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사건, 제도

[식민사학의 뿌리]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Bawoo 2015. 10. 15. 22:31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총독부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기관으로,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입증하고 한국인의 민족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1937년까지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1].

조선사의 편찬과 자료 수집을 주로 하였으며,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국사를 왜곡하여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는 활동을 하였다.<위키백과>

----------------------------------------------------------------------------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 12. 4,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로서 사업의 종류와 원칙은 이때 정해졌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는 이완용(李完用)·박영효(朴泳孝)·권중현(權重顯) 등이 임명되었다. 실제업무는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쿠로이타[黑板勝美]가 총괄했으며, 만선사관의 대표자인 이나바[稻葉岩吉]가 편찬업무를 주관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주요사업은 조선사의 편찬과 이를 위한 조선사료의 수집이었다. 작업순서는 사료수집, 편찬, 기고, 초고 정리 등으로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조선사의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편년사로 한다. ② 편찬의 시대구분은 삼국 이전,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전기·중기·후기(~갑오개혁)의 7편으로 한다. ③ 편찬의 문체는 일문(日文)으로 한다. ④ 사료의 수집범위는 인멸이 우려되어 갑오개혁 이후까지 한다는 것 등이었다.

 

심의과정에서 정만조(鄭萬朝)·이능화(李能和)·어윤적(魚允迪) 등이 단군(檀君)·기자(箕子) 등 건국신화는 민족정신발휘상 중요하며, 삼국 이전을 고대조선으로 하고 신화는 첫부분에 넣어야 할 것과, 강문(綱文)에 우리 글을 넣을 것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인 위원들의 독단으로 원안 그대로 결정되었다.

사료수집은 조선사편찬위원회 직원만으로는 어려워 1923년 5월 도지사회의에서 조선사료보존에 관한 협의회를 열고 '조선사편찬에 따른 고문기·문서 등 보존에 관한 건'이라는 훈시를 내려 관민이 일치하여 대대적으로 사료를 수집할 것을 독촉했다. 이것은 일제가 '학술적이고 공평한' 조선사의 편찬과 사료의 인멸 방지를 구실로 한국의 사료를 탈취하여 한국인의 사료 접촉을 막는 작업이었으며, 나아가 이 사료를 식민사관에 입각해 취사선택하여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 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를 중심으로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새로운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이완용·박영효·권중현·쿠로이타·핫도리[服部宇之吉]·나이토[內藤虎次郞], 위원에 이마니시[今西龍]·이능화·어윤적·오다[小田省吾] 등, 간사에 이나바 등 3명, 수사관에 이나바·홍희(洪熹)·후지타[藤田亮策]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崔南善)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의 〈조선사〉 편찬작업은 앞서 정해진 골격을 대부분 유지하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시대구분에 있어서 앞서의 제1·2·3편을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 이후라고 정정하여 모두 6편으로 했다. 둘째, 한국인 위원이 강력히 주장한 건국전설(단군·기자 신화)을 편년적으로 본문에 넣는 것에는 반대했으나 제4편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에 단군기사를 넣도록 했다. 셋째, 편수의 범위와 관련하여 시대구분의 시작을 신라통일 이전, 마지막을 갑오개혁으로 하는 것과 발해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수렴되지 않았다. 넷째, 최남선이 지적한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개찬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사편찬작업에 참여한 일부 한국인 학자들은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하는 명분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 자기 의견을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사 편찬사업은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역사연구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것으로서, 서술의 중심은 한국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기보다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데 두어졌다(→ 일제강점기, 식민사관).

즉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왜곡을 자행했으며, '황국신민화'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1938년까지 〈조선사〉·〈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 등을 간행했다.<다음백과>

----------------------------------------------------------------------------

 

[조선사편수회] 조직 및 구성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박은식>의 민족역사서인 [한국통사]가 나오자 놀란 일제가 우리 역사 조작을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총독부가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기관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시켰던 기존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1937년까지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

조선사의 편찬과 자료 수집을 주로 하였으며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취조국을 두었고 그 역할은 1915년 중추원 편찬과, 1922년 조선총독부 직할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학자들이 자료 수집과 집필에 참여하였고 1938년 《조선사》 37권이 간행되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해산되었다.


[직제 및 직원 명단]

1.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 위원장>

위원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아리요시 주이치 (1922년 6월 15일 ~ 1924년 7월 4일)
시모오카 주지   (1924년 7월  4일 ~ 1925년 6월 8일)

< 고문>

이완용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박영효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권중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 위원>

나가노 모토키 (1922년 12월 28일 ~ 1924년 12월 1일)
오다 미키지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9일)
유맹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능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어윤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정만조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마니시 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이병소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윤영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현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2월  3일)

홍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상영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5일)
후카가와 덴지로 (1923년 4월 18일 ~ 1924년 6월 8일)
오쓰카 쓰네사부로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이진호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동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 서기>

가네코 마사키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가쓰라기 스에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용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 촉탁>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1일 ~ 1925년 6월 6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1일 ~ 1923년 7월 31일)
홍희            (1922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10일 ~ 1923년 8월 16일)
이능화          (1923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다카하시 다쿠지 (1924년  6월 30일 ~ 1925년 6월 6일)
세노 바유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구로이타 가쓰미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2. 조선사 편수회 (1925~1945)

< 회장>

회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시모오카 주지     (1925년 6월 6일 ~ 11월 22일)
유아사 구라헤이   (1925년 12월  3일 ~ 1927년 12월 23일)
이케가미 시로     (1927년 12월 23일 ~ 1929년  4월  4일)
고다마 히데오     (1929년  6월 22일 ~ 1931년  6월 19일)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년  6월 19일 ~ 1936년  8월  5일)
오노 로쿠이치로   (1936년  8월  5일 ~ )

< 고문>

이완용   (1925년 7월 20일 ~ 1926년 2월 12일)
권중현   (1925년 7월 20일 ~ 1934년 3월 19일)
박영효   (1925년 7월 20일 ~ 1939년)[5]

나이토 도라지로   (1925년 9월 22일 ~ 1934년 6월 26일)
핫토리 우노키치   (1925년 9월 22일 ~ )
구로이타 가쓰미   (1925년 9월 22일 ~ )
야마다 사부로     (1933년 9월 8일 ~ 1936년 1월 16일)
이윤용            (1934년 4월 17일 ~)
하야미 히로시     (1936년 3월 7일 ~ )

< 위원>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

< 촉탁위원>

최남선(崔南善)
이병도(1927년 이후)

<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수사관>

홍희(洪熹)
신석호(1938년부터)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후지타 료오사쿠(藤田亮策, 1926년)

< 수사관보>

신석호
이병도 (1925 ~ 1927년)

[간행 서적]
《조선사》 전 37권, 1938년
《조선자료총간》
《조선자료집진》

 

*출처: web1.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