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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 왜 스스로 볼모가 되려 하는가

Bawoo 2015. 8. 22. 18:36

이후백(李後白)은 조선 중종~선조 연간의 명신이다. 도승지를 오래 하고 이조와 호조판서까지 지냈는데 집이 가난한 선비네처럼 늘 적막했다. 부정한 청탁을 받으면 당장 교제를 끊고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찾아오면 마땅히 여기질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게 평생 사욕을 버리고 공도를 좇은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인재를 추천할 때 신중에 조심을 더했다. 늘 여러 의견을 들었고 인사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내가 임금을 속였다”며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친척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말끝에 벼슬자리 하나를 부탁했다. 이에 후백은 바로 낯빛을 고치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장차 벼슬을 시킬 사람들 명단이었는데 친척이 보니 자기 이름도 있었다. 후백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천거하려 했는데 지금 자네가 청탁을 넣는 바람에 할 수 없게 돼버렸네. 사람들이 내가 청탁을 받고 벼슬을 준다고 수근대지 않겠나.”

 이런 그를 두고 동인(東人)의 중심인물 김효원은 “도량이 좁아 재상은 할지언정 정승 재목은 못 된다”고 비꼬았다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늘날에 비춰봐도 대부분의 문제가 인사 잘못에서 비롯됨이 증명되고 있고, 천재(天災)의 경우마저 용인(用人)이 어땠는가에 따라 사태 수습 결과가 천양지차인 걸 봐도 인사는 그야말로 고심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만사(萬事)임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문제가 된 두 여야 국회의원 아버지의 자녀 인사청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실업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청년들의 좌절보다 더 큰 이유에서다. 사기업이든 정부기관이든 나름의 인사정책이 있다. 향후 수년에 걸쳐 시행될 정책 방향에 따라 인사 수요를 예측하고 걸맞은 기준을 설정해 인재를 뽑는다. 거기에 제3자가 개입하는 건 기업이나 기관의 정책 설정을 무력화하고 시장을 교란하는 중대범죄다. 이른바 ‘빽’으로 채용된 사람이 자격을 갖췄건 못 갖췄건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볼모가 되기 때문이다. 청탁이 없더라도 기업이나 기관들이 유력자의 자제들을 앞다퉈 데려가려 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언제든 반대급부가 없을 리 없는 까닭이다.

 아비는 그렇다 쳐도, 젊은이가 그것도 제법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왜 스스로 볼모가 되려고 ‘음서(蔭敍)’에 기대는지 모르겠다. 제 자식만 귀한 줄 알아 힘 미치는 곳이면 염치불고 전화 버튼을 누르는 힘센 아비보다, 그 힘이 제 것인 양 여기나 저기나 함부로 휘둘러지기를 고대하는 자식이 더 딱하다. 아비의 힘이 영원할 리 없고 볼모의 운명도 따라 꺾일 게 분명한데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좋은 예가 있다. 후백보다 38년 앞선 조광조 얘기다. 그 역시 어릴 적부터 성품이 곧고 학식이 높았다. 그러한 행실이 널리 알려져 추천으로 사지(司紙) 자리를 제수 받는다. 사지란 조지서에서 종이 만드는 일을 관리하는 종육품 벼슬이다. 당시에는 나름 중요한 보직이었겠으나 조광조 같은 이한테 성이나 찼겠나.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작록을 구하지 않는데도 벼슬을 주니 차라리 과거를 거쳐 나와 임금을 모시는 게 옳겠다.” 이후백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가 전하는 바다.

 말은 그래도 ‘특채’로 시작해서야 뜻을 크게 펼 수 없음을 잘 안 것이다. 몇 년 후 조광조는 당당하게 과거에 합격해 옥당(玉堂)에 진출한다. 비록 모함을 받아 날개가 꺾였지만 500년 지난 지금까지 빛나는 이름과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던 힘이 거기서 나왔다. “자기 실력이 아니라 부모의 명성으로 대접 받고 그것을 즐기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다”는 플라톤의 말도 다른 얘기가 아니다. 자기로 모자라 자식에게까지 그 부끄러움을 넘겨주는 것 역시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이 땅의 힘센 부모와 유약한 자식들이여, 그 몰염치와 시한부 영화(榮華)의 세습 고리를 끊을지어다.

* 중앙일보 - 이훈범 논설위원

 

<참고 자료>

이후백 (李後白)계진(季眞), 청련(靑蓮), 문청(文淸), 연원군(延原君)

1520(중종 15)∼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관찰사 숙함(淑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원례(元禮)이고, 아버지는 국형(國衡)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주(酒)’자가 붙은 이상 상주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1535년 (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李義健)·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에게서 배웠다.

    [내용]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宗의 妃)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의 합칭)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함안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출처: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