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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백마고지 전투

Bawoo 2015. 7. 25. 21:03

백마고지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Battle of White Horse.jpg
날짜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장소 강원도 철원군 서북방 395 고지(백마 고지)
결과 대한민국 국군미국군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프랑스 프랑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김종오 제9사단장 소장
대한민국 임익순 제30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영선 제1대대장
대한민국 김봉철 제29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이대철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경진†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주일 제28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최창용 제3대대 중령
대한민국 전부일 제51보병연대장 대령
중화인민공화국 장융후이
병력
대한민국 국군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 명
대한민국 국군 제51,52,53 포병대대
대한민국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국군 제213자주포병대대
미국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국군 제73전차대대
중화인민지원군 제38군단 6개 연대 지원부대병력
총병력 4만 4056명
각종포 55문
피해 규모
3428명 사상
(중국측 추측: 9400 명 사상)
6700명 사상
(남한측 추측: 14322 명 사상
8234명 전사
5097명 포로
57명 투항)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배경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 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 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 과정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을 395 고지로 맹렬히 돌격해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군대로 3차례나 전투를 치뤄 중공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 고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의 걸친 전투 끝에 395 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 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 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 이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도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1929년 1월~1952년 10월)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인물들도 탄생하였다.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으며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을 사상했는데 특히 이번 전투에서 잃은 군대가 정예병이라 차후 신병이 보충되더라도 숙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갤러리

같이 보기

참고 자료

  • 온창일 외, <<6.25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외부 링크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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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자료 볼 수 있는 곳 - http://blog.daum.net/whrtk123/1795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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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간 24번 뺏고 빼앗겨… “화력 넘은 정신력의 승리”

밴 플리트 장군의 지시로 미 육군이 작성한 백마고지 전투 사후검토보고서 표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에서 치른 전투 중 ‘백마고지(395m)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이 전투에 대한 연구를 미 육군에 지시하고 미 제9군단 작전처는 사후검토보고서(AAR)를 작성해 전 미군 부대에 배포했다. 미군이 치른 전투가 아닌 한국군이 승리한 백마고지 전투를 밴 플리트 장군이 눈여겨봤던 것은 승리는 화력이 아닌 정신력이 이끈다는 교훈을 백마고지 전투가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강원 철원군 북쪽의 요충지를 놓고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치른 전투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판문점에서 열린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었다.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지만 결국 우리 군이 방어에 성공한다.

중공군은 6·25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저항해 북한을 지원했다는 뜻)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철원평야 지대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서울 및 후방에서 이어지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가 통과하는 곳이었다. 아군과 적군 모두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공군은 10월 6일 저녁 이곳에서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 공격과 동시에 아군의 후방 쪽에 있던 봉래호의 둑을 파괴해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국군의 증원과 군수 지원을 차단한 것으로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을 몰살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철원평야 일대는 적에게 절대 뺏겨서는 안 되는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9사단 장병들은 총알이 떨어지면 적을 물어뜯어서라도 물리쳤다. 적 기관총에 전우들이 쓰러지면 자신의 몸에 폭약을 두르고 적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3416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은 무려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밴 플리트 장군은 미군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라고 판단했다. 그랬던 그에게 백마고지 전투는 더없는 모범사례였다. 미 육군의 사후검토보고서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이 보여줬던 ‘사전불퇴(死戰不退)’, 즉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정신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는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은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베트남전 파병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베트남으로 이동해 닌호아 뚜이호아 깜라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