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 독백(獨白) (完)>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어느 노인의 독백

Bawoo 2015. 7. 17. 10:54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어느 노인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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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다. 아니, 살고는 있어도 살아있다는 의미가 없는 곳이다. 단지 죽기 위해 들어와 있는 곳, 살아서 나가기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곳, 요양원. 이곳은 늘 죽음의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나 김영숙에게서도 나고 옆에 있는 다른 늙은이들에게서도 난다. 다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 나이 차이는 조금씩 있고, 들어와 있는 사연도 조금씩 다르겠지만, 늙고 병들었다는 점에서는 똑 같다. 자식들이 간병하기를 포기하고 돈을 내어 남의 손에 자기 부모 간병을 맡긴 곳. 간병하기가 힘들고 귀찮아서, 자기들 편하자고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부모를 맡겨 놓은 곳. 개중에는 자식들한테 짐이 되기 싫다고 스스로 들어 온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늙고 추한 꼴 보이기 싫어서 그런다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들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와 있다. 죽어도 오기 싫었을 테지만 이런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반강제로. 죽어도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서.

나 김영숙도 그런 경우이다. 한 세상 잘 살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생애 말년이 참 꼴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집에서 잠시 앓다가 떠나야 되는 것을, 그래야 자식들이나 나나 서로 편한 것을. 이런 내 마음과는 달리 현실은 살아 있으되 산 것이 아닌 이런 상태로 지속되고 있다. 벌써 5년 째. 앞으로 언제까지일지 기약도 없이. 그러면서도 살아나갈 희망은 절대로 없이. 살만큼 산, 인간의 수명 한계까지 다 온 나이여서. 이제 죽어서나 나가게 될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게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목숨이 붙어 있을 뿐인 그런 삶을 살다가.

딱 한 명 살아서 나간 노인네가 있긴 하다. 내가 이 꼴이 되기 전에 단골로 다녔던 생선가게를 하는 여인의 어머니면서 딸의 은행에 다닌 대학 동기의 어머니이기도 한, 나하고 나이도 엇비슷하던 노인네. 그래봤자 죽어가는 목숨이 살아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단지 병수발 하는 것을 자식들이 다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일 테지만, 이나마도 내가 요양원에 들어 온 이후로 처음 본 일이었다. 여인은, 어머니를 일주일을 채 못 놔두고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요양원으로 데리고 올 때 같이 왔던 여동생하고 또 같이. 며칠을 안절부절못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더니 도저히 못 맡기겠다고 하고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서 나갔다. 아니면 죽으려고 병원으로 갔거나. 장례를 치르려면 장례식장이 필요하니 미리 준비하기 위해.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 세상 나름대로 잘 살아왔고 남들도 그렇다고 생각했을 텐데 삶의 마지막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이 둘씩이나 있는데, 둘 다 남부럽지 않게 번듯하게 잘 키웠는데,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들은 반듯하게 잘 자랐지만, 그래서 자기 가정 잘 가꾸며 살고 있지만, 에미인 나를 간병할 처지는 아니다. 설사 처지가 된다고 해도 간병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간병을 하겠다고 해도 내 마음이 편할 리는 없겠지만 뭐 어쨌든 그렇다.

딸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대학 졸업하자마자 에미 반대 무릅쓰고 결혼한 남자와 겨우 15년여를 살고는 대책도 없이 이혼하고 혼자서 살고 있다. 이혼할 때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손에 크게 쥔 돈도 없으면서. 결과가 60이 다 된 나이에 사는 나날이 편치 않은 그런 모양으로 살고 있다. 지 에미, 애비까지 힘들게 만들어 놓고. 혼자 살면 에미 병수발이라도 하고 살지 이도 몇 달 해보고는 힘들다고 포기하고 그냥 혼자 살고 있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무기력하게.



하기사 간병 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나도 해봐서 알지만 도저히 할 짓이 못된다. 시어머니, 남편 모두 간병해 본 결과 얻은 결론이다. 그걸 알면서도 다 해냈다. 시어머니는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남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연하게. 시어머니 때에는 요양시설이 없던 시대이기도 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긴 했다. 효자인 남편이 원하지 않았을 테고, 나 역시 그러했을 테니까. 차이가 있기는 했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였지만, 나는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런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마지못해 따른 거라는.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 있다. 그렇다고 모든 자식이 다 늙고 병든 부모를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않겠지만, 힘이 들어도 집에서 간병하며 지내는 자식들도 있겠지만, 이런 자식들보다는 요양원에 보내는 자식들이 더 많은 시절이 되어있으니 이리도 요양원이 많은 것일 게다. 그저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죽을 때만 기다리는 목숨인,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닌 사람들 때문에. 이리 오래 살아봤자 자식한테나 본인에게나 좋을 일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또 모른다. 이렇게나마 죽지 않고 사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들이 있을지는. 그러나 나는 싫다. 정말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힘들고 나는 나대로 힘든 이런 삶. 살아 있으되 산 것이 아닌 이런 구차스러운 삶. 남이 먹여줘야 먹을 수 있고 대소변 뒷처리 다 해줘야만 하는 이런 삶. 내가 어쩌다 이런 마지막 삶을 이리도 오래 살 게 되었는지 기가 막힌다. 한세상 참 잘 살아왔는데,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1.


"엄마 나 왔어요"

딸이다. 요양원에 있는 나를 보러 한 두달에 한번씩 들여다 보는, 그것도 마지못한 의무감에. 뭐 그렇다고 같이 요양원 생활을 하는 다른 늙은이들의 자식들이 남다른 효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 거기서 거기이다.  늙어 병든 부모 질기게 목숨 이어가는 것을 보는 자식들 마음 다 똑 같을 테지만. 자기들도 늙고 병들면 자기 자식들에게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 뻔하지만.



"딱한 것"

김영숙 여사는 병실 입구에 들어서는 딸을 보며 저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겉으로가 아닌 그저 마음속으로만 이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말년이 저리도 안 좋게 되어있담.'

김영숙 여사는 딸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자신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딱한 처지인 것도 어느 사이 잊어 먹는다. 그저 딸의 아직은 제법 남아있을 살아가야 할 나날이 걱정이 된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남부럽지 않은 여건에서 나고 자란 아이의 삶이 어쩌다가 저리 꼬였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식,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복 받은 삶이었는데, 에미인 내가 제 아버지인 남편을 만나기 전 까지 살아온 삶에 비하면 너무나 행운인 삶이었는데, 적어도 에미인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는데 말이다.



딸의 아버지인 남편은 대학교수였다. 그것도 이 나라에서 두셋째로 꼽히는 명문대학의. 전쟁이 끝난지 10여 년이 지나 있었지만 아직 나라 한창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되리란 보장은 전혀 없었던 암울한 시절. 그 시절에 대학교수란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 참 대단한 것이었다. 나라 곳곳은 하루 세끼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집들로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비록 풍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먹고 사는 문제 전혀 걱정 하지 않아도 되고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아버지를 뒀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을 타고 난 것이었다. 나도 그런 남편과 살았으니 행운의 삶을 산 것이고. 남편을 만나기 전 힘들고 어둡기만 했던 삶이 남편 만나면서 확 풀려 목에 힘 좀 주고 살았던 것이고.



사람의 삶이란 태어날 때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진다. 아니 어느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 굳이, 왕가, 재벌가가 아니라도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 걱정이 없는 집안에만 태어나도 그래서 자기 몫의 삶만 열심히 살면 되는 그런 집안에만 태어나도 커다란 행운인 것이다. 나라가 가난하면 그런 집보다는 삼시세끼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되는 집이 더 많은 법이니. 나 김영숙 집안도 그랬고 남편 집안도 그랬다. 두 집안 모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시대 상황이 그리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내 삶도 그리 편치는 않았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성장기 시절까지는.



그런 나의 삶에 비하면 딸은 참 축복받은 삶을 산 것인데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인생이 꼬여버렸다. 자식을 낳아노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야하는 게 부모의 의무이니, 에미인 나나 이젠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부모의 뒷바라지가 필요한 성장기 시절, 이는 다 해준 셈이니 딸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 나가야 하는 과정에서 잘못 된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2.


남편은 여고시절 마음에만 담아 두고 속앓이를 해야했던 스승이던 사람이었다.

그런 이와 부부의 연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셈이니 참 복 받은 삶이었다. 힘든 일도 제법 있었지만 남편의 사랑으로 다 극복할 수 있었다. 오로지 나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곁에 있는데 왜 못 견디랴 그러면서 스스로를 달래가면서 그리 살았다.
가장 힘든 일은 역시, 10년이 넘는 기간을 시어머니 병수발 든 일이었다. 시어머니 돌아가신 게 딸이 중학교 입학하던 때인 것으로 기억나니 정확히는 13년인가? 아무튼 대소변 다 받아내는 일을 그 긴 세월 동안 해야 했으니 그 고통이야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식 키우면서 힘든 것보다는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식을 키우는 일이 희망과 기쁨이라면 시어머니를 간병하는 일은 절망이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지는 탓에 힘듦에 보람이 있고 없고 차이가 있는 것이 다를 뿐 다 녹록한 일이 아니었기는 하지만. 가슴에 안겨지는 고통의 강도는 자식이 훨씬 다 강하기에 그렇다.

그래도 행복한 삶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평생을 살았다. 딸만 잘 살아 주었으면 아무 여한도 없을 그런 삶. 그런데 딸 때문에 그 행복이 어느 순간 날아가 버렸다. 남편은 정년 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내력인 고혈압이 크게 도져 몸져 누웠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내가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이리 된 것도 딸이 한 요인일 수도 있을테고. 그러나 그것보다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뜬 것이 더 큰 요인일 테다. 평생 나 하나만을 지극정성 온 마음 다해 사랑 해 준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그것이 수명이 많이 늘어난 요즘 추세대로면 조금은 이르다고 할 70초반 나이에 병들어 쓰러지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말이 안 들어 남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고 길어져 버린.

내가 쓰러졌을 때, 아들 내외나 딸이나 내가 이리 오래 병석에 누워 있으리라곤 생각을 못 했을 테다. 잠시 병석에 누워있다가 떠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집에서 간병을 한 것이고 그게 길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아들, 딸이 나를 집에서 간병한 기간은 대충 3개월 정도 된다. 이 기간 동안 딸은 아예 집에 와 있었고 아들은 수시로 들렀다. 그러다가 딸이 힘들어 도저히 못하겠다고 뒤호 나자빠지면서 아들도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으니 요양원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딸이 혼자 살고 있으면서 내 간병하는 일을 너무 일찍 포기한 것은 섭섭한 점이 많다. 나는 시어머니, 남편 다 간병하며 지낸 생각을 하니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딸과 나는 살아 온 환경이 달랐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래도,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이리도 길어질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그랬을 터.
아들이야 내 배 아파 난 자식이지만, 내 젖을 빨며 자랐지만  늙고 병들어 추해진 에미 몸을 보여 주는 게 마음 편한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싫었다. 아무튼 문제는 나다. 조금 아프다가 빨리 세상을 떠야 되는 것을, 그래야 자식들 눈총 안 받고 슬퍼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가운데 떠날 수 있는 것을, 병석에 누워 있는게 이리 길어지는 탓에 이제는 눈총을 받고 사는 신세가 되어 있다. 어쩌다 한번씩 들르는 아들, 딸의 "이 양반 도대체 언제 돌아가시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을 볼 때마다 더욱 그렇다. 자식들 미움 받기 전에 빨리 떠나야 되는 것을 이리도 기약없이 길어지고 있어 눈총을 받고 있는 내 삶이라니. 벌써 5년째인 구차스러운 이 삶. 한 세상 잘 살아냈는데, 그리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말년이 꼴이 아니게 되어버린 내 삶. 하루 빨리 남편이 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이 삶. 남편이 보고 싶다. 어둡기만 했던 내 삶에 커다란 빛이 되어 주었던 사랑하는 남편. 그 남편 먼저 떠난 뒤 단 하루도 안 그런 적이 없었지만 요즘 들어 더욱 그렇다. 아들, 딸의 눈치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요즘 들어 더욱.

3.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니 본 것은 여고 1학년 첫 국어 수업 시간 때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에 야간 여고 그것도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가 아닌 졸업 후 취업이 목적인 실업계 여고의. 야간이고 내 적성에 안 맞는 실업계 더구나 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다녀야 할 형편이었지만 그것만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아직 나라가 한창 가난하던, 전쟁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꾸는 아이들이 주변에는 널려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차고 넘치던 시절에 가족의 생계 뒷바라지 걱정은 안 하고 상급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나는 국어와 역사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특히 국어 과목을.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과목만큼은 최고 점수를 놓쳐 본 적이 없다. 글도 잘 썼다. 글쓰기 대회에 나가 상도 제법 받았다. 대학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으론 언감생심,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인 국어 가르치는 선생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첫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윽고 교실 문이 열리고 교실로 들어선 선생님 모습은 오! 하느님 맙소사, 우리들하고 나이 차이가 별로 많아보이지도 않는 20대 중후반 쯤으로 보이는 총각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던, 언제던지 이성의 인연으로 맺어질 수도 있는 그런 나이 차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선생님은 미소로 화답을 했다. 그 환호성 지르는 아이들 속에 지극히 소심한 성격의 나는 없었지만 나는 나 혼자만의 환호성을 마음 속으로 크게 질렀다. 야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에, 마음에 쏙 드는 모습의 선생님이라니.

나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현실에서 무엇으로 나타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 그 예감이 현실화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내가 학생이 아닌 성인이 된 뒤의 일이지만 단계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선생님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이미.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거 아닌가.? 자기가 관심있는 것을 잘 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당장 나만해도 그러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인 수학 담당 선생님이 아무리 멋있게 잘 샐겼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인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보다 좋을 리는 절대 없듯이. 그렇지만 그것이 학생과 선생 사이인 우리 둘 사이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주는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아니 꿈은 선생님을 보는 시간이 많아짐에 비례하여 조금씩 생겨나긴 했지만 그 바닥에는 언감생심이라는 체념성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르지 못 할 나무 쳐다는 보지만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마음.

선생님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내 예상대로 중간고사 시험이 끝나고서였다. 적어도 국어점수 특히 글쓰기만큼은 그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그 결과는 성적으로 늘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시험 점수는 만점이었다. 글쓰기 실력은 이미 한 차례 있었던 작문 시간을 통해 보여 드렸다. 그 뒤로 선생님은 내 가정 환경을 조사한 것 같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 뒤 수업을 마친 어느 날 "김영숙 학생 교무실에서 나 좀 볼까" 그러시는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지라 "국어점수가 잘 나와서 그런 것인가"하고 막연히 생각하며 선생님 뒤를 따라갔다. 그때 처음 본 선생님 뒷 모습도 역시 멋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괜스리 마음이 콩닥콩닥 뛰는 걸 느끼면서.

" 앉지"
선생님은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러면서 따뜻한 미소가 담긴 모습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선생님의 그 미소가 너무 좋았다. 만약에 저 미소가 나를 이성으로 사랑해서 지어주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저절로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선생님한테 이런 내 마음이 들키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김영숙 학생, 국어 실력이 뛰어나더구나. 특히 글쓰는 데 재능이 있어 보이던 데 왜 실업계 학교로 왔어. 비록 야간이지만 인문계로 가는게 도움이 될텐데."
선생님은 나에 대해 이미 대충 파악을 한 상태인 것 같으면서 이리 물었다.
" 대학을 갈 처지가 안 됩니다.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돼요. 지금도 학비를 아르바이트해서 벌어야 되는 형편인 걸요."
나는 내 잘못이 하나도 없는 집안이 가난하다는 뜻의 말을 하면서도 괜히 죄인인 듯 싶게 주눅이 들어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선생님의 물음에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랬구나. 환경조사서로 대충은 미리 알아봤다. 아버지 고향이 이북이더구나. 사실은 나도 이북 출신이야. 아버지 고향하고 같은 곳. 그래서 더 반갑더구나."
"네에~ 선생님 그런데 왜 부르신거에요? 설마 고향 이야기 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닐테고..."
나는 말 끝을 흐리며 나를 부른 진짜 용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이 한가롭게 고향 이야기를 하려고 수업시간 중 잠시 쉬는 시간에 학생을 부를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내 정신좀 봐라. 혹시 아르바이트 일자리 필요하지 않니? 마침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원 학과 사무실에 사동 자리가 나와 있는데"

선생님은 그러면서 다시금 내 얼굴을 따뜻한 눈길로 쳐다 보았다. 난 선생님의 그 눈길이 너무 좋았다. 왠지 모르게 나를 이성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끔찍했던 전쟁도 몇 년전에 끝나고, 사는 게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꿈 많은 소녀 시절이었다.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내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임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살아가는 나날이 그리 편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걱정을 다 날아가버리게 하는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 그 순간 감히 마음에 담아두기 조차 어려운, "선생님이 나를 한 여인으로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사춘기에 접어 든 소녀이기에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그리 말하고 싶었다. 아주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웬만한 평범한 외모의 아이들보다는 나은 외모를 하고 있기에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는 그 눈길이 내가 싫어서는 아닐꺼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다였다. 선생님은 나하고는 격이 안 맞는 그런 존재였다.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존재. 내겐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김영숙 학생,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제안한 것 어때? 학과에서 일을 하게되면 책 읽을 시간도 많을꺼야. 글 쓸 시간까지는 안 나더라도. 책은 학과 사무실에 얼마던지 있어. 그것으로 부족하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면 되고. 생각이 있으면 내일부터 당장 일 할수 있어. 내가 추천하는거라 가능해. 일도 힘든 일은 없어. 아침에 학과장님 출근하시기 전에 사무실 청소 하고나면 따로 정해진 일은 없고. 걸려오는 전화 잘 받고 잔 심부름만 하면 돼. 가끔 차 나르는 일하고 각 행정실이나 과에 서류 같은 것 전달하는 심부름 정도야. 어때, 해보겠니?"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었지만 여의치가 않았었다. 일하고자 하는 아이들은 많은데 일할 곳은 별로 없었다. 아르바이트 자리라서 그런지 공개적으로 구할 방법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같은 반 아이들을 보면 다들 알음알음 연줄을 통해서 얻은 자리였다. 이북에서 피난 온 우리 집은 남쪽에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아르바이트 일자리 얻기도 쉽지가 않은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제안한 아르바이트 자리라니, 더구나 난 가고 싶어도 절대 갈 수 없는 대학 그것도 이 나라에서 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대학, 거기다가 내가 가고 싶었던 학과인 국문학과라니.

학과 사무실에 근무하는거라면 재수가 좋으면 유명한 교수님들 얼굴도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는 날아갈 듯 마음이 기뻤다. 마치 내가 그 대학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은 이미 그 대학교에 가 있었다. 내 생애에 절대 갈 수 없는 대학, 설사 갈 수 있는 집안 형편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게 되리라고 절대 장담할 수 없는 들어가기 힘든 대학. 그런 대학을 학생 신분으로는 아니지만 매일 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의 내가 마음 속에 살포시 담아두고 있는 그 선생님이.

"할께요, 선생님. 무얼 준비하면 돼요?"
나는 머리 속으로 이런 생각을 순식간에 하면서 곧바로 대답을 했다.
"잘 생각했다. 준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나오면 돼. 내가 추천을 한거니까 나오서 신상 소개서 정도만 쓰면 돼. 당장 내일부터 나와도 된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 쉽지 않으면 일단 와서 학과 사무실 둘러보고 결정해도 되고. 아무튼 앞으로는 좋은 일이 많을꺼야"
선생님은 마지막 "좋은 일이 많을꺼야"라는 말에 약간 힘을 주어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있는 것 같이 얘기하면서 다시 한번 미소를 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60년도 전인 그때를 생각하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다. 내 어둡고 고달프기만 하던 삶에 한 줄기 가느다란 햇볕이 살며시 비치기 시작한 바로 그날, 그 햇볕은 조금씩 조금씩 크게 비치더니 어느 사이 내 삶을 송두리째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삶의 말년을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보내고 있는 요 몇 년을 제외하면 참 괜찮은 삶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야간 여상 출신이 명문대 교수의 아내로 한 평생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선생님이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도 그 날 처음 알았다. 주간이 아닌 야간 고등학교에 취업을 한 이유도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는 진심을 담아 크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취직이 된다. 그것도 내 형편으론 절대 갈 수 없는 대학, 설사 갈 수 있는 형편이 되더라도가게 되리란 보장을 절대 할 수 없는 명문대학에. 더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과 사무실에."
교실로 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복도를 갈지자로 뛰어가듯 걸으며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누가 내 뒷모습을 보았더라면 "쟤는 무슨 신나는 일이 있길래 엉덩이를 저리 흔들어대며 나는 듯이 걷고 있대?"라고 틀림없이 그럴 것이었을. 앞으로는 뭔가 좋은 일만 쭈욱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얼마 살지도 않은 삶이라서 앞으로 살아 갈 날이 더 많은 나이지만 지금까지의 삶은 웃는 일보다는 우울한 일이 더 많은 나날이었는데 앞으로는 웃을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분 좋은 예감.

4 .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전적으로 가장인 아버지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 개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그리 만들었다. 아버지는 북에서는 지주셨다. 아주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대대로 머슴두고 소작주며 살았던. 좋았던 시절은 해방이 되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언제였더냐 싶게 사라져 버렸다. 그 많던 땅 다 뺏기고 하루 아침에 빈털털이가 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대대로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은 지주라며 언제 무슨 핑계를 대고 잡아다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소작인들한테 심하게 군 지주 중엔 이미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다행이도 이런 악덕 지주들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땅을 부쳐먹는 소작인들이 아버지 땅을 부치길 원할 정도로 소작인들에게 후하게 대해 줬다. 그렇다고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못 되었다. 인심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표변할 지 알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하루 아침에도 180도 달라질 수 있는. 살 길은 남으로 내려오는 것 뿐이었다. 삼팔선이 막히기 전에 부랴부랴 어렵게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 내려온 덕분에 온 가족이 다 무사하게 내려 올 수 있었다. 부모님, 나 그리고 밑의 두 남동생이 온전하게 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을 마친 무렵이었다. 10살이 되어 있던 그 어느 날.

그나마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삼팔선이 막혀 전쟁통에 내려 온 사람들은 내려오는 도중에 가족들이 죽고, 행방불명되어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우리집은 가족들 목숨은 다 부지하긴 했지만 대신 가난이 집안을 휘몰아 돌았다. 북에서 살 때의 좋았던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부모님은 어렵게 챙겨 온 패물 몇가지로 우선 집 한칸을 장만했다. 안방, 건넌방, 사랑방 합쳐서 방이 3개인 자그마한 한옥을. 북에서 살던 집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집을. 사대문 안이 아닌 밖, 말이 서울이지 시골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곳, 고개 하나만 넘으면 동네가 '동'이 아닌 '리'로 불리는 경기도 지역인 서울의 최외곽에 있는 동네에, 고향인 이북이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단지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동네는, 뒤 쪽으로는 나즈막한 야산들이, 앞 쪽으로는 동에서 서로 제법 큰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물길을 막는 곳을 피해가면서 굽이굽이. 야산들도 이 개울을 따라 쭈욱 이어졌다. 기껏해야 2~300메터도 채 안 될. 산에는 집들이 없었다. 동네 바로 뒤에 있는 산에 조차도. 불과 몇 년 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산꼭대기까지 무허가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설 것이었지만, 그래서 우리 네식구 먹고 사는데 큰 힘이 돼 줄 것이었지만 ,그땐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누가 앞 날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 것인가. 더구나 자기 일도, 집안 일도 아니고 세상 일인 것을. 그것도 천지가 개벽하는,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전쟁이 터진 것을.

사랑채는 세를 놓았다. 말이 좋아 사랑채지 대문 들어서자마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옛적에는 아마도 머슴들이 쓰던 방 아닐까 싶은. 여기에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젊은 부부가 세를 들어왔다. 사내아이로 보이는 갓난아이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배는 언제인가 태어 날 아이가 있다는 암시를 하듯 조금 불룩해가지고, 머리에는 커다란 보퉁이를 힘겹게 인 모습을 하고서. 새댁은 아마 스물 초반 쯤 되었을 것이었다. 아직 소녀인 나보다는 10살 이상 어른인. 아주 순박하게 생긴 모습의. 나는 이 새댁을 이모라고 불렀다. 친 이모는 아니었지만 같은 집에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이 든 뒤에. 이모의 두 갓난 아이는 내 등 신세를 많이 졌다. 전쟁이 나면서 같이 피난을 갔다가 헤어지게 된 근 2년 동안. 이모가 장사를 하는 때문에 바쁜 일이 있으면 "영숙아 잠시만 봐 줘. 미안해"라면서 내 등에다가 포대기로 싸서 업혀 주는 통에.

어머니는 집에다가 한복 맞춤집을 차렸다. 간판은 대문에다 한지로 "한복 맞춥니다'라고 써붙이고서. 글씨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의 멋진 솜씨로 써서. 아버지한테 시집오기 전 양가댁 규수로 자란 탓에 배워 둔 바느질 솜씨가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나 전쟁 전에는 일꺼리가 별로 많지가 않았다. 동네가 그리 크지 않은 탓도, 여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일거리가 끊기지는 않을 정도로. 근처 동네에서, 고개 너머 경기도 지역에서.

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실력을 인정받아 출판사를 다니셨다. 그렇지만 출판사는 잘 안되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시절에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했겠지만 출판사가 지금도 잘 안되는 걸 보면 시대와 관련된 문제는 아니었다. 책을 만드는 사업 자체가 수지가 잘 안 맞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와 관계없이.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되었다. 나나 두 동생들이 아직은 상급학교 갈 나이가 아니라서 큰 돈이 들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먹고 사는 일은 무엇을 먹든 하루 세끼
먹으면 되었으니까. 북쪽 고향에 살던 시절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한 밥상이었지만 이도 못 받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던 시절이었으니까. 문제는 나나 두 동생이 상급학교인 중학교를 다니게 될 나이가 되었을 때인데 이는 전쟁 때문에 몇 년을 놀게 되면서 저절로 해결이 되었다. 가장인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나가 못 돌아오시고 계신 마당에, 우리 삼남매 뒷바라지를 어머니 혼자 떠 맡게 된 상황에서,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잘 하는 짓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랑방에 세들어 사는 새댁, 아니 이모와 엄마는 친자매처럼 지냈다. 나이는 엄마가 30초반이어서 열살 이상 위일 터였지만 별 문제는 안 되었던 것 같았다. 엄마에게 가까운 친척이 없는 탓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모는 친정이 서울 남쪽, 경기도 어느 곳이라고 했다. 이모 말로는 신작로가 있고 5일장이 서는 읍에서 서쪽으로 산길을 따라 10여리는 족히 들어가야만 되는 곳. 그 시절엔 오지 중의 오지여서 방물장사나 이따금 들를 뿐, 외지 사람은 구경도 못하는 곳인. 조선 초기에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사람의 출생신분 문제로 다툼을 벌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 눈에 난 조상님들이 도륙을 당하게 되면서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곳까지 숨어들어 살게 된 것이라고 했다. 대대로 같은 성씨들만이 모여 사는 동족 마을 이루어.

이모 남편도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했다. 바로 이웃마을에 사는. 이웃마을이기는 하지만 넓다란 벌판이 사이에 놓여 있어 어른들도 20여분은 족히 걸어야 될 거리에 있는. 이 마을도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산다고 했다. 이모 동네와는 다른 성씨였지만, 그래서 둘이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지만. 이모네는 일제시대에 같은 소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면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학교. 학년은 차이가 났지만, 이모가 서너살 아래였지만, 학교를 오가는 길이 같은 길이어서 등하교 시간에 가끔씩은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그렇다고 연애를 한 것은 아니었고 징용을 갔던 남편이 해방이 되어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중매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5.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다. 동족간 전쟁. 말로는 그리했지만 실제로는 국제전이었던 3년간 이어진 전쟁. 이 전쟁 때문에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를, 어머니와 이모는 남편을 잃었다. 그것도 어디에서 전사한지도 몰라 행방불명 통지만 받은, 죽었어도 죽은 장소까지 알게 된 가족들은 그나마 나은 것일 수도 있어 보이는, 참 더럽게 복도 없는.

전쟁이 터지자 이모는 자기 고향으로 피난을 가자고 했다. 고향은 아마도 괜찮을 지 모른다고. 워낙 오지여서 거기까지는 군인들이 들어오지 않을 지 모른다고. 어느 쪽이 이기던 전쟁이 끝나야나 아마 들어 올 것이라고. 실제로 그랬다. 우리가 이모 친정집 사랑채를 얻어 피난살이를 하고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 같이 요란스러운 총성이 반나절을 계속해 들렸지만, 총성이 잠잠해지고도 마을에는 군인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북한군과 미군이 처음으로 교전을 한 것이었고 미군은 참전한 500여명 중에 150여명이 전사했다는, 미군 입장에서 보면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었다고 했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이기고 바로 남쪽으로 처내려가기 바빴던 것이고.

이모네 친정에는 부모님과 큰 오빠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큰 오빠 밑으로 두 오빠가 더 있었지만 모두 객지에 나가 살고 있다고 했다. 집에 일손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농사일에 매달려봤자 겨우 입에 풀칠하기 바쁠 정도뿐이 안 되는 땅이어서 희망이 없다는 판단 아래,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세 오빠 모두 전쟁터로 끌려갔고 그 중 큰 오빠만 살아 돌아왔다. 나중 이야기지만, 아래 두 오빠는 국방군인지 의용군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국군이던 북한군이던 길거리에 젊은이들만 보이면 무조건 잡아다가 전선에 투입하던 시절이라서.
이모 부모님들은 큰 아들이 살아 온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을지도 모르는 일일 터였다. 자식들을 전쟁터에서 모두 잃은 집들도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으니.
이모 큰 오빠네는 아이가 둘 있었다. 둘 다 사내애. 큰 아이는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았고 작은 아이는 나하고 동갑이었다. 이모 올케가 엄마 나이 또래였던 것이다. 엄마는 이모 올캐인 이 여인과도 친자매처럼, 친구처럼 지냈다. 나와 동생들도 이 집 아이들과 친 남매처럼 지냈고. 거기서 산 근 1년 동안만.

나하고 동갑내기인 아이는 좀 별스러운 데가 있었다. 어린 아이들도 내외하던 시절인데도 기회만 있으면 내게 관심을 보였다. 일테면 가을에는 주운 밤을 갖다 준다던가 하는.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늘 허기가 져 있던 그 시절에 '나는 많이 먹었다' 그러면서. 이 아이를 내가 특별히 좋아한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싫어한 것은 아니었으니 호감을 가진 쪽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먹을 게 생기거나 뭐 특별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꼭 갖다주곤 했으니 그 경황없던 시절에도 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었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들이 딸의 대학동기인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구나 생각이 들게도 한 무려 40여년이 다 지난 뒤에. 딸이 이혼을 하고 혼자 지내던 그 어느 날, 집으로 찾아 온 그 동기를 보고서.

마을은 나라가 전쟁 중이라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무거운 분위기가 쫙 깔려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집집마다 젊은이들이 다 전쟁터로 끌려 가 있는 것 뿐이었지만, 최전선 인근 마을이나 빨치산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산자락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밤낮을 바꿔가며 피해를 입고 죽고 그러던 때에 그런 피해는 전혀 없는 행운의 마을이면서도 마을 사람들 모두 긴장하며 지내는 것이 어린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아이들도 덩달아 이런 어른들 눈치를 보며 지낼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아이들이기에 어른들 보다는 덜 긴장하면서 지내기는 했던.

이모는 시댁에 들어가서 살았다. 우리 식구를 친정아버지에게 부탁하고서. 출가외인인 탓이었다. 시부모가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 있는데 친정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친정에서 환영할 일도 아니었고 시댁에서도 펄쩍 뛸 일이었고.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사람들 모두에게 깊이 박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여자들이 출가하는 것은 목을 입을 하나 줄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이모 아들인 내 가짜 조카는 시댁의 단 하나 뿐인 장손이었다. 만약 이모부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면 손자들은 더 늘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장손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을. 이런 가능성은 날아가 버렸다. 이모부가 돌아오지 못 한 탓에. 이모부 위로는 누이가 셋이나 있었지만 다들 출가해서 그 집안 사람이 되어 있었고 피난도 오지 않았다. 이모부 누이들 모두 인근 마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서. 이모 시부모님인 당신들 부모님이 무사하신가 한번 들렀을 때 본 것이 전부였다.

우리 식구는 전쟁이 아직 끝나기 전에 서울 집으로 다시 올라왔다.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이모 친정댁에 눈치가 보이기도 했지만 전쟁이 38선 근처에서만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문에도 힘을 입었다. 1.4후퇴가 끝나고 서울이 다시 수복된 3월도 몇 달 지나서인 여름 무렵이었다.

이모는 시댁에 그냥 눌러 앉아 살았다. 두 아이와 함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몇 년을 더. 연로하신 시부모들이 다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가족이 서울로 다시 올라가면서 들렀을 때 "신랑 돌아오면 같이 올라갈께요" 그리 말했지만 바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신랑이 돌아오지 못한 탓에 그리 된 것은 나중에 알았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편지를 통해.
어머니는 새댁 친정 식구들과는 연락을 못하고 지냈다. 당장 코 앞에 닥친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교통이 안 좋았던 시절이어서. 전쟁이 나고 몇 년이 지난 뒤 시댁 살림을 다 정리하고 올라온 이모를 통해 전해 들은게 전부였다.

6.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전사 통지도 날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늘 밥 한그릇을 아랫목에 챙겨 놓으시고서. "아버지 오시면 드릴 것이라고"하시면서. 그러나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계셨던 것 같았다. 전사한 것이 확인이 안 되는 실종자들도 엄청 많다는 것을 여기저기 알아 본 끝에 알고 계셨던 것이었다. 단지 자식들인 나나 동생들에게 말을 안 하셨을 뿐.

마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보내드렸을 어머니는 그 눈물 마를 새도 없이 가장 노릇을 오롯이 떠맡을 수밖에 없으셨을 테다. 처음에는 아버지 돌아오실 동안 잠시 뿐이라 생각하셨을 테지만, 그리 기대하며 지내신 것일테지만, 현실은 그리 되지를 않은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만 쳐다보며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나와 두 동생을 당신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 했다. 그 역할에 도움을 피난민들이 해줬다. 집 뒤 산에 하나씩 둘씩 들어서던 무허가 판자집들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다닥다닥 들어서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혹시 옷 수선은 안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쭈볏거리는 모습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재봉틀이 없어서였다.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고 재봉틀을 하나 장만하셨다. 손으로 돌리는 재봉틀. 대문에는 '옷 수선합니다'라는 글씨를 더 써서 붙였다. 전쟁 전에 아버지가 '한복 맞춥니다'라고 써서 붙였던 종이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진 터였다. 돌아 올 기약이 없는, 아마 돌아가신 것이 거의 틀림없을 아버지의 모습처럼.

옷 수선 일은 제법 잘 되었다. 이모네가 살던 사랑방이 제법 모양새를 갖춘 옷수선 가게가 되었다. 어려운 시절이라 그런지 헌 옷가지를 고쳐 입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었다.그렇다고 큰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네 가족 하루 세끼 굶지 않고 지내면서 중학교 진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제대로 다녔더라면 이미 졸업을 했을, 고등학교를 들어갈 나이에.
이것만도 큰 행운이었다. 어머니는 "동생들 때문에 고등학교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중학교는 다니거라" 그리 말씀하시며 보내주었다. 당신이 상급학교를 가고 싶어했는데도 "여자가 공부는 해서 뭐해. 살림살이 하는 법 배워서 좋은 데 시집이나 가면 되지"라며 반대를 하신 외할아버지 때문에 못 배운 한을 나한테까지 갖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여기에다 다행인 것은 나 스스로 학비를 벌 수만 있다면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꿀 수 있을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만도 커다란 행운이었다. 살아가노라면 크던 작던, 알게 모르게, 몇 번씩은 맞게 되는 게 행운인 법인데 이 행운 중의 하나가 내게도 돌아 온 것이었다. 그때는 작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르나 나중에는 커다란 행운이 되어 돌아 온.

어머니가 하는 한복 맞춤일이 제법 잘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쟁 전이나 끝나기 전까지는 일꺼리가 별로 없었는데. 전쟁이 남겨 준 상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아물어 가면서, 사람들의 삶도 각기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전쟁 때문에 할 수 없어 미뤘던 결혼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다. 한복 수요가 저절로 많아지게 된. 어머니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일 거드는 조수를 둬야 될 정도로. 어머니가 많이 힘 드시기는 했지만 덕분에 생활은 안정이 되어 갔다. 그래봤자 한계가 있는 것이었지만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꿈 꿀 정도는 된 것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내가 공장 같은 곳에 취직하거나 어머니가 하는 일을 거들어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눈치셨다. 막내 동생까지 중학교를 들어가게 되는 바람에 당신 혼자 힘으로는 버거우셨던 모양이었다. 한복집이 잘 된다고 해서 우리 삼남매 학비를 다 댈 수 있을 정도로까지 큰 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차마 말은 못 꺼내셨다. 공부하기를 원하는 자식 학교 못 보내는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하셨겠으랴만 그래도 사정을 했다. 어머니 혼자 우리 삼남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하시는 걸 보면 너무 이기적인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쩌는 수 없었다. 대학은 못 갈 것이 뻔하지만, 바로 밑의 동생도 아마 힘들 것이지만 고등학교까지만이라도 꼭 나오고 싶었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학력이라는게 세월을 살아내고 나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학력보다는 어떻게 잘 살게 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지만, 학교를 가야 될 그 나이 때에는 못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학교를 때려치는 아주 특별난 인재들이 아닌 담에야 나머지 모두에게 해당되는.

"야간 실업고등학교에 들어가 낮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는 내가 벌께요. 공부 열심히 해서 졸업하면 은행같은데 취직해서 두 동생 뒷바라지도 거들께요."
어머니는 이것마저 반대는 못하셨다. 집안 살림에 당장 보탬이 되는 취직이 더 필요한 형편이었지만 차마 말은 못 꺼내셨다. 그저, 시대가 달라지면서 하루 아침에 몰락해버린 당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에미가 못나서 우리 딸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로 내 청을 허락하셨다.

7.

내가 일할 학과 사무실은 기대만큼 넓지도 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비좁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난한 정도. 사무실은 1/3정도는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었다. 왜 그런건가 궁금했는데 그쪽은 학과장님이 계시는 곳이었다. 나머지 2/3공간에 조교인 선생님이 근무하는 책상과 내가 근무할 책상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 책상은 교정이 바라다 보이는 창문을 뒤로 창문 가까운 곳에, 내가 사용할 책상은 과사무실 출입문 바로 옆에. 책상 위에는 전화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 주로 전화 받는 일이 될 것임을 말해 주듯이. 선생님 자리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러나 내 옆 모습만 볼 수 있는 곳이었고 내 자리는 선생님을 보려면 고개를 한 쪽으로 돌려야 가능한 곳이었다. 바른 쪽으로. 내 자리에서 보이는 정면 벽에는 커다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유리문이 달려 있어 멀리서는 안이 잘 들여다 보이지는 않는. 아마 선생님이 말해 준 내가 읽을 문학 관련 책들이 이 책장 안에 가득 들어있을 것이었다. 그 책장과 내 책상 사이에 출입문이 있었다.

선생님 안내를 받아 인사를 드리러 간 나를 본 학과장님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제자인 선생님으로부터 미리 내 이야기를 들으신 때문인지 별 말씀도 안하셨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예쁘게 생겼네. 잘 부탁해"라고만 하셨다. 그 한마디에 학과장님의 나를 대하는 마음이 다 묻어 나왔다. 따뜻한 마음.
학과장님은 유명한 소설가 분이셨다. 책을 통해서 만 본 바로 그 분. 현실에서는 도저히 만날 기회가 없었을 듯한 그런 분. 선생님 덕분에 하루 아침에 자주 뵐 수 있는 분이 되었다.
거의 매일.

"여기가 영숙이가 앉아서 근무할 자리야"
선생님은 내가 예상한대로 과사무실 입구의 자그마한 책상이 내가 근무할 자리라고 알려주셨다.
"학교에서 미리 얘기했지만 주로 하는 일은 과 사무실 지키면서 전화 받는 일이야. 아침에 조금 일찍 와서 청소해 놓고 나서 학과장님 출근하시면 차 한잔 갖다 드리면 되고. 그 외에는 학과장님이나 내가 시키는 잔심부름 정도 하면 돼. 주로 행정실에 서류 갖다주는 일이야. 나머지 시간에는 책 읽고 공부하고 마음대로 해도 돼. 단 자리는 함부로 비우면 안 된다. 특히 내가 수업을 들어가거나 다른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울 때는"
선생님은 이 말을 하면서 또 알듯모를듯한 미소를 나를 쳐다보며 지으셨다. 따듯한 마음이 느껴지는 눈길. 뭔가 , 나를 여인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드는 눈길. 나는 괜스리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발개지는 느낌이 또 들었다.

과사무실 일은 선생님 말대로 정말 편했다. 아침에 선생님 출근하시기 전에 사무실 청소를 하고 나면 선생님과 학과장님 모닝, 점심 커피 타드리는 것이 고정된 일과일 뿐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대응하면 되었다. 심부름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부 학생들이 조교인 선생님을 보러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학부 학생들이 내게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런 학생도 몇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학생은 없었고 내게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나는 이미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선생님.

과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학부 학생들이 내게 큰 관심을 안 가질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명문대 학생들이었고 나는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 학비를 벌 요량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간 여고생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와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장벽을 보았을 것이고 나 역시 그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절대 올라갈 수 없는 장벽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올라갈 수 있는 장벽. 여자이기 때문에 더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쉬울 수도 있는 장벽. 그 장벽을 선생님이 오르게 해주었다. 꿈에서만 그리던,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을.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도 알게 모르게 천천히. 그러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선생님과 밤 낮을 같이 얼굴보며 지내는 나날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년반 정도. 낮에는, 나는 직장인 신분이고 선생님은 대학원생이면서 학과 조교인 신분으로 같은 사무실에서. 밤에는, 나는 학생이고 선생님은 선생님 신분으로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그 기간은 늘 기쁜 나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과 같은 공간에서 매일 있는 것이 좋았고 하루 일이 끝나고 학교 갈 시간이 되면 선생님과 같이 학교 갈 기회가 생기는 것이 좋았다. 마음 속으로는 매일 같이 갔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런 행운까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학생들보다 일찍, 직장인 학교에 가야 했는지 늘 나보다 30분 정도 먼저 과사무실을 나서셨고 난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영숙이 학교에서 보자"라며 과사무실 문을 나서는 선생님을 보며 "네 학교에서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만 해야 되는 내 처지가 마음 아팠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은 학교에 같이 갈 수 있었다. 매주 토요일이 그날이었는데 그것이 선생님이 일부러 그리 만든 것임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는 그저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아 왜 같이 가게 되는 것인지 따져보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은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되는 날인가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선생님과 등교를 하기 위해 같이 가는 길은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등교를 하려면 과사무실에서 나와 교문까지 거의 1키로 거리가 다 되는 길을 걸어나가야 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이 길은 봄에 날리는 꽃가루 피해 때문에 그때는 이미 다 베어 없애버린 나무들의 이름을 딴, 아주 멋있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길이었는데 그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많은 꿈을 키우며 4년을 꼭 오가야만 되는 길이었다. 그 4년 동안 학교 안을 속속들이 다 다녀보지 못할지라도 이 길만큼은 꼭 오가야 했다. 다른 길이 두어 곳 있었지만 그곳은 학교 뒷산 쪽으로 난 산길이어서 위험스럽기도 했고 다니기도 불편했다. 정문 쪽으로 난 이 길이 다니기도 편했고 그 길을 나서야 필요로 하는 것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서점, 다방, 술집, 여관 등등.

난 그 길을 그들, 그 학교 학생들과는 또 다른 의미로 오갔다. 그들보다 1년반 짦은 2년반의 세월을. 그곳은 내가 학비 걱정없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직장을 오가게 해주는 길이었고,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나를 그 곳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선생님을 매일 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을 오가는 길이기도 했다.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길이었다. 문학소녀인 나에게 원없이 책을 제공해 준 학과사무실을 오갈 수 있게 해 준. 무엇보다도 선생님, 내가 마음에 담고 있던 선생님이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평생을 같이 하게 해 준 인연을 이어가게 해 준 길이었다. 다 선생님이 미리 계획한 일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매주 토요일 오후 등교 시간, 나는 그 길을 선생님과 함께 걸었다. 옆에서 걷지는 못했다. 한발짝 뒤떨어져서 더 이상은 안 떨어지게 잘 맞춰서 걸었다. 더 이상 떨어지면 큰 일이 난다는 생각으로.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도.
선생님은 그런 나를 뒤 돌아보며 "이리와 옆에서 같이 가자"라며 손짓을 하셨지만 나는 뒤에서 걷는 것이 더 좋았다. 선생님 옆에서 걷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그렇게 되면 선생님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소리가 선생님한테 들릴 것만 같아서.
선생님은 그런 나를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가끔씩 뒤돌아보았다. 혹 내가 안
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표정인 듯 싶기도 하게. 그러고서 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기도 한 것 같았고. 난 선생님의 그런 표정도 너무 좋았다. 나를 걱정해주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은 내가 학년이 올라감에 비례하여 소녀티를 조금씩 벗어나는 것과 함께 더 커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내 곁에 늘 있었지만 늘 없기도 했다. 적어도 겉으론 그랬다. 과사무실에서 이따금씩 나를 쳐다보는 선생님의 눈길을 느낄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 눈길이 내가 소녀티를 조금씩 벗는 것과 비례하여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아직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선생님을 담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음으로만 끝날 일이었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아직 고등학생인 제자를 보는 선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뭔가 달라지는 느낌은 있었다. 그것이 현실화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꿈에서는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99%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나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루어질 수 없는 1%가 내게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기는 했다. 늘 마음 조리면서, 애가 타 하면서.

선생님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일주일에 6일을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을 보며 지내지만 늘 사무적인 일로만 접촉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매주 한번, 그것도 바로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도 선생님이 미리 계획을 한 일이었던 것임을 나중에 알았지만 설사 그 당시에 알게 되었더라도 난 더 좋아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이성과도 아주 싫어하는 스타일만 아니라면 자리를 옆에 하고 앉으면 뭔가 설레임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법인데 그 대상이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선생님인데야 기쁜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분? 뭐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학교에 가려면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되었다. 버스 안은 늘 만원이었지만 토요일 오후 시간만큼은 자리가 여유로웠다. 평일 내 등교 시간이 대학생들 하교 시간과 맞물려 만원인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학생들이 토요일 수업은 될 수 있는대로 안 받으려고 수강 신청을 안 하는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강의 배정을 거의 안 했고.
선생님은 굳이 나를 옆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러며 다른 빈 자리로 가 앉으려고 했지만 선생님은 정색을 하며 "김영숙 명령이야. 이리와 내 곁에 앉아" 그러셨다. 나도 그러고 싶었은데 차마 못 그런 것이니 선생님의 반 강제적인 그 말은 내게 복음과도 같게 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 곁에 다소곳이 앉아 책가방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선생님도 별 말씀은 없으셨다. 버스를 타고 가는 30분은 왜 그리도 빠른지, 난 운전기사를 마구 원망하는 말을 퍼부었다. 좀 천천히 가라고. 마음 속으로만.

학교에 나와 선생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뜬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은 3학년 올라갈 무렵이었다. 선생님과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버스 안에서 하기 시작한지 얼추 1년반이 지나 있을 때 쯤. 소문의 진원지는 선생님과 내가 나란히 버스에 앉아 있는 것을 우연히 본 누구였을 것이다. 등교를 하는 아이들이 선생님과 내가 탄 버스를 타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실제로 탄 아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등교가 좀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그 아이들도 나처럼 어느 곳에선가 사동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이 남아 일찍 등교를 하는 중이었을 것이고.

선생님은 교장실에 불려가 자초지종을 해명한 모양이었다. 사실과는 다른 뜬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소문은 가라 앉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서운했다. 실제로는 특별한 사이가 아직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이후 선생님은 "괜히 구설수에 오르지 말자"라며 버스 안에서 따로 앉자고 그러셨다.
"대신 내 뒤쪽에 앉지 말고 내 눈에 뜨이는 앞쪽으로 앉으라"는 당부를 하셨다. 당신 눈에 내가 보여야 안심이 된다는 그런 뜻인 것 같은.
선생님과 부부가 되고 난 그 몇 년 뒤 잠자리에서 "그때 왜 꼭 앞 쪽에 앉게 했느냐"는 내 물음에 "내 눈에 당신 모습이 보여야 안심이 돼서 그랬다"는 말을 빙그레 웃음을 띈 얼굴로 해주었다. 동시에 팔베개를 해주고 품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선생님이 나를 이성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로부터도 1년이 지난, 내가 졸업을 하고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인이 되고서였다. 학업 성적이 좋았던 나는 졸업과 동시에 금융기관인 은행에 취업이 되었다. 공부를 더하고 글도 쓰고 싶었지만 애시당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은행에 취업이 된 것은 최선이었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생님은 잘 되었다고 당신 일같이 좋아하면서도 뭔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나대로 선생님을 이제 영영 못 보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쓰라렸지만 선생님을 처음 보고 마음에 담은 그 순간부터 미리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의외로 의연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그 아쉬운 표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선생님이 은행으로 나를 찾아와 스스로 밝혀준 뒤에야 알게 되지만 그것은 내가 선생님 곁을 떠난지 몇 개월 뒤의 일이다.

8.
은행 일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나라 유일의 서민은행인 탓인지 아침에 문이 열리기기 무섭게 손님들은 밀어닥쳤고 오후 늦게 문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월요일과 토요일은 더 바빴다. 특히 토요일이 더 심했다. 한나절만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라 그런지 점심을 걸르고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점심은 은행 문을 내린 뒤에라야 부랴부랴 해결을 했다. 즐거움은 없었다. 학교에서 사동일 아르바이트 할 때처럼 근무하면서 책을 읽는다던가 하는 여유로운 시간은 절대 가질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긴장이 연속인 나날이었고 이를 깰 돌파구는 없었다.
아무나 다닐 수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된 나름대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동료, 상사로 옆에 뒤에 포진해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대신 물질적인 여유로움이 생겼다. 늘 팍팍하던 호주머니가 두둑해졌고 덕분에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에도 조금은 밝은 빛이 돌아왔다. 이것을 보람으로 삼아야 했지만 뇌구조가 무언가 혼자만의 시간을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을 하도록 되어있는 나에게는 보람보다는 고통이 더 큰 나날들이었다. 탈출구는 없었다. 그러니 현실에 만족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되었다. 손님이 좀 뜸해져 손이 여유로워지면 선생님을 생각했다. 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창구에 온 손님들이, 해야 할 일들이 그리 놔주지 않았다. 대신 몸이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에는 늘 선생님을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곁에 없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며 지내던 선생님은 이제 내 곁에 없었고 마음 속에만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지만 방법도 없었다.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여자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시당초 현실에서 인연이 이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 선생님을 마음에 담은 그 때부터 이미 했었기에 그랬다.

"영숙아 전화 받아. 남자야"
토요일 오후 시간. 아침 은행 문이 열리고부터 여직껏 손님들과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이제 마감만 하면 내 시간이구나"'하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선배 언니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수화기를 넘겨 주었다. 근무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인 선배 언니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은 결혼할 여유가 없어 다니고 있지만 결혼자금만 모아지면 그만 둘 것이라고 했다. 사실 더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었다. 여행원들은 결혼를 하게되면 사표를 내야했다. 제도적으로 그리 되어 있었고 그 제도를 깰 힘은 아직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영숙입니다."
남자라면 짚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고등학교 3년, 은행에 취직해서 몇개월 그 기간동안 내 곁에, 내가 아는 남자라곤 선생님뿐이 없었다. 학교와 직장을 다람쥐 체바퀴 돌듯이 지내온 나날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생활이었다.
아니다, 딱 한명 있기는 했다. 과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사무실에 드나들던 학생 중 한 명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찝적거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성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 학생은 전공을 적성이 아닌 자기 실력을 맞춰 학과를 택한 듯이 보였다. 선생님을 비롯, 적성을 택해 과에 들어 온 학생들은 대부분 조용한 성격이었다. 남들이 보면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들어내지를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내성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터인데 난 이런 스타일의 남자들이 좋았다. 겉으로는 뭔가 자신이 없어보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속이 꽉 찬 스타일. 선생님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이 남학생은 정반대였다. 성격이 너무 활달하여 과사무실에 들를 때면 선생님을 보고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하며 사무실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인사를 하곤 했다. 선생님은 그런 그를 보며 "성격이 활달해서 좋구나"그러며 처음에는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행동이 반복되자 질색을 했다. 거기다가 학과 사무실 출입이 너무 잦았다. 학부생들이 학과 사무실을 자주 찾을 일이 없는데도 이 학생은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뻔질나게 드나 든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그 이유가 나 때문인 것을 안 뒤로는 아예 사무실 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날은 선생님 표정이 아침부터 무척 안 좋았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듯한 얼굴이었는데 나는 "평소 조용하던 분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길래 저러시나" 생각하며 선생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영숙아! 1학년 강의실에 좀 다녀올래. 가서 오덕환이 보고 수업 끝나는대로 과사무실로 오라고 해"
" 선생님!오덕환이 누구예요?"
"아 거 왜, 사무실에 오면 큰소리로 나한테 인사하는 친구 있잖아. 그 친구 말이야"
그 학생 이름이 오덕환인건 처음 알았다. 뻔질나게 사무실을 드나들며 나한테 야릇한 표정을 짓던, 그래서 질색을 했지만 이름을 알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알 수는 있었겠지만 자칫하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일이어서 꾹 참았었다. 그런 그가 학과 사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유가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그런 것인걸 눈치챈 선생님은 미리 예방 조치를 한 것이었다.

"강선생님이 찾아요"
강의가 끝날 무렵 강의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선생님의 전갈을 전하자, 그는 나를 보자마자 짓던 예의 반색하던 얼굴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뭔가 잘못한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영숙이는 잠깐만 나가 있을래"
오덕환과 함께 과사무실에 들어서자 선생님은 나를 밖에 잠깐 나가 있으리고 하고는 학과장님이 쓰시는 칸막이 뒷 쪽 방으로 오덕환을 데리고 갔다. 학과장님은 마침 강의를 들어가서 안 계신 시간이었다.

그 시간 이후로 오덕환은 과사무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선생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그 오덕환을 다시 본 것은 역시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그를 과사무실로 불러와서였다. 한 학년이 끝나가는 무렵. 그는 낙제를 할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오덕환을 불러다 놓고 뭐라고 그러셨다. 이번에는 나를 사무실 밖으로 내보지를 않으셨다.

"오덕환 너 낙제할 것 같은데 어떡할래?"
선생님의 말씀에 오덕환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계면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뭐 할 수 없지요. 1학년 한번 더 다녀야지요."
"아무리 집안 여유가 있어도 그렇지. 좀 너무했다. 여자들 꽁무니 그만 따라다니고 공부 좀 해라. 남들은 다니고 싶어도 부모 뒷바라지가 안 돼 못다니는 대학인데 그런 아이들 생각도 좀 해서. 아버지가 아무리 큰 부자가 되었다곤 하지만 아들이 공부를 안 해서 낙제한 것을 알면 크게 실망하실라."
"알겠습니다.선배님."
오덕환은 선생님의 어떻게 보면 도가 넘는 충고에 조금은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싹싹하게 대답을 하고는 학과 사무실을 나갔다. 선생님의 말에 자존심을 좀 상하기는 했겠지만 반항할 생각은 안 든 것 같았다. 같은 과 한참 선배인데다가 워낙 고지식한 선배로 학부생들에게 소문이 나있어 잘못 찍히면 안 좋다는 인식이 후배들에게 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 저 학생 아버지가 뭐하시는 분이예요. 선생님?"
오덕환이라는 학생이 과 사무실을 나간 뒤 묻는 나에게 선생님은 의외란 표정을 지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선생님이 묻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안 하는 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이런 나를 잠시 쳐다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정다운 눈길로 " 왜 오덕환이 한테 관심있어?'라고 되물으셨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에요 선생님, 워낙 밝은 표정에다 뭔가 오만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저런 사람은 뭐 대단한게 있길래 행동이 저리도 당당한가 좀 궁금했었거던요."
"그랬니? 그 녀석 아버지가 군 장성 출신이야. 원스타라고 하던가. 거기다 집이 엄청 부자란 소문이야. 아버지가 전역하고 벌인 사업이 무척 잘 된다나봐. 군납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애가 개망나니야. 원래는 착실하고 공부도 잘했는데 집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서 성격이 달라진 모양이야. 고등학교 1,2학년 시절만 해도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서 상위권 성적이었었대. 그런데 집이 졸부가 되면서 공부할 필요성을 안 느끼게 된거지. 그래도 워낙 실력이 탄탄했던 탓에 우리 대학이라도 올 수 있게 된거야. 원래는 S대 법, 상대를 갈 실력이라고 학교 선생들이 인정을 했었대. 그게, 가장 중요한 3학년 때 공부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우리 학교 그것도 점수에 맞춰 적성에도 안 맞는 우리 과를 오게 된거지. 아무튼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된 친구라 학교를 대충대충 졸업장이나 따러 다니는 것 같애. 그게 도가 지나쳐 이번에 낙제를 하게 된거야. 그야말로 복 받은 친구지.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런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팔자인 것이니. 대학에 가고 싶어도 형편이 안돼 못가는 영숙이나 대학원 등록금 마련하느라 야간 고등학교 선생하며 공부하는 나의 팔자에 비하면. 그렇다고 저 친구한테 관심두지 말어. 여자애들 킬러라고 소문이 나 있어. 잠깐 사귀고는 차버린다고 소문이 자자하니까. 더 심한 소문도 있는데 아직 고등학생인 영숙이한테는 차마 말 못하겠다. 아무튼 절대 관심두지 말어."
선생님은 마지막 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 나 강의실에 출석 체크하러 가니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라" 그러면서 과사무실을 나가셨다.

나는 오덕환이란 그 학생이 부러웠다. 선생님한테 들은 말로는 인간성이 변했다고 하는데
원래 사람 자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니 별 상관은 없지만 그가 누리고 있는,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쭈욱 누리게 될 행운의 삶은 부러웠다
태어날 때부터 노력없이도 잘 살 수 있는 행운을 주는 부모를 만난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이다. 노력이라는 것이 부모가 기본적으로 갖춰 준 바탕 위에서 필요한 부분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라면 얼마던지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 삶이어서 아무리 노력을 하려고 해도 그 밑바닥을 헤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삶처럼 고단한 삶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세상의 모습이니 그런 고단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행운를 타고 난 사람들은 얼마나 복받은 사람인가.
자신은 노력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단지 부모를 잘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인간 세상인 법이니.

9.

" 영숙아, 나다. 선생님"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선생님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동시에 목도 메었다.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으응! 그래 잘 있었니?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예요. 선생님 갑자기 사래가 들려서요"
나는 공연히 헛기침을 전화기에 대고 해댔다.
"으응 그랬구나. 난 어디 아픈 줄 알고 깜짝 놀랬네"
" 근데 웬일이세요,선생님?"
"으응 근처 볼 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에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 곧 퇴근 시간이지? 은행 맞은편 지하에 있는 다방에 와 있는데 퇴근하는대로 올래.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
거짓말이었다. 나를 보려고 일부러 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꿈에도 그리던 선생님이 나를 보러 왔다는데 뭐가 대수랴.
"알겠습니다. 마감 끝나는대로 바로 나갈께요"
"선생님이 나를 보러왔다. 그것도 몇 달만에.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아니 해보기는 했지만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마감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빨리 하려고 하는 마음과 달리 손은 마구 허둥거렸다. 지폐 100장 한묶음을 두 번 확인으로 끝내야 되는데 자꾸만 맞지를 않았다.
"아이씨!"하며 짜증을 내는 나를 보더니 옆 자리에 있는 언니가 급기야 한마디 했다. 핀잔이 섞인.
"너 왜 그리 허둥대니. 도대체 누구 전화길래.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해. 그럴수록 더 안맞게 되어 있는게 돈이야."
언니는 전화한 남자가 누군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얌전하게 일밖에 모르던 내게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으니.
"아~ 아니에요 언니. 그냥 아는 친척 오빠예요."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마감을 서둘렀다. 마감은 평소보다 오히려 늦게 끝났다. 점심은 먹지도 못했고 먹을 생각도 안 들었다. 단 1분이라도 빨리 선생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은행 문을 나서니 따사로운 햇살이 눈을 부시게 했다. 어느 덧 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처음 맞는 봄. 가만히 있어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봄. 이 아름다운 봄에 꿈에 그리던 선생님이 나를 만나러 와 계시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저 다방에. 내 마음은 이미 다방 안에 들어가 선생님을 만나고 있었다.

선생님은 다방 입구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계셨다. 다방 문을 들어서자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내가 다방 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자리. 그런데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먼 발치에서 바라봤을 뿐인데도 눈에 뜨이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왜 저리 마르셨대?"
나는 몹시 놀란 마음으로 선생님 곁으로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 오! 어서와라. 이리와 앉아."
나는 선생님 앞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 자리 소개해주려고 교무실로 불러 낸 이후로 마주 보고 앉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등교하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아 간 적은 있었지만, 옆 자리에 앉는 것은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싫었다. 선생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안 좋았다. 연인 사이라면 손이라도 잡을 수 있으니 좋았겠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니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좋았다.

" 그동안 잘 지냈어? 일은 할만 하고? 근데 우리 영숙이 성인이 되고 취직을 하더니 몰라보게 달라졌네. 이젠 소녀가 아니라 숙녀 티가 나네."
다방 아가씨가 차 주문을 받고 가자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며 궁금한게 많은 듯 이것저것 물었다. 그런 선생님의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교복을 입고 있었을 때의 나를 보던 표정하고는 달라 보였다.
"선생님이 이제는 나를 한 여인으로 봐주시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기분이 아주좋아지는 느낌.
"그냥 그래요.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예요. 비록 아르바이트였지만 학과 사무실에서 비는 시간에 책보고 그러는 것만 못해요. 수입이 좋아진 것만 빼고는요."
나는 수입 얘기를 하면서 뭔가 계면쩍어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왠지 좀 쑥스러워서였다. 돈이라는 것이 살아가는데 없으면 절대 안 되는 존재이지만, 그 돈이 없어 대학도 못가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고등학교를 다니고 그랬지만 돈 자체는 좀 깨끗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지내기 때문에도 그랬다. 선생님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학문을 하고 사는 삶이 목표인 선생님에게 돈이란 그리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이 없어 대학을 못 가고 취업을 했고, 선생님도 돈에 여유가 없어 야간에 학생들을 기르치며 대학원 등록금을 벌고 있는데도 돈은 우리 둘에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 돈을 하루 종일 만지며 생활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도.

"네에. 저야 뭐 그냥저냥 다람쥐 체바퀴 돌 듯 지내요. 토요일 오전까지는 죽어라 일하고 토요일 오후하고 일요일엔 쉬면서 못 읽던 책도 읽고 글도 쓰고요. 근데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많이 안 돼 보이세요."
"으응, 아니다. 요즘 신경을 좀 많이 써서 그런 모양이다. 별 일 아니야."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저 졸업하고 나서 한번도 연락 안 주시더니."
나는 조금은 원망이 섞인 말투로 궁금증을 담아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동안 한번 쯤은 연락을 해주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었다. 기다리다 지쳐 "역시 선생님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혹시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기대를 접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으응. 미안하게 됐구나. 그게 나도 사정이 좀 있었단다. 사실은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거야. 어떻게, 오늘 나에게 시간 좀 내 줄 수 있겠니. 다른 약속 잡혀 있는 것 없어?"
"없어요. 선생님"
있을 리가 없었다. 있어도 취소할 판이었다. 사춘기 소녀 시절부터 마음에 담고 있었던 선생님이 내가 사회인이 되자 직접 찾아오신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도 좋았다. 남의 눈에 뜨여도 상관없었다. 이젠 선생과 학생인 사이가 아니라 누가 봐도 떴떳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 잘 됐구나."
선생님은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지만 밝은 얼굴 표정으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럼 우선 이 답답한 다방부터 나갈까? 참! 점심은 먹었니? 난 아직 안 먹었는데"
"저도요, 선생님."
"그래. 그럼 잘 됐구나. 우선 점심 먹고 큰 길 건너에 있는 고궁에 갈까? 거기 가서 내가 할 이야기 하는 걸로 하지."
" 네, 선생님. 근데 하실 이야기가 뭐예요? 궁금해죽겠어요.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요?"
"글쎄다. 나에겐 좋은 일이지만 너한테는 어쩔지 모르겠다. 하긴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면 되니 그리 걱정 안해도 되지만 웬만하면 거절 안 했으면 좋겠구나."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먼저, 은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양식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선배 언니가 결혼을 할 남자 친구와 자주 간다던 곳.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보고 싶었던 곳. 그 사랑하는 사람이 선생님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스쳐 지나 다니던 곳.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
"은행 근처인데 괜찮겠어? 혹시 은행 거래 고객이 있을 지 모를텐데"
" 괜찮아요 선생님. 뭐 어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자랑하며 알리고 싶었다. 제발 누가 봐서 입소문 내줬으면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예금 좀 해놨다고 창구에 올 때마다 데이트하자고 졸라대는 인간들 제풀에 떨어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도 그랬다. 처음 발령을 받고 지점에 갔을 때 옆 자리 고참 언니가 제일 먼저 주의를 준 말이 그것이었다.
"돈 좀 예금해놨다고 곱상하게 생긴 여행원들 보면 추근거리는 인간들이 꽤 있으니 처신 딱 부러지게 잘 해라. 넌 남들보다 외모가 빼어나니 더 심할꺼야. 그러니 더 조심해라"라고.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여행원들에게는 이런저런 유혹이 많았고 거기에 넘어가 불미스런 일을 일으켜 사표를 낸 선배들도 있다고 한다. 좋은 일도 있었다고 했다. 고객 중에 재력이 있는 사람 하나가 며느리감으로 선배 한 명을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아들과 짝지어 주겠다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여상을 나와 은행에 들어 온 여행원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횡재를 했다고 직원들 사이에 두고두고 전해 내려오는 전설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영숙이 너도 외모되고 착실하니 혹 그 전설에 끼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처신 조심하고 일만 열심히 잘 해, 알았지?"
"네, 고마워요, 언니. 명심할께요"
대답은 그리했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우선 당사자가 문제가 아닌가? 시아버지 될 사람이 마음에 들어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당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죽어도 그리 못할 것 같았다. 평생을 같이 사는 것인데 조금 여유롭지 못하게 살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야되는게 맞는 일 아닌가 싶었다. 전설 속의 그 선배 언니를 본 적은 없으니 어떤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의사는 100% 죽이고 현실에 순응하는 그런 삶을 택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난 선생님 팔짱을 끼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선생님 뒤 한발짝 떨어져서 걸었다. 그런 나를 보고 선생님은 "영숙아! 내 곁으로 와서 같이 걷자. 너도 이젠 사회인인데"
"괜찮아요, 선생님, 이리 걸어도 너무 좋아요"라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으로는 "선생님 팔짱을 끼고 싶어요" 그러면서.

음식이 어떻게 입에 들어가는지 몰랐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서가 아니라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음식을 먹는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꿈을 꿔보기는 했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곤 생각을 못했었다.
"왜 음식이 맛이없어? 많이 들어"
" 네, 선생님"
괜시리 목이 메었다. 꿈만 같았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같이 식사를 하는 날이 오다니. 볼을 살짝 꼬집어보고 싶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저 선생님 모르게 힐끔힐끔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10.

봄의 고궁은 아름다웠다. 겨우내 앙상하게 매말랐던 나무가지에는 어느새 연두색 잎들이 조금씩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꽃들도 한창이었다. 특히 만개한 벚꽃들이 마치 나를 반기는 양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고궁 안에는 짝을 지어 데이트하는 모습의 젊은 남녀들이 눈에 많이 뜨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들 모습도 보였다. 모두들 행복해보이는 모습. 그저 지금을 즐기는 행복하고 단란한 모습들만 눈에 보였다.
지난 시절 아픔을 겪은 선조들의 흔적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지는 10여년이 지나 있었지만, 그래서 전쟁의 상처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시절은 아직도 한참 어려운 때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보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내야 할 것이기도 했다. 기왕에 주어진 삶, 아픔과 절망을 보기보다는 기쁨과 희망을 보기위한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그런 그들의 눈에는 선생님과 나도 한쌍의 연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제로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했다.

"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요, 선생님"
이런 나의 헛된 생각을 떨쳐버리듯 한 발 앞서 걷고 있는 선생님에게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참 아름다워 보인다. 마치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영숙이 같이 말이야."
선생님은 이 말을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저기 벚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가서 좀 앉을까?"
이제 할 얘기가 있다고 한 말을 하시려나 생각하며 나는 선생님이 가르킨 벤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바쁘게 발걸음은 천천히.

" 영숙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벤치에 앉은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으셨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선생님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것 같으면서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생님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토록 기다리고 바랬던 이야기를 선생님이 드디어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게 꿈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나를 이성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선생님이 얘기하는 뜻이 무엇인가가 확실해지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선생님을 처음 본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간을 그토록 마음 조리며 지냈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생각이 나서였다.
"영숙이 갑자기 왜 우니?"
선생님은 나의 갑작스런 눈물에 몹시 당황하신 것 같았다.
"아, 아니예요. 그냥 저도 모르게 저절로."
"그럼, 내 의견을 받아 들이는 것으로 보면 되겠니?"
선생님은 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면서 재차 확인하는 의미의 말을 하셨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바라고 기다렸던 일인가. 현실에서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100% 없는 일이기도 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 졸이며 보낸 지난 나날들이었다. 내가 여자라서, 선생님의 제자 신분이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더 큰 장벽이 선생님과 나 사이에는 가로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곧 박사 학위를 받을 대학원 그것도 명문대학의 대학원생이었고 나는 야간 여상을 나온 가난한 집안 출신 은행원일 뿐이었다. 어느 누가 봐도 엄청난 신분상의 차이가 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했다. 선생님을 좋아하면서도 마음에만 담고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 날들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 벽을 깨고 나를 여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말을 지금 한 것이었다. 남보다 외모가 조금 더 예쁘고 선생님이 좋아서 전공하는 분야를 나도 좋아하고 잘한다는 점은 있었지만 그런 여자들은 선생님 주변에 널려있었다. 그녀들은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같은 대학의 선생님 후배들이기도 했으니까.

"선생님 근데 왜 하필 저를..."
"왜 영숙이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도 선생님 주변에 좋은 후배들 많잖아요. 저보다 많이 배우고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은..."
선생님은 나의 이 말에는 아무 대답도 안하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무릎 위에 가지런이 놓여 있는 내 두 손을 꼭 싸안아 잡으셨다. 그러고는,
"영숙아, 사람 좋아지는건 말이다, 이성으로는 안 되는 일이야. 왜 첫 눈에 반한다는 말 있잖니. 그런 말이 왜 생겨났겠니.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니?"
선생님은 이 말을 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셨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푸르렀다. 저녁이 되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할 한 낮의 봄날 햇볕은 마냥 따사로왔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굳어있던 내 마음도 봄 눈 녹듯이 스르르 다 녹아 내렸다. 이제 좋은 일만 쭈욱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야호"하며 목청껏 큰 소리를 질렀다. 마냥 푸르르기만 하늘을 향해, 따사롭기만 한 봄날 햇볕을 향해.

그 햇볕이 서쪽 하늘 너머로 넘어가려면 아직은 한참 시간이 지나야 될 것이었다.

"근데 한가지 문제가 있어"
선생님의 이 말에 나는 "그게 뭔데요?"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 보았다. "뭐 아무거라도 상관없어요. 선생님이 나를 곁에 두겠다는데요. 지옥엘 같이 가자고 해도 갈꺼에요" 이런 마음을 담아 이제껏 한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아니 바라볼 수 없었던 그런 눈빛으로.

"사실 그동안 내가 빨리 연락을 못한건 최종적으로 이 문제 때문이였어. 뭔가하면 어머니 반대가 좀 심할꺼야. 나한테 당신의 삶을 송두리채 바치신 분이라서 며느리로 맞을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셔. 다른 문제는 다 나 혼자 해결하면 될 문제였지만 이 문제만큼은 어머니하고 연관이 있어서 말야. 근데 부딛쳐 해결해야 겠다는 결심을 이제서야 한거야. 영숙이를 포기하는 일은 도저히 안되겠더라구.
어머니에게 인사드리는 것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우선 내 마음을 영숙이에게 알려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어. 나도 학위 따고 모교에 자리잡기까지는 2~3년 더 있어야 되니 어머니는 그때 뵙기로 하면 될 것 같아서 말야. 그동안은 서로 시간이 되는 매주 일요일에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하고 말야."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한 주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버릴 수 있는 토요일 오후가 더 좋았지만 선생님에게 시간이 없었다. 직장인 학교에 수업을 하러 가야 돼서. 그래도 좋았다. 당장 선생님과 인연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만도 꿈만 같은 일이었다. 선생님 어머니 문제는 천천히 부딛치며 해결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지금부터 2~3년 뒤의 일이니 지금은 그 문제는 생각 안하기로 했다. 선생님과 연인관계가 되어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근데 오늘은 학교 안 가세요?"
"으응. 집에 일이 있다고 하루 휴가를 냈다."
선생님은 그러면서 좀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난 너무나 좋았는데. 자세히 말은 하지 않지만 나를 보기 위하여 일부러 휴가를 낸 것 틀림없는 것이기에.

11.

선생님 아니 이제는 나의 연인이 되어 있는 강일호씨는 박사 학위를 따고 모교에 전임 발령이 나면서 직장이던 야간 고등학교에는 사표를 냈다. 애초부터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만둘 생각으로 다닌 한시적인 직장이었다. 동시에 나를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서 연인이 된지 3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짧지 않은 그 시간을 선생님은 한치의 마음 흔들림없이 나를 사랑해 주었다. 애초에 나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나를 찾아왔을 때 이미 결심은 한 터이고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행동을 보여 준 것일 뿐이었지만.

며느리감이라고 데리고 간 나를 본 시어머니는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시어머니 입장이라도 그랬을. 당장 내 앞에 후줄그레 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저 딸도 결혼하겠다면 데리고 온 남자를 에미인 내가 한사코 반대했었으니까. 그 이유가 "얼마던지 더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네가 왜 그 정도 조건뿐이 안 되는 남자와 결혼을 하려고 해"였으니까. 부모의 마음이란게 고생고생해서 키워 놓은 자식 기왕이면 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상대를 만나 잘 살아주었으면 하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시어머니가 며느리감일 나의 조건을 보고 반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마음에 드는 조건은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몰락한 가난한 집안의 야간 여상 출신 며느리.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아들인 선생님에게 아마 이렇게 닥달하지 않았을까?
"네가 뭐가 부족해서 고등학교만 나온 가난한 집 애를 아내로 맞아. 내가 그러라고 시장바닥에서 좌판장사하면서 너를 키운 줄 알아"라고. 실제로 그랬다는 이야기를 결혼한 뒤에 듣기도 했다. 남편으로 부터. 그때는 힘들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웃을 수 있었기는 했지만.

시누이가 될 선생님의 누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선생님의 지금은 누나의 희생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아버지뻘 되는 선생님의 아버지가 그 많던 전답을 공산당에게 몰수 당하고 화병으로 세상을 뜬 뒤 시어머니는 선생님이 유학 중이던 서울로 시누이를 데리고 내려오셨다. 당연히 선생님과 선생님 누이 뒷바라지는 시어머니의 몫이었고. 여자 혼자 힘으로는 벅찬 일, 시어머니는 결국 선생님의 누이를 상급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누이도 당연한 일로 받아 들였고. 미군부대에서 이발사 일을 하며 거기서 번 돈으로 선생님 뒷바라지를 하다가 미군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 생활을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상대도 백인이 아닌 흑인이었다. 기왕이면 백인이면 좋았을 것을. 공산당 때문에 집안이 풍지박산 나지 않았으면 좋은 조건으로 여유로운 집안에 시집을 갈 수 있었을텐데 시대를 잘못 만나 그 시대에 맞는 상황으로 바뀌어 버린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받아들인 결과였다.

시누이의 눈에는 내가 횡재한 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겨우 야간 여상만 나온 가난한 집안 출신 주제에 대학교수 남편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테고. 나도 그런 시누이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세상살이 특히 남녀관계가 정해진 틀 안에서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나도 심정적으로는 백번 동의하지만 문제는 선생님이 제자인 나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이 결심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있는 몇 개월 뒤에 나를 찾아 온 그 때 선생님의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이도 어렵게 결혼을 하고 신혼 첫날밤 선생님 아니 남편이 웃으며 들려 준 이야기로 처음 알게 된 일이었지만.

12.

결코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았던 결혼 허락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허락받을 방법이 없어 노심초사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창 근무하고 있는 중에 선생님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영숙아 큰 일 났다. 어머니가 쓰러지셨어. 빨리 OO병원으로 와"
중풍이라고 했다. 반신불수가 돼서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중증. 선생님은 외가가 원래 고혈압 내력이 있는 집안이라서 그렇다며 날 위로했지만 원인이 우리들 결혼 문제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기로 했다. 시어머니 병 수발을 들기 위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어차피 그만 두어야 될 직장이었으니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 뿐이었다. 병수발을 들어야하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모시고 살아야 될 분이니 돌아가시기 전 병수발은 당연히 해야 될 과정 중의 하나였다. 그 시기가 앞 당겨진 것이고 너무 젊은 나이에 쓰러지신 탓에 병수발 기간이 길어진데 따른 고통,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은행에 사표를 내고 선생님 어머님 병수발 들러 다녀야 된다는 말에 펄쩍 뛰셨다. 차라리 헤어지라고 하셨다. 어차피 격에 안 맞는다고 반대한 양반이니 이 참에 헤어지라고 하셨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선생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는 일이고 나의 남편 사랑하는 마음, 남편이 선생님이던 시절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담았던 나의 마음에 대한 배신이었다. 갈등은 없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싶었다. 결혼 허락을 자연스럽게 받아 낼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길로 은행에 사표를 냈다. 아무 미련도 없었다. 사람들 속에서 보대끼며 사회생활을 하기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삶을 원했던 나이기에 훌훌 털고 나올 수 있었다. 집안 일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한복 가게는 큰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이제는 자리가 잡혀 있었다. 바로 밑의 남동생도 상고를 나와 유명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막내 동생 뒷바라지만 하면 되었는데 이 문제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막내동생은 아마 대학도 가게 될 것이었다. 자기 누나인 나나 형은 가고 싶어도 못 간 대학에. 집안 형편이 안 되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막내로 태어난 덕분에 누나, 형의 도움을 받아서. 모르긴 몰라도 매형이 될 선생님도 모르는 체 하지는 않을테니까.

나를 늘 챙겨주던 옆자리 언니는 나의 그만두는 이유를 듣고는 부러운 눈길과 걱정스런 눈길을 동시에 보냈다. 자기보다 늦게 들어와 먼저 그만두는 것에는 부러움을, 그 이유가 시어머니 될 사람 병 수발 때문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걱정의 눈길을.
"좋아하는 이와 같이 살게 되는 것 같아 잘 된 듯 싶기는 한데 힘들어서 어쩌니? 병수발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닐텐데"
"괜찮아요. 언니. 사랑하는 이의 어머닌데 힘들어도 참아야죠. 뭐"
"하긴, 누가 봐도 차이가 벌어지는 너를 사랑해주는 착한 사람의 어머니니 내가 너라도 참고 하긴 하겠다만 아무튼 시어머니가 건강하면서 결혼 허락까지 해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시어머니가 건강한 상태에서 마지못해 승낙한 결혼을 했을 경우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을 수도 있었다. 시장에서 좌판 장사로 두 자식을 키워 낸 분이었다. 이북에서는 지주댁 마나님으로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사신 분이 자식들을 위해서 궂은 일 마다 않고 뛰어 든 분이었다. 그러니 그 억척스런 성격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눈칫밥을 먹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병수발하는 일이 힘은 들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우선 돌아가실 때 내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돌아가셨다.
"아가, 그동안 고생했다. 고맙구나, 애비하고 잘 살다가 오너라"그러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고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시어머니는 처음엔 내 병수발을 안 받겠다고 하셨었다. 며느리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애한테 신세질 수 없다는게 거절의 이유였다. 그러나 현실이 내편이었다. 당장 병수발 할 사람이 없었다. 시누이는 같이 사는 미군과 함께 오래지 않아 미국으로 가게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사는 곳도 전방 어느 곳이어서 집에 오기도 쉽지 않았다. 모든 여건이 간병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해도 살아갈 날이 아직 한창인 30 초반 나이에 자기 어머니 간병하는데에 온 삶을 들일 수는 없을 터이기도 했고.

시어머니 병수발 드느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생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는 저절로 동거 형태로 이어졌고 시어머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셨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남들 보기 민망하다며 결혼식을 빨리 올리라고 시어머니가 먼저 서둘렀다. 주례는 남편의 은사인, 나 사동일 하던 시절의 학과장님이 서 주셨다. 주례 부탁할 겸 인사드리러 남편과 같이 댁으로 찾아 뵌 우리 둘을 보시더니 "자네 영숙씨를 사동일 시킨다고 데려올 때부터 뭔가 좀 수상쩍더라니" 그러면서 껄껄 웃으셨다. 그렇게 태어 난 아이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딸이다. 그 다음 해에는 아들이 태어났고.

13.

두 자식이 나고 자란 환경은 에미인 나나 아버지인 남편에 비하면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고 자식들은 그리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겠다. 자기가 태어 났을 때 부모가 만들어 가지고 있는 조건은 당연하게 자기들 것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 조건에서 보다 나은 조건들만 바라보며 부러워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니.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조건보다 못한 조건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안 들어왔을테니. 그러니 내가 기대한 만큼은 잘 되지 못한 것이겠지만.

아들은 그래도 나았다. 누가 보아도 엘리트 코스인 과정을 잘 밟아 올라갔으니까. 다만 예술을 하겠다는 걸, 음악을 그리 하고 싶어하는 걸, 그걸로는 밥 벌어 먹고살기 힘들다고, 타고 난 재능이 없이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험난한 길로 들어서는 것은 절대 찬성할 수 없다고 우리 부부 모두 반대하면서, 고시공부를 하던지 취업이 잘 된다는 법,상경계를 가라고 하는 바람에 많이 힘들어 했었다. 결국은 부모인 우리 부부 뜻을 따라줬지만 마음 한 켠에 늘 하고 싶은 일을 담아두고 사회생활을 한 탓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사회생활을 접은 게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제는 아들과 며느리의 문제로 넘어가 있는 때여서 부모인 남편이나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교사하는 아내 둔 덕분에 먹고 사는 문제 신경 안 쓰면서 늦게나마 원래 하고 싶었던 음악공부하면서 행복해하고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고. 다만 아내한테 얹혀 사는 모양새가 된 탓에 에미인 내 병수발을 하고 싶어도 말도 못 꺼내고 눈치나 보고 있는 것이 안 봐도 눈에 빤히 보이지만, 설사 아들이 그러겠다고 하고 며느리가 허락을 한다고 해도 내가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아들한테 추한 꼴 보이고 싶지도 않고 며느리 눈치 보기도 싫어서. 며느리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을 테고.

문제는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저 딸년이었다. 사춘기 시절인 중학교 때부터 애를 먹이더니, 그 이유가 굳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삶이 없다보니, 성장기 시절은 부모인 나나 남편이 뒷바라지 다 해주고 있고, 여자인 탓에 남자들처럼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되는 군대 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하던 다른 무슨 일을 하던 남보다 나은 조건으로 사회에 진출해야 된다는 부담감을 100% 이상 안고 살아야 되는 것도 아니어서, 군대를 갔다왔던 안 갔다왔던 병역의 의무를 마친 남자들 중 괜찮은 남자 하나 만나 결혼하면 일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입장이다보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신의 아쉬움만 생각하며 지낸 탓일 가능성이 많은. 그런데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가 보기에도 부러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것을 잘 활용 못 한 어리석은 삶이라니. 그런 자식을 지켜봐야 되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쓰라린지 알고는 있었던 것인지.

선생님 아니 남편은 그리 재미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책과 음악, 직장인 학교와 집뿐이 몰랐다. 어려워진 집안 형편 탓에 힘들게 공부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원래 성격이 그렇다고 봐야된다. 재미없는 성격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조용한 성격인 탓에 서로 마음이 통한 것일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어쨌던 이런 부모의 성격이 딸에게는 안 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친, 외할아버지들의 풍류를 좋아하던 성격을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 잠재되어 있으면서, 언제던지 튀어 나올 수 있는 그런 끼. 삶의 힘들고 어두운 면이라곤 태어났을 때 이미 병석에 누워있는 친할머니를 본 것이 전부일테니.
에미인 나나 아버지인 남편의 조용한 성격은 집안이 몰락해버린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참혹한 전쟁을 겪은 탓에 형성된 후천적인 면도 많이 있을테니 말이다. 특히 남편의 경우는 더욱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도 집안이 몰락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직접 겪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 시절이어서 피부로 덜 느꼈지만, 남편의 경우는 서울로 유학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집이 초토화되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테니 말이다. 거기다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전쟁을 직접 겪었으니, 지휘부에서 전령일을 하며 복무한 덕분에 단지 적이라는 이유로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을 해야만 하는 최일선 경험은 안 했다곤 하지만, 3년이란 기간 동안 전쟁 현장에 늘 있으면서 그 참혹함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테니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권력을 가진 인간들의 어딘지 모르는 끝도 없는 탐욕 때문에 힘없는 한 개인들은 얼마나 무기력하게 희생되어 가는지를.

이 양가 조부님들의 풍류를 즐기는 성격을 물려받은 것이라면 집안 환경은 어쩌면 최악일 수도 있었겠다. 병석에 누워 계신 할머니에다 원래 조용한 성격의 부모가 할머니 때문에 더욱 조용히 지냈으니, 집안 분위기를 늘 조용하게 지내야 하는 쪽으로 남편이나 나나 이끌었으니. 자라가면서 병석에 누워 있는 할머니를 계속 봐야했으니 이것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여기다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조건이, 남자들처럼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대하여 큰 부담이 없는 조건이, 스스로를 채찍질 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삶을 살아도 되는 조건이, 당장 눈 앞의 즐거운 일만 보며 추구하는 쪽으로 관심을 갖게 한 것 아닌가 싶다.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들은 그러지 않은 걸 보면.

14.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보게 되어 있는 법이다. 물론 최고의 권력, 재력을 가진 부모를 만나서 살게 된다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이런 부모를 만나는 행운을 갖고 태어나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든 일일 터이니 대부분의 삶들이 그렇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내 부모보다 돈이 많은 부모이면 좋겠고 권력이나 명예가 높은 부모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현실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면 자기보다 못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보고 위안을 삼으며 필요한 부분은 얻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데 사람들은 그러지를 않고 자기보다 나은 여건의 사람들을 보며 그저 자신의 지금 처지를 비관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일쑤이다.

내 저 딸도 아마 그런 것이었을께다. 아버지가 명문대학 교수지만 그래서 어지간한 집안의 아이들보다 엄청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이지만 물질적으로는 그리 풍족한 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에미인 나나 아버지인 남편이 자란 환경에 비하면 너무나 축복받은 여건에서 나고 자란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한테 전혀 뒤질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라고 사대문 안, 소위 이 나라 내노라하는 집안 자제들만 다닌다는 국민학교에 보내고, 밤낮으로 닥달을 해서 공부시켜 명문이라고 불리는 중학교에 보낸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게 한평생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인데, 형편이 되는 다른 집 부모들 다 그리하는 데 말이다. 자식이 보다 잘 되라는 마음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심지어 대학까지 딸년과 같은 학교를 다닌 아이가 있었다. 당연히 처음엔 몰랐던 일이었고 딸이 어렵게 어렵게 제 아버지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을 제 아버지 덕분에 합격을 한 뒤에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 딸년한테 들어 안 것이니 처음 그 아이를 본 뒤로 10여년은 지난 뒤의 일이다.
딸은 대학 입학식이 끝난 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쓸데없는 일이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딸의 버릇이었다. 사춘기,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앉은 그 뒤로 쭈욱.

이럴 때 해결 책은 딸이 기분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기로 했고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학교 들어간지 아마 1개월쯤 지났을까, 그날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밝은 표정으로 대문을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엄마. 우리 과에 희한하게 생긴 남학생이 하나 있다."
"뭐가 어떻게 생겼길래 희한하다고 호들갑이냐?"
" 응! 생긴 것도 여자같이 곱상한데다가 엄청 수줍어하는 성격이어서 여학생들한테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해. 근데 이 남학생 나한테 마음이 있는지 나를 볼 때는 눈빛이 좀 반짝이는 것 같아. 호호 "
" 그래? 아마 너한테 마음이 가는 모양이구나. 하기사 너 정도 외모면 모든 남자애들이 다 좋아할께야. 그러니 몸가짐 조심해 잘 하거라. 중, 고등학교 시절처럼 철없이 놀아 엄마 속 썩이지 말고."
"피이, 엄마는 내가 어린애유, 이제는 정신 차렸다우. 그때는 그냥 잠시 방황을 한 것이지."
딸년은 그러면서 지난 사춘기 시절에 속 썩인 것이 많이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어지간히 에미인 나와 아버지인 남편 속을 썩이더니만.
"그래, 그 남학생은 출신학교가 어디던?"
그냥 의례적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특별난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닌. 뭐 틀림없이 5대 사립
아니면 지방 명문고 출신이겠지 생각하며. 이 학교 다니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딸의 대답이 엉뚱한 쪽으로 돌아왔다. 전혀 예상도 못 한.
"아참! 이 동기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동기 중 유일하게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이야. 그것도 명문 실업고등학교도 아닌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이름없는 학교야. 그래서 그런지 몇 년을 꿀었더라구. 3년인가...? 근데 그 중 2년은 투병 생활을 했대. 뭐 폐결핵이었다나. 그래서 본격적으로 공부한 건 1년 뿐이래. 왜 그 유명한 재수학원 있잖아. D학원. 거기에 1년 다니며 공부했대."
" 그 학생 참 대단하구나. 명문대학을 인문계도 아닌 실업계 출신이면서 거기다가 투병 생활까지 했다면. 집안은 어떤 것 같던 "
" 응 그냥 평범한 집안인가봐. 내성적인 성격인 탓에 말도 별로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딴 동기들 말로는 아버지가 월남전 때 그곳에 가 있었대. 요리사로 미군부대에 근무했었는데 그 미군부대가 월남으로 이동하면서 같이 갔다나 봐. 그정도까지만 동기들에게 이야기 한 것 같아.

베트남 전이라면 끝난 지 몇년이 지나 있었다. 5년 정도 됐나 뭐 그럴 것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이 처음으로 패했다고 한 전쟁. 미국은 그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병력들까지 빼내간 모양이었다. 결국은 패하고 말 자기들이 먼저 일으킨 전쟁에 병력이 모자라. 자국내 여론이 안 좋아 신규 병력 충원이 쉽지 않은 탓에. 소문이 그럴꺼라고는 했었지만 거기에 우리나라 민간인이 처자식 먹여 살리는 먹고사는 문제에 연관되어 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딸의 입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 학생은 아버지가 월남에 기술자로 가서 돈을 벌어 온 바람에 대학에 올 수 있었었나 보네. 아마 월남전 아니었으면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꿨을지도 모르는데."

그랬을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는 애들은 남자건 여자건 부모가 대학 보내줄 능력이 안되는 집안의 애들이었다. 처음부터 공부 머리가 없는 아이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도 부모 뒷바라지가 안 되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위한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내 주변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어서 만약 집안 형편이 되었더라면 실업계 그것도 야간을 다녔을 리가 없었으니.

" 그 학생 어쨌던 참 대단하네.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에 투병생활까지 했다니 의지력이 보통 강한게 아닌 것 같네. 그나저나 그 학생 아버지 지금은 뭐하신대? 월남전 끝났으니 귀국했을 꺼 아냐"
"뭐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남학생들도 모르는 것 같던데. 굳이 이야기 안 하는 것을 보면 좋은 쪽은 아니지 않을까? 자랑할 일이라면 벌써 알고들 있을텐데."

러면서 딸년은 공연히 실없는 웃음을 실실 웃고 있었다. 나는 딸년의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를 알고 있었다. 뭔가 모르게 그 남학생한테 미안한 마음을 담은 웃음. 자기때문에 입시에서 떨어져 후기 대학을 갔거나 재수를 하고 있을 그 누군가가 있을꺼라는, 전에는 전혀 안 해봤을 생각이 불현듯 들은 듯 싶은 그런 웃음이었다. 부모 아니 아버지를 잘 둔 덕을 본데 대한 고마운, 겉으로는 들어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을 담은 웃음. 세상은 부모를 잘 만나면 이리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딸이 직접 보여 준.

15.

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대학이었다. 딸은 중학교 시절 뭔가에 비틀려 공부를 멀리 한 탓에 고등학교를 명문이랄 수 없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도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가출을 하는 등의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남편이나 에미인 내 복장 터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3학년 올라갈 무렵 담판을 지었다.
" 너 정신 안 차리면 절대 대학 못간다. 더구나 아버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다. 지금 결정을 해라. 정신차리고 공부해서 아버지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을 가던지 아니면 고졸 학력으로 끝낼 것인지. 다른 대학은 절대 보내 줄 수 없다. 등록금도 전액 다 내야하겠지만 아버지가 재직 중인 대학에 비해 인지도도 훨씬 떨어지지 않니? 더구나 시험에 혜택도 있단다. 아버지 말로는 교직원 자녀에게는 5% 가점 혜택이 있다고 하시더라. 대학 입시공부를 안 해본 나는 잘 모르지만 5% 가점은 대단한 거란다. 채점을 해보면 단 1점 차이에도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단다. 그러니 5점을 미리 벌고 들어가는 혜택이 얼마나 대단한건지 알 수 있지 않겠니?"
딸이 에미인 내 말에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힘을 쏟은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단 1년 공부해가지고 합격한다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국민학교 때부터 다잡아 시켜놓은 기초 실력이 도움이 된 것인지 어렵사리 합격을 했다. 아버지 잘 둬 5% 가점 혜택을 받은 탓에 턱걸이로.

남편으로부터 "합격이 됐다"는 전화를 받은 날 나는 속으로 이제 되었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었다. 남자가 아니라 군대 갈 일도 없을테니 그저 학교 생활 잘 하다가 좋은 짝 만나 시집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도 내 뜻대로 안되고 말아 결국은 지금 저 모양이 되어 있지만.

"근데 너 먼젓번 입학식날 왜 그리 속상해서 집에 들어왔었니?"
"으응! 아 걔 있잖아. 중학교 때 친했다가 헤어졌던 애. 그 아이가 우리 과에 들어왔더라구. 그것도 과 톱으로. 그래서 기분이 잡친 거였어. 근데 뭐 이제 괜찮아졌어. 걔도 공부하는데는 진력이 났는지, 아니면 이제 그만하겠다는 생각인 것인지 남자 만나는데만 열심이더라구. 사촌 오빠 친구라는데 우리 대학 다른 과에 다니나봐.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둘이 붙어 다녀."

누군지 짐작이 갔다. 딸이 하도 이 아이 이야기를 해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아이일까 궁금해 학부모 회의 때문에 학교 갈 일이 있을 때 일부러 교실까지 찾아가 교실 창문을 통해 바라다 봤었던 아이였다. 엄마가 의사라고 했다. 산부인과 의사. 전쟁이 끝나고 한창 아이들 많이 낳았던 시절에 큰 돈을 벌었을. 그래서 그런지 집이 엄청 부자라던 . 공부도 잘 해서 반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는다던 . 행동거지도 반듯해서 한 눈 한번 안 팔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을. 그래서 딸아이가 동일계 고등학교에 못 간거와는 달리 아무 문제없이 동일계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간. 내 저 딸년에게 상처를 줬던. 아니, 준 것이 아니라 딸년 스스로 상처를 만들어 가진 것이었지만. 그 아이라면 충분히 과수석 입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래 이젠 다 잊고 친하게 지내거라. 사실 네 스스로 문제를 만든 것이지, 걔는 특별히 이상하게 행동한 것도 없었다면서?"


16.

중학교 시절, 딸은 이 아이 때문에 극과 극을 오가는 행동을 했다. 마음에 드는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고 좋아 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으로 헤어졌다고 했다. 이후 공부하고는 담을 쌓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일계 명문여고 진학을 하는데 실패하여 이름도 없는 집 근처 학교엘 들어가야 했었다. 딸이 그 아이와 헤어진 이유는 집안 경제력 차이 때문이었다. 중학생 나이에 큰 돈 쓸 일이 없을 터인데도 항상 용돈을 아껴써야 하는 자기와 달리 늘 풍족하게 쓰는 그 아이가 부럽다못해 샘이 났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그 아이 집에 갔다 와서는 신경질을 낼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것 같기도 했고.

집안 형편은 크게 여유롭지는 않았다. 대학교수 월급이란게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의외로 적었다. 교수란 직함이 주는 명예를 값으로 매길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굳이 값을 매긴다면 너무 적다는 쪽으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고소득층인 의사와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비교도 안 되었다. 거기다가 몸져 누워 있는 시어머니 약값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의료보험이 있는 시절도 아니었으니. 그래도 나에게는 여유로운 시절이었다. 결혼 전 친정 가난했던 시절에 비하면 말이다.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시어머니, 시누이가 뒷바라지를 한다고는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라는 등록금, 책값을 마련하느라 과외를 안 할수 없는 생활이었으니까. 그러나 딸년은 그런 가난을 모르고 자랐으니 당장 지금 부족한 것만 생각하며 지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말로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너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들을 보며 지내라고 해봤자 그게 귀에 들어갈 리도 없었다. 부모가 가르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못하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될 것이고 하면 마음이 평안해 질 수 있었다. 후자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전자로 갔다. 딸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딸은 대학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고 아들은 죽자사자 공부에 매달렸다. 남자이기에 그게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에 그랬을 것이고 남편이나 나도 그리 해주길 바랐다. 비록 자기 적성에 안 맞는 분야였겠지만 자기 적성에 맞춰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남자는 사회 진출을 어떻게 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아들을 독려했다. 아들도 일단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테고.

나와 남편은 늘 행복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둘 다 추구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냥 같이 있는 것으로 족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집안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남편은 밝은 음악도 듣기 시작했다. 나와 책 다음으로 좋아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의 소양을 가지고 있던 클래식 음악을. 모차르트, 보케리니를 특히 즐겨 들었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베토벤을 주로 듣더니 바뀐 것이다. 달라진 집안 분위기와 함께. 남편은 내게 "모차르트가 몇 년 늦게 태어나고 또 몇 년 일찍 죽었지만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도 나고 활동하는 지역이 다른 탓에 전혀 교유가 없었던, 둘 다 그리 행복한 삶만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은 참 맑고 곱다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당신도 시간 있을 때마다 들어보라"고 그랬다. 특히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을 들어보라고. 직접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전문 음악인과 같이 이 음이 어떻게 활을 움직여야 나오는 것인지까지 알면서 듣는 수준의 감상을 할 수는 없겠지만 참 좋다고.
남편 덕분에 나도 클래식에 대한 소양이 제법 생겼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게. 음반 구입비로 적지 않은 돈을 지출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하는 일이고 음반 구입할 때 마음이 나를 사랑해주는 만큼은 아닌 것을 알기에. 다른 남자들 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데 쓰는 돈은 단 한 푼도 없었기에.

집안에는 평화로움이 흘러 넘쳤다. 딸이 느닷없이 결혼하겠다고 한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 4학년 말 무렵까지는...

17.

그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딸의 과 동기인 딸이 자기를 보는 눈 빛이 호감인 것 같아 보인다던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남학생 이야기.

딸의 대학 1학년 생활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2월 초쯤이던가, 그날 따라 딸이 집에 늦게 돌아왔다. 공부에는 별 관심없이 여유롭게 즐기는 대학생활이었지만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은 엄금을 한 남편 때문에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아니면 늦는 일이 없는 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속 썩인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수업이 비는 시간을 이용하면 필요한 것을 충분히 해결 할 수 있기도 했을 터이니.
"무슨 일이 있었니. 왜 늦었어? 아버지 걱정하신다."
"으응! 우리 과 남학생 한 명이 내일 군대를 가. 그래서 과에서 송별회를 해줬어. "
"누군데 벌써 군대를 가니? 아직 1학년도 안 마쳤는데"
" 그 늦깍이 남학생 있잖아, 전에 내가 말한.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3년을 꿀었다는. 나이가 차서 작년 재수할 때 신체검사를 받은 탓에 연기도 못하나봐. 그래서 내일 간대."
" 이 추운 날씨에 고생 좀 하겠네. 근데 그 학생 폐결핵을 앓았다며 어떻게 군대를 가니?
몸이 많이 허약할텐데?"
"몸이 약한 것은 맞는데 영장이 나온 걸 보면 가는 조건은 되는 모양이지 뭐. 난들 알수 있나? 근데 걱정이 되기는 해. 과 다른 남학생들이 교문부터 교양학부 건물까지 케이블카 설치해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몸이 약하니까."

교문에서 교양학부 건물까지는 거의 1키로가 다 되는 거리였다. 큰 경사는 아니었지만 산자락을 깍고 학교가 들어선 탓에 교문에서 강의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경사가 있었다. 걷는데 좀 부담이 되는, 낮은 고개를 향해 올라가는 듯한. 그래서 등교할 때는 하교할 때보다 힘이 들었다. 딸년 동기들은 아마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 그 학생 성격도 너무 얌전하다면서? 그러면 몸도 몸이지만 드센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잘 견뎌내려나 그것도 모르겠구나" 나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엉뚱하게 군대가서 고생할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워낙 속을 많이 썩이는 자식들을 둔 부모들을 보고 당사자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그러면 이 학생은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부모 속을 썩이는 형태의 학생은 아니지만 마음을 조리게 할 스타일이 아닐까 하고. 하기사 자식 군대보낸 부모 마음이 어떨지는 불과 몇 년 뒤 나도 직접 겪게 된 일이니. 한치 앞도 못 내다본 어리석은 마음으로 그 학생이
다녀오길 마음 속으로 빌어주었다. 일면식도 없는 학생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 되어서.
" 그나저나 그 남학생 너하고 학교에서의 인연은 일단 끝난거네. 제대하고 나오면 너는 졸업을 앞둔 때가 되어 있을테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렇지만 동기이니 얼굴 볼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지 않을까? 그게 언제가 될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딸은 이리 말하면서 자기도 알 수 없는 일 아니냐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참 아리송한 표정.

그 뒤로 그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딸년한테 들은 것은 불과 10여년 전 일이다. 그러니 무려 25~6년이 지나서인데 그때는 이미 딸년의 삶이 팍팍하게 돌아간 이후였다. 나나 남편은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고. 남편이 학교에서 정년 퇴직을 한지 몇 년 안 되었을 때였다.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쯤.

18.

날은 딸이 자신의 삶이 고달파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모습으로 집에를 들렀다. 물어보나 마나 아쉬운 소리 하려고 왔을테니 그냥 뭐하러 왔느냐는 표정으로 반가운 표정도 안 짓고 맞아들인 날이었다. 남편은 딸을 보자마자 마음이 안 좋은 듯 서재로 들어가버렸다. 젊은 시절, 부모인 나와 남편이, 그 중에 특히 에미인 내가 그리도 반대하던 결혼을 한 결과가 결국 안 좋은 상황으로 끝난 뒤라 난 딸을 볼 때마다 안스럽기도 했지만 미운 마음이 더 많았다.

" 에미 말 안 듣더니 꼴 좋게 됐다"라는 말을 속으로는 수도 없이 말했지만 차마 입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마음만 아파했었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니. 생활은 문제가 없는거야?"
" 뭐 그냥저냥 지내요. 그렇지 않아도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딸은 미안한 표정도 없이 무슨 빚받으러 온 빚쟁이마냥 당당하게 말했다. 자식은 평생 빚쟁이라더니 딸이 딱 그랬다.
"무슨 부탁이길래 그러느냐?"
사실은 이번에 자그맣게 장사를 좀 해볼까해요. 그래서 말인데 돈 좀 만들어 주세요.
"얼마나?"
"1억정도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집에 그런 돈이 어디 있느냐? 있는 것이라고는 이 낡은 집 한채 뿐인데. 생활은 아버지 퇴직금 은행에 맡겨 나오는 이자로 하고 있는 것 잘 알테고"
"집 담보로 해서 대출 좀 받아주시면 안돼요? 원금과 이자는 내가 낼께."
아무리 자식이 죽을 때까지 빚쟁이라고는 하지만 해도 이건 너무 한다 싶었다. 에미, 애비가 죽고 난 뒤에야 저희 남매가 찢어가지던 말던 상관할 일이 아니었으나 당장은 살아야 될 집 아닌가? 그래도 어쩌는 수 없었다. 잘못되면 길거리 나 앉게 될 것이 눈 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자식 일이라면 해 줄 수밖에 없는게 부모 마음이었다. 남편은 펄쩍 뛰겠지만 결국은 해 줄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자식들 한테 물려 줄 집인데 미리 넘겨주는 셈 칩시다" 그럴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한테 얘기해보기는 하겠다만 허락이 떨어진다해도 대출은 어디서 받으려고. 담보 있다고 대출해 주는 것은 아니잖니? 은행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너도 아다싶이 없지 않느냐? 내가 젊은 시절에 은행에 다녔다고는 하지만 불과 몇 년 다녔을 뿐이고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아는 사람들도 다 퇴직했을 터인데. 아버지야 평생 집하고 학교 연구실 뿐이 모른 양반이니 더욱 그렇고"
" 아! 그건 걱정 안해도 돼 엄마. 내 대학 동기 중에 은행 다니는 사람이 있어."
딸은 그러면서 자기의 고단한 삶 때문에 부모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듯 환한 표정이 되어 목소리까지 생기가 돌아 말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문과 대학 출신이 무슨 은행이야. 그게 도대체 누구야?"
나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딸에게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과대학 출신이 은행에 취업을 하려면 전공과 관계없는 공부를 해야했을 터인데 딸년 동기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 아닌가. 하기사 문과대학 출신이라고 기업체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을테니 은행에 다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는 한 일이었다. 들어가느라 전공과 관련없는 과목 공부하느라 고생은 좀 했겠지만.

"엄마 기억나? 1학년 때 군대 갔다는 동기. 아! 거 왜 있잖아?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에다가 폐병으로 2년을 투병생활 했다던."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딸년의 많지 않은 30명 동기 중에 제일 먼저 내 머리에 각인 되었었던. 워낙 특별난 케이스의 학생이어서 좀처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던. 그 학생 이야기를 딸은 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 동기가 은행에 다니던?. 근데 어찌 알았어?"
"알기는 젊은 시절부터였는데 단지 엄마한테 말을 안 했을 뿐이야. 동기들 소식은 따로 만나지는 않아도 다 알게 되어 있어. 만나는 동기들을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어 있거든. 그래서 알고는 있었는데 만난 것은 최근 들어서야. 내가 사는 지역에 이 동기가 살고 있더라구. 친했던 동기한테서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이 동기도 나와 있더라구. 요즘 한달에 한번 꼴로 만나. 동기 댓 명이 함께."
"근데 어떻게 은행엘 들어갔대냐? 네 말로 미루어보면 인문계가 딱 적성에 맞는 학생 같았는데."
"으응, 그게 사연이 좀 있어.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취업을 한 모양이야. 제대하고 복학해서 3학년까지만 다녔대. 가장이나 다름없는 입장이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해야 됐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학문을 하려던 꿈을 부득이 접고 취업을 했던 모양이야. 다니는 은행이 정부투자기관인 국책은행이어서 학력 제한을 안 받았대. 현재까지는 그 정도만 알아."

딸이 여기까지 한 이야기만 듣고도 그 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집안이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어 자신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도 그랬다. 당장 나만해도 거기에 해당되었다. 집안을 부양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학 진학 자체를 꿈도 못 꾸었으니까.
난 그 학생에 대해 깊이는 알지 못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픔이 많이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상상하는대로라면 이 학생은 은행일이 성격에 안 맞았을 것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학문이나 예술등 아무튼 자기 머리를 쥐어짜는 일인데 은행일은 그와는 정반대인것을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이가 40중반쯤 되었을테니 직급이 꽤 높겠네. 지점장이야?"
"부지점장이래. 결원만 생기면 바로 지점장 발령이 나게 되어 있는. 근데 다니는 걸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아. 기회만 생기면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을 자주 비추더라고."


19.

딸이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다며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건 대학 졸업반이던 4학년 말 무렵이었다. 졸업할 때가 다 되었고 특별히 사회생활할 의욕도 안 보이던터라 결혼을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던 터에 잘 되었다 싶었다. 어떤 남자일까 궁금해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중매 결혼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딸은 내 짝은 내가 고르겠다는 주의였다.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격에 맞는 배우자를 골라 주고 싶었고 그런 조건으로 중매도 들어왔지만 남편은 탐탁하게 생각지를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데리고 오라고 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게 최고야. 조건은 나중이지. 당신과 나를 보면 잘 알지 않소?"
남편은 그런 말을 하면서 지난 나날들이 생각나는 듯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조건인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 준 사람.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을 경우 그러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거기에 해당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벌써 40년 넘게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이면서도.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여자의 삶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일생이 좌우된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이 좋은 남자를 만나야된다고 생각했다. 내 경우도 나에게는 과분한 조건의 남편에게서 사랑을 받은 것이기에 지금까지 행복한 생활을 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하는 남자냐. 학교는 어디 다녔고. 집안은 어떄?"
"으응, 자그마한 회사를 다녀. 학교는 국립 S대학교 공대 다녔고. 집안은 딱히 내세울 것은 없는 평범한 집인 것 같애."
출신학교는 일단 합격이었다. 집안이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면 연애로 발전한 사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젊은 남녀간에 좋아하는 마음이 싹터 연애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우선은 외모를 보고 반한 것일테니 집안을 따질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거기다 결혼까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조건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일테니까.
"집으로 한번 데리고 오렴.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봐야하지 않겠니?"

딸이 데리고 온 남자는 한눈에 봐도 훤칠하게 참 잘 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다. 같은 남자들이 봐도 반할 정도의 외모. 딸이 반할 만했다. 딸도 한 미모하니 외모상으로 보면 이리 이울리는 짝이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마음 한 편이 불안했다. 그것은 이유가 뭔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살아온 연륜이 깊어짐에 따라 저절로 생기게 마련인 그런.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외모가 지나치게 잘 생긴 사람은 언젠가는 꼭 배우자를 마음 아프게 할 일을 만들 가능성이 많다는게 평소 내 생각이었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지켜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 저절로 얻어진 체험적 결론인. 편견일 수도 있지만 외모가 빼어 난 사람들은 꼭 인물값 한다는, 그 주된 이유는 본인이 만드는 것도 있지만 주변의 유혹이 많다보니 저절로 그리 된다는.

"왠지 모르게 썩 내키지가 않는데 꼭 결혼해야겠니?. 여보 당신은 어때요? 난 뭔가 모르게 찜찜하네요."
딸의 결혼 상대자를 보내고 난 뒤 느낀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내가 한 말.
"글쎄 난 뭐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지 않나 싶은데. 무엇보다도 둘이 좋다고 하니 말이요."
남편은 둘이 좋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남편 성격으로 봐서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여보 사내애가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요? 여자들도 인물이 너무 반반하면 속 썩이던데 남자는 더하지 않겠어요. 일평생 살아가는게 무슨 단거리 경주도 아니고 둘이 좋아 죽고 못사는 건 신혼 고작 몇년일텐데 말이에요."
" 당신 그 생각엔 난 반대요. 다 사람 나름 아니겠오. 대표적으로 나를 보시오 허허"
남편은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또 나를 정답게 쳐다보았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나를 제자 시절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지켜보고 돌보아 주면서 이제 노년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 있는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그런 사람. 그러나 남편 같은 사람이 그리 흔할까? 오히려 그 반대라는 생각이 더 많았다. 젊은 시절 불같이 사랑을 하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더냐 싶게 갈라서는 걸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 유명인들도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을 장식하지 않던가 말이다.
"근데 직장이 왜 번듯한 곳이 아니고 듣도보도 못한 작은 회사야. 그 사람 학벌로 보면 큰 회사들도 골라서 들어갈 수 있을텐데"
딸은 내 이 말을 듣는 순간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 그 회사는 아는 먼 친척이 운영하는 회사래. 경영이 어려우니 좀 도와달라고 해서 가 있대."

거짓말이었다. 다닌 학교를 속인 것은 아니었지만 졸업을 못 했다. 쉽게 얘기해서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번듯한 직장에 취업을 못한 것이었다. 졸업을 못한 이유는 뻔했다.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 결론은 딸의 앞날이 그리 순탄한 삶이 안 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살이는 사랑 하나만으로 버텨질 수 있을 만큼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다. 더구나 남자가 아닌 여자의 경우는 결국 남편인 남자의 생활능력에 따라 자기 삶이 좌우되기 마련인 법인데 배우자 될 사람이 집안이 가난하여 대학을 졸업 못 할 정도라면 기본 자격이 미달 된 것이나 다름없다. 또 모른다. 학력 제한이 없는 고시에 도전해서 합격을 했던지 아니면 정부투자기관에 다니는 것이라면. 그게 아니라면 졸업장이 없으면 월급쟁이로 출세하기는, 아니 취업 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인 것이다.

"헤어지거라.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행세하기 어려운게 이 나라잖니. 네가 뭐가 부족해서 장래성이 안 보이는 그런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그러니? 사람 좋아하는 것 하나만으로 그 길고 긴 세월을 살아낼 수는 없는 법이란다. 더구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건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는 것이고."

딸이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데 반대를 하는 부모 마음을 헤아릴 생각, 정신 다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엄마는 대학 근처에도 못갔지만 지금 잘 살고 있잖우" 하면서 "자꾸 반대하면 어디 가서 칵 죽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해댔다. 이기기 어려웠다. 다 자기를 위해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에미 마음을 알리가 없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식 낳아 키워봐야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자기가 부모가 되어 자식 때문에 마음 조리는 나날을 보내봐야 알 수 있는, 지금 현재의 삶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허락해줍시다. 둘이 좋으면 되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하우. 계속 반대했다가 또 마음 아픈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오. 자기 인생이니 알아서 잘 살아가길 바라고"

남편이 결혼을 허락해주자는 이유는 딸의 "수틀리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이 단순한 협박성이 아니란 걸 이미 겪었기 때문이었다. 자식을 앞 세우는 일을, 그것도 사고가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일로 이미 겪은터라 남편은 그걸 더 두려워했다.

20.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일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다행이 미수로 끝나 60이 다 되어가는 나이까지 살아와 지금 내 앞에 저리 후줄그레 한 모습으로나마 서있지만, 만약 그때 부모인 나나 남편을 앞서 세상을 등졌다면 우리 부부는 과연 남은 생을 잘 살아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절대 아니다라는 쪽으로 죽을 날만 바라보며 지내고 있는 지금도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남자인 남편은 그래도 덜 했을지 모르겠지만 뭐 큰 차이는 없을 것이었다. 아픔을 소화시키는 방법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법이니.

딸이 목숨을 끊으려 한 이유는 지금도 도통 모르겠다. 딸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아니라 나도 아픈 상처를 굳이 들어내고 싶지 않아 참고 지내왔으니. 다만 막연하게나마 생각이 드는 건 아마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마련인 세상에 대한 염증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데 딸의 깊은 속내까지는 비록 에미라도 알 수는 없는 법이니.

그게 아마 고등학교 갓 들어가서 였을 것이다. 딸은 다니던 명문 여중의 동일계 고등하교 진학에 실패하고 이름도 없는 학교에 진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책임이 중학교 때 2학년 무렵부터인가 무슨 이유에선지 공부를 멀리하고 방황한 자기에게 있지만 이에 관계없이 자존심을 무척 상한 모양이었다. 특히 3년 내내 라이벌로 여기고 지내던 의사엄마를 둔 친구는 무난히 동일계 고등학교에 진학한데 따른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내 배 아파 난 새끼지만 그 뱃속을 알 수 까지는 없으니.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휴일이면 늘상 그렇듯이 늦잠을 자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침 먹을 시간이 되어도 방에서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밥이라도 먹고 다시 자게하던지 하려고 방문을 두드리니 인기척이 없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방문을 열어보니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도 없고. 예감이 이상해서 비상 열쇠를 찾아 부랴부랴 문을 열어보니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다량의 수면제를 먹은 것이었다. 치사량을 넘지 않아 목숨은 건졌지만 기가 막혔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집히는게 있다면 혹 집안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였는데 이건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던 시절에 아버지가 대학 그것도 명문대학 교수인 애가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많아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것인지. 아마도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부모지만 절대 알 수 없는 영역의 자식 마음.
"이년아 내가 네 팔자로 태어났다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으로 살텐데 도대체 네가 뭐가 부족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해. 아버지, 내노라하는 대학의 교수지, 너는 남보다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 네 또래 남들이 부러워하지.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목숨을 끊으려고 해. 참 복에 겨워 생지랄이구나. 우라질 년"
딸의 목숨이 살아날지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딸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속으로 수도없이 욕하면서.

복용한 수면제가 치사량이 아니어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뒤로는 딸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그 뒤로는 그런 시도를 안 했지만 그것은 결과물이었을 뿐 지내온 나날은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다. "너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들을 수는 없었다. 제발 무탈하게 잘 지내주기만을 빌었다. 제 어머니 아버지 금슬 좋게 잘 사는 것을 보고 지내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에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면서.
" 저 녀석 돌연변이 아닐까?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자기 부족한 부분만 보는 어리석은 바보인"
남편은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하며 딸하나 있는게 바람대로 커주지 않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만이 없던 남편은 딸 때문에 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다. 해결책은 없었다. 다 큰 자식이니 스스로 깨달아 제 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는 것밖에는.

21.

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한 듯 했다. 적어도 신혼 초기에는. 사위도 예상보다는 사회생활을 잘 하는 듯 했다. 작은 회사인데다 비록 졸업은 못했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그런지 승진도 빨랐다. 학벌이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과 한 학년만을 남겨두고 그만 둔 것이라고 하니 졸업장을 딴 사람들하고 비교해서 고작 1년을 대학 생활을 적게 했을 뿐이었으니까. 그 1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우리나라 풍토였다. 졸업장이 있다, 없다로 사람을 가늠했다. 그 편견을 깨려면 뭔가 실력이 있음을 입증해야 되었는데 사위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나라 최고로 인정받은 대학을 다녔으니 기본 실력이 탄탄한 것은 불문가지였을테니. 대기업에 비해 봉급이 적은 것 같았으나 그것도 그리 큰 문제는 안 되었던 것 같았다. 작은 회사라 그런지 대기업에 다니는 같은 또래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당연히 거기에 따른 비공식 수입이 많은 것 같았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문제가 안 되었다. 딸년이 행복해하면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식이 잘 살아주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은 법인 것이니. 그런 부모의 마음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찌되든 안중에도 없는, 사회적으로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나는 모르는 일이야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게 되어 있는, 참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랬고, 그러고 있는게 이 나라 사람들이니 나라고 별반 다를게 있겠는가라고 자위를 하면서.

당연스레 결혼 반대한 것이 미안스러워졌다. 졸업장이 없는 것 때문에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내 편견(?)도 어느 정도는 잘못된 것이라는 걸 사위는 입증해주고 있었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불거져 이혼을 하네마네 그러다가 결국은 갈라서기 전까지는.

22.

딸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모습으로 친정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하나 뿐인 외손주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결혼 생활이 10여년을 넘어선지도 벌써 몇 년째 지난 뒤였다. 사위는 회사에서 벌써 부장이 되어 있었다. 대기업 같으면 과장되기가 어려울 30중반의 나이에. 상대적으로 회사 관련 접대 일이 많아졌고 이는 파행으로 이어졌다. 여자문제.

딸은 이것을 못 참아했다. 다른 어느 여자도 남편이 자기 아닌 다른 여자 만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지만 어느 정도는 눈감고 살기 마련인 법인데 딸은 그게 안 되는 성격이었다. 무엇보다도 결혼 이후로는 사위 하나만 보고 살았다. 사춘기 시절부터 남자애들 문제 때문에 무던히도 속을 썩였지만 사위를 만나고부터는 이런 버릇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오로지 사위 그리고 하나 뿐인 자식인 외손주만 바라보고 살았다.
부모가 반대한 결혼을 한 것이니 보란 듯이 더 잘 살아야한다는 부담감도 작용했을 터. 그러나 다 소용없었다. 아무리 불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식기 마련인 법이고 그 식은 사랑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식인 법인데 딸은 그게 안 되는 성격이었다. 자존심의 문제.
"내가 누군데 네가 나한테 이래" 아마 그런 오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남보다 빼어 난 미모에 아버지가 명문대 교수라는, 자신은 그런 좋은 조건에서 불만스러운 것만 생각하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알게 모르게 몸에 배어 있었을, 내 아버지는 누구야라며 부모 잘 둔 아이들이면 누구나 다 하게 될 그런 생각과 행동을 했을.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죽기살기로 밀어붙여 했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는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이를 사춘기에 접어 든 외손녀가 더 힘들어했다. 그렇게 매일 싸우며 지낼 바에는 차라리 헤어지라고 한참 부모 뒷바라지가 필요한 때인 사춘기 나이에 그랬을 정도였다. 이혼을 하기 까지는 그래도 또 몇년이 더 걸렸다. 이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딸이 더 잘고 있었을 터. 그것은 스스로 생활력을 갖춰야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미우나 고우나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면 되었지만 앞으로는 스스로 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딸의 어리석음은 여기서도 나타났다. 여자들의 사회 진출 기회가 전혀 없었던 옛 시절, 여자들이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참고 산 이유가 스스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사회 여건 때문인 것을 전혀 생각도 안 해본 모양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사위의 바람기를 참고 살기는 더 이상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생활 대책도 없이 위자료 몇 푼 받고 갈라서는 어리석음이라니...

딸은 좀 더 영악해야 했다. 이혼을 하려고 결심하기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였을 때일텐데 그렇다면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명확히 해결해놓고 했어야 했다. 이혼을 할 때가 아직은 40초반의 나이이니 잘 물색만 하면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외모되고 학벌되니 하다못해 재혼 전문 결혼 상담소 문이라도 두드려 볼 일이었다. 그런데 그럴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 불같은 사랑을 하여 에미인 내가 그토록 반대한 결혼을 밀어붙여 한 결과가 이혼으로 나타나니 남자에 대한 불신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이혼을 하고 혼자가 되면 제 밥벌이는 제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는 뜻인데 딸은 이에 대한 대비책이 안된 상태에서 이혼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23.

시절은 바야흐로 취업하기 힘든 때로 접어들어 있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할 당시 딸이 다닌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얼마던지 취업이 가능했었던 시기는 언제였나 싶은 옛 시절이 되어 있었다. 정통성은 없었지만, 자기와 자기 측근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나라를 통치한 과거 이 나라 지배계층이나 현재 북의 지배계층과는 달리, 이 땅의 5천년을 이어 내려오던 가난의 고리를 끊어보겠다고 애쓴 한 지도자 덕분에 나라가 잘 살게 되면서 각 개개인의 삶의 수준이 좋아진 탓에 집집마다 자식들을 대학을 보내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소 팔고 논 밭 팔아 자식 대학 보내던 시절은 불과 몇 십년 만에 언제 있었던 이야기냐는 듯이 아득한 시절로 잊혀져 갔다. 대신에 일자리를 구하는 젊은이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에 대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일자리도 늘어나 있었지만 그 일자리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더 많은 시절이 되어 있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 해결 때문에 겨우 국민학교, 좀 나은 집안 형편이면 중,고등학교까지 나와 일자리를 구해야 했던 가난했던 시절하고는 전혀 달라진 시절이 된 것이었다.
나라 자체가 가난하여 힘들게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자기들 부모 세대가, 나라가 발전하면서 자신의 책임 아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성인시절을, 어느 정도 능력만 갖추면 일자리 걱정은 안 해도 되게 보내고 잘 살게 된 덕분에, 태어나서 부터 아무 고생 안하고 편하게 자라, 대학까지 별 문제없이 다닌 젊은이들이 단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험한 일을 하려고 할 리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3D 업종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 외국인들을 채용해야 했다. 자신들의 부모 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다른 나라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구박 받는 것 마다 않고 밀려 들어와 일하고 있는 시대였다. 젊은이들은 먹고사는 문제는 부모세대, 성장기를 춥고 배고프게 살아야 했던 부모 세대가 해결해 주고 있으니 그런 힘든 일자리를 단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죽어도 안 갈려고 하는, 그래도 되는, 시대에 와 있는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 40이 넘은 여자가 명문대 졸업장, 교사 자격증이 있다고 마땅한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운이 좋을 경우 임시직에 잠깐 있을 수 있을 뿐이었다. 위자료로 받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은 야금야금 줄어들어 갔다. 결국 자꾸만 서울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집 규모도 같이 줄어 들었다. 그러기를 근 20여년, 딸년도 이제는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으면서 늙어가는 몸과 함께 햇볕도 잘 안 들어오는 다세대 지하로 밀려나 있었다. 그것도 서울 위성도시의 제일 낙후된 지역에 있는.

24.

대출을 받아 시작한 장사는 잘 안 되었다. 장사 경험도 없을 뿐 아니라 경쟁이 너무 심했다. 자신의 미모를 믿고 시작한 호프 집이었지만 입소문이 난 처음에만 잘 되고는 그 뒤로는 내리막 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호프집을 드나드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딸에게 눈독을 들이고 드나들었는데 딸은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너무 도도해서 술 마실 맛이 안 난다고 단골로 드나들던 사람들까지 발길을 끊었다. 애초에 호프집을 차린게 문제였다. 접객업이라는 것이 손님의 온갖 요구를 다 들어줘야 되는 것인데 그러지를 못한 것이니. 1년만에 때려 치우고 1억원의 집 담보 대출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별수 없이 집은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다. 남편은 화병으로 쓰러졌다. 한평생 학자로 존경받으며 남 부럽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 딸 때문에 정년 퇴직 후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막을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이 죽게 되었다고 돈 해달라는데 외면할 수가 있겠는가. 같이 죽는 길인지도 모르면서 해 줄 수밖에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집을 어쩔수 없이 경매 처분을 하게 되었다고 은행으로부터 통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의 대학 동기가 집으로 찾아왔다. 굳이 안 와도 되는 일이었지만 한번 와보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들렀다고 했다. 본의 아니게 일이 이리돼서 정말 죄송하다고 하면서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들고서.

그때 처음으로 딸의 동기를 보았다. 딸에게서 처음 말을 들은 딸 대학 1학년 시절부터 무려 25~6년이 지나서. 첫 대면에서 어디서 본 듯한 낯 익은 느낌이 들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지. 어디서 본 듯 싶은 이 느낌은?" 속으로 생각하며 찬찬히 다시 쳐다 보았다. 민망해하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서. 답을 바로 찾을 수는 없었다. 물어서 확인해보기 까지는. 우선은 남편과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학문을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느낌에서는 남편의 모습을, 하고 싶은 일 못 하고 살아 뭔가 응어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에서는 아들의 모습을. 그 응어리가 나고 자란 환경이 엄청 다른 아들과는 다른 형태의 것이겠지만, 아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것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는 그렇게만 보였다. 부모가 만들어 준 여건이 안 되어서 못하고 살아 왔을. 여건은 되지만 부모인 나나 남편이 반대해서 못 한 아들과는 달리, 가족들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야 돼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살아 온 것 때문에 생겼을 응어리. 그 응어리가 얼마나 큰 것일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다 풀려 있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 만나 한 세상 잘 살아 온 이후로 다 풀려버렸지만, 남편 만나기 전에는 내 가슴 속에도 크게 맺혀 있었으니까.

딸의 동기는 은행 같은 온갖 사람들과 접촉하며 지내야 하는 직장생활보다는 오로지 자기 학문을 파고 드는 데 시간을 보내는 학자 생활이 딱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많이 힘들겠다 싶었다. 은행이라는 곳이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를 않았다. 외관으로 보면 깨끗한 건물에 4시반만 되면 영업을 끝내고 문을 내리는 직장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만 가지고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문을 내리고 나면 그때부터 그날 하루 영업한 것을 결산해야 했다. 단 1원이라도 안 맞으면 전직원 퇴근이 불가능했다. 그것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은행 하는 일이 하루 영업한 결과를 당일로 결산하는 일이 주였으니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인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돈을 다루는 곳이 은행이었다. 당연히 탁한 분위기가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 은행원 아니 은행원 중 돈을 빌려줄 권한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커미션을 요구했다. 관행처럼 굳어져 있어서 직원들은 늘 그러려니 했고 이 마인드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자신들을 검게 물들게 했다. 세상은 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고 나도 권한이 있으면 그럴 것이라는, 단지 권한이 있는 자리에 있을 능력이 안 되어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기도 하지만 이는 극히 적은 몇 명 정도일 뿐일.

25.

"어서 오세요. 이리 마음 써 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래도 일부러 오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내가 진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네자 그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아닙니다. 사실은 인영씨 집에 한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시절부터요. 30명 동기 중에 제일 부러운게 인영씨였거던요. 아버지가 교수님이신게요. 그런데 아무런 명분이 없어서 못 와 본 것인데 이번 일 핑계삼아 한번 온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낯이 많이 익은데 혹시 어디서 나 본 적 없나요?"
"아니요. 저는 처음 뵙는데요. 인영씨가 어머님 닮아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는 이리 말하면서 해맑은 웃음을 웃었다. 40중반일 지금까지 세상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살아왔을 터인데 그런 느낌은 전혀 안 드는 아주 맑고 환한 웃음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같이 맑아지게 하는 웃음을."
" 혹시 고향이 어딘가요? "
"고향이요?" 그는 '뜬금없이 고향은 왜 물어보느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너무 낯이 익은 듯 싶은 얼굴이라 혹시나 싶어서요. 내가 아는 집 자제분이 아닌가 하고..."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그는 "그럴리가요. 저는 가난한 시골 출신인데요. 인영씨 어머님과 연계될 일이 있을리가요"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요. 내가 전쟁통에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피난가 있었던 시골 마을이 있었는데 부지점장님 성씨가 그 동네 사는 분들 성씨와 같은데다 워낙 낯이 익은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서요."
"그러세요? 제 고향은 서울 남쪽 경기도 O시에서 10여리 들어야 되는 곳에 있는 N리입니다."
"그럼 아버님 존함이..."
내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딸년 동기는 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O자O자O자를 쓰십니다만..."그러며 말을 흐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고모 할머니가 한 분 계시지요?"
"네.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만 어머니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고생고생하며 자식 키워노니 며느리 잘못 들어와 마음 고생 많이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다고요.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하셨습니다.
"그럼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충청도 O시에 살고 계신데 뭐 그냥 잘 지내고 계십니다."
딸년 동기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하고 싶다는 듯,
"어머님 저 서재 구경 좀 해도 될까요?"라고 물으며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 온 주 목적이 서재 구경하려는 거였다는 분위기가 잔뜩 나는 듯한 모습으로 딸년 안내를 받으며.

26.
이모가 아이 둘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 온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50년대가 아직은 끝나기 전인, 내가 야간 여상을 다니고 있던 때인 50년대 말 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전답 다 정리해서 올라 온 것이라고 했다. 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떠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아래 시동생은 다리 한 쪽을 못 쓰는 불구가 되어 돌아왔단다. 시부모님은 우리 죽고 나면 논밭 다 정리해서 서울로 올라가라고 그러셨다고 했다. 대를 이을 장손 잘 키워 달라시면서, 그때까지만 당신들 곁에 있어 달라고 하시면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단다. 가진 재산이라야 시부모님 앞으로 되어 있는 논밭이 다였으니까. 시골에 살고 있으면 그 논밭에서 나오는 것들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농사 지을 사람이 없었고 지을 생각도 안 들었단다. 시동생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몸상태여서 상이용사들을 위해 나라가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회사에 일찌감치 취직해 나갔고. 공부를 제법 잘 하는 아들을 생각해서도 시골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들은 큰 아이가 열살 쯤, 밑의 여동생은 일곱살 쯤 되어 있었다. 전쟁 일어나기 전에는 내가 업어주기도 했던 아이들. 어머니는 사랑방을 내주셨다. 한복 일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마루에서 하는 것으로 하고. 안방을 손님 접대하는 방으로 쓰고. 손님들은 더 좋아한다고 그러셨다. 살림방인 안방에서 맞아주니 제대로 대접 받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이모는 행상을 했다. 옷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는. 어머니 일을 거드는 정도로는 두 아이를 뒷바라지 하기는 무리여서. 품목을 옷으로 정한 것은 어머니가 하는 한복일과도 연관이 있었다. 혼사가 있어 보이는 집에 들르면 어머니한테 한복을 맞추라고 소개를 하는. 행상일로도 큰 돈을 벌 수는 없었을 터였다. 당연히 딸을 중학교를 못 보냈다. 딸은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공장에 나가 벌어 들이는 돈으로 집안 살림에 보탰다. 덕분에 아들은 대학엘 갈 수 있었다. 그래도 4년제 대학은 불가능했고 2년제인 교육대학. 등록금도 쌌고 졸업하면 바로 교사가 될 수 있어서, 그러면 한 시름 덜 수 있을 것이어서.
문제는 아들이 결혼하면서 들어 온 며느리 때문에 생겼다. 이모는 꿈에도 생각 못 했을 일이 터진 것이다. 평생을 혼자 살면서 자식 뒷바라지 하는 것을 낙으로 삶고 살아 온 분을 한 순간 실심하게 만들어 버려 결국은 60이 채 못 된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어버린. 이 모든 일이 나도 결혼을 한 뒤의 일이어서 어쩌다 한번씩 친정을 들를 때에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도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새댁의 아들이 국민학교 교사로 취업을 하면서 하던 행상일도 접고 이제 한시름 덜려고 하던 중이라고 했다. 아들 나이가 차니 결혼 시킬 생각은 당연히 한 것이고. 동료 교사라고 했다. 결혼하겠다고 아들이 데리고 온 여성이. 어머니 말로는 이모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했단다. 젊은 시절에 청상이 되어 오로지 자식 뒷바라지 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 온 이모 입장에서는 누가 온다고 해도 아들을 뺏기는 심정이었겠지만 그래도 뭔가 감이 안 좋았더랜다. 그렇지만 아들이 좋다고 하니 반대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결과는 서서히 뒷방으로 몰리는 것으로 나타났더란다. 대놓고 구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실권을 며느리한테 빼앗긴 삶이어서, 아들은 아들대로 자기 마누라하고 자식에게 더 신경을 쓴 삶을 살아서, 자기를 뒷바라지 해 준 엄마는 뒷전인 듯 싶게 대하는 것이 못내 서운했더란다. "내가 제 놈을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섭섭했지만 겉으로 들어낼 일도 못 되었단다. 결과는 가슴에 응어리가 자꾸 쌓여만 가는 그런 나날이 지속되었고. 어머니 말로는 이모가 워낙 과묵한 성격이어서 말은 잘 안 하지만 어쩌다가 하는 한 마디 말과 얼굴 표정에 다 나와 있더란다. 아들 따라 이사간 곳이 새로 개발된 강남지역이어서 집에를 오려면 만만치 않은 거리인데도 자주 찾아 오셨더란다. 그러다가 "영숙아, 네 이모 세상을 떴단다"라는 엄마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의 전화 연락을 받은 것이 딸년이 대학 들어가고 나서이니 내 나이 40중반 쯤일 때였다. 이모는 60도 채 안 된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다. 특별힌 몸을 망가뜨리는 생활을 안 한 사람들이라면 아직은 죽기 이른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즈음에.

27.

집이 경매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직원 개인의 힘으로 경매를 넣고 안 넣고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매 진행이 늦어져 은행 손실로 이어지면 관련 직원 개인에게 변상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서요."
내가 "부지점장님 직권으로 어떻게 막아줄 수 없느냐"는 물음에 딸의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집의 위치가 좋아 제가 아는 주택사업자에게 매입을 권유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겁니다. 대지 지분이 넓은 오래 된 단독주택을 사서 다세대 주택으로 만들어 파는 주택사업자들이 많거든요. 그 중에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어 매입을 하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장사꾼들이라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만 경매로 매입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으니 아마 매입을 고려할 것 같습니다. 그리되면 경매로 팔리는 것보다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고요."라고 말했다.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얘기였다. 자기가 아는 사업자를 통해 최대한 좋은 가격을 받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는 이야기. 결과는 딸의 동기가 말한대로 되었다. 시세에 안 떨어지는 가격으로 집은 팔렸고 서울 변두리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규모가 작은 집으로 갈 수 있는 돈은 남았다. 참 어렵게 어렵게 장만한 집이었는데,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이 전세로 살던 집을, 월급 알뜰살뜰 모아 은행 융자까지 끼고 결혼 10년만에 산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시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셨었는데.

28.

아들은 오히려 잘 된 일인 것 같다고 그랬다. 팔려고 내나봐야 집이 오래돼 작자도 잘 안 나설텐데 은행에서 살 사람을 알아서 구해주겠다고 하니 이참에 집 정리해서 자기네가 사는 아파트 근처로 이사하는게 어떠냐고 그랬다. 경매 막아드릴 여윳돈도 없지만 있어도 이 집에 투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집은 딸의 동기가 이야기한대로 시가에 모자라지 않게 잘 팔렸다. 집을 산 업자는 매수 계약을 하면서 생색을 엄청냈다. 부지점장 덕 본 줄로 알라고. 부지점장 아니었으면 이리 좋은 가격 절대 받을 수 없을꺼라고. 딸의 동기가 많이 고마웠다. 인맥이라는게 이래서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집 판 돈은 은행 대출금과 연체 이자를 갚고도 작은 연립주택 하나 살 돈은 충분히 되었다. 아들은 그 돈으로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연립주택을 하나 샀다.
20평이 채 안되는 것, 1층에. 집이 크면 어머니 청소하기 힘드니 작은 평수가 오히려 좋다고 그러면서, 위에 층은 아버지 바람쐬러 나가실 때 힘들다고 그러면서, 아파트를 사드려야 되는데 애들한테 들어가는 돈이 워낙 많다보니 보태드릴 여유가 없어 못 그래 죄송하다고 하면서. 그래도 병원 가깝고 시장도 가까운 곳이라서 지내기는 아주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급한 일 생기면 내가 금방 달려 올 수 있어서 좋다고 하면서.

이사하면서, 가장 큰 짐인 책들은 남편 모교에 기증했다. 내가 꼭 필요로 하는 책만 일부 남겨두고. 남편이 평생을 들여 사 모으고 애지중지 했던 책들이었지만 이제는 아무 짝에 쓸모없게 된. 우리 부부 늙어감에 비례하여 같이 용도가 줄어 버린. 그냥 놔두면 고물상에서 폐휴지로나 가지고 갈. 기증할 곳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행운인. 음반들은 가지고 갔다. 모두 다. 남편이 계속 음악을 들을 수 있기에. 아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들이 꽤 있을 것이기에.

아들 내외는 가끔씩 집에 들렀다. 딸은 자기 지은 죄가 있는 탓에 면목이 없어서인지 죽은 듯 소식이 없었다. 며느리는 직장 다니며 손주들까지 챙기는 생활인 탓도 있겠지만 자주는 못 들렀다. 사실 오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다. 의무감에 마지못해 오는 그런 방문이 뭐 좋겠는가. 시아버지는 내가 있으니 걱정말고 손주들 잘 챙기고 직장 열심히 다니라고 했다. 아들에게만은 매주 한번씩은 꼭 들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들이 오면 남편을 휠췌어에 태워 바깥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남편은 자리에 눕게되자 신기하게도 사람 구경을 하고 싶어했다. 학교에 나갈 때는 사람 만나는 일은 질색을 하고 책과 음악에만 빠져 들었는데 이게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책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음악은 내가 틀어주어 계속 듣고 있는데도 그랬다. 그즈음에는 레퀴엠 같은 곡들을 자주 듣고 싶어했다. 나는 질색을 했지만 "장송곡이 뭐 그리 좋으냐고"뭐라고 그랬지만 "뭐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마음 정리하는 차원에서 좋아. 그러니 이해하구려" 그러면서 계속 틀어달라고 했다. 특히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브람스는 작품도 좋지만 인품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그러면서. 스승인 슈만의 부인을 연모하면서도 이성으로는 관계를 맺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 가족들을 돌보아 준 그 착한 심성이 너무 좋다면서. 브람스의 음악을 듣노라면 그 사람의 인품이 절로 느껴진다면서.

남편이 사람 구경을 하고 싶어한 이유는 하루 종일 집에 누워 있다보니 사람 모습이 그리워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 만나는 것을 질색을 하는 생활을 평생 했지만 그것은 직접적인 만남을 싫어한 것이지 사람들 보는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남편 직장이던 학교에는 젊고 생기발랄한 학생들이 늘 넘쳐났으니까. 이런 젊은이들을 평생 보며 지냈었으니까.

남편이 사람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니 어디가 좋을까 생각을 했다. 휠체어에 태워 다닐 수 있는 곳.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야 했다. 평소 자주 다니는 재래시장이 생각이 났다.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천히 걸어나가도 10여분이면 충분한 곳인.

29.

장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이도 시간이 흘러, 시장 바로 곁에 마트가 생기면서 처음 이사왔을 때보다는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재래시장을 살리자고 온갖 세금 다 처들이면서, 정작 막아야 할 마트 허가는 시장 바로 옆에 내주는 행태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 구경하기에는 제일 좋은 곳이었다. 남편은 이곳에 오는 걸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이 활기있게 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시장에는 내가 다니는 단골 생선가게가 있었다. 혈압이 높은 남편에게는 생선이 좋다고 해서 어느 생선가게가 좋을까 물색을 하다가 단골로 하기로 결정을 내린. 가게는 좌판이었다. 시장 통로 복판에 주욱 늘어서 있는 좌판 중의 한 곳. 이사 온 처음에는 좌판을 일부러 피했었다. 물건이 좋지 않을꺼라는 편견 때문에. 그런데 자주 다니며 보니 그렇지 않았다. 생선이고 야채고 다 물건이 좋았다. 특히 생선이. 파는 여인을 눈여겨 봤다. 그 여인이 모르게 흘끔흘끔. 그러다가 차츰차츰 단골이 되어갔다. 물건도 좋고 값도 싸서. 시간이 흐르면서 여인과 친해졌다. 가정사를 물을 정도로.

여인은 딸과 같은 나이였다. 얼굴에 그늘이 있는 것도 비슷했다. 여인의 그늘은 아마도 딸과는 달리 나고 자랄 때부터 생겨 있는 것 일테지만 거기까지 물어 볼수는 없었다. 다만 딸보다 훨신 박복한 삶을 살았을 것임을, 앞으로도 별로 좋아지지 않은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만 해주었다. 남편과는 40초반에 사별을 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머뭇거리며 말하는 것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나라도 남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거짓말로 할 터이니 그런가보다 했다.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굳이 알려고 할 이유도 없었고. 눈 앞에 보이는 모습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에 비하면 나의 삶은 참 축복받은 삶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족은 없수? 자식들"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집안 살림은 친정 어머니가 해주고 있고.
"그럼 형제는?"
여인은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이면서도 갑자기 화색이 돌며 생기가 나서 말을 했다.
"오빠하고 여동생이 한 명 있어요. 오빠는 명문대학 나와서 은행 지점장이고 동생은 오빠가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어요."
여인은 그리 말하곤 이내 힘들고 쓸쓸한 표정으로 되돌아 갔다. 자신의 고달픈 삶을 자조하는 듯한.

30.

이 여인의 오빠가 딸의 은행 다니는 대학동기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전혀 상상도 못 해 본 조합이었던 탓에. 명문대 나온 은행 지점장의 좌판 장사하는 여동생이라니. 나라가 한창 발전하던 시절이어서 내 다음 세대에서는 얼마던지 나올 수 있고 실제로 나왔던
모습들이었는데 내가 그걸 깜빡한 것이었다. 당장 내 친정 막내 동생만 해도 자기 형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대학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지 않았던가. 제 형은 대학 갈 꿈도 못 꿔보고 상고만 나와 취직을 했었는데.

그날은 추석 전 날이었다. 남편과 사람 구경도 할 겸 간단한 먹거리를 사려고 나선 길이었다. 제수는 아들 내외가 알아서 준비할테니 우리 부부는 사람 구경이 주 목적이었다. 시장은 추석, 구정때가 되면 평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편을 태운 휠체어가 거치적거려 눈치가 보일 정도로.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명절은 명절이예요. 그렇죠?"
나의 이 말에 남편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휠체어를 미는 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런 남편이 세상을 먼저 뜨면 어찌 사나 싶었다. 괜시리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는 가운데 단골생선가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 낯 익은 모습의 남자가 여인의 옆에서 열심히 돈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인영씨 어머님 아니세요?"
가게에 가까이 다가가자 딸의 동기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아니 지점장님이 어쩐 일로 여기에?"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제 여동생입니다. 명절 때면 워낙 바빠해서 도와주러 오고 있습니다. 이 동네로 이사오셨군요?"
"아들네가 이 근처에 살고 있다우. 그래서 이쪽으로 이사를 왔다우. 그나저나 장사일 거들기가 쉽지 않은 일일텐데..."
딸의 동기는 나의 이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는 듯 밝게 웃으며 "뭐 1년에 두어번인데요. 매일 하라면 못하겠지만 괜찮습니다. "
"교수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그저 그만하답니다. 충격으로 쓰러진거라 마비는 왔지만 건강한 편이라우."
그 뒤로 1년에 두 번은 어김없이 시장에서 딸의 동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추석하고 구정 때. 시장 곁에 마트가 생기는 바람에 시장 경기가 죽어버려 명절 때도 크게 일손이 필요치 않게 된 것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된 몇 년 전까지는.
"오빠는 이제 안 오우?"
"네. 일손이 별로 필요치 않을 만큼 손님도 줄어든데다가 이젠 딸이 와서 도와주고 있어서요. 지금 집에 와 있어요. 엄마 뵈러."
그 딸의 동기를 다시 본 것은 남편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시장에서 처음 본 뒤로 몇 년이 지나서인 남편이 70 중반이 되어 있던 때, 나는 60중반이 되어 있던 때에.

31.

소는 조촐하게 꾸몄다. 대인관계를 워낙 안 하는 남편의 성격 탓도 있지만 퇴직후에는 자연스레 만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의 바램도 있었다.
"최대한 간소하게 하구려.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연락하지 말고. 애들한테도 아주 가까운 사람만 연락하라고 그러고."
그래도 딸의 대학 동기들이 몇 명 와주었다. 은행에 다니고 있는 내게 도움을 준 그 동기도.
"이리 조문을 와줘서 고맙다"는 나에게 "별 말씀을요. 당연히 와봐야지요"라고 그러면서 퇴직을 했고 그랬다. 지금은 그림 공부를 하면서 글 쓰기도 하고 있다고도. 학문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복학은 안 했다고 했다. 졸업장이 필요한 나이도 이제는 지났으니 졸업장 때문에 다시 학교에 가서 학점 따려고 신경 쓰기는 싫더라고.
"어차피 이것저것 다 하기에는 늦은 나이 같아서요. 원래 꿈이었던 학문을 했더라도 그림은 했을터이니 차선을 택했습니다. 그놈의 세월 때문에."
그러면서 너무도 밝은 웃음을 지었다. 은행에 다니고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참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늦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내는 생활에 대한 만족감. 이런 느낌이 온 몸에서 풍겨 나왔다.

32.

아들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젊어서부터 하고 싶었던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며느리의 동의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대기업이다보니 정년까지 간다는 보장도 없었고 임원인 이사가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사가 못 되면 나이에 관계없이 부장 자리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불문률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한 두해 미리 나오는 차이일 뿐이라고 며느리를 설득한 것일테고. 아들과 캠퍼스 커플이어서 누구보다도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 며느리는 이를 받아 들인 것이고. 잘 나가던 대기업 간부직을 그만 두겠다는 아들의 말에 갈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며느리는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그래요. 그동안 애썼으니 이젠 당신 하고 싶은 것 해요. 집안 살림이야 내가 버는 돈으로 충분히 꾸려 갈 수 있으니."라고.
교직에 몸담고 있어서 가계 꾸려나갈 걱정은 크게 안 해도 되는 며느리는 이를 받아 들인 것이었다. 대신 아들의 집안 내 위상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퇴직금이 있다고는 하지만 매달 들어오는 수입은 없어졌으니 며느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아들은 행복해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음악 공부를 늦게나마 하는 것을 너무 좋아 하는 것 같았다. 난 아들의 그런 모습에서 딸의 은행 다녔다는 대학동기를 떠올렸지만 둘의 출발은 처음부터 너무 달랐다. 딸의 대학동기는 그야말로 자기가 아니면 가계를 꾸려갈 사람이 없는 가장의 입장이었고 아들은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부모인 나와 남편이 말려 못한 것 뿐이었으니까. 인생 후반기에 들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낸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둘의 출발은 처음부터 이리 달랐던 것이다. 단지 자기를 낳고 키워준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33.
"여보 그동안 고생했오. 당신 덕분에 한 세상 잘 살았군. 나 없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나저나 당신이 걱정되네.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어떡하지? "

남편은 눈을 감기 전에 내 걱정을 했다. 자식들이 간병을 해주리라는 기대를 접은 말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먼저 편히 가 있으세요. 산 사람은 또 어떻게 되겠죠. 설마 자식들이 모른 척이야 하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그것이 내 경우만은 아닌 다른 대부분의 집 자식들도 다 그리 하고 있음을 요양원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지만.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었고 몸의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절대 막을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죽지는 않고 몸에 마비만 와서 대소변 보는 일, 먹는 일을 모두 남의 손을 빌려서 해야 하는 처지로. 살아는 있으되 살아있다는 의미가 없는 신세로. 80을 몇 년 앞 둔 나이 때였다. 지금부터 3년여 전. 남편 떠나보내고 혼자 산지는 10년쯤 지나서였다.
쓰러지면서 이유가 뭘까를 생각했다. 100세 장수 시대 어쩌구 저쩌구 떠들어대는데, 주변에 보면 장수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친정 어머니가 대표적인데. 시어머니 병수발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제일 먼저 생각났고 그 다음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딸이었다. 꽤 속을 썩였던, 남편이 쓰러지는 한 요인이 되게도 한, 지금도 에미된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눈 감기는 어려운 모습으로 살고 있는. 그러나 이것들이 주 원인은 아니었다.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의 곁에 없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나만을 지극 정성으로 사랑해 준 남편이 곁에 없다는 것. 남편이 없어 쓸쓸하기 그지없는 빈 자리를 글 쓰기로 채운다고 애써봤지만, 음악도 듣고 그랬지만 절대 채워지지 않는, 그럴 수 없는 빈자리.
하기사 내가 독한 년인지도 모르겠다. 남편 없는 그 긴 시간을 혼자서 잘 살아냈으니. 서양화가 *아내 중에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자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도 있고, 브람스도 마음 속의 여인인 클라라가 죽자 1년이 채 안 돼 세상을 떴는데 말이다. 남편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이 두 사람에게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사랑이었는데 말이다.(*모딜리아니의 아내 잔느 에뷔테른-모딜리아니가 죽자 22상의 나이, 뱃곳에 8개월 된 아이가 있는데도 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어쨌던 남편이 없어 쓸쓸하기 그지없는 그 빈자리를 그동안 살기 바빠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글쓰기를 틈틈히 하는 걸로 보냈다. 사람들 누구나가 한편의 소설은 될 삶을 산다고 하니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살아 온 지난 나날들에 대해 써보기로 하고서. 설사 읽어 줄 사람 하나도 없을지라도 마지막 가는 길에 남겨 놓고 가기 위해서.

34.

아들과 딸은 내가 쓰러진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며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올 것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니, 70이 넘은 부모가 있는 자식들은 늘 각오를 하고 있는 일일테니. 매스컴에서 아무리 평균수명이 늘었네 어쩌네 떠들어대지만, 60이 넘어노면 하나씩 둘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뜨는 사람들은 늘 보이게 마련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보다는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시절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아들네의 간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는 며느리, 한창 공부하고 있는 손주들 때문에라도 아들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들 내외도 그럴 생각이 없었겠지만 설사 그러자고 했어도 내가 싫다고 했을 것이다. 기대한 건 딸이었다. 혼자 살고 있으니 와서 간병하며 지내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들 내외도 가끔은 들여다 볼 것으로 기대를 했고 실제로 그리 하기는 했다. 그것이 하루종일 누워 있어야 되는 나에게 큰 위안이었지만 실제 도움이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오줌, 똥을 치워 줄 사람이, 때 되면 밥을 먹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간병인을 오게 해봤지만 무슨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의 집, 죽어가는 노인데 똥오줌 받아내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간병할 사람들을 가리는 것 같았다. 넓고 큰 집이어서 간병하는 시간 동안 편하게 티비 볼 수 있고 가끔은 용돈도 받을 수 있는 그런 집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간병인들은 며칠 안 해보고 그만 두던지 처음부터 마다했다. 자그마한 연립주택에 반나절을 갇혀 있다싶이 해야되는 것을 못견뎌 하는 것 같았다. 내 돈 내고 간병을 받으려 해도.

35.

딸은 처음에는 간병을 하며 지내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았다. 마음 단단히 먹고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고마웠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늙어 병든 부모 대소변 받아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니, 시어머니, 남편 병수발 하면서 수도 없이 겪은 일이니. 더구나 딸처럼 고생이란 해보지 않고 자란 아이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님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딸은 3개월 정도를 견뎠다. 그러고는 아들에게 얘기한 모양이었다. 도저히 못하겠노라고.

둘은 "어머니 요양원으로 모시겠다고 죄송하다"고 별로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로만 그리했다.그러라고 그랬다. 반대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지만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래저래 눈치보기는 마찬가지인 삶이 된 것이니 빨리 죽어져야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야 나도 자식들도 편해지는 것이라고.
요양원비는 남편 퇴직금에서 아직 남아 있는 돈을 우선 쓰고 정 모자라면 집을 팔아 충당하라고 했다. 이즈음엔 은행 금리가 낮아 퇴직금 원금을 까먹고 있었지만, 그래서 통장 잔고가 자꾸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크게 들어갈 돈이 없는 나이라서 잘 버텨 준 돈이었다. 집은 어차피 다시 돌아갈 기회도 없을테니 그러라고 했다. 쓰다가 혹 남는 돈 있으면 딸에게 주라고 했고. 얼마가 될 지는 알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아들네는 나름대로 잘 살고 있어 몇 푼 안 될 돈에 관심은 안 가져도 될테니. 자식이,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마음만큼 부모에게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와 관계없이 에미인 내가 해줄 게 있으면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가기.

남편이 보고 싶다. 남편 죽은 뒤 한번도 안 그런 적이 없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더 그렇다. 요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 스스로 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단지 목숨만 붙어 있다는 것 외에는 살아 있다는 의미가 전혀 없는 삶을 이리 계속 살아야한다는게 너무 싫다. 어쩌다 한번씩 들르는 아들, 딸의 모습에서도 그런게 보인다. 차마 말은 못하지만 " 이 양반 빨리 안 돌아가시나" 하는 마음인 게 눈에 역력히. 간병인들의 마지못해 뒤처리하는 모습도 보기 지겹다.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50은 넘었을 나이에 3D업종 못지 않게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그녀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 좋은 팔자가 아닌 삶을 살아왔을게 뻔한 그녀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에 대한 의욕도 별로 없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간병해야 할 노인네가 집에 돈이 좀 있는지 없는지를 재빠르게 가늠한다. 집안이 어떤지, 자식들은 또 어떤지. 그러고 나서 거기에 맞는 처신을 한다. 간병인에게 마구 집어줄 돈까지는 없으나 아들 내외가 어쩌다 한번씩 들를 때마다 몇 푼씩 건네주는 탓에 나에 대한 대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얼마전 들어와 단 며칠 정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간 그 노인네에 비하면 말이다.
나는 대학교수 부인이었었다는 것도, 아들이 대기업 간부 출신인 것도, 며느리가 고등학교 선생인 것도 많이 작용을 했다. 적어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봤자 당장 자기 손안에 들어오는 게 없으면 다 소용없는 것이라는 게 빤히 보이지만, 그래서 올 때마다 몇 푼씩 꼭 집어준다고 아들 내외는 그리 말했지만.

얼마전, 며칠 정도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내 나이 또래 노인네는 그 잠시 있는 동안에 내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 이유가 보호자인 여인이 워낙 초라한 모습이어서 그랬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그 여인의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며 "그 분 아드님이 은행 지점장 출신이랍니다"라고 간병인에게 귀뜸을 해줬지만 잠시 움찔 했을 뿐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며칠 동안 내가 말해 준 아들은 보이지를 않고 딸인 생선장사하는 여인만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뿐이었으니.

생선가게 여인은 경황이 없는 중에도 나를 알아보았다.
"어머 사모님 그동안 안 보여 궁금했었는데 요양원에 와 계셨군요"
나는 왠지 민망한 생각이 들어 말없이 반갑다는 눈짓을 보내면서 "모시고 온 분이 누구시우"라도 물었다.
"친정 어머니세요. 쓰러지신지 1년 정도 됐는데 그동안 집에 모시고 있다가 너무 힘들어서 이리로 모시고 왔습니다. 근데 사모님이 여기 계실 줄은 꿈에도생각을 못했군요. 그저 어디로 이사 가셨나 그리 생각했는데..." 그리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은 왠지 그리 밝지를 않았다.
"한 5년 정도 됐다우. 근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시우"
"제 동생입니다. 분당에 사는. 일주일에 이틀씩 간병을 하러 오는데 본인도 당뇨가 있어서 간병하기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고민 끝에 모시고 왔는데 마음이 편치를 않군요."
얼굴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그거였다. 남의 손에 어머니 간병을 맡기는게 마음이 편치 않은.
"오라버니는 안 오우?"
"매주 하루씩 간병하러 오는데 요양원에 모시고 온 거는 아직 몰라요. 알아도 뭐라고 그러지는 않겠지만요. 일단 며칠 있어보고 요양원에 계속 계시게 할 때 알리려고요. 아직은 확신이 안 서서요."

선가게 여인은 결국 며칠을 못 버티고 어머니를 다시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장사를 하는 와중에도 끼니 때마다 들르더니 그리 한 것이다. 가면서 이리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근 20년을 같이 살았는데, 엄마가 딸 키워주고 살림해줘서 먹고 살았는데 내 몸 편하자고 요양원에 모셔다 노니 몸은 편한데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요. 엄마 걱정에 도통 잠이 안 와서요. 요양원 사람들 믿을 수도 없고요. 밥은 제대로 먹이는 지, 귀저기는 제때 갈아주는지요. 자식인 나도 기저귀 갈아주는게 힘들고 귀찮은데 요양원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남의 집 다 죽어가는 노인네들 돌보며 돈 버는 사람들이 뭐 그리 신명나게 잘 해주겠느냐고요. 그래서 죽으나 사나 집에다 모셔다 놓고 견뎌 보려고요. 동생과 오빠가 3일은 와서 간병을 해주니 힘들더라도 돌아가실 때까지 그냥 견뎌보려고요. 안녕히 계세요 사모님."

생선가게 여인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느 누가 자기 부모도 아닌 사람을 그리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겠는가. 혹 엄청난 보수를 주고 사람을 쓸 경제적 능력이 있는 집에 개인적으로 고용된 것이라면 모를까. 그런게 아니고 요양원에 모시는 집이라면 경제력이 다 그만그만 한 정도일 터이니 그런 집의 늙고 병든 부모들을 간병하는데 뭐 그리 바랄 것이 있어 신명나게 일해주겠는가. 귀찮으면 기저귀를 제 때 안 갈아 주기도 했다. 밥도 빨리 안 먹는다고 채근을 하기도 했고. 정신이 온전하니 바깥으로 나갈까봐 침대에 묶어 놓는 짓은 안 했지만 치매가 있는 다른 노인들에게는 그러는 것 같았다. 일일이 옆에 붙어 감시는 할 수 없을테니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말로 구박도 했다. 친절스런 느낌이 드는 말보다는 퉁명스런 느낌이 드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긴 병 수발하다 보면 자기 자식이라고 구박하는 말 안 할리는 없지만 자식이 하는 말과 남이 하는 말은 다른 법이다. 더구나 돈까지 내가면서 얻어먹어야 하는 구박이라니. 이래서 늙고 병들면 빨리 죽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조물주란 존재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늙고 병들면 수삼일 내에 죽게 만들 것이지, 자식들이 병수발 들다 지치지 않을 정도만 살게 해주지 이게 뭐란 말인가. 살아 있으되 산 것이 아닌 이런 목숨을 이리 끈질기게 게 살아있도록 만들 건 또 뭐란 말인가. 혹 모른다. 한 나라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있다는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그렇지만 나 같이 평범한 삶이라면 그래서 죽는다는 게 가족이나 지인들 외에는 큰 의미로 안 받아들여지는 그런 삶을 산 사람이라면, 이리 아무 의미도 없는, 단지 목숨만 붙어 있는 이런 삶은 살아 있으되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빨리 죽어야 되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으니.

새삼 참 복되게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부러웠다. 30이 채 안 된 나이에 혼자서 자식 셋 뒷바라지 하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지만 큰 남동생 상고 나와 취직하고 막내 동생 대학공부 뒷바라지 끝난 뒤로는 모든게 탄탄대로였다. 큰 남동생은 장가를 잘 갔다. 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늦게 결혼한 것이 큰 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모가 며느리 잘못 들어와 마음 고생하는 걸 본 어머니는 너는 여자 고를 때 무조건 심성부터 봐야된다고 동생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을 시켰고 동생은 어머니의 이 말을 충실히 잘 따랐다. 같은 직장의 여상 나온 우리집과 별 차이가 없는 그런 집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었다. 올캐는 친정 어머니한테 지극정성으로 잘 했다. 이모는, 며느리 잘못 들어와 마음 고생이 심했던 이모는 이런 어머니를 엄청 부러워하다가 돌아가셨다.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행복하게 돌아가셨다. 내가 아직 쓰러지기 전까지 정정하게 지내시다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엉덩이 뼈가 부스러진 것이 원인이 되어 불과 한달 정도만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100세를 바라볼 수 있는 90중반 나이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세자식 다 잘 되어 잘 살고 있는 것 즐거운 마음으로 보며 사시다가.

남편이 보고 싶다. 남편 먼저 떠난 뒤로 단 하루도 안 보고 싶은 적이 없었지만 살아 있다는 게 아무 의미도 없는 나날이 길어지면서 더욱 그렇다. 야속한 양반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빨리 좀 데려가 주지. 내 이 꼴을 그리 오래 보고 싶은가. 자식들 어쩌다 한번 의무감에 마지 못해 들여다 보고, 간병인들 간병 안 할 수는 없으니, 안 하면 자기 밥줄이 끊어지니 마지 못해 귀저기 갈아대는 이런 꼴을.

빨리 떠나고 싶다. 이, 살아 있으되 산 것이 아닌 목숨 어서 빨리 거두어졌으면 좋겠다. 그래도 한 세상 나름대로 잘 살아 온 것 아니었던가. 그러니 마지막 마무리만 깔끔하게 잘 된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는 데 말이다.

남편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
사랑하는 내 남편.

[참고: 글 가운데 나오는 인물들은 다 가상의 인물입니다. 제 기억 속에 있는 분들을 참고해서 필요한
부분만 끌어내어 만들어 낸 실재하지 않는 인물들입니다.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2015. 7.10일 1차 마무리
7. 20일 1차 수정/ 7.26일 2차 수정/7. 30일 3차 수정/ 8.5 최종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