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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애국했다 치고 …

Bawoo 2015. 7. 18. 23:22

세계 일등 기업을 갖고 있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마주치는 한국 대기업 광고판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10년 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사민주의 정책의 정교함에 한참 주눅 든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삼성 TV 광고판이었다. 모스크바 ‘붉은광장’을 난쟁이처럼 걷던 나에게 용기를 북돋운 건 LG 깃발이 나부끼는 다리였다. 미국과 유럽 국제회의 석상에서는 괜히 삼성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에겐 이런 게 있다’는 유치한 시위지만 은연중 자존심의 징표가 되긴 했다.

 IMF 사태 이후 한국 경제를 지켜왔던 삼성전자도 외국 헤지펀드에 공격당할 날이 올 것이다. 경영권 방어능력이 선진국에서 가장 취약한 게 한국이다. 외환위기 동안 한국의 알짜 기업이 무작정 바겐세일 당했음은 익히 아는 바다. 글로벌 기업이 되려면 외국인 투자가 필수적이지만 자칫 외국인 지분율이 커질 경우 국적이 바뀔 위험이 덩달아 커진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51.8%, 현대모비스 51%다. 반면 국내 지분율은 30% 정도여서 헤지펀드가 눈독을 들이면 경영권이 휘청한다.

 헤지펀드는 해적펀드(pirate fund)다. 적도에서 발생한 증기가 뭉쳐 태풍이 되듯, 수익을 찾아 세계 상공을 수색 비행하고 있는 뭉칫돈이 헤지펀드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사정없이 내려앉는다. 도덕성? ‘난 그건 모르겠고!’다. 시세차익이 최고의 도덕이고 윤리다. 이름만 고상한 ‘엘리엇’은 독수리처럼 하강해 먹이를 채는 명사냥꾼이다. 채권·자산·기업 등 시가와 주가의 등락 폭이 큰 곳이 주요 놀이터이고, 잘나가는 유망 기업도 공습 대상이다. 엘리엇의 포화에 혼쭐난 굴지의 기업이 여럿이다. 대주주 지분율이 지극히 낮은 SK그룹은 타이거펀드와 소버린의 공격에 이미 혼이 난 바 있다. 지금도 대형 헤지펀드들이 한반도 상공을 탐색 비행하고 있다.

 어제 삼성물산이 다행히 한고비를 넘겼다. 임시총회는 양 진영 간 설전과 세 싸움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집적대는 게 헤지펀드의 장기이기에 패자 엘리엇으로선 손해가 아니다. 시범경기에서는 교훈을 얻는 법이다. 탐색전을 눈여겨봤을 여타 세계적 헤지펀드들이 삼성전자에 와락 달려들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현대차·SK텔레콤·LG도 방호벽을 쌓아야 할 과제를 안았다. 해적이 국적을 묻지 않듯, 헤지펀드는 애국심도 뚫는다. 만약에 엘리엇이 승리했다면 투자는 한없이 위축될 위험이 크다. 메르스와 가뭄 때문에 정부가 급히 요청한 추경예산이 10조원 규모인데, 대기업들은 이보다 더 큰 자금을 경영권 방어에 쏟아부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나 소액주주들이 일단 삼성 편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불만이 없는 게 아니다. 합병 ‘내부 결정’을 누가, 왜, 언제 했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사전 설명이 없었다. 주주 친화적 태도가 아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소액주주를 찾아 나선 직원들은 ‘진작 좀 하시지’라는 냉소를 감당해야 했다. 정보공개와 의결권 존중 여부는 주주 친화의 척도다. 위임장을 선뜻 내주긴 했지만 찜찜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너지 효과와 미래가치를 높인다는 기업의 선전은 훗날 얘기고 당장 주가 등락에 더 관심이 많다. 삼성물산 주가비율이 저평가됐다거나 결국 손해 볼 것이라는 엘리엇의 반격에 더 솔깃해진 이유다.

 찜찜한 것은 또 있다. 한국 기업의 고질병인 순환출자를 개선한다는 합병 취지는 옳은데, 경영권 승계가 얽혀 있다면 셈이 복잡해진다. 수락할까, 말까를 결정할 판단 자료가 궁핍해서다. 재벌기업들은 국민에게 진 빚을 기억하고는 있을까. 삼성과 현대 모두 국민의 ‘강제적’ 저축과 ‘애국적’ 소비를 발판으로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가산(家産)의 절반가량이 재벌기업의 공급품인 나라가 어디 있을까. 소액주주들이 주가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일단 유보하고 애국심이라는 낡은 일기장을 꺼내 들었던 것은 한국 경제의 전선을 지켜달라는 오랜 소망 때문이었다. 냉혹한 주주자본주의에서 국민을 든든한 원군(援軍)으로 만들려면 대기업들이 공익 증진에 눈물겹게 매진해야 한다. 주주(stock holder) 존중의 기업문화야말로 국민을 이해당사자(stake holder)로 만드는 첩경이다. 엘리엇의 분발을 제압한 것은 애국심이었는데, 그게 언제까지 작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엘리엇의 공격을 ‘위장된 축복’으로 해석했다. 주주친화적 기업문화로 바꾸라는 명령이자, 금융산업을 육성해 헤지펀드의 전횡을 막으라는 시급한 과제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찬성 69.53%는 압승에 해당하지만 그 속에는 손익을 따지는 시장합리성보다는 한국민 특유의 온정주의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온정주의에 어떻게 화답할 것인지, 이제 삼성이 대안을 내놓을 차례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