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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 남한산성 축성 관련 인물>장군 이회/축성 총 책임자 이서

Bawoo 2015. 8. 27. 17:38

장군 이회 

 

매 바위엔 억울한 죽음 이회 장군 설화

 어장대 앞마당 끝에는 매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이 바위는 축성 당시 억울한 누명으로 처형당한 이회 장군의 설화를 담고 있다. 축성 총책임자인 이서는 북쪽 성은 벽암 각성대사에게, 남쪽 성은 이회 장군에게 각각 맡겨 성을 쌓게 했다. 벽암 대사는 팔도에서 모인 스님들을 독려하며 기한 내에 성을 완성하지만 이회가 맡은 동남쪽은 지세가 험해 공사비도 많이 들었고 기한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결국 이회 장군은 공사비 탕진 누명을 쓰고 수어장대 앞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장군의 목을 베자 불쑥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시체를 감싸 돌며 바위에 내려앉았다 날아갔다. 매가 앉았던 바위에는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았으며 이후 이를 신성시했다. 실제로 매 발자국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 관리가 도려내갔다고 전해진다. 남편의 공사를 돕기 위해 산성으로 오던 이회 장군의 아내와 첩도 처형 소식을 듣고 송파나루에서 투신 자살했다. 훗날 이회 장군의 무고함이 밝혀졌고, 서장대 옆에 청량당(사진)을 지어 이들의 넋을 달래게 했다.<중앙일보 뉴스클립에서 발췌>

이서 李曙

요약 테이블
출생 1580(선조 13)
사망 1637(인조 15)
국적 조선, 한국

 

<요약 >

 

조선 중기의 무신.

이서

이서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본관은 전주. 자는 인숙, 호는 월봉.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며, 아버지는 목사 경록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사용·진도군수를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중형을 받을 뻔했으나 화를 면했으며 그뒤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를 지냈다. 1623년 장단부사로 있을 때 병력 700명을 동원, 능양군(뒤의 인조)에게 합류하여 인조반정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으로 완풍군에 봉해졌으며, 호조판서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부원수로서 반란군을 추격하다 멈춘 죄로 파직되었다. 그뒤 총융사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삼혈총과 조총을 제조했으며, 이어 형조판서·공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조판서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지키다 이듬해 성 안에서 죽었다.

 

그의 저서인 〈화포식언해 火砲式諺解〉는 각종의 총을 쏘는 방법과 화약 굽는 방법을 기술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된 화약병기의 종류와 용약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밖에 말의 여러 가지 병에 대해 기록한 〈마경언해 馬經諺解〉가 있다. 남한산성의 온조왕 사당과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출처: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