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英布, ? ~ 기원전 195년)는 한나라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성은 영(英)이고 이름은 포(布)인데 경형(黥刑)을 받아 흔히 경포(黥布)라고도 한다.
생애
반진 봉기군
육현(지금의 안휘성 육안 부근)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형벌을 받을 운명이나 후에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다. 그 뒤에 법을 어겨 경형(얼굴에 죄목을 문신으로 새기는 형)을 받자 스스로 예언이 이루어졌다 여기고 기뻐했으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로부터 경포(黥布)라는 별명이 붙었다. 형벌로 여산에서 노역에 참가하다, 같이 노역하는 죄수들 중 우두머리들, 호걸들과 교류하고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 강중에서 도둑 떼를 이루었다.[1]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모아 파군 오예에게 가담해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오예의 신임을 받아 그 사위가 됐다.[1]
장한이 진승을 멸하고 여신을 무찌르자 북진해 진나라의 좌우 교위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나아가다, 항량이 회계와 강동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영이 항량에게 합류하자 진영의 뒤를 따라 포장군(蒲將軍)과 함께 항량에게 합세했다. 항량이 경구 · 진가 등을 격파할 때 공적이 으뜸이었고, 항량이 초 의제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당양군이 됐다.[1]
항량이 장한의 공격을 받아 정도에서 죽은 후 팽성으로 천도한 초 회왕의 명령으로 장수들과 함께 팽성에 모였다. 이때 조나라는 장한의 공격을 받아 거록에 포위된 채로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어, 초 회왕이 파견한 조나라 구원군에 종군했다. 이 구원군의 대장 송의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반발한 항우가 송의를 잡아죽이고 스스로 상장군이 되니 장수들은 모두 항우에게 속했다. 항우의 명령으로 선진을 맡아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마침내 항우가 이끄는 본대도 강을 건너와 거록을 포위한 진군을 격파하고 조나라를 구원했다(거록 전투).[1]
장한의 항복을 받은 항우가 진나라의 본토로 쳐들어가던 도중, 신안에서 항우의 명령을 받아 진나라 졸병 20여만 명을 밤중에 갱살했다. 함곡관에 도달한 항우의 군대가 함곡관을 막은 패공 유방에게 저지돼 넘어가지 못하자, 별동대를 이끌고 우회해 관의 병사를 격파하고 본대가 함곡관을 넘을 수 있게 했다. 항상 항우의 선봉에 서 으뜸가는 공적을 세워,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를 멸한 항우가 각지에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옛 초나라 영역을 넷으로 나눈 중 하나인 구강왕에 봉해졌고, 서울은 육(현 중화인민공화국의 루안 시)에 두었다.[1]
이해 4월, 스스로 서초패왕을 일컬은 항우가 초 회왕의 이름을 높여 의제로 삼고 장사로 천도하게 하면서,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 등과 함께 서초패왕에게서 초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1][2] 이에 장수를 보내 의제를 기습해, 8월, 침현까지 추격해 살해하였다.[1]
서초에서 한으로
한왕 2년(기원전 205년),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이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자 서초패왕이 전영을 치러 가면서 구강의 병사를 모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대고 장수와 수천 명의 군사를 보냈으며, 서초패왕이 본국을 비운 사이 한왕 유방이 56만의 제후연합군을 이끌고 서초의 서울 팽성을 함몰하는데도 서초를 도와 싸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초패왕의 노를 사 꾸짖음을 받고 소환령을 받았으나 두려움을 품어 응하지 않았다. 서초패왕도 당장 자신을 돕는 자가 구강왕 뿐인데다 구강왕의 재능을 아껴 공격하지는 않았다.[1]
한왕 유방은 일시 팽성을 점령했다가 서초패왕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팽성 전투) 간신히 달아났는데, 알자 수하가 한왕을 찾아가 구강왕을 꾀어 한왕의 편을 들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구강왕은 수하를 만나, 수하의 변설에 넘어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비밀리에 약조했다. 마침 서초의 사자가 구강왕을 찾아와 군사를 내도록 독촉하려고 했는데, 수하가 구강왕의 변절을 드러내는 바람에 결국 초나라 사자를 베고 서초를 공격했다. 서초는 항성과 용저를 보내 회남을 공격하게 하고 서초패왕은 하읍을 공격했다. 몇 달 못 가 용저와 항성에게 격파당하고 한왕에게 달아났다. 한왕이 자신을 무례히 대하자 분노하고 후회해 자결할 생각까지 했으나, 한에서 제공한 관사의 대접이 매우 융숭해 기뻐했다. 한편 사람을 구강으로 보내 보니, 이미 항백이 구강의 병사들을 거두고 일가족도 모두 서초에 죽었다. 옛 구강왕의 병사 중 수천 명이 다시 구강왕의 밑으로 들어왔고, 한왕은 이들을 성고 수비군에 합류시키는 한편 한왕 4년(기원전 203년) 7월에 구강왕을 회남왕으로 봉했다.[1]
한왕 5년(기원전 202년)에는 구강의 몇 현을 얻었고, 한왕 6년(기원전 201년)에는 유고와 함께 구강으로 들어가 서초의 대사마 주은을 회유했다. 이들은 함께 구강의 병사를 이끌고 한의 본대와 합류해 해하에서 초나라를 격파했다(해하 전투). 항우가 죽고 한왕이 온 중국을 평정하면서 회남왕으로서 육을 서울로 삼고, 구강 · 여강 · 형산 · 예장군을 통치했다.[1]
모반, 패망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고황후가 한신을 죽이자 마음 속에 두려움을 품었다. 여름, 고조가 팽월을 죽이고 팽월의 살코기로 젓을 담가 제후들에게 주었는데, 이를 받고 더 큰 두려움을 품어 은밀히 병사를 모으며 경계를 강화했다.[1]
회남왕의 애첩이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러 자주 다니자, 의원 곁에 사는 중대부 비혁(賁赫)이 애첩을 자주 시중해 애첩이 비혁을 회남왕에게 칭찬했다. 회남왕은 비혁이 애첩과 간통했다고 의심하고 사로잡으려 했으나, 비혁은 장안으로 달아나 고제에게 회남왕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변했다. 상국 소하는 일단 비혁을 묶어두고 회남왕의 모반 혐의를 증험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회남왕은 비혁이 자국의 기밀을 이미 흘렸고, 한나라의 사자도 이미 자신의 수상한 동태를 알아챘으리라고 여기고 마침내 비혁의 일가족을 다 죽이고 모반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한 조정에서는 비혁을 풀어주고 진압군의 장수로 삼았다.[1] 옛 재상 주건은 모반을 만류했으나 양보후는 모반을 일으키도록 권했다.
반란을 일으키고서는 우선 동쪽으로 나아가 형왕 유고를 한 싸움에 격파해 죽이고 형나라의 군대를 모조리 빼앗아 화이허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왕 유교는 군사를 셋으로 나눠 서로 호응하게 했으나, 이 중 하나를 격파하니 나머지 두 군도 흩어져 달아났다. 서쪽으로 진격해 마침내 황제가 친히 이끄는 진압군과 기현 서쪽의 회추(會甀)에서 만났다. 회남왕은 옛 항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군진을 폈는데, 고조는 이를 보고 싫어했다. 고조가 멀리서 말했다.
“ | 무엇이 괴로워서 반역을 일으켰는가? | ” |
회남왕이 답했다.
“ | 그저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 ” |
회남왕의 반군과 고조의 진압군이 마침내 크게 맞서 싸우고, 고조가 싸움 중에 유시에 맞아 상처를 입었으나(결국 고조는 이 상처가 악화돼 죽었다)[3] 반군이 패주해 화이허를 건너 여러 차례 싸웠으나 불리해 양쯔 강을 남쪽으로 건너 달아났다. 회남왕의 장인 오예는 이미 죽고 그 아들 장사성왕 오신이 뒤를 이어 장사왕을 지내고 있었는데, 이 장사성왕에게 속아 함께 월나라로 망명하자는 말을 믿고 같이 파양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죽었다. 황자 유장이 영포를 대신해 회남왕이 되었고, 비혁은 기사후에 봉해졌고, 그 밖에 영포의 난을 진압한 신하들에게도 상이 내려졌다.[1]
주석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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