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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런의 고뇌와 주류 경제학의 위기

Bawoo 2015. 9. 21. 21:55

‘옐런 풋(put)’.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새가슴을 비아냥대는 말이다. 풋 옵션은 장래 특정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자산을 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자산가격 폭락을 피하는 방어무기다. 이번에야말로 금리를 올릴 것처럼 잔뜩 으르더니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이내 꼬랑지를 내린 옐런을 풋 옵션에 빗댔다. Fed가 금리를 동결한 이유로 중국 경착륙과 신흥시장 위기를 든 데서도 옐런의 고뇌가 묻어난다. 그러나 정작 Fed를 떨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7년째 바닥인 미국 국내 물가다. 이는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동안 주류 경제학은 비운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가 정리한 교환방정식을 신주단지처럼 받들어왔다. ‘M(통화량)XV(화폐유통속도)=P(물가)XQ(총지출량)’가 그것이다. 모든 거래가 돈으로 이뤄지는 화폐경제에선 ‘쌍권총은 두 자루’란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화폐의 유통속도 V는 관습의 지배를 받는다. 잘 안 바뀐다. 총지출량 Q 역시 경제의 기초체력을 반영하니 단기간엔 조정이 어렵다. 그렇다면 M과 P만 남는다.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르고 돈줄을 죄면 물가가 떨어진다는 ‘화폐수량설’이 여기에서 나왔다. 경기가 가라앉을 때마다 Fed가 달러를 마구 찍었던 건 화폐수량설에 대한 굳은 믿음에서다.

 그런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믿음에 금이 갔다. Fed는 6년9개월 동안 금리를 0%로 묶고도 모자라 무려 4조 달러를 퍼부었다. 눈알만 굴리던 일본·유럽도 ‘양적완화(QE)’란 미명하에 돈 살포에 나섰다. 한데 물가는 꿈쩍도 안 하고 있다. Fed는 지난해 6월 0.6~0.8%로 봤던 올해 물가상승률 예상치를 0.3~0.5%로 되레 낮췄다. Fed의 목표치 2%까진 까마득하다. 유럽에선 마이너스 물가상승률마저 속출하고 있다. 한마디로 ‘쿼바디스(Quo Vadis·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때도 믿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돈을 풀었는데도 물가가 요지부동이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란 영국 경제학자가 ‘유동성함정’이란 신무기로 화폐수량설을 공격했다. 주류 경제학에선 기업과 가계를 완벽한 합리주의자로 가정한다. 금리가 떨어지면 어김없이 현금 대신 집·주식을 사야 마땅하다. 한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집값이나 주가가 더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 금리가 바닥인데도 집·주식 대신 현금을 보유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다. 모두가 화폐를 들고 있으려 하니 돈이 도는 속도가 떨어진다. 피셔의 교환방정식에서 돈(M)을 풀어봐야 화폐유통속도(V)가 느려지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

 화폐수량설을 KO시킨 케인스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보단 정부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는 재정정책이 낫다는 처방전을 냈다. 미국의 뉴딜정책 이후 세계 각국 정부가 경기부양에 뛰어든 명분이다. 그러나 케인스 처방도 일본에서 약발이 다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 정부는 경기를 부양한답시고 돈을 펑펑 썼다. 그러나 물가는 마이너스로 떨어졌고 일본 정부는 세계 1위 빚쟁이란 오명만 뒤집어썼다. 미국이나 유럽 정부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고 있다. 재정정책은 이미 퇴화한 셈이다. 그렇다고 통화정책도 안 먹힌다. 중환자를 앞에 놓고도 처방을 못 내리니 주류 경제학은 위기다.

 어쩌면 기업이나 가계가 자로 잰 듯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부터가 현실과 동떨어진 건지도 모른다. 저출산·고령화가 중증이 된 경제에선 특히 그렇다. 청년실업도 마찬가지다. 장래에 대한 불안은 합리적 소비와 투자를 마비시킨다. 중앙은행이 돈 풀고 정부가 토건사업을 벌인들 돈이 돌질 않는다. 돈맥이 꽉 막힌 곳에 덮어놓고 돈만 푸는 건 부동산·주가 거품만 부풀리는 자충수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만 믿었다간 발등 찍힌다. 돈이 도는 길목의 병목을 뚫어주는 구조 개혁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중앙일보-정경민 경제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