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사건, 제도

조선의 노비제도

Bawoo 2015. 7. 4. 23:12

1. 노비의 종류


 조선시대의 노비는 국가적으로는 그때 그때의 입장에 따라서 종부법(從父法), 종천법(從賤法), 종모법(從母法)이 시행되었다. 대체로 국가에서는 노비가 지나치게 증가되어 조세수입이 감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종부법, 종모법 등을 시행했지만 일반사대부는 사유재산인 노비를 늘리기 위해서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을 고수하려 들었다.


 노비는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집단으로 흔히 종이라고 불리웠다. 노비는 고대로부터 존재하였다. 노비의 발생은 전쟁포로, 인신매매, 채무, 투탁, 귀화, 형벌, 재생산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재생산에 의한 노비가 주를 이루었고 생계유지를 위해 노비가 되는 투탁 등이 있었다. 노비는 국가나 개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조세부담이나 국방의 의무는 없었다. 다만 소유주를 위해 각종 신역과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조선에서 노비의 종류는 그들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 소속의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었다. 공노비는 중앙의 각 관아에 소속된 각사노비(各司奴婢)와 지방 관아에 소속된 각관 노비(各官奴婢)로 나눌 수 있으며, 다시 일정 기간 관아에 입역하는 선상노비(選上奴婢)와 노비 신공(身貢)을 바치는 납공노비(納貢奴婢)로 분류된다. 그리고 사노비는 거주 형태에 따라 솔거노비(率居奴婢), 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었다.


2. 공,사노비의 역부담


 공노비는 16~60세까지 국가에 대하여 1년에 6개월간 육체노동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후기로 갈수록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보다 면포를 납부하는 대립(代立)이 성행하였고, 국가는 필요한 노동력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고립제(雇立制)를 시행하였다. 노비노동력의 동원이 선상, 입역(立役)에서 고립제로 바뀐 것은 노비의 회피가 한 이유이지만 국가가 고립제의 시행을 더 장려했기 때문이다. 노비의 대부분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으므로 6개월간이나 노동력을 빼앗는다는 것은 노비가족의 농업생산력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노비의 가족의 경제생활이 무너진다는 것은 국가가 필요한 노동력을 제대로 이용할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따라 국가는 노동력보다 면포로 대납하게 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노비의 입장에서도 국가에 바칠 포(布)를 6개월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어서 경제적으로 유리하였다. 따라서 노비들은 국가가 양인의 부역노동으로 유지하던 각종 직종에 대거 고립함으로써 신분적인 상승과 경제적인 여건의 개선을 가능하게 하였다.


 사노비는 개인의 사적 소유물로 국가에서 통제할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초기에는 국가에 대한 권리도 의무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거듭된 전란과 군역 담당층인 양인의 감소로 사노비에게도 군역이 부과되었다. 사노비에게 본격적으로 군역이 부과된 것은 속오군이 설치된 뒤부터였다. 속오군은 양인도 있었으나 거의 노비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또한 속오군 외에도 중앙의 오군영과 봉수군(烽燧軍) 등 각종 군역에 사노비가 충당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노비의 군역도 다른 군종과 마찬가지로 점차 쌀과 포를 대신 납부하게 된다. 그런데 사노비는 개인의 사유물로 이미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태에서 또다시 국가에 군역을 바쳐야 했으므로 노비주나 노비 자신에게 부당한 것이었다.


3. 결혼과 양육


 조선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사회로서 노비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노비의 신분이 시기별, 지역적으로 그 대우가 차이나지만 대체적으로 노비라는 신분은 일천즉천이라는 악법에 의해 자손대대로 이어졌다. 물론 여자노비의 의지에 의한 출산이건 아니건 태어나는 자식은 아버지의 신분과 관계없이 노비가 되었다. 따라서 어릴 때 주인집 자식과 함께 놀던 노비의 자식이 성장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갈등은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노비에게는 결혼보다 동거라고 하는 말이 더 적당하다. 경제적인 이유로 잔치를 치를 수도 없는 것이고 주인집에서 특별한 예식을 해줄리도 없었다. 노비주들은 노비의 재생산을 위해 여자노비를 양인이나 노비와 결합시켰다. 만일 주인이 첩으로 삼아 자녀를 낳게 되더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설령 일상적인 남녀의 만남과 결혼을 통해 노비가 가정을 이룬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의 욕심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언제든지 가족구성원이 헤어질 수 있었다. 또한 노비들은 노동량에 비해 제대로된 식사가 뒷받침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의복을 제대로 갖추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어쩌다 좋은 가재도구를 장만하면 수탈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집안살림이라고는 의식주에 관계된 것을 빼고 거의 없었다. 게다가 농사일 외에도 주인집의 모든 잡일을 맡았으므로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나무를 해오거나 물을 길러 와야 했다.


 일찍부터 체념을 하고 노비라는 신분적 굴레안에서 만족감을 찾는경우도 있었겠지만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도망이 줄을 이었다. 언제나 예외는 있듯이 훌륭한 주인을 만나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편안히 가정을 이루어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러한 주인도 신분의 해방만은 절대로 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조선이 신분제사회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 불합리한 노비세습


 노비 중에도 많은 재산을 바쳐서 양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은 물건과 같은 재산으로 취급되어 소유자의 재산분급에 따라 언제든지 가족이 흩어질 수 있었다. 설사 부유한 노비가 돈을 바치고 그 신분을 벗어났다고 해도 옛주인들은 2~3번에 걸쳐 다시금 해당 노비에게 몸 값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미 문서상으로 노비가 아닌 자를 과거에 자신의 집에서 부렸다는 이유만으로 상속재산에 포함시켜 다시금 금품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사회적으로도 이들이 노비를 면하였다 하여도 양인으로 대접받기는 어려웠다. 사회적 관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지배층 양반은 물론이고 양인들도 그들을 기존의 노비처럼 함부로 대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노비는 개인재산이라는 인식에 따라 소유자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였으며 법적인 예방책도 미흡하였다. 물론 원칙적으로 노비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일은 국법으로 금하였다. 문제는 부모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관습이 조선후기까지 시행되어 한 번 노비가 되면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회적 현실이었다. 또한 이외에도 노비는 주인이 죄를 범해 받는 체벌을 대신 받기까지 하였다.


 조선사회의 불합리한 노비세습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성호 이익은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천하고금에 없는 법으로 한 번 노비가 되면 백세토록 고역을 면치못한다렁렁노비제의 즉각 폐지가 어려우면 노비매매만이라도 금지하고 자손의 신분세습을 금하라”고하여 점진적인 노비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국가의 이익과 결부되어 점차 노비의 양인화정책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 자유를 위한 몸짓


 신분해방의 가장 빠르고 확실한 것은 노비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다. 도망가는 곳은 변방의 섬이나 깊은 산속 등 인간의 발자취가 드문 곳이었다. 도망은 개인만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가족 전체가 야반도주하는 형태였다. 도망을 가서도 생업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여러 방법으로 그 지역에 터전을 닦았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힘센 세도가나 관가에 몸을 맡기는 것이 있다. 노비주가 도망간 곳을 알고 찾아와도 공권력에 의지하고 있는 노비를 잡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 노비가 가족을 남겨둔채 홀로 도망가는 경우에는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그것을 바탕으로 양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도망간 노비는 일반적으로 뇌물을 사용하여 호적에서 빠지거나 국가가 보호할 수 있는 보충대와 같은 특수 병종에 속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도망간 노비들이 주인에게 다시 잡혀가지 않고 생활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국가에서 노비주에게 도망노비의 추적을 자주 금지시켰기 때문인데, 이는 구가적으로 보아서 노비의 양인화는 새로운 조세원의 생성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노비주에게 사적인 형벌을 가하지 못하게하여 노비의 권익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추세였다.


6. 국가의 손길


 조선후기로 갈수록 노비주에게 돈을 주고 양인이된 자들이 현실적으로 양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노비 양인화 정책은 노비의 수를 점차적으로 감소시키는 추세를 보였다. 양인의 수가 늘수록 정부의 조세수익이 많았으므로 공노비 뿐만 아니라 사노비도 양인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양인화 정책의 대표적인 것은 기존의 노비종모법(從母法)을 종량법(從良法)으로 전화시킨 것이다. 종모법은 부친의 신분에 관계없이 모친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것으로 노비주에게는 노비양산을 가져오는 법이었다. 반면에 종량법은 모친이 양인이면 자식은 자동적으로 양인이 되는 것으로 강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것과 노비의 수가 증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조정의 적극적인 노비양인화 정책에 의해 조선후기의 노비 중에는 어느정도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어 일반 양인과 다를바 없는 생활을 하게된 자도 있었다. 농업경영의 변화, 상공업의 발달 등 사회경제적 변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주인집의 토지만이 아니라 제 3자의 토지를 빌려서 생계유지와 재산증식에 힘썼다. 토지의 매매와 소유를 할 수 있는 사회환경에서 노비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재산을 증식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주인집에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있을뿐 경제적으로는 주인집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였다.


 노비제가 완화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중인과 서얼 등의 신분해방운동 때문이다. 종래 양반지배층만이 관직을 영위할수 있었던 것에 중인계층이 조금씩 진출하게 되자 노비들의 신분해방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다. 결국 조선정부는 공노비를 1801년에, 사노비는 1894년 갑오개혁때 법적으로 폐지시켰다.

 

* 출처:해주최씨전한공파중원문중(http://cafe.daum.net/haejuch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