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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조의 권력자, 윤원형의 애첩이자 둘째 부인> 정난정(鄭蘭貞)

Bawoo 2015. 6. 30. 22:57

정난정(鄭蘭貞, ? ~ 1565년 11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외척이며 명종의 넷째 외삼촌이자 재상인 윤원형의 애첩이자 그의 둘째 부인이다. 명종조의 권력자의 한 사람으로,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사후 사림파에 의해 악녀의 대명사로 몰렸다.

본관은 초계(草溪)로 아버지는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이고, 정난정은 그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성부 출신.

생애

출생과 가계

한성부에서 초계 정씨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윤겸과 차실(次室) 남씨(南氏)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 딸로 태어났다. 모친은 본래는 상민이 아니었으나 난신에 연좌된 부녀로서 노비가 되었고, 정윤겸의 집에 분배되었다. 그는 정윤겸과 노비가 된 반가 여성 사이에서 서녀(庶女)의 신분으로 태어났다.[1] 어릴 때 집을 나와 기생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다. 훗날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위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사사되었고 이때 김안로의 질녀였던 윤원형의 부인 김씨를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묵인하에 몰아내어 실질적인 안방 주인이 되었다. 그 후 명종8년 문정왕후는 정난정에게 적처로 올리라는 전교를 내려 실질적인 윤원형의 정실이 되었다.

 

정난정이 정실부인이 됨에 따라 자녀들도 당당한 정실 자식이 되었고 윤원형과의 슬하에 4남 2녀를 남겼다. 양반가에서는 그녀의 권세에 힘입으려고 사돈이 되자고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많은 재산을 모으며 부귀를 누렸고 문정왕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재에도 능했던 그는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한다.[2]

정치 활동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승려 보우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보우문정왕후에게 적극 추천하여 그를 총애받게 한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3]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나 마찬가지이며 윤원형이 이조판서에 오를 때 정부인으로, 의정부 우의정영의정에 오를 때에는 정경부인으로 작호가 올랐다. 정경부인으로 오른 후 궐에 자주 들어 명종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최후

하지만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반대도 극심하였고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사망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나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문정왕후가 승하한지 5개월 후인 1565년 9월 8일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는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며 의금부에 고발하였다. 이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1565년 11월 13일 독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사후 사림파에 의해 악녀의 대명사로 몰렸다.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구전과 민담을 통해 작품과 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산 4-20번지(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4] 윤원형과 본부인 연안 김씨가 매장된 묘소 뒤쪽에 매장되었으며 비석은 없이 전하다가 조선이 멸망한 뒤에 비석이 세워졌다.

가계

관련 작품

텔레비전 드라마

평가

그는 자신이 문정왕후의 측근인 점을 이용, 문정왕후에게 서자 서녀도 능력이 되는 인물을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남편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2] 이는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2]

기타

  • 뒤에 나타난 전설에는 그와 정난정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난정이 체포되어 노비가 된 뒤에 죽었다는 전설이 나타났다. 이는 사실은 아니나 정난정 및 윤원형에 대한 사림의 원한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
  • 선조시대에 판중추부사로 지냈던 정종영은 정윤겸의 손자이자 정난정에게는 서조카였다. 원형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킬 적에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종영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난정이 참람하게 정실(正室)이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져서 외명부(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으나 종영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원형이 크게 유감을 품어 매양 죄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난정의 어머니가 난정을 경계하기를 "너는 종손을 해치지 말라. 내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당하겠다”하였으므로 화를 면하게 되고 예전처럼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정난정의 동복 둘째 오빠는 담(淡)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정난정이 반드시 화근이 될것이라 예상하고, 일체 그녀와 왕래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찾아올까봐 집 입구의 담을 꼬불꼬불하게 쌓아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 정난정은 늘 가마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가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문에 정난정은 그의 집에 가볼 수가 없었고, 덕분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한 뒤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 정난정의 4촌인 정준이 명종7년 6월 18일 사헌주 집의에 임명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준은 음험하고 경박한 성품으로 윤원형의 위엄을 빌어 대관이 되어 마음내키는 대로 인물들을 공격하였고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욕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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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정(鄭蘭貞)은 태생부터 평범하지 않았다.경상남도 합천, '초계 정씨(草溪 鄭氏)' 도총관 정윤겸(鄭允謙)과 소실(小室)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지만, 또 다른 야사(野史)에서는 허균(許筠)의 스승이 되는 한문과 문장에 능한 '손곡 이달(蓀谷 李達)'과 정윤겸의 소실(小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여튼 '정난정'의 어머니는 관가(官家)의 계집종인 관비(官婢) 출신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이씨'가 겪는 눈물의 세월을 지켜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은 첩(妾)살이를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정난정이 혼기(婚期)에 접어들자, 그녀를 데려 가겠다는 청혼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모두가 소실(小室)자리 뿐이었다. 소실의 딸이기 때문에 소실(小室)로 출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법도이었다. 올곧고 야멸찬 '정난정'이 매파(媒婆)가 다녀갈 때마다 자작시(自作詩)를 지어서 매파(媒婆)를 돌려 보내곤하였다. 바로 그 시(詩)가 당시 장안을 떠들석하게 하였다.  

 

           서녀절세한            庶女絶世翰         소실의 딸로 태어난 것이 절세의 한이  되어

           여의단간장            汝意斷肝腸         간장이 끊어지는 듯 서러워라 

           명부시정경            名婦是貞敬         명가의 며느리는 정경부인이라

           방소조혼객            放笑嘲婚客         혼담 가져온 사람을 크게 웃어 조롱하네 

 

이 무렵 조선의 정국은 바로 가관이었다. 임금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어린 이복동생 명종(明宗 ... 문정왕후의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明宗)의 외삼촌되는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 두  남매는 자신들의 권력 독점과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왕권을 빙자하여 상대 정파(政派)를 죽이거나 유배 보내고 사건을 조작하여 매장했다. 이들에게 국가 안위나 민생 안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첩이 되려고 기생의 길을 선택하다 

 

정난정(鄭蘭貞)은 미천한 신분을 떨치고 천출(賤出)의 한(恨)을 푸는 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 윤원형(尹元衡)의 첩실(妾室)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정난정은 '윤원형'이 자주 출입하는 술집을 알아내 그 집의 기생(妓生)이 되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정난정을 보고 첫눈에 반한 윤원형(尹元衡)이 정난정을 자신의 첩실(妾室)로 삼았다. 이때 윤원형은 적처(嫡妻) '연안 김씨'와 원수지간이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폐위)를 기도하다가 사사(賜死) 당한 불구대천의 정적(政敵) 김안로(金安老)의 당질녀이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명종(明宗) 20년 4월 6일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세상은 급변하였다. 명종(明宗)은 이양(李樑)을 중용(重用)하여 윤원형을 견제했을 정도로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을 싫어하였다.  명종(明宗)은 문정왕후의 사망 이후 경연(經筵)에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외삼촌 박소(薄昭)를 죽인 사례를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원형'을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명종 20년 8월 3일 대사헌(大司憲) 이탁(李鐸)과 대사간(大司諫) 박순(朴淳)이 윤원형을 탄핵(彈劾)하는 첫 포문을 열었다. 이들이 윤원형(尹元衡)을 공격한 첫 번째 사유가 '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婦人)으로 삼은 것 '이었던 점은 '정난정'에 대한 사대부(士大夫)의 반감(反感)의 크기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 달 후에 다시 첩(妾)으로 강등되었고,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어 가있던 윤원형(尹元衡)을 따라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종 20년 9월, 윤원형의 전(前) 부인 '김씨'의 계모 '강씨'가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毒殺)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정난정(鄭蘭貞))이 전부인 '김씨'의 몸종 '구슬이'를 시켜 음식 속에 독약을 넣어 독살(毒殺)했다는 주장이었다.  

 

고소장(告訴壯)을 접수한 형조(刑曺)에서는 강상(綱常  .. 삼강오륜을 범한 죄)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다며 역모(逆謀) 등 체제(體制) 사건을 다루는 의금부(義禁府)로 이첩하였다. 의금부(義禁府)는 '구슬이'는 물론 10여 명의 여인들을 소환하여 문초(問招)했는데, 짜맞춘 구도대로 진술하기를 거부하는 여인들은 심한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명종실록' 10월 22일자의 기록에 ' 전일 형문(刑問)한 사람은 모두 죽고 단지 주거리(住去里 .. 정난정의 여종)만 남았다 '는 위관의 보고는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는 그녀들이 심한 고문(拷問)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否認)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자 의금부(義禁府)는 '정난정'을 잡아다가 심문하자고 청했다. 의금부가 원하는것은 사건의 진상(眞相)이 아니라 '정난정'의 목숨이었다. 명종(明宗)은 어머니 문정왕후(文貞王后)의 무덤에 풀이 돋기도 전에 어머니의 형제인 '윤원형'를 내쫓고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정난정'마저 장하(杖下)의 귀신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에서 일단 거부하였다.

 

정난정(鄭蘭貞)은 자신의 부인첩(夫人帖)을 거두라는 주장을 한 달 동안 거부하는 체 하다가 윤허(允許)한 것 처럼 이번에도 결국에는 허락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끌려가면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리라고 직감한 그녀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조롱 속에 신음하지는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녀는 명종(明宗) 20년인 1565년 11월 3일 ' 금부도사가 온다'는 종의 말을 듣고 '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며 자결하였다. 정난정이 죽자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하였던 윤원형(尹元衡)도 뒤를 따라 음독(飮毒) 자살(自殺)하였다. 그녀는 죽은 후 다시 천인(賤人)으로 환원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녀를 성리학(性理學)과 강상(綱常 .. 삼강오륜)을 어지럽힌 만고의 죄인으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명종실록의 기록>

 

윤원형의 첩(妾) 정난정이 자살하였다. '김씨'를 독살(毒殺)한 정상은 환하게 드러나 의심이 없어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인데, 다만 윤원형을 두려워해 감히 신인(神人)이 함께 격분할 죄상을 발설치 못함이 여러 날이었다. 그 일에 간여된 계집종들을 다 문초(問招)하였는데, 그 음흉한 비계(秘計)는 정난정(鄭蘭貞)도 스스로 천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항상 독약(毒藥)을 가지고 다니면서 '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독약을 먹고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었다. 마침 금부도사(禁府都事)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집 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고하기를 '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 '하니, 윤원형은 소리내어 울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정난정은 '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하고 약을 마시고 바로 죽었다.  

 

또한 정난정(鄭蘭貞)의 죄(罪)는 주모(主母)를 독살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미 부인(夫人)에 오른 뒤 종기(腫氣)가 등에 났었는데, 의원 송윤덕(宋潤德)으로 하여금 침(鍼)으로 이를 째게 하였다. 송윤덕(宋潤德)은 세침(細鍼)을 가지고 치료하면서 여러 번 그 종기(腫氣) 난 곳을 빨아주어 '정난정'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이로부터 '송윤덕'이 거침없이 드나드니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 그런데도 윤원형만 이 사실을 모르고 송윤덕을 보기를 아들처럼 하였다. 사람들은 '윤원형'이 속고 있는 것을 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출처: 정보- 책:조선노비열전조선노비열전/ 자료수집: http://cafe.daum.net/kskochon<발췌>


[보충 자료]

정난정은 정말 본처를 독살했을까?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드라마 '옥중화'에서 악역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2001년에 방영된 '여인천하'에서도 범상치 않은 악의 기운을 뿜었지만 이번에는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팜므파탈의 치명적 매력으로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휘어잡는가 하면, 권모술수에 능하여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고 눈 밖에 난 사람은 거리낌없이 죽인다.

정난정은 양반 아버지와 관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은 본처의 자식(적자)과 첩실 소생(서자)을 엄격히 구분하고 차별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양인도 아닌 종의 신분인 탓에 그녀 또한 천대받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정난정은 신분의 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여인의 삶을 살펴보면 오히려 신분질서에 도전하는 '발칙한' 행적이 두드러진다.

정난정이 기생이 되어 윤원형의 첩으로 들어앉은 것은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일단 발판을 마련하자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능이 빛을 발하였다. 정난정은 시전상인들과 결탁해 재산을 늘리는 수완을 발휘했는데 독점판매, 폭리 등 부정축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업은 권세를 등에 업고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덕분에 정난정은 남편 윤원형뿐만 아니라 시누이 문정왕후의 신임까지 얻었다. 권력의 기반인 외척세력을 키우려면 큰돈이 들었을 텐데 이 골치아픈 문제를 첩이 해결해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녀는 차츰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며 문정왕후의 참모 노릇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등용하여 불교를 부흥시킬 때 산파역을 한 이도 정난정이었다.

1551년 윤원형의 본부인 김씨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공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2년 후에는 궁궐 밖 여인에게 최고의 영예였던 정경부인의 직첩을 받기도 했다. 천첩이 본처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공주에 준하는 지위를 얻게 된 셈이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시대 신분질서에 비춰볼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신분의 벽을 넘어 부귀영화를 손에 넣은 정난정은 그러나 자신이 천대받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권신 윤원형이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철폐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무래도 그녀의 입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신분질서가 흔들리자 외척세력의 위세에 눌려 숨죽이고 있던 사림이 조용히 칼을 갈기 시작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외척세력이 밀려나고 사림의 발언권이 커졌다. 유자로서 신분질서를 중시하는 그들이 정난정을 가만둘 리 없었다. 사헌부와 사간원 등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그녀의 정경부인 직첩을 회수하고 본처와 첩실의 분별을 엄중히 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정난정을 잘 아는 명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법을 관장하는 형조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이미 죽은 본부인 김씨의 모친이 정난정을 고소했다는 것이다. 소장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쫓겨난 딸이 굶주려서 정난정에게 먹을 것을 구했는데 정난정이 여종 구슬을 시켜 독이 든 음식을 내주는 바람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든 뜨거운 스캔들이었다. 세상에 첩실이 본처를 독살하다니….

의금부에 끌려간 여종 구슬 등은 처참한 고문을 받다가 정난정이 독살을 사주했다는 진술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신하들은 "사람의 도리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기강을 문란케 한 중대범죄"라며 '진범' 정난정을 잡아들이라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명종은 고개를 저었다. "정난정이 쫓겨난 본부인을 구태여 죽일 이유가 없고, (김씨의 모친이) 원한을 품고 지어냈을 수도 있다"는 반론이었다.

마녀사냥에 몰린 정난정은 얼마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남편 윤원형도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난정의 죽음을 알린 실록 기사(1565년 11월 13일자)는 본처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못 박는 한편 집에 드나들던 의원과의 성적 추문까지 보탰다. 역사기록의 붓을 쥔 사림은 신분질서를 어지럽힌 이 여인을 지저분한 악녀로 낙인찍고자 했다.

[출처: 머니투데이 -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42 - 정난정 : 신분의 벽 넘으려다 희대의 악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