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감상실 ♣/ 영화 이야기

[실제 덴마크 역사를 다룬 영화]-로얄어페어

Bawoo 2015. 8. 18. 22:50

 

 

 

 로얄 어페어는 18세기 덴마크 왕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왕실내의 스캔들을 주제로 한 단순한 멜로물이 아니라 18세기 절대왕정국가였던 덴마크 왕실의 권력암투와 소수의 기득권자들에 의해 방치되어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민중들,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영향을 받아 민중개혁의 의지를 보였던사람들의 역사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조선시대 초기 정도전의 개혁과 좌절, 그리고 중종 시대의 조광조의 개혁과 좌절이 떠올랐다. <출처 : http://negidung8ja.blog.me/130155784217

 

 

 

크리스티안 7세의 초상

 

 

미친왕으로 불렸던 크리스티안 7세는 프레드릭 5세와 영국의 죠지 2세의 딸 루이자의 아들이다.

자식에게는 엄격했고 사생활은 방탕했던 아버지와 개인교사였던 백작의 학대 속에서 자랐고  왜소한 체격에 대한 컴플렉스도 많았다.

17세인 1766년 프레드릭 5세가 죽자 왕위를 계승했고 이 해 영국의 죠지 3세의 누이인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한다. 둘은 친척간이다.

 

영화는 캐롤라인 마틸다가  독일의 첼레에 유배되어 죽기전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쓰는 장면부터 시작되며 과거를 회상한다.결혼하기 위해  백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덴마크로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랑 크리스틴 7세에 대한 기대와 함께... 

 

           

캐롤라인 마틸다 Caroline Mathilde                         캐롤라인 마틸다와 그녀의 자매 루이자

             pastel by Francis Cotes                     The 16-year-old Queen Caroline stands next to her sisterPrincess Louisa of Wales,

   

 

 캐롤라인은 크리스티안 7세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크리스티안7세는  캐롤라인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안나 카레리나 벤타겐이란 애인을 두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 방탕한 성생활과 편집증, 자해 등의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미친왕으로 불린다. 

 

 

 

 

크리스티안 7세는 유럽을 순회하던 중 독일인 의사 '요한 프리드리히 스투루엔지'Johann Friedrich Struensee 를 알게되고 스투루엔지는 크리스티안 7세의 주치의로 일하게 되면서 1769년 1월에 덴마크로 함께 돌아온다. 크리스티안 7세는 계몽사상가였던 스투루엔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스투루엔지의 뛰어난 언변과 아우르는 포용력에 깊은 신뢰를 보내며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요한 스투루엔지는  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자유로운 사상과 파격적인 개혁을 실천해나간다. 요한 스투루엔지는 아버지가 신학자이며 목사였지만 신을 부정하고 루소의 평등주의적 무신론적 사상을 신봉했다. 고아원 설립, 고문폐지, 사형축소, 검열제 폐지 등을 주창했다.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는 자신의 생각과 관심사가 같은 방향이었던 요한을 사랑하게 되고 딸 루이자 오거스트를 낳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캐롤라인 마틸다는 용모가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몇개 국어의 외국어에도 능통했고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충분히 매력적인 여인이였다 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형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은 당시 엄격했던 덴마크 사람들에는 익숙했던 것은 아니였다. 크리스티안 7세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그녀는 더욱 고립되어 갔다고 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영화에서는 캐롤라인이 미친왕 크리스티안에게 실망하고 거리를 두는 것으로 설정 된다. 

 

 

 

 크리스티안 7세는 요한 스투루엔지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며 모든 정사를 그에게 맡긴다.

결국은 왕의 결정권까지 위임하게 된다.

한 사람의 권력이 집중되면 그에 의해 소외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크리스티안 7세와 요한 스투루엔지가 민중을 위해 개혁을 시도하면 할수록 그로 인해 자신의 권력과 이권을 상실하는 또 한 편의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크리스티안 7세의 계모 율리아나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권력의 핵심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와 요한 스투루엔지의 비밀스런 관계를 눈치 챈 계모 율리아나 마리아는

귀족들의 불만세력을 규합하고 왕비와 왕의 주치의와의 스캔들을 유포시켜 민중들을 선동하여

성난 민중들의 분노를 왕실의 스캔들로 향하게 하여 구데타의 명분을 삼는다.

 

 

Johann Friedrich Struensee and his companion Brandt are beheaded in Copenhagen on 4/28 1772

 

율리아나 마리아와 그녀를 동조하는 귀족세력들은  크리스티안7세를 무력화시켜

스투루엔지를 처형시키고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를 추방한다.

1772년 4월 28일 독일인 의사 요한 스투루엔지는 군중들 앞에서 처형된다. 

 

1751년 7월11월 영국에서 태어난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는

1766년 덴마크 왕비가 되고 

1769년 독일인 의사이자 계몽사상가였던 요한 스투루엔지를 만나고 사랑하고

1772년 이혼 추방당하고 1775년 성홍열로 독일의 첼레에서 사망한다.

 

크리스티안7세는 1749년 1월29일 태어나 1766년 왕위에 오르고 같은 해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

1772년 계모 율리아나 마리아에 의해 실질적인 왕권을 상실하고 허수아비 왕으로 정신분열증과 함께 살아가다 1808년 사망하였다. 

 

 

율리아나 마리아 왕비

Juliane Marie as Queen-Dowager at the height of her influence by Vigilius Eriksen 

 

 

 

크리스티안7세의 계모 율리아나 마리아는 그의 아들과 함께 1772년에서 1784년까지 섭정을 했고

1784년 크리스티안 7세의 아들 프레드릭왕세자가 율리아나로부터 왕권을 되찾자 추방당했다.

아들 프레드릭6세는 55년간 통치하며 크리스티안7세와 요한 스투루엔지가 펼쳤던 많은 정책들을 실질적으로 펼쳐나갔다.

크리스티안 7세는 미친왕으로 불렸지만 그가 재위하는 동안 과학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캐롤라인 마틸다와 요한 스투루엔지

 

 

 

크리스티안7세와 그녀의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

 

   
       

캐롤라인과 요한 스투루엔지의 딸 ,어린 아기때의 루이자 오거스트공주      루이자 오거스트 공주

Portrait of Princess Louise Auguste as a child. Pastel by H.P. Sturz, 1771 

 

그녀가 낳은 딸 루이자 오거스트는  덴마크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공주로서는 받아들여졌지만

작은 스투루엔지(La petite Struensee)로 불렸다 한다.  

 

캐롤라인과 크리스티안7세의 아들 프레드릭 6세

 



    

      크리스티안7세 Portrait of King Christian VII of Denmark

 

In the 1770s, during the reign of the mentally unstable Christian VII (1766–1808), the queen's lover, a German doctor named Johann Friedrich Struensee, became the real ruler of the country. Filled with the ideas of the Enlightenment, he attempted a number of radical reforms including freedom of the press and religion. But it was short-lived. The landlords feared that the reforms were a threat

 to their power, while the commoners believed that religious freedom was an invitation to atheism.

In 1772, Struensee was arrested, tried, and convicted of crimes against the majesty, his right hand was cut off following his beheading, his remains were quartered and put on display on top of spikes on the commons west of Copenhagen. The next 12 years were a period of unmitigated reaction until a group of reformers gained power in 1784.<영어위키>

<참고자료>

 

슈트루엔제(Johann Friedrich, Graf von Struensee)
Struensee Juel.jpg
Regent of Denmark

요약 테이블
출생 1737. 8. 5, 독일 할레
사망 1772. 4. 28, 덴마크 코펜하겐
국적 독일

요약 독일 태생의 의사·정치가.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7세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1770~72년 덴마크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슈트루엔제는 1760년대에 알토나(지금은 독일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덴마크의 한 지방이었음) 지방에서 의사가 되었다.

그는 덴마크의 궁정신하들과 교분을 맺음으로써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크리스티안 7세가 유럽 여행(1768~69)을 떠날 때 왕의 수행의사가 되었고 1769년에는 궁정의사로 임명되었다. 크리스티안 7세를 좌지우지하게 된 그는 1770년 카롤리네 마틸다 왕비의 정부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국무회의와 노르웨이 총독직을 폐지했고 1771년 6월 왕을 구슬러 덴마크 각료가 되었고 7월에는 백작이 되었다.

1771년 3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그는 언론의 자유, 농민 부역동원 축소, 사법제도의 통일, 코펜하겐 자치정부 개혁 등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그 개혁정책 때문에 많은 관리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결국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1772년 1월 왕비와의 간통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다.<다음백과>

 

 

Johann Friedrich Struensee: Count Johann Friedrich Struensee (5 August 1737 – 28 April 1772) was a German doctor. He became royal physician to the mentally ill King Christian VII of Denmark and a minister in the Danish government. He rose in power to a position of "de facto" regent of the country, where he tried to carry out widespread reforms. His affair with Queen Caroline Matilda ("Caroline Mathilde") caused scandal, especially after the birth of a daughter, Princess Louise Augusta, and was the catalyst for the intrigues and power play that caused his downfall and dramatic death. He died unmarried.

 

 

 

크리스티안 7세

 
Christian VII of Denmark.jpg

크리스티안 7세(Christian VII, 1749년 1월 29일 ~ 1808년 3월 13일)는 덴마크노르웨이의 군주이다

(재위: 1766년 ~ 1808년).

생애

크리스티안 7세는 프레데리크 5세영국의 루이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는 아내 루이세를 잃은 후 크게 상심해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의붓어머니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율리아네 마리와의 관계 또한 좋지 않았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교육을 담당했던 레벤틀로프 백작에게 폭력적인 대우를 받았다.[1]

 

열 여섯 살이 된 크리스티안은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의 유복자이자 조지 2세의 손녀인 사촌누이 캐롤라인 마틸다와 혼담이 오갔고, 국왕에 즉위한 뒤 그녀와 결혼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이내 아내에게 싫증을 느꼈고 안나 카테리네 벤타겐(Anna Catherine Benthagen)을 애인으로 삼아 그녀에게 갖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로 인해 크리스티안은 왕비와 사이가 멀어졌고 국민들의 신망도 잃었다. 크리스티안은 몇몇 신하들을 대동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을 순회했다. 처남인 조지 3세는 크리스티안을 못마땅하게 여겨 형식적인 대접만을 했지만 크리스티안은 방문지의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비교적 성공적인 여행을 마쳤다.[1]

 

이 여행에서 크리스티안은 독일인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의사로 대동했고 그는 이후 크리스티안의 주치의로 일하게 되었다. 슈트루엔제는 왕비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크리스티안의 신임도 얻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크리스티안의 정신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자신이 프레데리크 5세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몸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했다.[1] 그는 궁전의 창문과 가구들을 부숨으로써 자신의 공격적 욕구를 해소했고, 이러한 폭력적 성향은 갈수록 심해졌다.

 

1772년 크리스티안의 의붓어머니 율리아네 마리의 주도로 쿠데타가 일어나 슈트루엔제는 체포되어 사형되었고 왕비는 딸과 함께 유폐되었다. 크리스티안은 명목상의 국왕으로서 공식 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1784년까지는 율리아네 마리와 이복동생 프레데리크가, 그 이후에는 아들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황태자로서 통치했다.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