군주제의 정계에선 그녀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일파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군주제 자체에 대한 강한 의구심마저 생겨 한 때 유럽에는 그녀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지만 5년간 기이한 행위를 지속하던 여왕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식민지 전쟁에 박차를 가해서 대영 제국의 황금시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완성한다. 이 시기 그녀는 인생 최대 스캔들에 시달리는데 바로 앨버트의 시종이었던 스코틀랜드 인 존 브라운과의 추문이었다. (이 얘기는 '미세스 브라운'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음).그는 여왕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수행했고 여왕의 침실 옆방에서 지냈다. 그들의 관계는 1883년 브라운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모든 사람이 죽은 후, 자식 넷이 먼저 죽은 후에도 살아남았던 여왕이 1901년 81세로 죽었을 때 빅토리아 여왕 재위 중에 태어난 영국의 60대 이하 세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이 죽자 그녀의 아들이 그녀를 관 안으로 옮겼으며, 여왕은 흰 옷을 입고 (검정 색을 싫어해서) 관으로 넣어졌으며 그녀가 죽자 런던은 purple 과 white로 뒤덮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The Frogmore Royal Mausoleum at Windsor Castle 의 남편인 Prince Albert 옆에 묻혔다.
Victoria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통치한 왕으로서 64년간 영국을 다스렸다. 그녀는 영광스럽게 죽었지만 왕실은 모든 권능을 잃어갔고 20세기 빅토리아 왕가의 운명과 대영제국의 미래에 숙명적인 쇠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남편 알버트 공
★빅토리아 여왕의 9명의 자녀들 (Queen Victoria's Children)
1. Princess Victoria Adelaide Mary Louise 는 1840년에 태어남. 가족은 그의 별명을 Vicky라고 불렀다.
그녀는 17세 때 프러시아Prussia의 왕자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과 결혼하여 남편은 독일의 왕(Emperor of Germany)이 되지만 3개월 후에 목 후두암으로 사망,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장남은 독일의 왕 (German emperor) 빌헬름 2세Wilhelm II가 되었다. 그녀의 딸 Sophie는 그리스 왕자와 결혼하여 같은 기간에 그리스 여왕 (the queen of Greece)이 되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진 프러시아 궁정에서 지성과 강한 독립심을 겸비하고 있었던 비키는 알게 모르게 박해당했다.
장녀 빅토리아(비키, 1840-1901)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
1.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윌리)(1859-1941)
2.작센 마이닝겐公妃 샬롯테(디타)(1860-1919)
3.하인리히(헨리)(1862-1929)
4.지기스문트(지기)(1864-1866)
5.샤움부르크-리페公妃 빅토리아(모레타)(1866-1929)
6.발데마르(발디)(1868-79)
7.그리스王妃 소피(1870-1932)
8.헤센-카젤 公妃 마르가레테(모시)(1872-1954)
2. Prince Albert Edward는1841년에 태어났다. 그의 별명은 Bertie이며, 1863년에 Denmark의 공주 알렉산드라Alexandra와 결혼한다. 그들은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딸 중의 하나인 마우드Maud는 the queen consort of Norway가 되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숨을 거두자 Bertie가 왕위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7세 King Edward VII가 되었다. 그가 1910년에 죽자 그의 아들이 조지 5세King George V로 즉위했다.
장남 영국왕 에드워드 7세(버티)(1841-1910): 덴마크 왕녀 알렉산드라(1844-1925)
1.클라렌스 공작 앨버트 빅터(에디)(1864-92)
2.조지 5세 (1865-1936)
3.파이프 공작부인 루이즈(1867-1931)
4.빅토리아(토리아)(1868-1935)?미혼
5.노르웨이 왕비 모드 (1869-1938)
6.존 알렉산더 (1871)
3. Princess Alice Maud Mary 는 1843년 태어났다.
그녀는18세 때Prince Ludwig or Louis of Hesse (later Grand Duke Louis XIV)와 결혼하여 일곱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나중에 일곱 자녀중의 하나인 Alix는 러시아 마지막 왕인 Nicholas II의 황후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때 살해당함.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로서는 처음으로 Alice가 1878년 35세의 일기로 장티푸스에 걸려서 사망했다. 그녀는 모친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아 두 딸과 아들이 혈우병이었다.
차녀 앨리스(1843-78):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1837-92)
1. 바텐베르크 공비(후에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빅토리아(1863-1950)
2. 러시아 대공비 엘리자베트 (엘라) (1864-1918)
3.프로이센 왕자비 이레네 (1866-1953)=혈우병 보인자
4.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어니)(1868-1937)
5.프리드리히(프리티) (1870-73) =혈우병으로 사망
6.러시아 황후 알렉산드라 표드로브나(알릭스)(1872-1918)=혈우병 유전자
7.마리 빅토리아(메이)(1874-78)
4. Prince Alfred Ernest Albert는 184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별명은 Affie로 1874 년에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의 딸 마리 대공녀(Grand Duchess Marie, the daughter of Tsar Alexander II of Russia)와 결혼. 1남4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은 1899 년에 권총으로 자살하며, 4명의 딸 중 장녀인 Marie는 Romania왕자 Crown과 결혼하는데 그가 나중에 페르디난드 King Ferdinand I이 된다.
차남 에딘버러 공작&작센-코부르크-고타 公 알프레드(어피)(1844-1900): 러시아 대공녀 마리(1853-1920)
1.작센-코부르크-고타 왕자 알프레드(1874-99)
2.루마니아 왕비 마리아(미시)(1875-1938)
3.헤센 대공비, 후에 러시아 대공비 빅토리아 멜리타 (더키) (1876-1936)
4.호엔로에-랑겐부르크 후작부인 알렉산드라(산드라)(1878-1942)
5.갈리에라 공작부인(스페인 왕자비)베아트리스(베이비 비)(1884-1966)
5. Princess Helena Augusta Victoria 는1846년에 태어났고. 그녀의 별명은 Lenchen이었다.
그녀는 1866년에 Prince Christian of Schleswig-Holstein과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고 Lenchen는1923에 사망했다.
삼녀 헬레나(렌헨)(1846-1923):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왕자 크리스티안 (1831-1917)
1.크리스티안 빅터??死(1867-1900)
2.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公 앨버트 (1869-1931)
3.헬레나 빅토리아(토라)(1870-1948) 미혼
4.안할트 뎃사우 후작부인 마리 루이즈 (1872-1957)
5.프레데릭 하롤드 (1876)
6. Princess Louise Caroline Alberta 는 1848에 출생했다.
사녀 루이즈 (1848-1939): 제 9대 아가일 공작 존(론 후작)(1845-1914)
그녀는 23세에 John Campbell, Marquis of Lorne (나중에 the Duke of Argyll)와 결혼하였으나 결혼에 문제가 있어서 자녀가 없었으며, 그녀는 1939년까지 살았다. 캐나다의 알버타 (Alberta)라는 州 명은 루이스 캐롤라인 알버타 공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그녀가 론 후작과 결혼하여 서부 캐나다를 여행할 때 이 지역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녀의 남편이 캐나다 정부에 상신, 자신의 신부의 이름을 따서 알버타 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7. Prince Arthur William Patrick 는1850년에 출생, 그는 1879년에Princess Luise Margarete of Prussia와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로서는 92세로 1942년까지 가장 장수했다.
삼남 코너트 공작 아서 (1850-1942): 프로이센 왕녀 루이제 (1860-1917)
1.스웨덴 왕세자비 마가렛(데이지)(1882-1920)
2.아서 (1883-1938)
3.레이디 패트리샤 램지(팻시) (1886-1974)
8. Prince Leopold George Duncan 는1853에 출생하여 1882년에 Princess Helena Frederica of Waldeck 과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결혼한지 2년 만에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혈우병으로 죽음.
사남 알바니 공작 레오폴드 (1853-84): 발덱-피몬트 공녀 헬레나(1861-1922)
1.텍 公妃 앨리스(1883-1981)
2.작센-코부르크-고타 公 칼 에두아르트(1884-1954)
9. Princess Beatrice Mary Victoria는1857에 태어나 그녀의 별명은 Baby 였으며, 1885년 Prince Henry of Battenberg와 결혼했다. 이 공주도 혈우병.
오녀 베아트리스 (1857-1944): 바텐베르크公 헨리(리코)(1858-96)
1.캐리스부르크 후작 알렉산더(산드리노)(1886-1960)
2.스페인 왕비 빅토리아 유제니(에나)(1887-1969)=보인자로 스페인 왕실에 혈우병을 퍼뜨린 장본인.
3.마운트배튼 경 레오폴드 (1889-1922)
4.마운트배튼 경 모리스 ?死(1891-1914)
☞ 빅토리아 여왕 서거 100주년 추모 ☜
영국을 한때 지구 육지의 4분1을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건설했던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추모행사가 이어졌습니다.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고조할머니가 되는 빅토리아 여왕은 18세에 즉위해 지난 1901년1월22일 영국 남해안의 와이트섬에 있는 오스본하우스에서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4년이라는 영국 왕실 사상 최장기간 통치한 여장부.
엘리자베스 여왕은 빅토리아 여왕 10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2001년1월21일 2000년8월4일 100세를 맞은 모후와 남편 필립공 등과 함께 노포크에 있는 샌드링햄 왕실영지 근처의 세인트로렌스교구교회에서 열린 추모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 교회는 빅토리아 여왕 자신이 1889년 방문했던 곳으로 이날 추모예배에서 샌드링햄교구의 조지 홀 신부는 `빅토리아 여왕이 오랫동안 이 나라와 세계를 위해 통치하면서 행했던 모든 일과 그녀의 생애에 대해 감사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날 예배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가 낭독됐으며 그녀의 독일 출신 남편 앨버트 공이 작곡한 음악이 연주 되었습니다. 또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채플에서도 추모예배가 열렸고요.
100주년 당일 1월22일에는 그녀의 통치시절 만들어진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빅토이아 소사이어티가 버킹험 궁 앞의 기념비에 헌화했고 그녀가 앨버트 공 및 9명의 자녀와 함께 살다가 숨을 거둔 오스본하우스에서도 100주기 추모행사로 백파이프가 연주됐습니다.
이와 함께 지난 2001년 2월4일에는 빅토리아 여왕보다 40년 먼저 장티부스로 세상을 떠난 남편 앨버트공과 함께 빅토리아 여왕이 묻혀있는 윈저홈파크의 프로그모어 왕실묘가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또 오스본하우스도 100주기 추모행사로 빅토리아 여왕이 숨질 때 누워있던 침대를 당시 모습대로 재현하고 생존시 인도에서 받은 100여점의 진귀한 선물들을 전시, 오는 31일부터 일반에게 공개 되었고요.
빅토리아 여왕은 에드워드공의 무남독녀로 지난 1819년 5월 24일 켄싱턴궁에서 태어났으며 알렉산리나 빅토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그러나 삼촌인 조지 4세나 후에 윌리엄 4세가 된 그의 동생 클라렌스 공이 모두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자손'을 두지 못해(조지 4세는 외동딸 샬롯 공주 사망, 클라렌스 공 윌리엄 4세의 두 공주는 요절)그녀가 윌리엄 4세의 뒤를 이어 지난 1837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숨지는 날까지 남편 앨버트공을 그리워해 항상 검은 색 옷을 입고 검은 테가 둘려진 종이만을 사용하였으며 다리, 극장등 여러 가지 건축물에 앨버트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
그녀는 또 "우리는 즐겁지 않았다"는 말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엄하고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이 말은 장교가 만찬에서 외설스런 이야기를 하자 그에 대해 대꾸한 것일뿐 인생의 여유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호주에서 빅토리아 여왕은 호주의 독립국가 출범에 서명한 존경스런 인물로 평가 받고 있고 실제로 `빅토리아주' 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국을 대제국으로 건설한 만큼 식민통치를 받았던 국가에서는 미움을 받고 있죠. 엄격한 식민지 통치와 인권침해, 그리고 유럽역사상 유레가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빅토리아 여왕 당시에 일어났던 `아일랜드 감자대기근' 사건입니다.
같은 나라이면서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일어난 순박한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사람들 150만 명이 굶어죽은 사건, 과연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존경스런 여왕으로서의 일을 했는지 다시 한번 역사를 뒤집어 볼 필요가 있겠군요.
*http://cafe.daum.net/bigmemories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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