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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奴婢)/노비(奴婢)제도

Bawoo 2015. 7. 4. 22:10

노비(奴婢)는 한국의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던 천민 사회 계급을 가리킨다. 남의 집이나 나라에 몸이 매이어 대대로 천역에 종사하던 사람으로서 흔히 이라고도 불렀으며,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가리켰다.

노비들의 삶[편집]

노비는 성씨(姓氏)를 가지지 못하고 이름만 있으며 외모도 양인과는 달리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 흔히 노비를 창적이라 부른 것은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1]

노비는 상전이 모반 음모가 아닌 이상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으며, 상전을 관에 고해 바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강상을 짓밟는 것으로 간주되어 교살에 해당하는 중죄로 규정했다.[2]

유형원(柳馨遠)은 “중국에 비록 노비가 있으나 모두 범죄자로 몰입(沒入)된 자이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남에게 고용된 자뿐이며, 그 족계에 의해 대대로 노비로 삼는 법은 없었다. 죄도 없는 자를 노비로 삼는 법은 옛날에도 없었고, 죄를 지어 노비가 된 자라도 후사에게까지 형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3]

또한 이익(李瀷)도 “노비라는 이름은 은나라시대부터 나타난 것인데, 기자(箕子)는 그 제도를 본떠서 만든 것이나 은나라시대에도 세전의 규정은 없었다. ……(중략)……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 없었던 것으로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百世)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그 부당함을 들어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4]

노비구가장조(奴婢毆家長條)에 이르기를, '만약 노비가 주인의 시키는 명령을 위범(違犯)하였으므로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결행(決行)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든 것과 과실치사한 자는 모두 논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5]

노비의 생산[편집]

반역이나 모반에 연루된 경우 노비가 된다.

압량위천[편집]

“이미 속량한 노비에게 감사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빼앗은 경우와 조상 선대에서 속량해 준 노비를 그 자손 대에 이르러 억지로 빼앗은 경우는 모두 ‘양민을 억눌러 천민으로 삼은 죄(壓良爲賤)’로 다스린다고 <속대전>에 규정했다.

자녀[편집]

일천즉천에 의해 한쪽 부모가 노비일 경우 자녀도 노비가 되었다. 고려시대 천자수모법에 의해 노비끼리 혼인한 경우 어머니의 주인이 자녀의 소유권을 가졌다. 조선 후기 노비종모법에 의해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아버지 신분과 무관하게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자녀도 양인이 되었고, 어머니가 노비라면 자녀도 노비가 되었다.

면천 방법[편집]

노비가 양인으로 면천하는 방법 중에는 국가의 기득권을 위협할 만한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활약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일생에 여러번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노비가 면천할 수 있는 방법은 막혀 있었던 셈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속오군'에 지원하는 방법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신설된 '속오군'은 병농일치제에 따라 평상시에는 농사와 무예훈련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소집되어 국가 방어에 동원되는 체제로서 부자 2대에 걸쳐 '평생동안' 군대에 복무해야 양인으로 면천종량될 수 있었다. 다만 이들에게는 국가의 물질적 급여는 없었고, 훈련 경비도 군인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6][7] 숙종 7년에는 그 수가 20만에 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비 인구[편집]

이 무렵(1484) 전국 호구는 100만 호에 340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어 성종 때의 공노비 35만여 구는 전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된다. 또 이 때 한명회(韓明澮)는 공천 가운데 미추쇄자(未推刷者)가 10여만 구 있고, 지금 공사천구(公私賤口) 중 도망해 숨어사는 자가 100만 구라고 했다.[8]

한영국은 1609년의 울산부 호적에서 인구의 47%가 노비임을 확인하였다. 노진영은 1606년의 산음현 호적에서 41.%, 1630년의 동 호적에서 34.5%, 한기범은 1606년의 단성현 호적에서 무려 64.4%에 달하는 비중을 확인하였다. 일찍이 사방박이 1690년의 대구부 호적을 통해 확인한 노비의 비중은 44.3%이다.[9]

노비의 도망률에 관한 정보는 앞서 소개한 한명회의 이야기가 최초이다. 1484년 당시 그는 공노비 총 45만 가운데 10만, 22%가 도망 중이라고 하였다. 1528년 경상도 안동부 주촌의 이씨 양반가의 호적에서 노비는 총 51명, 그 가운데 1/3인 17명이 도망 중이었다. 1606년 단성현에서 노비의 도망률은 무려 51%이다.[10] 노비들이 주인의 수탈 혹은 학대를 피해 도망을 많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망 노비에 관한 형벌

혹사에 못 견디어 도망했을 경우, 1049년(문종 3)에 제정된 법에 따라 3회 도망했을 때 자자형(刺字刑)을 가해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이와 같이 사노비의 주인에 대한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경국대전>에 이르기를, 도망노비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와 이를 알고도 소관인(所管人)에게 알리지 않은 자와 이웃은 제서위율(制書違律 : 법을 어기는 일)로 논죄하며, 만약 도망해 중(승려)이 된 자는 장 100을 때린 뒤 주변 작은 읍의 노비로 삼고, 스승 되는 중은 제서위율로 논죄한 뒤 환속시켜 충역한다.

도망한 노비를 고하면 매 4구 중 1구는 상으로 준다. 고역을 피해 일이 적은 곳으로 가려 한 자와 관리로서 청탁을 받아 옮기도록 협조한 자는 장 100을 때리고 도(徒) 3년에 처한다. 선상하지 않은 자는 장 80을 때리고 추후에 입역하도록 한다.

 

노비의 신분 상승 사례[편집]

노비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출세한 경우도 있다.

고려 고종 45년 최의가 집안 노비인 이공주를 낭장으로 삼았다. 옛 법제에 노비는 비록 큰 공이 있어도 관직을 제수하지는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최항이 집정해서는 안심을 얻고자 집안 노비인 '이공주'와 '최양백', '김인준'을 별장으로 삼았고, 섭장수는 교위로 삼았다.

정충신[편집]

정충신(鄭忠信)은 전라도 나주에서 아전과 계집종 사이의 노비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법규상 어머니가 종이면 아들도 종의 신분을 세습받았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을 따라 종군하다가, 16세의 나이에 왜군의 포위를 뚫고 의주까지 가서 권율의 장계를 선조임금에게 올렸다. 이러한 의기를 기려 백사 이항복이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선조 임금은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1621년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하고, 1623년 안주목사 겸 바어사가 되었다.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천시받는 노비의 신분에서 만인의 추앙을 받는 위인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12]

노비의 이름

성씨와 족보는 고려시대 이후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한국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13]

다만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어머니가 노비라면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기 때문에 성씨를 가진 경우라도 첩의 자식인 서얼은 모계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한편 조선후기 신분 해방 전까지 인구 절반은 성씨 없이 지냈다.[14]

1909년에 작성된 『민적통계표』에 의하면 실제 양반의 숫자는 양반이 제일 많은 서울에서 조차 2.1%에 불과할 뿐이다.[15]

 

조선 후기 신분제가 문란해지면서 상민과 노비들이 부역을 면제받기 위해 족보를 위조하는 일이 허다했다. 고려 초기에는 가계를 기록한 보첩이 없었다. 따라서 향리에서 힘을 갖게 된 집안이나 신흥 문벌들은 자신의 조상을 얼마든지 바꾸고 이어붙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 예로, 17세기 말 경상도에 살았던 노비의 후손들은 다수가 김해 김씨로 편입되기도 했다.[16]

 

1894년 갑오개혁으로 종래의 신분제가 없어져 성씨의 일반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새 '민적법'의 시행으로 누구나 모두다 법적으로 성과 본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성이 없던 사람들이 새 성을 갖게 되자 호적담당 관리나 경찰이 임의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고, 노비의 경우는 종전 주인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14] 그 결과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쉬운 인구가 많은 흔한 성씨로 편입되면서, 특정 성씨에 인구가 치중되는 결과를 낳았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