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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문신, 천문학자/양성 보유자 사방지와 통정한 이씨의 아버지>이순지(李純之)

Bawoo 2015. 7. 1. 22:54

이순지(李純之)

 

출생 1406년
조선
사망 1465년 (60세)
조선
국적 조선(朝鮮)
별칭 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
학력 1425년 생원시에 합격
1427년 친시문과에 을과 급제
직업 문신, 천문학자
활동 기간 1425년 ~ 1465년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신씨 부인
부모 아버지 이맹상(李孟常)
친척 할아버지 이한(李澣)
증조부 이춘부(李春富)
형 이효지(李孝之)
형 이전지(李全之)
형 이겸지(李謙之)
외조부 유자(柳滋)
장인 신한(申僴)

 

이순지(李純之, 1406년 ~ 1465년)는 조선 초기의 문신·천문학자이다.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자(字)는 성보(誠甫)이며,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다.

 

생애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산학·천문·음양·풍수 등에 능하였다. 1425년(세종 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 8년) 동궁행수로 있다가 1427년(세종 9년) 친시문과에 을과 급제하였고, 한양의 북극고도(즉 위도)가 무엇이냐는 세종대왕의 질문에 관료 중에서 유일하게 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종의 신임을 받아 천문역산(天文曆算) 전문가로 활약했다.

 

1433년부터 조선의 천문역법을 정비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이순지를 중심으로 역법(曆法)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1442년에 이르러 조선 독자의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의 편찬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그간 중국의 역법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독자적으로 천체 운행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승지(承旨),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관련 작품

TV 드라마

저서

*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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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지(李純之.?∼1465(세조 11)

    조선 세종(世宗) 때 수학자(數學者).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靜平), 본관은 양성(陽城).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세종 9) 문과에 급제, 어명으로 산법(算法)을 공부한 후 의상(儀象)을 교정(校正)하고, 간의규표(簡儀圭表)태평현주(太平懸珠)앙부(仰釜)흠경각(欽敬閣)의 물시계 등을 만들었으며, 1465(세조 11)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성미가 꼼꼼하여 산학천문음양풍수의 학문에 밝았으며, 김담(金淡)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했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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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의 문신·천문학자.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靜平).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세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교리·봉상시판관·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승정원좌부승지 등을 거쳐 1465(세조 11)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3책을 펴내었다.

    ,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1책을 완성하였다.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算學천문·음양·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이순지 선생 묘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4. 묘는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는데, 부인 영월 신씨와 합장한 묘로, 왼쪽은 이순지의 묘이고 오른쪽은 부인의 묘이다. 한 봉분 앞에 각각 묘비와 상석(床石)이 따로 놓여 있다. 묘비는 500여년의 풍상을 겪어 부식되어 단촐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신도비는 근래에 건립해 큰길가에 세워져 있는데 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갖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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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조선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작성자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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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이 아낀 최고의 천문학자

    벌써 새해 달력을 주고받는 시기가 되었다. 요즘엔 달력이 일정표로서의 성격이 강하지만, 옛날만 해도 달력은 한 왕조의 안위와 백성들의 한 해 농사가 달린 매우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옛날 왕조 국가에서는 새해에 정확한 달력을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것이 제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만 해도 대체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법을 들여와 국내에서 사용하는 달력을 만들었다. 즉, 중국의 수시력과 대통력을 수입해 우리나라 달력을 만들었던 것이다. 수시력은 원나라 세조가 만든 역법으로서 가장 정밀하고 정확한 달력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대통력은 명나라에서 수시력을 차용해 만든 역법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여온 역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중국의 위도와 경도는 우리나라와 다르므로 절기 및 일출·몰 시각에서 약간의 오차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 이에 따라 세종대왕 때는 신년 하례식 날에 예보된 일식이 두 차례나 잘못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같은 오보가 일식을 예보하는 서운관 관리의 실수가 아니라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일어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세종은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 제작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1442년(세종 24)에 완성된 것이 바로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다. 칠정산이란 해와 달,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칠정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방법을 뜻한다. 즉, 7개의 움직이는 별의 위치를 파악해 절기는 물론이고 일식과 월식 등을 예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내외편'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내외편’ ⓒ 연합뉴스

    칠정산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통력을 한양의 위도에 맞게 수정·보완한 것이며, 칠정산외편은 아랍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원나라에서 편찬한 회회력을 조선에 맞게 고친 것이다.

    특히 칠정산외편은 한 일본 과학사학자가 “한문으로 엮어진 이슬람 천문 역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으로 평가할 만큼 정교한 계산 체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이 1년의 기점을 동지에 둔 것과 달리 춘분에 두었으며, 일식과 월식 계산에서도 외편이 내편보다 정확하다.

    칠정산내외편이 발표됨으로써 그 당시 세계에서 일식과 월식을 제대로 예보할 수 있는 천문학 수준을 가진 나라에 중국과 아랍에 이어 조선도 포함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우리나라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가 바로 김담과 함께 칠정산외편을 이순지(李純之)였다. 칠정산내편은 정인지, 정흠지, 정초 등이 편찬했다.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

    이순지는 1406년 아버지 이맹상과 어머니 문화 유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자는 성보(誠甫)이다. 부친 이맹상은 강릉판관, 사헌부 장령, 형조참의, 원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공조참의, 호조참의 등의 관직을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이순지는 다섯 살 때까지 말을 못하고 먹지 못하여 항상 어머니가 포대기에 업고 다닐 만큼 어릴 때 몸이 약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잘 성장하여 21세 때인 1427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서 외교 문서 관련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 우리나라의 독자적 역법 체계를 추진하던 세종대왕에 의해 선발돼, 다른 문신들과 함께 역법에 필요한 산법(算法)을 익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세종대왕에 의해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쳤다.

    그가 특히 세종의 눈에 들게 된 계기는 ‘한양의 북극 출지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해 보고한 사건’ 덕분이었다. 그가 추산한 결과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계산해 보고한 사건인데, 처음엔 세종도 그 같은 보고에 대해 의심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자가 역서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북극에서 나온 땅이 38도 강(强)입니다”라고 하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며 이순지에게 1431년부터 천문 관측과 역법에 관한 일을 맡겼던 것이다.

    직접 연구에 참여해 많은 업적 남겨

    이순지는 고위관료로서 지휘, 감독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천문역산 연구 활동에 참여해 평생 동안 깊이 있는 업적을 남겼다. 1445년에는 역대 천문역산의 역사를 정리한 ‘제가역상집’을 펴냈으며, 그리고 천문학 교과서와도 같은 ‘천문유초’, ‘교식추보법’이 그에 의해 편찬됐다.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은 중국의 여러 천문학자들의 이론들을 천문, 역산, 천문기구, 시계 등으로 나누어 정리·소개한 책으로서, 핵심을 취해 주제별로 분류함으로써 참고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당시의 천문학개론서라 할 수 있는 ‘천문유초(天文類抄)’는 다양한 천문 및 기상현상을 다루면서 천문기상 현상과 국가의 치란(治亂) 및 재변의 상응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가 김석제와 함께 편찬한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은 일식과 월식의 계산법을 알기 쉽게 해설해놓은 책이다. 이 책은 계산 공식과 함께 실제 계산 사례가 실려 있어 나중에 관상감의 기술직을 뽑기 위해 시행했던 잡과시험의 시험교재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는 풍수에도 밝아 세조의 명에 의해 ‘기정도보속편’이라는 책을 1459년에 펴냈다. 풍수지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464년(세조 10)에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교통로였던 천천현 고갯길의 존폐 논쟁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종 때의 풍수가 최양선이 태종을 모신 헌릉의 능선 지맥을 이 고갯길이 끊고 있다며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집현전에서 반대하면서 논쟁이 이어졌다. 그 후 세조 때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지자 세조는 이순지의 의견을 좇아서 고갯길을 닫지 않고 길에 잔돌을 까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이순지는 당시 국가의 주요 수입이었던 논과 밭에서 세금을 거두는 문제의 기본이 되는 ‘양전사업’에도 관여했다. 그는 1443년(세종 25) 김담,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고 경기도 안산에 가서 양전사업 문제에 대해 실제조사를 했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토지 측량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기 위해 국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토지 측량을 위한 수학은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세종은 수학에 대한 관심이 커서 수학 진흥책에 대해 고민했다.

    “산학(算學)은 비록 술수라 하겠지만 국가의 긴요한 사무이므로, 역대로 내려오면서 모두 폐하지 않았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도 비록 이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근일에 전품을 고쳐 측량할 때에 만일 이순지와 김담의 무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쉽게 측량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산학을 예습하게 하려면 그 방책이 어디에 있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1443년 11월 17일자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위와 같이 산학을 공부하게 할 방책을 세우기 위해 승정원에 이르고 있는데, 이순지가 산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순지는 정인지, 김담 등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제방을 쌓는 일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순지가 중국의 여러 천문학자들의 이론을 정리해 소개한 '제가역상집'

    이순지가 중국의 여러 천문학자들의 이론을 정리해 소개한 ‘제가역상집’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이순지는 간의대에서 수년간 천문 관측 임무를 맡아 하기도 했다. 간의대는 1434년(세종 16)에 건립한 왕립 천문대로서, 각종 천문관측기기들을 설치한 조선 최초의 천문 관측대였다. 세종대왕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달력인 칠정산내외편을 만들기 위해 기초 작업으로 진행한 것이 바로 천문을 직접 관측하는 간의대 사업이었다.

    때문에 세종대왕은 간의대 사업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지극하게 정성을 쏟았는데, 모친상을 당한 이순지가 간의대의 천문 관측 업무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말릴 만큼 그를 신뢰했다. 하지만 간의대는 자주적인 천문 관측을 허락하지 않는 명나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 북쪽 구석으로 옮겨진 후 결국 1915년 일본 총독부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이순지는 세종 때 만들어져 조선시대 활자의 기본이 된 갑인자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추원지사 이천과 직제학 김돈, 장영실, 김빈,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이 명나라 초기 판본을 기초로 삼아 2개월 동안 20여 만 자의 글자를 주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각종 과학기기 제작에 참여해

    갑인자는 자판의 빈틈을 납을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를 이용함으로써 글자가 선명하고 아름답다는 장점과 함께 활자의 모양이 바르고 글자의 크기가 고르게 조립되어 있어 기존의 활자보다 배 이상의 생산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갑인자는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 처음 만들어진 활자본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이후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에 걸쳐 개조돼 다시 만들어졌다.

    그밖에도 이순지는 규표와 앙부일구, 보루각기, 흠경각기 등 각종 과학기기 제작에 참여했다. 또한 앞에서 언급된 저서 외에도 ‘사여전도통궤’, ‘중수대명력’, ‘태양통궤’, ‘태음통궤’, ‘오성통궤’, ‘선덕십년월오성능범’, ‘경오원력’, ‘선택요략’ 등의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이순지가 마냥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러 가지 사건에 얽혀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임금들이 나서 그의 편을 들면서 좋게 마무리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447년(세종 29)에 일어난 인사 청탁 사건이다.

    우부승지 김유양의 아들 김사창이 승진하는 데 김유양으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아 이순지를 포함한 혐의자들이 사헌부의 조사를 받고 의금부에 갇혀 고문을 당한 것. 그때 의금부에서는 관련자 모두를 처형하겠다고 했으나, 세종대왕이 나서서 파면으로 마무리 짓도록 했다.

    세조 때인 1462년에는 더 괴이한 일에 이순지가 얽혀 들었다. 김구석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일찍 죽어 홀로 된 그의 딸이 여종인 사방지와 기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용이 임금에게 보고된 것.

    산학 및 천문, 음양, 풍수에 매우 밝아

    세조가 승정원에 명을 내려 조사케 한 결과 이순지의 딸인 이씨 부인과 사방지가 10년 가까이 내연 관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방지가 양성인간이었다는 점이었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 등 겉모습은 여자임이 틀림없었지만, 옷을 벗겨보니 남자의 성기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어져 세조에게 국문을 하도록 수차례나 청했다. 하지만 세조는 사방지가 정상인이 아닌 병자라는 이유를 대며 끝내 벌하지 않고, 이씨 부인의 아버지인 이순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했다. 세종대왕이 아끼던 공신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집안 일로 처리하게 한 것이다.

    그 후 이순지는 1465년(세조 11)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세조실록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순지의 성품은 정교하며, 산학·천문·음양·풍수에 매우 밝았다. (중략) 정평(靖平)이라고 시호하니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문 것을 정(靖)이라 하고 집사에 절제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즉, 그는 과묵하면서도 늘 겸손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모든 일에서 절제가 있던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칠정산법’은 그 후로도 쭉 사용되다가 효종 때 이르러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전해준 서양천문학을 채용한 ‘시헌력법’으로 바뀌었다. 그 역법은 천체 현상의 계산에서 다른 역법보다 더 정확해 채택되었으며, 그 후 250년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896년 고종 때 우리나라는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시헌력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출처:사이언스 타임스 이성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