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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대 도망노비>이만강

Bawoo 2015. 7. 1. 22:12

조선조 숙종(肅宗)시대!
 충청도 전의현(全義縣)에 이만강(李萬江)이라는 사노(私奴)가 있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마을 선비로 부터 글을 배웠다.
 얼마나 총명(聰明)한지 열세살 때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줄줄 외웠다.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헌헌장부(軒軒丈夫)로 성장했다.
 
 계급사회!
 당시는 양반(兩班), 중인(中人), 상민(常民), 천인(賤人)으로 철저하게 신분(身分)이 구분되어 있었다.
 양반(兩班)의 후예가 아니면 과거(科擧)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제도(制度)가 이러하니 천인(賤人)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노(私奴) 만강(萬江)이가 무슨 수로 과거를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강(萬江)은 포기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천인(賤人)의 신분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자손대대로 떳떳하게 살아보자.'
 이렇게 다짐하고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백방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신년(戊申年) 난(亂)때 멸문지화를 당한 최진사(崔進士)댁의 외동딸을 알게 되었다.
 당시 20세의 최규수(崔閨秀)는 이웃마을에서 몸종(奴婢) 한명과 외롭게 살고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를 내가 도와주어야 겠다."
 "우리 외가(外家)가 영월엄씨(寧越嚴氏)다. 마침 외가댁의 가첩(家牒)이 우리집에 있다."
 "이것만 있으면 양반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이걸 가지고 떠나거라."
 규수는 가첩과 상당량의 재물(財物)을 만강에게 주었다.
 
 강원도 영월땅에 들어선 이만강!
 가첩의 적당한 곳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엄택주(嚴宅周)로 고쳤다.
 그리고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으로 행세하였다.
 
 엄흥도가 누구던가!
 지난 날, 세조(世祖)는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端宗)을 영월에서 죽여버렸다.
 이때, 후환(後患)이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준 이가 바로 엄흥도다.
 당시는 세조의 위세에 눌려 숨어 살았지만, 후일 충의(忠義)의 인물로 추앙받았으며, 영조(英祖)는 그에게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추서(追敍)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양반이 또 있을까?
 
 택주(宅周)는 그의 후예로서 영월 호장(戶長) 김씨(金氏)의 사위까지 되었다.
 그리고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10년을 공부했다.
 31세가 되던 1719년(숙종45)에 소과(小科)인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6년 뒤인

1725년(영조1)에는 꿈에도 그리던 대과(大科)인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니,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연일현감(延日縣監)으로 부임한 엄택주!
 그는 하늘을 나는듯 했다.
 그래서 정성(精誠)을 다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2년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고 하니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뿐이라면서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비목(碑木)을 세워서 그의 공덕(功德)을 기렸다.
 
 그 후,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푸니 명관(名官)이라는 소리를 듣다가 20여 년의 공직을 마감했다.
 그리고 봉화군(奉化郡) 어느 산골에 들어가 훈장(訓長)노릇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그도 고향이 그리웠다.
 어느 날,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최규수를 만났다.
 규수는 어느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가 사별(死別)한 후 혼자 살고 있었다.
 오, 얼마만이던가!
 그들은 회포(懷抱)를 풀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은 일에는 흔히 마(魔)가 들기 쉽다.'
 
 1745년(영조21), 전의현감의 동생인 사헌부 지평(持平) 홍중효(洪重孝)가 엄택주를 상소(上訴)하였다.
 영조(英祖)는 택주가 비록 양반사칭(兩班詐稱)의 중죄를 지었으나 공직자로서의 공덕(功德)을 감안하여

오히려 현감(縣監)으로 재 등용코자 하였다.
 
 그러나 기득권(旣得權)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양반(兩班)들의 극심한 반대로 인하여 흑산도(黑山島)로

귀양가게 되었고, 아울러 과거합격자 명단에 있는 엄택주(嚴宅周)라는 이름도 삭제되고 말았다.
 넘실대는 검은 파도를 타고 흑산도로 귀양가는 이만강!
 그는 피눈물을 쏟았다.

 

영조 실록 83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3월 11일(갑신) 1번째기사
내사복에 나가 이만강·이효식을 추국하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만강(李萬江)을 신문하고 다시 이효식(李孝植) 등을 추국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0책 83권 24장 B면
【영인본】 43책 565면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출처: 정보- "책" 조선노비열전/ 자료수집-"카페" 안동 김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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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택주의 일은 인간 윤리의 문제이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 윤리를 제일로 삼는데, 사람이 사람 노릇하는 것은 삼강오륜의 윤리가 있기 때문이다. .... 이는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니, 그대들 의견이 내 뜻과 같다. 엄히 처벌한 후, 흑산도로 유배해 영원히 노비로 삼고, 대과(大科)·소과(小科)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라.”([영조실록] 61권, 1745년(영조 21) 5월 26일)

 

엄택주는 누구인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임금이 크게 노하며 과거에 합격했던 기록을 삭제하고 동시에 노비로 삼아 흑산도로 유배를 명했던 것일까? 엄택주가 신분을 속여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까지 올랐지만, 원래 신분이 미천하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였다. 엄택주는 누구일까?

 

[국조문과방목]과 [사마방목]에 따르면, 엄택주의 자는 관보(觀甫)이며 본관은 영월이다. 영월엄씨는 충의지사로 이름난 엄흥도로 인해 오늘날까지 유명해진 성씨이다. 엄택주는 1689년 엄완((嚴?)에게서 태어났고, 조부는 엄효, 외조부는 신후종이다. 과거에 응시할 때 제출한 기록만 보면 완벽한 양반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국조문과방목에 추가로 기록된 바에 따르면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고 전의현의 관청의 노비였다. 그 기록을 더 살펴보면, 그가 이름을 엄택주로 바꾸고 1719년(숙종 45)에 증광 사마시에서 3등으로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리고 6년 후인 1725년(영조 1) 증광 문과에서 병과 7위로 합격하여 판관이 되었지만 나중에 발각되어 노비가 되고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엄택주의 신분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엄택주의 출생과 과거에 급제하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야사를 모아 놓은 [동소만록]에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국조방목 및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과 같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엄택주는 종이었다. 실제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만강으로 전의현 아전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노비였다. 어려서 재능이 있었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선비 신후삼에게 글을 배웠다. 글재주는 늘던 어느 날 저녁, 그는 신후삼에게 “어느 마을에 어떤 집에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살고 있는 처자가 있는데 그 처자와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집은 화를 입어 모두 죽고 다만 처자만 한 명 있었는데 혼기를 놓쳐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후삼은 그 처자와 고향이 같아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신후삼은 크게 노하여 ‘천한 주제에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이제부터 내 집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꾸짖었다. 만강은 도망하여 동쪽을 떠돌다가 영월에 이르러 정착하고 호장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엄흥도(嚴興道)의 후예로 행세하며, 이름도 엄택주로 고쳤다. 엄씨 행세를 한 것은 엄씨가 충의가 있는 성씨로 이름이 있었지만 가문이 번창하지 않아 신분을 감추기에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이 후 용문사에서 10년을 공부한 후 나와서 고위 관리의 자제들과 사귀면서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상은 야사의 기록이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황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

 

마침내 1719년에 증광 생원시에, 1725년에 증광 문과에 전체 15위로 급제하였다. 엄택주와 같이 급제한 인원이 44명이니 그의 성적은 꽤 뛰어났던 것 같다. 그는 급제 후 연일 현감이 되었고, 1740년에는 제주에서 판관 벼슬을 한 것으로 보아 15년 이상 여러 벼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소만록에 따르면 엄택주는 벼슬을 그만둔 후 태백산 기슭 궁벽한 곳에 거주하며 향촌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결국은 발각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엄택주가 흑산도로 귀양간지 1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1746년 5월, 지평 이진의(李鎭儀)가 올린 상소가 올라왔다. “죄인 이만강(李萬江)이 멋대로 섬을 떠나 서울을 왕래한 일은 매우 무엄한 짓이니, 당연히 체포하여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엄택주가 흑산도에서 몰래 나왔다가 발각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울까지 왔다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배형은 중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따라서 유배지에서 무단으로 이탈한다는 것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왜 육지로 나왔을까? 1745년에 엄택주의 신분이 밝혀질 때부터 그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을 흔들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다른 연줄이나 기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잘 무마되어 엄택주는 다시 흑산도로 유배갔다. 이후 엄택주는 잠시 역사에서 사라졌다.

 

9년이 흐른, 1755년 1월, 윤지(尹志, 1688∼1755) 등이 전라도 나주 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벽서를 붙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모자로 밝혀진 윤지와 이하징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런데 사건 조사 과정에 엄택주가 다시 등장하였다. 귀양살이하면서 윤지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포착된 것이다. 엄택주는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실록에는 “이만강”이란 이름으로 5차례 이상 고문을 받은 기사가 등장한다.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엄택주는 고문을 못 이겨 자백한 것인지 아니면 사실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글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받아 멀리 섬으로 귀양을 갔었기 때문에 원한이 마음속에 가득하였고 이로 인해 윤지 등과 어울렸다”고 진술하였다. 이제 엄택주가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죄인 이만강이 물고(物故)되었다”고 한다. 즉 고문을 받다가 죽은 것이다. 

 

이만강에서 엄택주로, 엄택주에서 다시 이만강으로 신분이 바뀌는 과정은 신분제라는 높은 벽을 넘으려는 한 인간의 상승과 몰락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