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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중 U보트 총사령관)카를 되니츠(독일어: Karl Dönitz)

Bawoo 2015. 9. 14. 23:14

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카를 되니츠

 

카를 되니츠(독일어: Karl Dönitz, 1891년 9월 16일 ~ 1980년 12월 24일)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해군 제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대 사령관, 독일 해군 총사령관 및

히틀러 사후 나치 독일 대통령을 지냈다.

 

생애

카를 되니츠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보트(U-Boat: 잠수함) 함장으로 참전하여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종전 후에도 계속 해군에 남은 되니츠는 한동안 순양함 함장 등을 지내며 군 생활을 했고, 1935년 재군비 선언 이후 대령 계급으로 잠수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유보트 건조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과 당시 잠수함 건조 기술의 한계를 감안한 늑대떼 전술을 창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도 잠수함대 사령관으로서 영국 해군과 대서양 호송선단 전투를 결사적으로 벌였다. 윈스턴 처칠은 훗날 유보트를 가장 무서웠던 존재로 꼽았다. 에리히 레더 제독이 히틀러와 수상함대 문제로 갈등을 빚은 후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자살 후에는 히틀러의 정치적 유언에 의해 대통령(독일어: Reichspräsidenten)이 되었다. 히틀러괴벨스를 총리로 임명하였지만 그는 자살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되니츠의 1인 정부가 되었다. 동프로이센 및 동부지역 민간인과 군병력이 엘베 강 서안으로 탈출해서 미군에 항복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항복 협상을 지연시키기 원했으나[2], 연합군은 즉각적인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으며, 《10년 20일》(독일어: Zehn Jahre und Zwanzig Tage)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1980년 12월 24일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같이 보기

주석

  1. 이동 《베를린의 한 여인》
  2. 이동 1941년 이후 독-소전에서 나치독일은 대규모 민간인 학살, 도시 황폐화, 무조건적인 포로 대량 처형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독일인에 대해 원초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소련군의 적개심을 잘알고 있던 독일군 장군들은 최대한 많은 수의 민간인과 군병력을 신사적인 대우를 해주는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장교들의 묵인하에 독일 영토 침공 이후 똑같은 보복 행위를 저질렀다. 마지막 베를린 점령 과정에서 방화, 약탈, 강간 등 학대 행위가 수도 없이 보고되었다. 강간의 경우 베를린에서만 10만 건 이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독일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1]<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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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U-보트와 되니츠 제독 이야기

바다의 늑대! 독일 U-보트 박물관 답사기

1, 2차 세계전쟁을 통해 수많은 독일 잠수함 승무원들이 전사했다. 특히 2차 대전 초기에는 독일 육군과 공군의 화려한 전격전으로 인해 히틀러는 해군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군은 해군을 ‘서자’처럼 다루었다. 더구나 해군 내에서도 잠수함대는 그 가공할 잠재력에 비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 원인은 잠수함이 독일 해군 전함 「비스마르크」나 순양함「샤른호르스트」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3제국 군대의 위용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 싶은 히틀러의 눈에 차지 않았다.

<글 |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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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을 주름잡던 U-boat
한적한 해변에 쓸쓸히 누워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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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101707:00 ! 함장하인리히소령이 지휘하는 독일군 잠수함 U-48. 어제밤 이 잠수함은 북대서양 연합군 수송선단에 뛰어들어 1만 톤급 유조선 1척과 상선 1척을 어뢰로 순식간에 격침시켰다. 유유히 수면 아래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긴 바다의 늑대 U-48호 승조원들은 승전의 파티를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뿔사, “적기출현! 적기출현!”이라는 함교 견시병의 자지러지는 고함소리와 함께 3명의 당직병들은 짐짝처럼 선실 안으로 떨어졌다. 방수 헷치가 닫히기도 전에 영국 대잠초계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2발의 폭뢰를 떨어뜨렸다. 어제 수송선을 격침시킨 이 늑대를 찾기 위해 초계기들은 밤을 새워가며 교대로 바다 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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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키일항의 U-보트 박물관
 
순식간에 잠수함 선체는 크게 흔들렸고 실내전등이 꺼짐과 동시에 쌓아두었던 짐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긴급 잠항! 긴급 잠항!”
 “현재 심도 80m, 100m, 150m.....200m... 바닥에 착지!"
 
음파 탐지병이 숨 넘어 갈 듯이 긴급하게 하인리히함장에게 보고한다.
함장님! 초계기 연락을 받은 영국 구축함 수 척이 머리 위에 도착했습니다.”
곧 이어 잠수함을 찾기 위해 구축함에서 쏘아대는 --’하는 소나 소리가 기분 나쁘게 함내에 울려 퍼진다. 벌써 안전 잠수심도 100m를 넘어선 잠수함은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듯이 뿌지직- 뿌지직-’ 거린다. 함장 입술은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바다 최저 수심에 납작 배를 깔고 붙어있는 U-boat는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다.
 
간간히 주변에서 터지는 폭뢰로 선체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좌우로 요동친다. 이윽고 입술을 지그시 깨문 하인리히 소령은 전 승무원들에게 드러누워 조용히 취침할 것을 명령한다. 이미 잠수함 내부의 공기는 탁해지면서 질소 농도가 위험 한계치에 근접했다. 승무원들의 의식은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장교들은 산소통을 들고 수시로 자리를 옮겨가며 승무원들을 격려하며 의식 상태를 확인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폭뢰 충격으로 선체에 조그마한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잠수함은 수심 200m의 엄청난 수압으로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하인리히소령과 승무원들은 무려 10여 시간 이상을 버티었다. 부하 승무원들의 평균 연령은 불과 19!
영국 대잠초계기와 구축함들도 초인적인 U-boat 승무원들과의 버티기 시합에 결국 굴복하고 잠수함 수색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 날 까지도 제2차 세계대전 잠수함 전투사에서 U-48 승무원들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인용되고 있다.
 
 이런 독일군 U-보트의 활약으로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총 2,603척 13,50만톤의 연합국 상선과 175척의 군함이 바다속으로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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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외부 대공포 장치
 
좁은 내부와 열악한 잠수함 생활
참전 승무원의 75%가 전사포로
 
독일 북부지역에 위치한 키일(Kiel)!
이 도시는 독일 슐레스비히흘슈타인주의 주도(州都)이다. 함부르크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 정도 달려 U-boat 박물관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전시되어 있는 잠수함은 옛날 강성했던 독일 제국을 상징하듯 웅장했다. 그러나 주변은 너무나 황량하고 찾는 관광객도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1,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U-boat는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하며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전범 국가의 잠수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탓인지 U-boat 조차도 숨을 죽여 가며 말없이 갯벌에 누워 있다. 계단을 통해 잠수함 내부로 들어갔다. 흡사 거인 나라의 큰 통조림 깡통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 실내 구조도 비교적 단순하다. 함장실, 잠망경실, 조타실, 승무원 침실겸 어뢰실 그리고 엔진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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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내부 잠망경 조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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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엔진실
 
다른 국가의 잠수함 박물관과는 다르게 독일 해군의 구체적인 활약상이나 전승 기록 등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기사 독일군 활약상을 홍보한다는 자체가 전쟁 피해국가 입장에서는 정말 기분 나쁜 일.
마침 견학을 온 독일 꼬마는 승무원들의 일상사를 기록해 둔 전시물을 유심히 지켜본다. 이런 잠수함을 견학하며 이 아이는 무엇을 생각할까? 자기 선조들의 과거의 영광을? 아니면 전쟁 중에 겪었을 선조들의 고통을?
 
전쟁 중 독일 U-boat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1940년 대 부터 유럽 인근 대서양에서 주로 작전을 하던 독일 잠수함들이 1942년대에는 북미와 남미대륙에 까지 작전영역을 확장했다. 미국 동해안의 경우에는 7척의 독일 잠수함이 숨어 있었다. 19421월과 2월에 이 7척의 잠수함들이 무려 130척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시켰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일본 잠수함과 협력이 가능한 동아프리카와 인도양까지 U-boat 작전범위를 넓혔다. 말라카 반도 페낭에 독일·일본 연합 잠수함 기지를 건설했다. 1942년 중순 U-boat는 북미 동해안에 21, 멕시코 만에 15, 카리브해에 12, 서인도제도에 11, 북대서양에 8, 대서양 중앙에서 15척이 작전했다. 19421년동안 독일 잠수함이 격침시킨 연합군 선박은 총 1,160척으로 626만 6,215톤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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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 침실겸 어뢰보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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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인정받지 못하는
전범국가 참전자들의 서러움
 
1, 2차 세계전쟁을 통해 수많은 독일 잠수함 승무원들이 전사했다. 특히 2차 대전 초기에는 독일 육군과 공군의 화려한 전격전으로 인해 히틀러는 해군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군은 해군을 서자처럼 다루었다. 더구나 해군 내에서도 잠수함대는 그 가공할 잠재력에 비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 원인은 잠수함이 독일 해군 전함 비스마르크나 순양함샤른호르스트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3제국 군대의 위용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 싶은 히틀러의 눈에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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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되니츠.
그러나 걸출한 해군제독
되니츠의 활약으로 나중에 히틀러는 U-boat100 척까지 늘려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되니츠는 뒤이어 늑대떼 전술'을 개발하여 연합군의 수송전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후일 되니츠 제독은 만약 200척의 U-boat가 있었다면 영국대륙으로 가는 수송선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고, 300척이 있었다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오늘날 암흑 같은 바다 속에서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렸던 U-boat 승무원들의 공적을 기리는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전쟁사를 연구하는 일부 역사학자나 군사 매니아들만이 간간히 그들의 투혼을 책이나 영화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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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세계대전 전몰자 추모비
 
U-boat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1, 2차 세계대전 전몰자 추모탑이 덩그렇게 솟아 있다. 또한 키일(Kiel)에서 출항하여 스칸디나비아 대륙으로 항해하는 대형크루즈선이 수시로 이 박물관 근처로 지나간다. 동행한 J소령 말에 의하면 많은 독일 청년들의 꿈이 틈틈히 저축하여 모은 돈으로 저 크루즈선을 타고 밤새도록 즐겁게 놀면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로 여행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세기 전, 수많은 그들의 선조들이 처참한 전쟁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역사를 기억하는 후손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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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대륙행 크르즈선

"어뢰에 맞아 처참하게 불타는 수송선, 곧이어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구축함, 폭뢰, 물속 깊은 곳으로 숨을 헉헉거리며 도망치는 U-boat!···" 잠수함 밖으로 나오면서 이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진정으로 이런 참혹한 전쟁의 역사가 두 번 다시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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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되니츠 제독과 U보트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잠수함 부대를 이끈 되니츠 제독(왼쪽)과 U보트.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길었고 끊임없이 진행된 전투가 바로 해상교통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서양전투다. 개전 초기부터 전투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독일 잠수함대는 막대한 물량과 기술적 발전을 앞세운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1944년 이후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된다. 특히 43년 중순부터는 연합국의 항공세력이 독일 잠수함대에 대한 심각한 위협요인으로 부상했다.

 43년 이전까지 대서양의 야간은 독일군 잠수함대에 완벽한 은폐 수단을 제공했다. 대체로 날씨가 좋지 않고 파도도 심한 바다에서 높이가 낮은 잠수함을 육안으로 발견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 부상해 항진하는 잠수함을 원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항공기 탐재용 레이더와 탐조등을 개발하며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야밤에 느닷없이 탐조등을 앞세우며 덮치는 연합군의 폭격기 앞에 독일의 잠수함대는 구조신호를 보낼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격침되곤 했다.

 급속히 늘어나는 잠수함대의 손실에 대한 독일 해군사령관 되니츠 제독의 대응은 대서양에 잔존해 있는 잠수함 세력의 전면 철수였다. 사실 당시 독일 해군은 잠수함대의 손실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손실을 계속 감수하다 보면 반격의 기회가 왔을 때 쓸 숙련된 잠수함 승조원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즉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며 무의미한 손실을 감수하느니 대응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일단 잠수함대를 보존하자는 것이 되니츠의 전략이었다. 결국 야간에 잠수함을 탐지할 수 있는 영국의 기술 수준을 되니츠가 인지한 것은 전쟁이 끝난 이후의 일이었다.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던 셈이다.

 대체로 주식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종목의 주가가 갑자기 하락하는 초기에 애널리스트는 ‘주가 하락의 이유가 없으므로 절대 발을 빼지 말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손실을 마냥 감수하다 보면 나중에 시장 환경이 변해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마저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매매 전문가가 괜히 기술적인 지지선의 유지 여부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분석’에 근거해 해당 종목의 주가가 하락하는 원인을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경우 이미 회복 불가능한 손실의 단계로 접어든 경험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이다.

즉 ‘징조가 이상할 때’ 조기에 발을 뺄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고수가 될 수 있었다. 모르는 손실을 무작정 감수하기보다는 일정 수준에서는 남은 투자 재원을 보존하는 전략이 우월한 성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기억하자. <중앙일보-김도현 삼성증권 프리미어 상담1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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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자료 있는 곳:Karl Dönitz - military.wikia.com/wiki/Karl_Dönitz>

 

* 자료 출처: 정보- 책폴 케네디 제국을 설계한 사람들 1장 '이리떼 U보트를 막아라 중/ 자료 수집- 별도 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