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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의 헌정내력

Bawoo 2015. 7. 29. 00:32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의 헌정내력

베토벤이 협주곡으로 남긴 작품의 수량은 다른 장르에 비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바로 직전 세대인 모차르트가 수 십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만든 것과 대조적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다섯 개는 지극히 금욕적인 분량이다. 베토벤은 보다 거침없고 자유롭게 자신의 음악관을 표출할 수 있었던 소나타나 교향곡을 선호했을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라는 두 매체가 정해진 룰에 따라 곡을 짜나가야 하는 협주곡에서 베토벤의 운신의 폭은 제한되었을 수 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을  매일 밤 열리는 연주회에서 소비되어야 할 용도로 만들었던 모차르트에게 협주곡은 거의 ‘실용음악’이었다. 한 번 연주된 곡이 다시 무대에 올려 지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모차르트식 실용적 태도로부터 베토벤은 이미 멀리 떠나와 있었다. 반드시 협주곡에 국한된 얘기도 아니지만 이제 작품 창작은 베토벤에게 실용 혹은 귀족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 목적이 아니었다. 베토벤에게 음악이란  필연적이고 절박한 내면의 발산과 표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은 존중해야 할 룰이 더 많은 고전양식의 소산인 협주곡에 베토벤은 상대적으로 공을 덜 기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다소 협주곡에 소극적이었던 베토벤의 피아노 콘첼토는 초기의 습작들을 제외하고 다섯 곡이 남아있다. 물론 그 작품들 하나하나는 베토벤 예술세계의 변천을 말해주는 증거품들이라 할 만하다  그가 남긴 다섯 개의 협주곡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이 그러했듯 전통에서 개성으로 가는 진화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한편 베토벤시대 작곡가의 입지란 일종의 과도기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비슷한 시대의 모차르트나 하이든은 왕족 및 귀족들에 의한 고용상태 하에서 정규적으로 때로는 의무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최초의 ‘음악회 표 구매 고객’을 만들어낸 것으로도 기억되어야 할 모차르트만 하더라도 아직 완전히 귀족들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는 계제는 아니었다. 베토벤 역시 귀족들에 의한 고용 혹은 후원체제를 무시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반은 독립적이고 반은 귀족들의 동향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베토벤의 작품들 가운데 ‘헌정(dedication)이 많은 것도 이 같은 귀족과 작곡가 사이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전제로 놓고 봐야한다. 우리 귀에 익숙한 라주모프스키 백작, 발트슈타인 백작, 루돌프 대공 등은 베토벤이 작품들을 헌정했던 대표적인 귀족들이다. 그들은 모두 베토벤을 ’고용된 작곡가‘라는 개념이 아닌 하나의 독립적이고 빼어난 예술가로 대했다. 동시에 그의 작품들을 진심으로 애호하는 심정으로 음악 활동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베토벤 역시 이들에게 마치 여인들에게 그러했듯 우직하고 결곡한 애정을 바치며 자신의 음악을 즐겨 그들에게 헌정하곤 했던 것이다. 그들 중 피아노 협주곡과 가장 많은 연관을 가진 이는 바로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이다. 협주곡 4번과 5번, 즉 베토벤의 성숙되고 유연한 스타일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모두 그에게 헌정되어있다. 그렇다면 이전 작품들인 1,2,3번은 누구에게 바쳐졌던 것일까?

베토벤의 모든 초기 작품들이 그렇듯 협주곡 1번과 2번도 아직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는 작품들이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것들은 그에게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신이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을 즐겨 연주했을 뿐  아니라 당시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즐겨 연주하던 모차르트의 모든 협주곡의 스타일에 통달했다. 또한 초기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엿볼 수 있듯 비록 인간적으로는 그리 매끄러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하이든에게 품었던 경의(敬意)는 협주곡에서도 뚜렷하다. 피아노 협주곡 1, 2번에서 이 두 고전 대가들의 영향은 감지된다. 그러나 1794년과 1795년 연달아 씌여진 협주곡 1번과 2번을 베토벤 자신은 다소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 세대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깔려있는 일종의 ‘모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쓰이기는 1번보다 먼저 쓰인 2번 'Op.19, 내림가장조'는 ‘Carl Nicklas Edler von Niclelsberg'에게 헌정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헌정 받은 이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베토벤과 모종의 연관을 맺었을 귀족으로 추정될 뿐 구체적인 정보는 찾을 길 없다. 다만 그가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거나 마음에 남아있는 대상에게 작품을 헌정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분명 작곡가에게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인물이었으리라 추측해 볼 따름이다.

베토벤의 작품 스타일이 한층 성숙해지는 시점인 1803년 발표된 협주곡 3번은 작곡자 자신이 초연했었다. 그런데 베토벤은 모차르트가 예전에 곧잘 그러했듯 피아노 파트를 온전히 기보해 놓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연주했다.  작곡자가 곧 연주자이던 시절의 관행이지만 협주곡이라는 장르를 아직까지는 그다지 진지하거나 중요한 장르로 취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심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일년 후 친구이자 제자였던 리스(Ferdinando Ries)가 이 곡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 베토벤은 꼼꼼히 악보를 기록해 주었다. 그런데 정작 이 곡은 베토벤이 그의 연주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군인이자 피아니스트 또 작곡가이기도 했던 루이  페르디난드(Louis Ferdinande)에게 헌정이 되었다. 이 Ferdinande라는 인물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프러시아 왕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에도 참여했으나 후에 반(反)나폴레옹 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했던 인물이다. 결국 그 투쟁의 와중에서 전사함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혁명이후의 왜곡되어가는 사회상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결곡한 기상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페르디난드는 음악 애호가였다. 일찍이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그는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도 남기고 있다. 왕족으로서 당시에는 의무에 가까웠던 군인으로서의 역할과 예술적인 기질을 잘 조화시켰던 그의 존재는 당연히 그즈음의 베토벤의 관심을 끌기에 족했을 것이다. 베를린의 살롱 음악회에서 자주 피아노 즉흥 연주를 선보였던 그에게 당대의 시인 슐레겔을 비롯 많은 예술인들이 찬사를 보냈고 베토벤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루이 페르디난드는 전문적 음악인은 아니었고 전쟁의 와중에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어쩌면 이런 측면들이 베토벤의 심성에 더욱 진하게 와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베토벤 자신도 프랑스 혁명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을 향한 갈망이 혁명후의 왜곡된 과정을 통해 환멸의 지경에 이르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다.  페르디난드 역시 혁명대열에 동조했다가 후에 반 나폴레옹 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던 고로 베토벤의 그에 대한 관심과 경의는 이윽고 ‘협주곡 3번’을 그에게 헌정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협주곡 3번’의 분위기 자체도 강렬한 에너지와 자신감 넘치는  남성적인 힘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전 시대까지 유행하던 패시지들의 장식적인 요소를 최소화 했으며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혁신적인 기운과 피아노라는 악기의 주체성을 한껏 긍정하는 분위기가 이 곡의 특징이다. 이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나폴레옹 혁명의 영광과 환멸, 그 빛과 그림자를  짧은 시간 안에 맛보았던 루이 페르디난드에게 헌정된 사실은 작곡자인 베토벤 자신의 사고의 궤적과 맞물려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다.

그 누구보다도  베토벤의 깊은 심중에 근접해 있었고 가장 많은 작품들을 헌정 받는 특권을 누린 이는 바로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이다. ‘고별 소나타’를 비롯 ‘3중 협주곡’, 여러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들, 그리고 ‘미사 솔렘니스’가 모두 루돌프 대공에게 바쳐진 곡들이다. 협주곡 4번과 5번도 바로 이 루돌프 대공에게 현정되었다. 루돌프 대공은 당시 비엔나를 통치하던 레오폴드 2세의 막내아들로서 몸이 약한 탓에 군대 참여를 못하고 대신 사제의 길을 택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작곡가과 연주자로서의 재능도 일찍이 발휘해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베토벤이 장기간에 걸쳐 가르친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베토벤이 경제적 곤궁에 처했을 때마다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기보다는 작곡가의 안위를 위한 적절한 조처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로 베토벤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사실 베토벤 인생의 중반이후에 나타났다(1803). 그러나 베토벤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던 단순한 학생의 신분을 떠나서 두 사람은 곧  서로를 이해하고 후원하는 강력한 동반자의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협주곡 4번’은 1808년 베토벤의 마지막 라이브 연주로 비엔나의 극장에서 연주된다.  당시의 연주 평은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나 대단히 예술적인 걸작’이라는 것이 지배적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1836년 멘델스존에 의해 재발견되기 전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어간다.

주지하다시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의 정점을 이루는 곡이 바로 5번 ‘황제’이다. 1809년으로 알려진 발표 연대는 이미 혁명 이후 이어진 환멸의 기운이 확실해진 때이다.  많은 이들이 추측하듯이 이 ‘황제’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냐 와 같은 질문은 단순한 호사가들의 궁금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토벤 자신은 이 ‘황제’라는 별명을 결코 사용한 적이 없으니까. 다만 동시대 작곡가이자 친구였던 크래머가 출판업자에게 ‘황제’라는 별칭을 붙이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웅 교향곡’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탓에 모두들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의 존재와의 관련선상에 이 작품을 놓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오류이거나 무리한 시도일 뿐이다. 베토벤이 품었던 이상은 오히려 군림하는 ‘황제’보다는 모든 인간의 평등 염원을 실현시켜 줄 ‘영웅’의 표상에 가까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제’ 협주곡이 전하는 이미지는 다소 복합적이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전체적 분위기 덕에 ‘황제’라는 별명을 얻어 갖기는 했지만 베토벤이 추구했던 것은 어쩌면 그즈음의 유럽에 팽배해가던 무언가 위대한 기운, 인류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거대한 힘에 대한 갈구였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음악으로 표출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힘이 이 ‘황제’ 에는 들어있다. 베토벤은 이 곡을 그의 신뢰하는 친구이자 제자인 루돌프 대공에게 다시 한 번 헌정했다. 시민사회의 이상을 염원했던 베토벤의 심경을 귀족의 신분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마지  않았던 정신적 동지가 루돌프 대공이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대부분 그의 작품 초연을 직접 했지만 1811년 행해진 ‘협주곡 5번’의 연주만큼은 스스로 하기에 너무 힘들었다. 이미 그의 청력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공식 초연에서는 그의 제자였던  체르니가 이 곡을 연주하게 된다.  이후 황제 협주곡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으로 등극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은 양은 많지 않지만 번호들마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품고 있는 소중한 장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고전 어법에 우선 충실하게 따랐던 1, 2번을 지나 분출하는 자신만의 개성을 숨길 수 없었던 3번 그리고 독주자가 훨씬 두드러지도록 한 작곡자의 의도가 거부감 없이 묻어나는 4번과 5번을 지나다보면 베토벤의 정신적, 음악적 역정(歷程)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중심에는 당대의 유럽을 뒤흔들었던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있고 작품들 속에는 그 모든 격랑의 소용돌이에서도 베토벤을 지지하고 후원해 주었던 일군의 귀족들을 향한 작곡가의 진심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가 작품을 헌정했던 인물들은 거의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이었다. 그러나 귀족과 그에 부속된 작곡가라는 한정된 틀을 넘어선 자유로운 교류는  피아노 협주곡의 헌정 대상들을 결정짓는 주요 이유가 된다. 루돌프 대공 같은 이는 베토벤의 후원자이면서 학생이었고 친구였다. 쉽게 형성될 수 없는 이런 식의 포괄적 관계는 음악사에 있어서도 흔치 않은 범례를 남긴다. 베토벤은 다른 장르에서도 물론 그러했지만 피아노 협주곡을 통해서도 그가 심중에 품어왔던 음악과 인간에 대한 이상을 주저 없이 풀어놓았고 그것을 기꺼이 헌정할 좋은 대상들을 주변에 두었었다는 점에서 행복한 작곡가였다.

 

* 출처:piano21c.net/zboard/view.php?id=rcnhyun8&page=9&sn1=&divpage=1&sn=off&ss=..

          김순배님의 글입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